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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12화)
5. 당설혜(唐設惠)(2)


각설하고, 힘없이 늘어진 설혜의 두 손을 들어 맞잡은 궁현은 가만히 눈을 감고 노인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제 수기(水氣)를 끌어 올려 여인에게 주입하거라.
노인의 말대로 단전에서 기운을 끌어 올려 여인의 중충혈(中衝穴)을 통해 수기를 주입한 궁현은 여인의 혈도(穴道)를 따라 움직이는 수기를 잡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제 혈도를 따라 운기(運氣)하며 독기를 찾거라.
그렇게 말해도 이미 궁현에게는 기에 대한 운용이 불가능했다. 아직 궁현이 미숙한 탓도 있었지만, 아니 미숙하기 때문에 손을 맞잡고 기를 운용하기에는 무리도 한참 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기를 주입한 이상, 어떻게든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수기를 통해 혈도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한다는 것이었다.
‘음?’
한참을 그러다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을 찾은 궁현은 어떻게든 수기로 그 기운을 감싸려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수기는 궁현의 그런 맘을 몰라 주고는 혈도를 통해 계속 운행했다. 다시 한 번 일주천을 끝내자 그제서야 어느 정도 수기를 조종하는 것에 익숙해진 궁현은 다시금 독기를 찾으려 시도했다.
―느, 늦었다. 너무 늦고 말았어. 지금쯤이라면 벌써 온몸에 퍼지고도 남았음이야. 포기하거라, 현아.
노인의 말에 조금 움찔거린 궁현이었지만, 이내 설혜의 몸에 들어간 수기에 정신을 집중해 갔다.
‘확실히 독기(毒氣)가 전신에 퍼지기는 했지만, 그 양이 너무도 적었다. 그 정도로 치사량(致死量)이 될 리는 없어. 분명, 분명 할아버님의 측정은 잘못 된 거야.’
―이, 이 녀석아! 그만두래도!
‘하지만, 너무 광범위해. 한곳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아니면…… 그래! 독기는 엄연히 말하면 수기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수기가 아니라 수기와는 상극(相剋)인 토기(土氣)로 제압한 뒤에는 이 여인 본인이 가진 내기(內氣)와 약간의 수기로도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궁현은 잡고 있던 수기를 그대로 당설혜의 몸에 흐르게 놔두고는 토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내 실수가 즉시 이 여인의 목숨을 앗아갈 거야.’
따로 토기를 운용할 필요는 없었다. 궁현은 그저 혈도를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토기에 신경을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다.
‘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혈도에 토기를 운행케 하여 독기를 찾던 궁현에게 결국 숨어 있는 독기들을 찾아내었고, 이내 그 독기를 토기로 감싸기 시작했다.
―아니, 이 녀석이?
얼마 가지 않아 토기와 섞인 독기들은 그 위력이 다해 더 이상 기혈을 상처 입히지 못했고, 그에 따라 원래부터 독기에 익숙했던 설혜의 내기와 궁현의 수기가 한데 뒤섞여 독기를 흡수해 갔다. 본디부터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독기인지라, 당설혜의 내공은 이것으로 한차례 더 강해졌음이 분명했다.
“하아.”
이제 겨우 독기를 제압했다 생각한 궁현은 그대로 마주잡았던 손을 떼었고, 되돌아갈 곳이 없어진 수기와 토기는 어느 기운에도 섞일 수 있는 자연지기답게 일부는 당설혜의 내공에 흡수되었고, 일부는 기류공의 특성대로 당설혜의 몸에서 흘러나와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허, 허허허. 정말로 제압했구나. 하지만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거지? 보통은 이 다경(약 30분)이 넘어가면 죽는다만.
사실 노인의 말은 정확했다. 자혈독사에게 물렸을 경우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길어야 삼 다경(약 45분), 짧으면 일 다경(약 15분)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것인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것에 있었다.
“할아버님. 그 시간, 제가 했던 응급처치를 안 했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요?”
그랬다. 환부에서 꽤 많은 독을 빨아 낸 데다, 종아리를 묶어 독의 침입을 막았고, 또한 마령저(馬鈴藷)가 가진 성분(쿠코아민, Kukoamines:간의 해독작용을 높인다.)이 독을 제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노인은 그저 자신이 아는 지식에 따라 당설혜가 죽었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즉, 노인의 말만 듣고 포기했다면 정말로 설혜를 죽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아, 하마터면 진짜로 시체 하나 치울 뻔했잖습니까!”
―미, 미안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아무리 해독을 끝냈다지만 이대로 두어서야 되겠느냐? 몸을 좀 데우던지…….
민망했던지 노인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지만 의외로 정곡을 찔렸던지, 궁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 하지만 제 처소에 들였다간…….”
하루, 아니 반의 반 시진도 못 가서 화선에게 걸릴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자니 그것 또한 위험했다.
“에잇, 한 번 시작을 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잠시간 고민했던 궁현이지만, 이내 결심한 듯 동굴을 나섰다.

동굴을 나갔던 궁현은 얼마 되지 않아 이불을 가져왔다. 화기(火氣)를 일으켜 혹시 있을지 모를 물기를 말린 뒤 이불을 편 궁현은 그 위에 당설혜를 눕히고는 연신 동굴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며 설혜를 간호했고, 벌써 그것이 만 하루째였다. 궁현이 노인의 말에 입을 쭉 내밀며 답했다.
“보기 민망한 게 아니라, 독을 빨아낸 겁니다. 뭘 알고 말씀하셔야지. 원래 독사에 물렸을 때는 최소한의 독만 침투하도록 환부에서 몇 촌 정도 위를 약간 피가 통할 정도로 묶은 다음 환부를 빨아서 피와 함께 독을 빼내는 게 정석인 겁니다. 기본적으로 처치자 본인에게도 꽤나 중독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남녀가 유별하여 외간 남자에게는 감히 속살을 내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 그 대화를 듣던 당설혜는 자신의 얼굴이 벌게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할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앞으로도 며칠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할 그녀의 몸은 아무렇지도 않고 그저 얼굴에 약간 혈색이 돌았다 싶을 정도로 붉어질 뿐이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대체 누가 그러더냐? 뱀에게 물렸을 때는 그곳을 빨라고?
노인의 그 말을 들은 당설혜는 설마설마 하던 일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완벽한 사실이 되어 버리자 당장에라도 일어나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의 몸은 반응이 없었다.
궁현 또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600년 쯤 뒤에는 그게 대중적인 응급처치법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 그냥 어쩌다 보니 길 가던 사람에게서 알게 됐습니다.”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길이 인터넷의 네트워크를 말하는 것이고 길 가던 사람은 네티즌(혹은 유저)을 말하는 것일 뿐. 분명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뭐, 그 사람 참 대단하구나. 어찌 이런 방법을 알아냈을꼬.
당설혜는 눈이 뜨이질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기를 돌려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 이건.’
그녀가 느낀 것은 자기 몸 안에 세 가지의 낯선 기운이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기운 모두 자신의 내기에 거의 흡수되어 가고 있었다.
‘하나가 독기인 것은 알겠지만…… 나머지 둘은.’
잠시 생각해 보지만, 그녀가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지금 자신의 옆에서 말하고 있는 노인과 청년의 기운이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때 쯤, 다시금 당설혜의 정신은 깊숙이 잠겨 갔다.
‘아. 지금은, 더 자 두는 게 좋을지도.’

그렇게 다시 나흘이 지나갔다. 그동안 설혜는 상체는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자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궁현과 대화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유일한 낙이 되어 있었다.
‘이 사람, 거부감이 들지 않아. 어째서지?’
사실 당설혜는 친구를 사귄다거나, 남들에게 다가서거나 남들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그것이 남자라면 더더욱. 하지만 궁현의 꾸밈없는 미소나, 아무런 흑심도 담기지 않은, 상대에게 다가서는 것에 스스럼없는 모습에, 설혜는 점점 빠져들고 있던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라. 이 사람이라면, 혼인하는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닐 거야.’
설혜가 그런 생각을 하고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궁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벌써 가시렵니, 아니. 가실 겁니까?”
자신만의 망상에 빠져 궁현과의 혼인 후를 생각하던 설혜는 무의식적으로 나온 교태 어린 말투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눈빛은 그대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벌써 해도 지고 있고, 안 들어가면 화선이에게 혼이 나서요. 대신 내일 일찍 올게요. 알았죠?”
궁현의 말에 설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설혜에게 인사를 한 궁현은 동굴을 나섰다.
“잘 자요.”
“예, ……가도.”
나지막이 무언가 말한 설혜였지만, 궁현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예? 뭐라고요?”
“아니요. 잘 주무시라고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궁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뢰무한기궁법집편에 실려 있던 경신법을 펼친 것이다.
“다음에 볼 땐,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실 거예요, 가가(哥哥).”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한 설혜는 동굴을 나섰다.
사실 설혜는 어제부터 전신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떨어지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만히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칠천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당가의 가솔들도 지금쯤은 설혜를 찾느라 이동이 늦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궁현도 설혜도 떠나간 동굴은 점점 식어 갔다.

다음 날, 동굴에 도착한 궁현은 주인 없이 잘 개어져 있는 이불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아, ……뭐,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겠죠?”
―허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게야.
노인의 말을 들으며, 궁현은 다시금 호수 앞으로 나가 검을 꺼내 들고는 검술 연마를 시작했다.
“……제왕뇌익검법. 제일초, 붕익섬뢰(鵬翼閃雷).”
검이 햇빛을 받아 뇌기(雷氣)를 띤 듯 번쩍거리며 허공을 베어 갔다. 단 한 번 베어 공기마저 잘리는 것을 보니 마치 새들의 제왕인 대붕의 날갯짓 같았다.
“제이초, 뇌붕시우(雷鵬矢羽)! 하앗! 하!”
고요한 숲의 아침을 깨우는, 유쾌한 검음(劍音)이었다.

***

칠천회가 열리기 사흘 전, 남궁세가의 아침이 찾아왔다. 이미 도착한 모용세가의 태상가주(太上家主) 모용일천(慕容一天)을 비롯한 가솔들을 제외하고 아마도 오늘 중으로 칠대세가의 대부분이 도착할 것이었다.
칠천회!
칠천회는 칠천회주가 속한 세가에서 열리게 된다. 지금의 회주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건이었다. 칠천회주는 15년마다, 혹은 회주가 죽었을 때마다 바뀌는데, 바로 올해가 이 남궁건의 마지막 임기였다.
각설하고, 그 남궁세가 안에서 헤매는 어느 불쌍한 이가 있었으니, 이 이가 바로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소가주(小家主), 소소검 모용서현이었다.
소소검(小笑劍) 모용서현(慕容栖晛)!
고작 십이 세의 나이로 강호에 출도하여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고수들을 꺾어, 강호의 동도들이 감히 후지기수들 중에 최고로 꼽기를 마지않는 이였다.
“우…… 여기, 여기는 대체 아버니임― 어머니임― ……으우우.”
그런 모용서현도 아직 어린 티를 벗지는 못했는지, 울먹거리며 부모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부모들은 느긋하게 남궁건과 그 아내인 서모련과 함께 차를 나누며, 아들이 길을 잃고 미아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