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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동거>
1.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사다리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짐을 실어 나르고 있다. 막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 단지엔 하루에도 몇 집이 이사를 들어오고 있어서 이런 광경은 어느 동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저쪽 건너편 집과 경쟁을 하듯 사다리차가 오르내리고 있었으니까.
막 냉장고가 실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는 품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금액으로 이런 좋은 아파트 전세를 구했으니 정말 횡재가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몇 년쯤은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것이 올해의 나쁜 운을 말끔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날린 기분이었다.
“오늘 밤부터는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겠다. 그렇지?”
이제 7개월에 접어든 긴 속눈썹에 뽀얀 살결을 가진 예쁜 아기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기특하고 예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아기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선우는 손목시계를 힐끗 살폈다. 막 9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상하네. 왜 여태 안 오시지?”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인이 오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약속 시각을 잘못 들었나? 선우는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핸드폰을 찾았다. 어제까지도 몇 번의 통화를 한 탓에 번호를 찾는 일은 쉬웠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잘못 걸었나 싶어 다시 눌러 봐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전화기는 왜 꺼져 있지?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선우는 슬쩍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짐이 올라가는 광경을 응시했다. 이제 곧 마지막 짐이 올라갈 테고 이사도 끝이다. 아무래도 사무실로 가 봐야 할까. 그래,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애써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던 그때였다.
이삿짐 차량과 사다리차 한 대가 근처에서 멈춰 선다. 어느 집이 또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차량에서 내린 인부들이 먼저 이삿짐을 나르고 있던 사람들과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인사를 나눈다.
“요즘 바쁘시죠?”
“아주 정신없어. 그쪽은 어때?”
“저희도 뭐 정신없죠. 요즘은 저녁에도 심심찮게 하는 걸요. 몇 호 이사 오는 거예요?”
담배를 빼 물며 구레나룻이 까만 남자가 물었다.
“우리? 1104호.”
“1104호? 어? 우리도 1104호인데?”
양쪽 남자들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우리 이미 짐 다 올렸는데.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타박하자 삐딱하게 담배를 문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이내 인상을 구겼다.
“맞다니까요. 1104호.”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우리는 이미 이사를 끝냈는데 누군가가 또 이사를 온다니. 이해가 가지 않아 입을 반쯤 벌리고 서 있던 선우에게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그들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모님, 우리 짐 똑바로 들어간 거 맞죠?”
“…….”
선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들고 있던 전화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맞겠지? 그래, 맞을 거야. 맞아야 해.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여전히 꺼져 있다는 멘트가 들려온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건 왜였을까. 선우는 다급하게 가방에서 계약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어 집주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벼락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연히 들어갔던 부동산 사무실에서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전셋집을 구했고 모자라는 금액을 맞추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순간 좋지 않은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 봐요, 괜찮아요?”
몸이 기우뚱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달려오는 남자들이 보였다. 하늘이 노래졌다가 이내 깜깜해졌다.
지구대 안은 몹시도 소란스러웠다.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무리의 취객들이 영업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끌려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경찰들은 그들의 고성방가를 막기 위해 위협적으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난리 북새통이란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긴 의자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선우는 조금 전부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이의 귀를 양손으로 막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정작 괜찮지가 않았다.
벌써 30분 넘게 그녀는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 감각이 없어졌다. 대체 지금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 지금쯤이면 짐을 풀고 새로 배달된 물건들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이사한 기념으로 점심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을 생각이었다. 원래 이삿날엔 자장면이 제격이었으니까. 그리고 나선 뭘 할 생각이었더라. 맞다.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거실에 누워 수영이와 함께 느긋한 오수를 즐길 예정이었지. 내일까지 휴가를 얻었으니 충분히 그럴 여유는 있다고 생각했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젊은 경찰 하나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쳐다본다. 뭔가 좀 안됐다는 표정이다.
“아기가 참 착하네요. 칭얼거리지도 않고.”
“……네.”
“몇 달 됐어요?”
“7개월이요.”
“휴, 한창 예쁠 때네요. 집주인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경찰 말에 허여멀겋던 선우의 뺨에 핏기가 돌았다. 그사이 전화번호를 바꾸어 버린 집주인과 연락이 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말없이 연락처를 바꿔 버린 것이 내심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와 주기만 하면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는 잘 해결이 될 터였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는 말 한마디면 이런 해프닝쯤은 기꺼이 웃으며 넘겨 줄 작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유리문을 벌컥 밀치고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꽤 장신의 남자는 근사한 슈트 차림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저절로 뒤돌아볼 만큼 젊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곧장 경찰에게로 향하는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고 선우는 어서 주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선우 씨.”
경찰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 앞으로 남자가 뚜벅뚜벅 다가섰다.
“이선우 씨?”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저음은 이 날카로운 순간에조차 근사하게 들렸다.
“네, 제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선우를 훑던 남자의 시선이 아이를 지나 그녀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러더니 그 잘생긴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신이 이 말도 안 되는 쇼의 주인공입니까?”
남자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
안 돼.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선우는 질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언니, 제발 도와줘…….”
오전에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어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나가 있던 동완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였다. 얼핏 본 번호의 끝자리가 112로 되어 있었다. 112라. 경찰서를 사칭한 스팸 전화일 확률이 거의 100%라고 확신한 동완이 가뿐히 무시하고 다시 회의에 열중하는데 전화는 끝없이 걸려 왔다. 이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거는 놈들도 있었던가. 결국, 전화를 받은 것은 8통의 부재 중 전화가 뜬 다음이었다.
지구대 경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와 통화를 마친 동완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번에 새로 분양받아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어제 이미 잔금까지 치르고 법무사를 통해 등기까지 신청한 상태였다. 한데 다른 사람이 이사를 들어오고 있다니? 대체 누가?
양해를 구하고 회의 중간에서 일어난 동완은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지구대로 향하며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대낮에 버젓이 남의 집으로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이라니.
차를 세우고 지구대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한쪽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중년 남자가 그 간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인상으로 보아 사기꾼 기질이 다분해 보였다. 감히 남의 집에 이사라니. 합의 같은 건 절대 하지 말아야지. 잔뜩 벼르고 있는데 경찰이 가리킨 쪽은 그 남자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여자였다. 작은 체구에 긴 생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고작해야 20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
벌떡 일어선 여자는 아무리 봐도 그럴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외모와 범죄의 상관관계 같은 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중요한 일정을 엉망으로 만든 여자를 향해 그는 곱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당신이 이 말도 안 되는 쇼의 주인공입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여자의 입술이 뭐라고 달싹거렸다.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걸 보니. 겁을 잔뜩 먹은 여자의 모습을 보니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넘어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남의 집에 버젓이 이사를 들어온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였으니까.
동완은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게 사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를 하실 거라면 제대로 하시죠.”
그나저나 이 여자는 대체 집에 어떻게 들어간 것일까. 위협적으로 팔짱을 끼며 큰 키를 이용해 여자를 내려다보는 그에게 파르르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하아, 기가 막힌다. 내심 발휘해 보려던 너그러움이 그 한마디에 깡그리 사라졌다.
“이선우 씨. 이쪽은 강동완 씨라고 1104호 집주인이에요. 계약하셨다면서 두 분 서로 만난 적 없으세요?”
여자는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경찰과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보았을 턱이 없을 테지. 동완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며 인상이 차가워졌다.
“들으셨습니까? 내가 그 집 주인입니다만.”
거짓말처럼 얼굴이 하얘진 여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고 그 바람에 놀랐는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지구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 한심한 상황에 어울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동완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1.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사다리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짐을 실어 나르고 있다. 막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 단지엔 하루에도 몇 집이 이사를 들어오고 있어서 이런 광경은 어느 동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저쪽 건너편 집과 경쟁을 하듯 사다리차가 오르내리고 있었으니까.
막 냉장고가 실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는 품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금액으로 이런 좋은 아파트 전세를 구했으니 정말 횡재가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몇 년쯤은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 생각만 해도 흐뭇한 것이 올해의 나쁜 운을 말끔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날린 기분이었다.
“오늘 밤부터는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겠다. 그렇지?”
이제 7개월에 접어든 긴 속눈썹에 뽀얀 살결을 가진 예쁜 아기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기특하고 예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아기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선우는 손목시계를 힐끗 살폈다. 막 9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상하네. 왜 여태 안 오시지?”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인이 오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약속 시각을 잘못 들었나? 선우는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핸드폰을 찾았다. 어제까지도 몇 번의 통화를 한 탓에 번호를 찾는 일은 쉬웠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잘못 걸었나 싶어 다시 눌러 봐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전화기는 왜 꺼져 있지?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선우는 슬쩍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짐이 올라가는 광경을 응시했다. 이제 곧 마지막 짐이 올라갈 테고 이사도 끝이다. 아무래도 사무실로 가 봐야 할까. 그래,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애써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던 그때였다.
이삿짐 차량과 사다리차 한 대가 근처에서 멈춰 선다. 어느 집이 또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차량에서 내린 인부들이 먼저 이삿짐을 나르고 있던 사람들과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인사를 나눈다.
“요즘 바쁘시죠?”
“아주 정신없어. 그쪽은 어때?”
“저희도 뭐 정신없죠. 요즘은 저녁에도 심심찮게 하는 걸요. 몇 호 이사 오는 거예요?”
담배를 빼 물며 구레나룻이 까만 남자가 물었다.
“우리? 1104호.”
“1104호? 어? 우리도 1104호인데?”
양쪽 남자들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우리 이미 짐 다 올렸는데.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타박하자 삐딱하게 담배를 문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이내 인상을 구겼다.
“맞다니까요. 1104호.”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우리는 이미 이사를 끝냈는데 누군가가 또 이사를 온다니. 이해가 가지 않아 입을 반쯤 벌리고 서 있던 선우에게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그들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모님, 우리 짐 똑바로 들어간 거 맞죠?”
“…….”
선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들고 있던 전화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맞겠지? 그래, 맞을 거야. 맞아야 해.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여전히 꺼져 있다는 멘트가 들려온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건 왜였을까. 선우는 다급하게 가방에서 계약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어 집주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벼락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연히 들어갔던 부동산 사무실에서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전셋집을 구했고 모자라는 금액을 맞추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순간 좋지 않은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 봐요, 괜찮아요?”
몸이 기우뚱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달려오는 남자들이 보였다. 하늘이 노래졌다가 이내 깜깜해졌다.
지구대 안은 몹시도 소란스러웠다.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무리의 취객들이 영업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끌려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경찰들은 그들의 고성방가를 막기 위해 위협적으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난리 북새통이란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긴 의자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선우는 조금 전부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이의 귀를 양손으로 막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정작 괜찮지가 않았다.
벌써 30분 넘게 그녀는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 감각이 없어졌다. 대체 지금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 지금쯤이면 짐을 풀고 새로 배달된 물건들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이사한 기념으로 점심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을 생각이었다. 원래 이삿날엔 자장면이 제격이었으니까. 그리고 나선 뭘 할 생각이었더라. 맞다.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거실에 누워 수영이와 함께 느긋한 오수를 즐길 예정이었지. 내일까지 휴가를 얻었으니 충분히 그럴 여유는 있다고 생각했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젊은 경찰 하나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쳐다본다. 뭔가 좀 안됐다는 표정이다.
“아기가 참 착하네요. 칭얼거리지도 않고.”
“……네.”
“몇 달 됐어요?”
“7개월이요.”
“휴, 한창 예쁠 때네요. 집주인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경찰 말에 허여멀겋던 선우의 뺨에 핏기가 돌았다. 그사이 전화번호를 바꾸어 버린 집주인과 연락이 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말없이 연락처를 바꿔 버린 것이 내심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와 주기만 하면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는 잘 해결이 될 터였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는 말 한마디면 이런 해프닝쯤은 기꺼이 웃으며 넘겨 줄 작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유리문을 벌컥 밀치고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꽤 장신의 남자는 근사한 슈트 차림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저절로 뒤돌아볼 만큼 젊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곧장 경찰에게로 향하는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고 선우는 어서 주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선우 씨.”
경찰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 앞으로 남자가 뚜벅뚜벅 다가섰다.
“이선우 씨?”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저음은 이 날카로운 순간에조차 근사하게 들렸다.
“네, 제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선우를 훑던 남자의 시선이 아이를 지나 그녀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러더니 그 잘생긴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신이 이 말도 안 되는 쇼의 주인공입니까?”
남자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
안 돼.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선우는 질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언니, 제발 도와줘…….”
오전에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어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나가 있던 동완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였다. 얼핏 본 번호의 끝자리가 112로 되어 있었다. 112라. 경찰서를 사칭한 스팸 전화일 확률이 거의 100%라고 확신한 동완이 가뿐히 무시하고 다시 회의에 열중하는데 전화는 끝없이 걸려 왔다. 이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거는 놈들도 있었던가. 결국, 전화를 받은 것은 8통의 부재 중 전화가 뜬 다음이었다.
지구대 경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와 통화를 마친 동완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번에 새로 분양받아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어제 이미 잔금까지 치르고 법무사를 통해 등기까지 신청한 상태였다. 한데 다른 사람이 이사를 들어오고 있다니? 대체 누가?
양해를 구하고 회의 중간에서 일어난 동완은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지구대로 향하며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대낮에 버젓이 남의 집으로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이라니.
차를 세우고 지구대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한쪽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중년 남자가 그 간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인상으로 보아 사기꾼 기질이 다분해 보였다. 감히 남의 집에 이사라니. 합의 같은 건 절대 하지 말아야지. 잔뜩 벼르고 있는데 경찰이 가리킨 쪽은 그 남자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여자였다. 작은 체구에 긴 생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고작해야 20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
벌떡 일어선 여자는 아무리 봐도 그럴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외모와 범죄의 상관관계 같은 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중요한 일정을 엉망으로 만든 여자를 향해 그는 곱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당신이 이 말도 안 되는 쇼의 주인공입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여자의 입술이 뭐라고 달싹거렸다.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걸 보니. 겁을 잔뜩 먹은 여자의 모습을 보니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넘어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남의 집에 버젓이 이사를 들어온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였으니까.
동완은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게 사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를 하실 거라면 제대로 하시죠.”
그나저나 이 여자는 대체 집에 어떻게 들어간 것일까. 위협적으로 팔짱을 끼며 큰 키를 이용해 여자를 내려다보는 그에게 파르르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하아, 기가 막힌다. 내심 발휘해 보려던 너그러움이 그 한마디에 깡그리 사라졌다.
“이선우 씨. 이쪽은 강동완 씨라고 1104호 집주인이에요. 계약하셨다면서 두 분 서로 만난 적 없으세요?”
여자는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경찰과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보았을 턱이 없을 테지. 동완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며 인상이 차가워졌다.
“들으셨습니까? 내가 그 집 주인입니다만.”
거짓말처럼 얼굴이 하얘진 여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고 그 바람에 놀랐는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지구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 한심한 상황에 어울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동완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런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