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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13화)
5. 당설혜(唐設惠)(3)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던 서현의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어? 꼬마야.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 이번에 온 모용세가의 아이니?”
바로 궁현의 동생인 소연이었다. 서현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낮추고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모습이 서현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듯 보였다.
“우…… 응! 아, 아니. 그렇소. 저는 모용서현이라고 하는데, 소저는?”
“풋! 꼬, 꼬마야. 그렇게 무게 잡지 않아도 돼. 서현이라고? 누나는 소연이라고 해. 남궁소연.”
일부러 무게를 잡고 나이답지 않은 말투를 사용하는 서현이 너무나도 귀여웠던 나머지, 소연은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귀여운 꼬마로만 보이는 겉모습을 모용세가의 강력한 소가주와 연결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꼬마는 길을 잃은 거니? 누나가 안내해 줄까?”
“아, 아니오. 누, 누가 길을 잃었다는 것이오? 그리고 나는 꼬마가 아니라 모용서현이라니까, 모용서현!”
이쯤 되면 자기 이름에서 뭔가 알아차리지 않을까 기대한 서현이었지만, 소연도 워낙 둔했는지, 그저 어린아이의 투정을 받아 주듯 할 뿐이었다.
“그래, 그래. 서현아. 그럼 어디로 갈까? 모용세가가 배정받은 전각으로 갈래?”
“아, 아니오. 나, 나는 그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묻는 소연에 얼굴이 빨개진 서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여, 연무장에…… 아, 아니. 미리 남궁세가의 실력을 가늠해 보려는 것은 아니고. 그, 그저 무공을 좀 견식. 아니, 그것도 아니오! 그냥 연무장이 좋은가 보려고…… 제가 이번 칠천회에 참가하다 보니.”
횡설수설하며 불안해하는 서현이었지만, 소연의 눈에는 그런 그가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그래, 그럼 연무장으로 가자.”
그렇게 소연은 서현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한편, 남궁세가의 연무장에서는 남궁천천이 쉴 틈 없이 검을 놀리고 있었다. 그 검에서 펼쳐지는 것은 바로 가주와 소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남궁세가의 상승무공인 제왕검법(帝王劍法)이었다.
“하아! 하! 육초, 제왕군림(帝王君臨)!”
아직 연성이 부족해 8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못하는데도, 그 검기(劍技)는 날카롭기만 했다.
“제와…… 아, 소연이 왔느냐?”
한참을 검무에 빠져 있던 천천은 연무장으로 다가오는 소연과 서현을 보고는 검세를 가다듬었다.
“아, 오라버니. 잘 주무셨어요?”
“그래, 내가 잘못 잘 일이 뭐가 있겠느냐? 안 그래도 칠천회를 앞두고 검을 연마하고 있……?!”
소연과 아침 인사를 나누던 천천은 갑자기 자신을 압박해 오는 기운을 느끼곤 깜짝 놀라 그 기운에 맞서 갔다.
“음, 꽤 하시는구려.”
그러고는 그 기운의 시작이 자신보다 한참 작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놀랐다.
“그런 어린 나이에 이런 기세(氣勢)라니 그럼 네가 소소검 모용서현인가?”
그 말에 서현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에게 쏟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소연은 천천의 말을 천천히 되새겨 보다 더욱 깜짝 놀랐다.
“소소검이라니. 설마, 꼬마. 아니, 소협(小俠)이 바로 모용세가의 소가주셨군요!!”
소연의 말에 약간 기뻐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서현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린아이 취급을 당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서현은 한편으로 그것이 기뻤던 것이다.
“그렇소, 내가…….”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니지요, 소협.”
그제야 자신의 명호(名號)를 정식으로 밝히려던 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소연에 화들짝 놀라 그 손길을 피하고는 멋쩍어했다.
“후훗. 아! 저도 몸을 좀 쓰고 싶은데…… 상대해 주시겠어요, 오라버니?”
“음? 아아― 그래. 얼마든지.”
그 말과 함께 비무를 하기 전의 예를 생략하고 검을 맞대어 가는 둘이었다.
채챙! 챙!
먼저 공격해 간 것은 소연이었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천천의 허리를 베려던 소연의 시도는 천천이 같은 속도로 가볍게 뒤로 뜀으로서 실패했다. 여유롭게 공격을 피한 천천은 검을 들어 올린 뒤 소연에게로 내리쳤다.
챙!
천천의 검을 강하게 튕겨 낸 소연은 그대로 똑같이 검을 내리쳤다.
챙!
왼쪽 어깨로부터 대각선으로 베어 내려오는 검에 자신의 검을 살짝 가져다 대어 막은 천천은 그대로 소연을 제압하려는 듯, 목을 향해 검을 찔러 갔다. 하지만 소연도 허리를 정(丁) 자로 구부려 검을 피하고는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후우.”
천천의 검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이동하고서야 겨우 상체를 들어 올린 소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오라버니. 정말로 죽을 뻔했어요. 설마 진심으로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제 실력은 오라버니보다 한참 아래라구요. 부우우우―”
“아, 미안하구나. 네 실력이 어느 정도 늘었나 보려다 그만. 하지만 훌륭하게 피했지 않느냐? 게다가 네가 피하지 못했을 때 검을 회수할 정도 능력은 된다.”
천천의 말에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소연이었다. 그런 소연의 눈에 네 명의 인영이 보였다. 바로 그녀의 부모인 남궁건과 서모련, 그리고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영휘(慕容永輝)와 그 부인 황보옥빙(皇甫玉氷)이었다.
한편, 궁현은 소연과 천천이 비무를 하는 동안 어느새 수련을 마치고 땀과 피로까지 닦아 내고는 세가의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궁현에게, 문지기인 나재하(羅材霞)와 이현혁이 다가가 섰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예, 접객당(接客堂)으로 오라 하십니다.”
두 문지기의 말에 궁현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두어 번 끄덕이고 접객실인 환인각(歡人閣)으로 향했다.
“가주님, 이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래. 들라 해라.”
“예, 들겠습니다. 아버님.”
드르륵!
궁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여러 얼굴들이 궁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먼저 자신을 부른 가주 남궁건으로 시작하여 모친 서모련, 태상가주 남궁적, 조모(祖母)인 하설련(霞雪蓮), 남궁천천. 그리고 경악한 표정으로 궁현을 바라보고 있는 당설혜와 당가의 가주 당천명, 그리고 네 명의 남녀가 더 있었다.
바로 그 일 다경 전, 연무장에 나타난 남궁건과 서모련은 모용세가의 사람들을 다인전(多仁殿)으로 안내하고는 곧바로 천천을 환인각으로 데리고 왔다.
그 이유는 바로 상견례 때문이었다. 예정보다는 사흘이나 늦었지만, 어찌 됐던 사천당가가 오늘 아침 도착했고, 더 늦으면 칠천회가 끝날 때까지 미뤄야 하기에 급하게 사람을 모은 것이다.
“오랜만이오, 당 가주. 그동안 안녕 하시었소?”
“저야 뭐. 남궁 가주도 안녕하시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당가의 태상가주인 무심독(無心毒) 당현상(唐玄傷)이 남궁적과 반갑게 인사하며 상좌에 앉자, 그동안 계속 얼굴을 감추고 있던 당설혜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후, 이런 나를 보고 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아!”
그녀다. 이 넓디넓은 중원, 다시는 그녀를 찾지 못하리라 여겼건만 자신의 앞에서 수줍은 듯 떨고 있는 이 여인은 분명히 그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천천은 당설혜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당설혜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그런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던 것이다.
그만큼 첫사랑인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천천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때와는 달리 한껏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차려입은 당설혜의 모습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편 기대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천천의 얼굴을 확인한 당설혜 또한 떨리는 눈으로 천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아, 아니야. 이 사람이 아니야.’
조금 닮긴 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 남궁 가주님?”
“아, 왜 그러시…… 아니, 왜 그러느냐, 혜아야.”
예를 차려 말을 하려던 남궁건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며느리가 될 거라는 생각에 말을 낮추었다. 그런 남궁건에게 당설혜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저, 저는 소가주님과 혼인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당설혜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의 어깨를 짚으려던 남궁건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주님, 이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응? 이공자라면 남궁현? 서, 설마,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당설혜는 경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아닐 거라고 자위(自慰)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맘에 둔 사람을 놔두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바로 옆에서 계속 그를 지켜봐야만 하는 혼인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마음에 둔 사람에게 그 마음도 전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훨씬 괴로운 일이 아닌가!
“아, 그래. 들라 해라.”
“예, 들겠습니다. 아버님.”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녀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토록 아니길 빌고 또 바랐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님, 아버님, 작야간(昨夜間) 평안하셨습니까?”
“하하, 그래. 그래. 아! 당 가주! 이 아이가 내 둘째 아들인 현이라오.”
이럴 수가! 남궁현이라니?! 그는 무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당설혜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지고 눈은 흔들렸으며, 입술은 자꾸 말라만 갔다.
당천명은 궁현을 보며 그리 자랑스러운 듯 소개하는 남궁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라면, 남궁현은 무공도 배우지 않으려 하는 주제에 언제나 가출이나 하는 망나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 당천명은 웃는 얼굴로 궁현을 맞이했다.
“호오, 그렇소? 반갑구나…… 현아.”
당천명의 눈빛에서 자신을 깔보고 있는 듯한 기색을 읽은 궁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생각에는 아마도 전에 말했던 형인 남궁천천의 상견례인 것 같았는데, 웬만하면 그다지 끼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당 가주님.”
그때, 궁현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아, 당신은!”
바로 당설혜였다. 당설혜는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궁현의 표정을 보고는 입술을 떨며 몇 차례를 뻐끔거리더니 간신히 언어를 구사했다.
“아아, 아. 남궁현 소협, 이셨…… 습니까? 지난 일은 가슴 속 깊이…… 너무나도 깊숙이 감사하고 있어요.”
“네? 아, 예. 천만에요. 해야 할 도리를 한 것뿐인데요. 저기…….”
간접적으로 마음을 전해 보는 설혜였지만, 궁현은 그 기색을 전혀 읽지 못하고 다른 것을 난감해하고 있었다.
궁현이 그녀의 이름을 몰라 난감해하는 것이 눈에 띄자, 옆에 있던 서모련이 살짝 전음을 날렸다.
―당설혜 소저니라. 어찌 아직까지 자기 형수가 될 여인의 이름도 몰랐느냐?
―……그야 가르쳐 주신 적이 없잖습니까!
“아, 당설혜 소저. 아니,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하여튼, 며칠 전에는 갑자기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형수! 궁현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 나오자마자, 떨리던 당설혜의 표정은 오히려 아무 변화 없이 잠잠해졌다. 당황과 충격이 도를 넘어 아주 표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런 당설혜를 놔두고 상견례는 조금씩 진행되어 갔다.
그때 바싹 마른 입술을 잠깐 혀를 내밀어 적신 당설혜가 당현상에게 말을 걸었다.
“……버님.”
“응?”
“할아……버님.”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당설혜에게 적잖이 당황한 당현상은 잠시 오랜 친우와의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잔뜩 굳은 그녀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이 아이가!! 대체 왜.’
“죄, 죄송합니다. 전, 이 혼인은…… 모, 못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 맺혀지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집안의 어른들이 결정할 문제인 것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심정이 간절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그런 당설혜의 말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무슨 소리냐?! 혜아야, 이것은 네 마음대로 될 일이 아니다!”
“마음에,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습니다. 그래도 아니 됩니까?!”
당설혜의 간절한 음성에 모두가 더욱 경악했다. 특히 남궁천천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당설혜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라니! 하지만 남궁세가로서는 당가와의 사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천천 개인적으로도 포기라는 것은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