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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 준비 중
프롤로그
“에이씨!”
공허한 방 안에 여자의 괴성이 울렸다.
“어제 결제를 했는데 왜 아직도 준비 중이냐고!”
여자는 괴성을 지르며 연신 클릭하더니 결국 고객센터 창을 열었다.
……폭풍 생리 중이거든요. 얼른 안 보내 주면 선혈이 낭자한 채로 인증샷 보낼 겁니다!
“힝, 이러면 보내겠지. 썩을. 배고파라.”
일어선 여자는 어느새 땀이 흥건해진 헐렁한 민소매 티를 쑥 걷더니 등 뒤로 낑낑대며 팔을 놀렸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늘어난 브래지어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에이씨. 먹으면 다 살이 일루 가네.”
남들에겐 축복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골 아픈 현실일 뿐이었다.
“배고파.”
그러나 여자는 연신 배고프다 투덜거리면서도 컴퓨터 화면 속 즐겨찾기한 쇼핑 창들을 볼 뿐이었다.
“배송 준비 중……. 배송 준비 중……. 아, 배송 중? 이건 오겠구먼. 이게 뭐지…….”
여자가 산 것은 오리 훈제 세트였다. 56,000원에 여섯 마리인데 타임 찬스로 무려 5,000원이나 할인을 받아 51,000원에 득템한 것이었다. 그거면 한동안 기운을 쓰겠지 싶어 그녀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오리 냉채, 오리 구이, 오리 무침…….”
노랫소리가 절로 나왔다. 물론 그녀의 성격상 프라이팬에 데우는 것도 귀찮아 기름이 잔뜩 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을 게 뻔했지만.
그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엽떼요?”
─여보세요는 무신. 야, 나야.
“누구?”
─넌 발신자 번호도 안 뜨냐? 나 영숙인데 내 택배 좀 받아 주라.
“무신! 니 택배를 왜 내가 받아.”
─그거 회사에서 받기 좀 그래서 그래. 이따 퇴근할 때 찾아갈게.
“뭔데? 계집애야, 또 뭘 샀는데?”
─아, 있어. 뜯어보지 마라. 후회할 거다. 으흐흐흐.
“썩을! 내 집에 온 거니까 내가 쓴다!”
─그러든지. 생각해 보니 너한테 필요한 거구만. 하여튼 바빠. 받아 줘. 알랍!
친구 영숙의 전화를 끊은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의 집은 커다란 원룸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사무실이 잔뜩 밀집한 커다란 빌딩이 바로 뒤에 있어 집값도 꽤 나갔다.
그녀의 부모님은 은퇴 후에 시골로 내려가면서 총 열두 가구가 살 수 있는 원룸의 맨 위층을 그녀에게 주었다. 4층짜리 원룸 열두 개로 이루어진 신축 건물은 그 주변에 있는 원룸들보다 훨씬 세련됐고 깨끗했기 때문에 빈집을 찾기 힘들었다. 여자는 그 원룸의 꼭대기 층, 주인용으로 지어진 넓디넓은 공간을 혼자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노브라에 숏 팬츠를 입은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주방용 튀김 젓가락을 꾹 꽂고 있었다. 비녀를 매번 사긴 했지만 산 날 이후로는 당최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를 노릇이라, 손에 잡히는 긴 작대기라면 연필이건 붓이건 젓가락이건, 심지어 세탁소 옷걸이도 펴서 머리에 꽂을 판이었다.
여자는 제 본업인 글을 쓰기 위해 한글 파일을 켜 놓긴 했지만, 아침부터 열 줄도 쓰지 않은 채였다. 대신 무시무시하게 넓은 컴퓨터 화면에는 온갖 인터넷 쇼핑 창들이 가득 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클릭한 것은 부동산 커뮤니케이션 사이트.
“에이씨. 하나도 없네. 이 정도면 무지 싼 건데…….”
그녀는 게시판에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었지만 상당한 조회수에 비해 전화는 하나도 오지 않고 있었다.
방배 4동 메르시앙 빌딩 뒤 4층. 방 두 개 룸메이트 구합니다. 직장인 여성분 환영합니다. 보증금 500에 월세 30만 원 안에 공과금 포함입니다. 성격 무던하신 분 찾습니다.
이 얼마나 대박인 조건인가! 그러나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바로 저번 주 여자의 룸메이트라고 쓰고 세입자라고 읽는 여자가 게으른 그녀의 만행을 참지 못하고 계약 기간 3개월은커녕 보름 만에 나가 버린 터였다. 아래층은 한 층마다 네 개의 원룸들로 나눠져 있었지만 그녀가 사는 4층은 주인집용이라 넓디넓은 거실과 두 개의 욕실, 그리고 방이 세 개나 됐기 때문에 혼자 살기에는 턱없이 넓었다.
사실 혼자 살아도 별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아래층 월세나 보증금 같은 것은 바로 부모님 계좌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허울만 좋지, 그녀는 실은 글을 쓰고 그게 책으로 나와야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 그놈의 필이 통해야 글을 쓰는 판이니 아무리 인기가 있는 작가라 할지라도 그걸로 먹고살기는 힘들었다.
걸어 놓은 전자책들 덕에 인세가 들어오긴 하지만 매일 앉아서 쓸데없는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게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생활 그 자체이므로 다달이 부모님이 온갖 잔소리를 하며 보내 주는 용돈으론 택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수입원은 바로 부모님 몰래 놓는 월세였다. 그러니 룸메이트가 필요한 거지.
그러나 문제는 그 룸메이트들이 그녀와 사는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아니, 전기 절약을 위해 세탁물을 일주일씩 모아서 빠는 게 뭐가 나쁘냐고. 날이 습하니까 곰팡이가 좀 필 수도 있는 거지. 설거지야 그릇이 없을 때 하면 되는 거 아냐? 웃겨. 만날 먹고 나서 설거지하면 식후의 여운을 즐길 시간이 없잖아…….”
근처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태였다. 두 달 전에 이 집에 잠시 살았던 여자가 참지 못하고 게시판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유난히 깔끔을 떨더라니……. 그 뒤로 그녀의 룸메이트 광고에는 ‘성격 무던한 분’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러나 방이 빈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
내가 뭐 어때서!
텅 빈 댓글란을 보고 열이 오른 여자가 냉장고를 열자 그 안에는 정체불명의 팩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음……. 떡은 해동하려면 한참 걸릴 거고. 에이씨, 고들빼기김치는 벌써 쉬었네. 두유나 마셔야지.”
인터넷 쇼핑 중독의 경지에 이른 그녀는 원래부터 있는 집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다니고 직장 생활도 잠깐 했었다. 지금은 책을 꽤 내고 고정적인 팬들도 가진 저명한 로맨스 소설 작가로, 이런 노른자위 땅에 망망대해 같은 집을 가진 정말로 골드스러운 미스였다.
물론 거울 따위는 잘 보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잰 키로는 167cm, 그렇게 먹을 것을 사시사철 시시때때 24시간 입에 달고 살면서도 50kg 이상을 넘지 않는, 축복받은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넌 성격이 문제야!
뭐가 어때서! 옷가게에 가면 들러붙는 점원이 무서워서, 새 옷은 뭐가 묻기 전에는 빨기 싫고, 머리는 길어서 감기 귀찮으니까 정말 가려우면 감을 뿐이고, 미용실은 갔다 하면 서너 시간이 걸리니까 패스할 뿐인 자연인 아닌가. 그래도 새벽 3시쯤 되면 이름이 쓰여진 라벨을 다 뜯은 박스를 가끔씩 내다 버리러 나갔다.
그러나 그녀도 예전엔 이런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맞벌이를 하느라 늘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살뜰하게 할 줄 아는 요리 가짓수도 꽤 되었고, 항상 교복도 스스로 다려 입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성격이 문제를 만들었고 그녀의 인생에 한 획을 긋게 된 사건 뒤로는 삶의 방식을 바꿔 버렸다. 뭐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란 걸 깨달았으니까.
그런 그녀의 쇼핑 목록은 당연 먹는 것 위주였다. 당장 밖에 나가려면 세수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싫으니까 생수부터 시작해서 라면, 김치, 과자, 간식거리까지……. 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가. 슈퍼에 가지 않아도 먹거리를 살 수 있다니. 물론 그 와중에 책도 간간이 사고, 아까처럼 생리대니 세제니, 가끔 곰팡이가 피면 새로 이불도 사고 일주일을 가지 않지만 귀여운 슬리퍼도 샀다.
이번에 산 건 뭐였지? 이제 곧 도착할 오리 세트와 배송 중비 중인 생리대, 아, 그리고 멋진 의자를 하나 샀다. 동그란 프레임에 든 새 둥지 모양의 의자는 푹 파묻혀 앉아서 넷북을 하면 딱일 거야.
물론 인터넷 쇼핑의 단점은 그만큼 실패도 있다는 것이었다. 박스를 뜯지도 않은 냄비 세트라든지, 이제는 다릴 옷도 없는데 산 증기다리미나, 할 재주도 없는데 산 세팅기 등. 온갖 물건이 잔뜩 든 채 배송받은 그 상태 그대로인 박스가 한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입에 비해 턱없이 지출이 많았지만 그녀는 뒤늦게 얻은 무남독녀 외동딸답게 부모님에게 애교를 떨어 용돈을 타 내 가면서 탱자탱자 행복한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모자란 돈을 위해선 빨리 룸메이트가 나타나길 바라는 수밖에!
“아이씨. 왜 안 와. 오리가 와야 밥을 먹지.”
문제는 밥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녀는 슬금슬금 난장판인 주방으로 갔다. 그릇이란 그릇은 다 나와 있는 넓은 일자 모양의 주방 싱크대는 이미 밥그릇 하나 올려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여섯 개짜리 세트로 된 머그컵이 두 세트나 나와 있는데도 설거지를 하지 않아 물 마실 컵이 없어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종이컵에 생수를 따라 마시고는 밥통을 열었더니 밥알이 말라비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 물을 붓고는 옆에 올려놓은 쌀 봉지에서 대충 후루룩 쌀을 부어 휘휘 저었다.
요즘엔 날이 더우니까 그나마 찬물에 손을 담그지 추울 때는 숟가락이나 거품기로 대충 휘휘 저을 때가 많았다. 두어 번 물을 갈고 나서는 희끄무레한 쌀 물을 가뿐하게 무시한 채 밥솥 밑에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을 담을 그릇이 있나 싱크대를 열었더니 위쪽에 접시가 두어 개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우선 밥은 저기다 담으면 되고……. 그나저나 오리는 왜 안 와!
삐리리리리리리리리리~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다. 다다다다 소리가 날 만큼 인터폰 쪽으로 뛰어갔다.
─택배 왔습니다.
대부분 그녀의 집에 오는 택배 기사들은 전화를 하지 않고 방문했다. 현대, 경동, 옐로우 캡, 우체국, 대신…… 모든 택배 기사들이 이곳에 사는 여자가 매일같이 물건을 배달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연히 집에 없는 법도 없었다.
“아싸, 배고픈데 잘됐다!”
벌써부터 입에 고이는 침을 닦으며 문가로 뛰어갔지만 이 삼복더위에 4층 계단을 올라와야 하는 택배 기사는 쉬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빨리! 빨리 뛰어!”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데 딩동 소리가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문을 활짝 연 정원의 눈앞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택배 기사가 보였다.
그녀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고정원 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대답하는 그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내 오리는!
계단을 올라오느라 열이 오른 택배 기사의 손에 들린 것은 오리가 든 스티로폼 냉동 박스가 아니라 조그마한 상자였다.
“오리는요?”
“네?”
“오리가 와야 되는데…….”
“방배 4동 만천 뒷길 234호 명신 빌딩 4층 고정원 씨 아니세요? 여긴 전화 안 해도 된다고 하시던데…….”
모자를 쓴 남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긴 맞는데…….”
“받으세요.”
그런데 상자를 내미는 남자의 시선이 수상했다. 뭐가 문제지? 그제야 늘 오던 현대 택배의 인상 좋은 아저씨가 아니라 처음 보는 젊은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키가 훤칠한 데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하얀색 면 티에 택배 직원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반팔로 드러난 그을린 팔뚝은 마른 듯 했지만 잔근육이 잡혀 있었다.
“사인해 주십시오.”
어쭈, 목소리도 좋네. 정원은 남자가 내민 PDA에 오랜만에 사인을 해 봤다. 대부분 그냥 물건만 던지고 가는데…….
이내 남자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좇아가던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남자는 히죽 웃더니 인사까지 하고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별……!”
그래도 뭔가 새로운 물건이 배송됐으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드라이어가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의 택배 상자.
그녀는 상자에 쓰여 있는 배송 요청 사항을 본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바이브레이터니까 겉면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보내 주세요.
헐? 웬 바이브레이터…… 바이브레이터라면…… 바로 그, 그것? 아니, 저 녀석이 이걸 보고 웃은 거야?
정원은 그제야 아까 영숙이 히죽거리면서 했던 전화를 기억해 냈다. 얼굴이 화끈거리긴 했지만 그건 3초도 지속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상자 안의 담긴 물건뿐이었다.
이런…… 아니, 이딴 걸 산단 말이지!
말로만 듣던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정원은 닦지 않아 찐득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열심히 상자의 테이프를 뜯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전에 일을 하던 분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저 집 여자한테는 거의 매일같이 가야 한다고, 전화 따윈 안 해도 늘 집에 있다고 하더만.
늘씬한 여자를 보는 게 한때 일이었던 적도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위험스러우리만큼 짧은 핫팬츠와 목이 늘어난 민소매티를 입고, 그 목이 조금 많이 늘어난 데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브라 차림이라니……. 게다가 얼굴도!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닦던 그가 PDA를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주소다. 룸메이트를 구한다던 원룸 4층? 혹 저 여자인가?
그때, 남자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야! 한승우. 거기 어디야, 인마. 빨리 집하장으로 안 와!
“가요,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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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씨!”
공허한 방 안에 여자의 괴성이 울렸다.
“어제 결제를 했는데 왜 아직도 준비 중이냐고!”
여자는 괴성을 지르며 연신 클릭하더니 결국 고객센터 창을 열었다.
……폭풍 생리 중이거든요. 얼른 안 보내 주면 선혈이 낭자한 채로 인증샷 보낼 겁니다!
“힝, 이러면 보내겠지. 썩을. 배고파라.”
일어선 여자는 어느새 땀이 흥건해진 헐렁한 민소매 티를 쑥 걷더니 등 뒤로 낑낑대며 팔을 놀렸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늘어난 브래지어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에이씨. 먹으면 다 살이 일루 가네.”
남들에겐 축복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골 아픈 현실일 뿐이었다.
“배고파.”
그러나 여자는 연신 배고프다 투덜거리면서도 컴퓨터 화면 속 즐겨찾기한 쇼핑 창들을 볼 뿐이었다.
“배송 준비 중……. 배송 준비 중……. 아, 배송 중? 이건 오겠구먼. 이게 뭐지…….”
여자가 산 것은 오리 훈제 세트였다. 56,000원에 여섯 마리인데 타임 찬스로 무려 5,000원이나 할인을 받아 51,000원에 득템한 것이었다. 그거면 한동안 기운을 쓰겠지 싶어 그녀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오리 냉채, 오리 구이, 오리 무침…….”
노랫소리가 절로 나왔다. 물론 그녀의 성격상 프라이팬에 데우는 것도 귀찮아 기름이 잔뜩 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을 게 뻔했지만.
그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엽떼요?”
─여보세요는 무신. 야, 나야.
“누구?”
─넌 발신자 번호도 안 뜨냐? 나 영숙인데 내 택배 좀 받아 주라.
“무신! 니 택배를 왜 내가 받아.”
─그거 회사에서 받기 좀 그래서 그래. 이따 퇴근할 때 찾아갈게.
“뭔데? 계집애야, 또 뭘 샀는데?”
─아, 있어. 뜯어보지 마라. 후회할 거다. 으흐흐흐.
“썩을! 내 집에 온 거니까 내가 쓴다!”
─그러든지. 생각해 보니 너한테 필요한 거구만. 하여튼 바빠. 받아 줘. 알랍!
친구 영숙의 전화를 끊은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의 집은 커다란 원룸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사무실이 잔뜩 밀집한 커다란 빌딩이 바로 뒤에 있어 집값도 꽤 나갔다.
그녀의 부모님은 은퇴 후에 시골로 내려가면서 총 열두 가구가 살 수 있는 원룸의 맨 위층을 그녀에게 주었다. 4층짜리 원룸 열두 개로 이루어진 신축 건물은 그 주변에 있는 원룸들보다 훨씬 세련됐고 깨끗했기 때문에 빈집을 찾기 힘들었다. 여자는 그 원룸의 꼭대기 층, 주인용으로 지어진 넓디넓은 공간을 혼자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노브라에 숏 팬츠를 입은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주방용 튀김 젓가락을 꾹 꽂고 있었다. 비녀를 매번 사긴 했지만 산 날 이후로는 당최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를 노릇이라, 손에 잡히는 긴 작대기라면 연필이건 붓이건 젓가락이건, 심지어 세탁소 옷걸이도 펴서 머리에 꽂을 판이었다.
여자는 제 본업인 글을 쓰기 위해 한글 파일을 켜 놓긴 했지만, 아침부터 열 줄도 쓰지 않은 채였다. 대신 무시무시하게 넓은 컴퓨터 화면에는 온갖 인터넷 쇼핑 창들이 가득 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클릭한 것은 부동산 커뮤니케이션 사이트.
“에이씨. 하나도 없네. 이 정도면 무지 싼 건데…….”
그녀는 게시판에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었지만 상당한 조회수에 비해 전화는 하나도 오지 않고 있었다.
방배 4동 메르시앙 빌딩 뒤 4층. 방 두 개 룸메이트 구합니다. 직장인 여성분 환영합니다. 보증금 500에 월세 30만 원 안에 공과금 포함입니다. 성격 무던하신 분 찾습니다.
이 얼마나 대박인 조건인가! 그러나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바로 저번 주 여자의 룸메이트라고 쓰고 세입자라고 읽는 여자가 게으른 그녀의 만행을 참지 못하고 계약 기간 3개월은커녕 보름 만에 나가 버린 터였다. 아래층은 한 층마다 네 개의 원룸들로 나눠져 있었지만 그녀가 사는 4층은 주인집용이라 넓디넓은 거실과 두 개의 욕실, 그리고 방이 세 개나 됐기 때문에 혼자 살기에는 턱없이 넓었다.
사실 혼자 살아도 별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아래층 월세나 보증금 같은 것은 바로 부모님 계좌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허울만 좋지, 그녀는 실은 글을 쓰고 그게 책으로 나와야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 그놈의 필이 통해야 글을 쓰는 판이니 아무리 인기가 있는 작가라 할지라도 그걸로 먹고살기는 힘들었다.
걸어 놓은 전자책들 덕에 인세가 들어오긴 하지만 매일 앉아서 쓸데없는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게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생활 그 자체이므로 다달이 부모님이 온갖 잔소리를 하며 보내 주는 용돈으론 택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수입원은 바로 부모님 몰래 놓는 월세였다. 그러니 룸메이트가 필요한 거지.
그러나 문제는 그 룸메이트들이 그녀와 사는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아니, 전기 절약을 위해 세탁물을 일주일씩 모아서 빠는 게 뭐가 나쁘냐고. 날이 습하니까 곰팡이가 좀 필 수도 있는 거지. 설거지야 그릇이 없을 때 하면 되는 거 아냐? 웃겨. 만날 먹고 나서 설거지하면 식후의 여운을 즐길 시간이 없잖아…….”
근처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태였다. 두 달 전에 이 집에 잠시 살았던 여자가 참지 못하고 게시판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유난히 깔끔을 떨더라니……. 그 뒤로 그녀의 룸메이트 광고에는 ‘성격 무던한 분’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러나 방이 빈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
내가 뭐 어때서!
텅 빈 댓글란을 보고 열이 오른 여자가 냉장고를 열자 그 안에는 정체불명의 팩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음……. 떡은 해동하려면 한참 걸릴 거고. 에이씨, 고들빼기김치는 벌써 쉬었네. 두유나 마셔야지.”
인터넷 쇼핑 중독의 경지에 이른 그녀는 원래부터 있는 집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다니고 직장 생활도 잠깐 했었다. 지금은 책을 꽤 내고 고정적인 팬들도 가진 저명한 로맨스 소설 작가로, 이런 노른자위 땅에 망망대해 같은 집을 가진 정말로 골드스러운 미스였다.
물론 거울 따위는 잘 보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잰 키로는 167cm, 그렇게 먹을 것을 사시사철 시시때때 24시간 입에 달고 살면서도 50kg 이상을 넘지 않는, 축복받은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넌 성격이 문제야!
뭐가 어때서! 옷가게에 가면 들러붙는 점원이 무서워서, 새 옷은 뭐가 묻기 전에는 빨기 싫고, 머리는 길어서 감기 귀찮으니까 정말 가려우면 감을 뿐이고, 미용실은 갔다 하면 서너 시간이 걸리니까 패스할 뿐인 자연인 아닌가. 그래도 새벽 3시쯤 되면 이름이 쓰여진 라벨을 다 뜯은 박스를 가끔씩 내다 버리러 나갔다.
그러나 그녀도 예전엔 이런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맞벌이를 하느라 늘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살뜰하게 할 줄 아는 요리 가짓수도 꽤 되었고, 항상 교복도 스스로 다려 입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성격이 문제를 만들었고 그녀의 인생에 한 획을 긋게 된 사건 뒤로는 삶의 방식을 바꿔 버렸다. 뭐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란 걸 깨달았으니까.
그런 그녀의 쇼핑 목록은 당연 먹는 것 위주였다. 당장 밖에 나가려면 세수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싫으니까 생수부터 시작해서 라면, 김치, 과자, 간식거리까지……. 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가. 슈퍼에 가지 않아도 먹거리를 살 수 있다니. 물론 그 와중에 책도 간간이 사고, 아까처럼 생리대니 세제니, 가끔 곰팡이가 피면 새로 이불도 사고 일주일을 가지 않지만 귀여운 슬리퍼도 샀다.
이번에 산 건 뭐였지? 이제 곧 도착할 오리 세트와 배송 중비 중인 생리대, 아, 그리고 멋진 의자를 하나 샀다. 동그란 프레임에 든 새 둥지 모양의 의자는 푹 파묻혀 앉아서 넷북을 하면 딱일 거야.
물론 인터넷 쇼핑의 단점은 그만큼 실패도 있다는 것이었다. 박스를 뜯지도 않은 냄비 세트라든지, 이제는 다릴 옷도 없는데 산 증기다리미나, 할 재주도 없는데 산 세팅기 등. 온갖 물건이 잔뜩 든 채 배송받은 그 상태 그대로인 박스가 한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입에 비해 턱없이 지출이 많았지만 그녀는 뒤늦게 얻은 무남독녀 외동딸답게 부모님에게 애교를 떨어 용돈을 타 내 가면서 탱자탱자 행복한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모자란 돈을 위해선 빨리 룸메이트가 나타나길 바라는 수밖에!
“아이씨. 왜 안 와. 오리가 와야 밥을 먹지.”
문제는 밥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녀는 슬금슬금 난장판인 주방으로 갔다. 그릇이란 그릇은 다 나와 있는 넓은 일자 모양의 주방 싱크대는 이미 밥그릇 하나 올려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여섯 개짜리 세트로 된 머그컵이 두 세트나 나와 있는데도 설거지를 하지 않아 물 마실 컵이 없어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종이컵에 생수를 따라 마시고는 밥통을 열었더니 밥알이 말라비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 물을 붓고는 옆에 올려놓은 쌀 봉지에서 대충 후루룩 쌀을 부어 휘휘 저었다.
요즘엔 날이 더우니까 그나마 찬물에 손을 담그지 추울 때는 숟가락이나 거품기로 대충 휘휘 저을 때가 많았다. 두어 번 물을 갈고 나서는 희끄무레한 쌀 물을 가뿐하게 무시한 채 밥솥 밑에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을 담을 그릇이 있나 싱크대를 열었더니 위쪽에 접시가 두어 개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우선 밥은 저기다 담으면 되고……. 그나저나 오리는 왜 안 와!
삐리리리리리리리리리~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다. 다다다다 소리가 날 만큼 인터폰 쪽으로 뛰어갔다.
─택배 왔습니다.
대부분 그녀의 집에 오는 택배 기사들은 전화를 하지 않고 방문했다. 현대, 경동, 옐로우 캡, 우체국, 대신…… 모든 택배 기사들이 이곳에 사는 여자가 매일같이 물건을 배달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연히 집에 없는 법도 없었다.
“아싸, 배고픈데 잘됐다!”
벌써부터 입에 고이는 침을 닦으며 문가로 뛰어갔지만 이 삼복더위에 4층 계단을 올라와야 하는 택배 기사는 쉬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빨리! 빨리 뛰어!”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데 딩동 소리가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문을 활짝 연 정원의 눈앞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택배 기사가 보였다.
그녀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고정원 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대답하는 그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내 오리는!
계단을 올라오느라 열이 오른 택배 기사의 손에 들린 것은 오리가 든 스티로폼 냉동 박스가 아니라 조그마한 상자였다.
“오리는요?”
“네?”
“오리가 와야 되는데…….”
“방배 4동 만천 뒷길 234호 명신 빌딩 4층 고정원 씨 아니세요? 여긴 전화 안 해도 된다고 하시던데…….”
모자를 쓴 남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긴 맞는데…….”
“받으세요.”
그런데 상자를 내미는 남자의 시선이 수상했다. 뭐가 문제지? 그제야 늘 오던 현대 택배의 인상 좋은 아저씨가 아니라 처음 보는 젊은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키가 훤칠한 데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하얀색 면 티에 택배 직원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반팔로 드러난 그을린 팔뚝은 마른 듯 했지만 잔근육이 잡혀 있었다.
“사인해 주십시오.”
어쭈, 목소리도 좋네. 정원은 남자가 내민 PDA에 오랜만에 사인을 해 봤다. 대부분 그냥 물건만 던지고 가는데…….
이내 남자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좇아가던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남자는 히죽 웃더니 인사까지 하고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별……!”
그래도 뭔가 새로운 물건이 배송됐으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드라이어가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의 택배 상자.
그녀는 상자에 쓰여 있는 배송 요청 사항을 본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바이브레이터니까 겉면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보내 주세요.
헐? 웬 바이브레이터…… 바이브레이터라면…… 바로 그, 그것? 아니, 저 녀석이 이걸 보고 웃은 거야?
정원은 그제야 아까 영숙이 히죽거리면서 했던 전화를 기억해 냈다. 얼굴이 화끈거리긴 했지만 그건 3초도 지속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상자 안의 담긴 물건뿐이었다.
이런…… 아니, 이딴 걸 산단 말이지!
말로만 듣던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정원은 닦지 않아 찐득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열심히 상자의 테이프를 뜯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전에 일을 하던 분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저 집 여자한테는 거의 매일같이 가야 한다고, 전화 따윈 안 해도 늘 집에 있다고 하더만.
늘씬한 여자를 보는 게 한때 일이었던 적도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위험스러우리만큼 짧은 핫팬츠와 목이 늘어난 민소매티를 입고, 그 목이 조금 많이 늘어난 데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브라 차림이라니……. 게다가 얼굴도!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닦던 그가 PDA를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주소다. 룸메이트를 구한다던 원룸 4층? 혹 저 여자인가?
그때, 남자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야! 한승우. 거기 어디야, 인마. 빨리 집하장으로 안 와!
“가요,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