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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지 척! 역시 택배 총각!





“이봐요.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물론 있습니다.”
정말로 땀이 삐질삐질 흐르다 못해서 뚝뚝 떨어지는 날씨였다. 멀쩡하게 있는 에어컨의 씌워 놓은 커버를 벗기기 귀찮은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오고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방치한 터였다. 대신 하루 종일 켜 놓은 대형 컴퓨터의 열기를, 새로 산 USB에 꽂는 앙증맞은 꽃잎 모양의 선풍기와 최신형이라는 날개 없는 선풍기, 그리고 얼음을 넣어 두면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는 냉풍기를 돌려 식히고 있는 건 제 실험 정신 때문이라 변명하고 있었다.
전혀 소용없는 세 기계는 이 더위에 보람도 없이 전기 요금만 날름날름 잡아 드시고 있었다. 씻는 걸 귀찮아하는 그녀지만 일어나자마자 마치 수영장에서 나온 것 같은 질척함에 대충 찬물 샤워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스팀 다리미에 스팀 연속 분사하는 소리인지!
“저기요, 아저씨. 저 혼자 사는 여자거든요? 그리고 분명히 직장 여어어어성 룸메이트 구함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여성’이라는 단어에 강조와 강조를 더한 정원의 말에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은 남자는 날름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정원은 제 앞에 선, 자세히 보니 꽤나 잘생긴 젊은 남자를 째려봤다.
“그리고 저, 아저씨 아닙니다.”
아저씨가 아니란 말의 꼬리가 묘하게 굴러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건 깊이 눌러쓴 모자 사이로 삐뚜름한 남자의 입술이 삐죽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왠지 날도 더운데 어제부터 받았던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저씨든, 오빠든 제가 상관할 바 아니고요. 그거 제 택배 맞죠?”
남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를 보고 정원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하루였다. ‘씬’ 못 쓰기로 자자한 정원은 어제 편집자로부터 받은 전화 탓에 왕 고민을 하느라 밤을 꼴딱 새고 어스름할 때 잠이 들었었다. 그러다 너무 더워서 깨어난 뒤 영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냥 두 사람의 감정선이 부드럽게 넘어가서 아침이 된 거면 다들 뭔 일이 일어난 줄 알잖아요.”
─알죠, 다 알죠. 그러나 그 뭔 일을 어떻게 시시콜콜했느냐가 중요하다고요. 작가님 왜 이러세요.
“전 빨간 딱지 작가도 아니고요. 제가 이런 식으로 쓰는 거 제 독자들은 다 알거든요?”
─기존 독자만 가지고 그러시면 안 되죠. 이제는 좀 ‘씬’도 넣어 주셔야 합니다. 평이 좋지만 별 하나 덜 받는 이유가 ‘씬’이 없어서예요. 요즘 쏟아지는 책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19금만 찾는 사람도 엄청 많아요. 기본적으로 들어가 줘야 하는 19금 장면 하나 없이 책을 내시면, 그건 독자들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동화를 읽지, 로설 안 보거든요. 그냥 좀 묘사라도 해서 넣어 주세요.

아니 무슨 동화까지 들먹여? 있는 대로 상한 정원의 마음과는 달리 편집자의 말이 이어졌다.

─보세요. 두 번째로 보내 주신 원고 말이에요. 여기 두 사람 처음 같이 보내는 밤, 요 장면 말이에요. 앞에서 내내 정 교수 짐승남이다 그렇게 강조를 해 놓고, 겨우겨우 200페이지 만에 합방 장면이라구요. 그런데 대뜸 아침에 일어나서 여주 몸에 키스 마크만 범벅이다, 이렇게 써 버리면 기운 빠져서 책 볼 맛 나겠어요? 편집하는 저도 열 받더라고요. 읽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좀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시라는 거예요. 독자로서 기대치가 있는데 그걸 그렇게 무참하게 박살을 내시면 안 되죠.

열불이 난다는 건 이런 거겠지. 정원은 주섬주섬 주변을 더듬었다. 아무거나 잡히는 걸로 거칠게 부채질을 하면서 겨우 대답했다.

“아니, 전에 손 편집장님은 안 그러셨거든요. 충분히 재미있다 하고 제 스타일 존중해 주셨다고요.”

그러나 손에 잡힌 건 플라스틱 접시였고, 그 접시는 어젯밤 냉동고에 있던 마지막 브라우니를 꺼내 먹을 때 받친 것이어서 남아 있던 부스러기가 사방에 날려 떨어졌다.
‘에이씨~’ 하는 소리가 절로 나려는 걸 꾹 참아야 했다.

─아는데요, 그러니까 책 열 권 팔릴 거 아홉 권 팔리는 거예요. 저희도 책을 파는 곳이라고요. 그 한 권을 로설의 백미, ‘씬’으로 채워 주셔야죠. 작가님!
“아, 몰라요!”

열이 뻗쳐 냉장고로 뛰어갔을 때 시원한 생수라도 한 통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열이 올라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어 있는 생수통 사이에 며칠째 찌그러져 있던 두유는 분명히 제가 생각하기에도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생각을 안 하려 해도 속이 니글거려 그녀는 이참에 어제 방송하던 정수기를 주문할 걸 하고 후회하다 없어진 월세 수입 덕에 펑크 난 카드값이 생각나 이내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물론 10시가 넘었으나 그녀에게는 이른 아침이었다─남자가 하는 이 헛소리는 대체 뭔가.
“룸메이트 구하신다고요. 방 보러 왔습니다.”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며 서 있었다. 아니, 택배 기사면 택배 물건이나 주고 가지.
방을 보여 주기도 심히 난감한 상태였다. 물론 세 줄 방은 비어 있었다. 전 세입자가 나간 뒤로 열어 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깔끔 떠는 여자였으니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제 것을 가져갔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방까지 가는 길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고 와야 방까지 가는 길을 내놓지…….
“저,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와서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르겠어요!”
실은 아는 남자였다.
어제도 이 눈앞의 남자가 엄청나게 큰 금속제 흔들의자를 컴퓨터 옆까지 날라 줬기 때문이었다. 푹신한 원형 방석이 있는 둥근 철제 흔들의자는 마치 새 둥지처럼 공중에 매달린 독특한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겨울부터 내내 찜했지만 너무 비싸 사지 못하고 있다 50% 할인이라는 대박 찬스를 등에 업고 과감하게 질렀다.
하지만 푹푹 찌는 날씨 탓에 푹 파묻히는 쿠션 속에 흐뭇한 마음으로 앉았다가 소복하게 엉덩이에 땀띠가 돋는 것을 느끼고는 가을을 기약하며 옆으로 밀어 놓고 바로 후회를 했다.
물론 ‘오호, 요 근래 본 택배 총각치곤 잘생겼네~’ 하고 휘리릭 혼자 휘파람을 불긴 했었다. 게다가 호리호리한 남자가 그 무거운 의자를 4층까지 번쩍 들어다 놓는 것을 보곤 내심 감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택배 기사가 짐을 옮겨 주는 것과 남자 룸메이트를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씬’도 못 쓰는…… 요 근래에는 연애도 안 한 이 젊은 순백의 처자를 뭘로 보고!
“한 달이면 됩니다. 딱 한 달만 지내게 해 주시면 됩니다. 저를 남자라 생각하지 마시고…….”
아까 삐죽이 올라갔던 남자의 입술이 생각나서였는지 정원은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미쳤어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썩은 호박에 임플란트도 안 들어가는 소리 하지도 마시라고요. 그거 제 택배죠? 그거나 줘요!”
“진짜 급해서 그럽니다. 그리고 전 목숨 같은 약혼녀도 있습니다. 사진 보여 드릴까요?”
남자는 급기야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정원은 그런 남자의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거든요! 내가 왜 댁의 약혼녀 사진을 봐야 하는데요!”
문을 닫으면 그만인데 너무 더워서 탈이었다. 남자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저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연풍이 가장 시원했고, 문을 닫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우락부락하고 나쁜 사람 같았더라면 초장에 경찰을 불렀을지도 모르겠으나 워낙에 귀티가 흐른달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정원은 제가 더위를 먹었나 싶었다. 무신 택배 아저씨가 귀티는…….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남자는 우선 훤칠한 키만큼은 알아줘야 했다. 키 큰 남자야 여럿 봤지만 다들 비율이 안 좋아서 거구로만 보였었는데 이 택배 총각은 머리가 작아서 그런지 늘씬해 보이기는 했다.
다들 꽉 끼는 택배 직원용 조끼가 헐렁할 만큼 잘빠진 데다 볕에 새까맣게 그슬린 팔뚝엔 잔근육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푹 눌러쓴 모자 밑에 드러난 얼굴도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깊이 눌러써서 턱 근처만 보이긴 했지만, 키가 워낙에 커서 이런 난처한 상황이 아니라면 ‘오호~’ 하고 절로 휘파람이 나올 만했다.
잠시 정원이 남자의 외모를 스캔하는 동안 그는 주섬주섬 가죽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에일…… 아니, 유은주라고 지금 영국에서 유학 중이에요. 예쁘죠? 유학 끝나고 돌아오면 결혼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전 제 약혼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약혼녀한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남자입니다. 믿어 주시죠.”
아니, 영국에 유학 중인 약혼녀가 있는 택배 직원? 택배 직원들은 대부분 계약직이고 이직이 많으며, 그 이유가 낮은 급료와 고된 일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길 만큼 대단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물론 뽀샵이라는 현대 기술의 쾌거가 있어 과하게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은 신빙성이 없어 보였지만.
그러나 거기서 끝났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약혼녀의 사진에 상대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제멋대로 판단한 남자의 입에서는 점입가경의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정신 멀쩡한 사람들이 굳이 이 집에 세 들어 살 것 같지도 않잖습니까? 그런데 저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제가 보기보다 비위가 강해요. 그리고…… 제가 당장에 목돈이 없어서 그런데 한 달 선월세 먼저 드릴 테니까, 보증금은 몸으로 때우면 안 될까 싶네요.”
“네? 뭐라고요?”
정말로 어이가 없어진 정원은 이제는 더위에 소리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보증금 대신 힘 좀 쓰죠. 솔직히 말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집 정리를 해 드릴게요. 요 며칠 봤는데 바닥에 떨어진 거 하나 안 주우시는 분 같은데……. 이거 원 쓰레기장도 아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저도 살아야 하니까 정리를 좀 해 드리죠. 쓰레기도 치워 드리고요. 그리고 뭐 그 밖에 일을 부탁하시면 100% 성심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제가 진짜 고급 인력이라 그쪽이 손해 보는 거 하나도 없으실 겁니다!”
이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
물론 보증금은 월세를 안 내면 거기서 까고 돌려주는 의미니까 받는 거고, 또 집에 세 든 사람이 뭔가 손해를 끼치면 제하고 주면 되기에 받는 것인지라 솔직히 집주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전세 보증금같이 큰 금액도 아니고, 어차피 맡아 놨다 방을 뺄 땐 돌려줘야 하니까 마구 손을 댈 수도 없는 돈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 택도 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내 집이 어때서!
“하! 기가 막혀서. 됐거든요. 제가 쓰레기 더미에서 살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에요? 택배 기사면 물건이나 던져 놓고 가든지! 당장 고객센터에 전화해야겠어요. 정말이지 기분 나빠서!”
그때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감히 내 이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쓰레기장이라니! 전화가 널 살렸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얼른 나가라는 듯 손짓하고는 전화기를 찾아 들었다. 남들은 다들 거창한 전화 벨소리를 쓴다지만 기계치인 데다 전화와 문자밖에 쓰질 않는지라 지극히 기본적인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저기…….”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이럴 때……. 받지 말걸! 발신자 번호를 보고 전화를 받는 습관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그녀는 마음속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 또 지금 일어났지? 당장 미용실로 뛰어가.
“엄마! 나 지금 바빠, 누구 왔단 말이야!”
어떤 전화인지 뻔히 아는 그녀가 한 번 더 손짓을 하며 나가라는 표시를 했지만 문 앞의 남자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그 쓰레기장에 누가 와? 당장 미용실 가서 머리하고 옷 챙겨 입고 6시까지 프레스티뉴 호텔 커피숍으로 와.
아니! 하필 엄마까지 쓰레기장이라고 하다니! 이마가 절로 찌푸려져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엄마, 나 원고 마감이거든.”
─그까짓 푼돈 필요 없어. 엄마 돈 많아. 당장 차려입고 와. 박 사장 부모님도 오실 거니까 예쁘게 하고 나와.
“엄마아!”
저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자 앞에 있는 남자가 움찔했다. 전화 통화가 길어질 것 같은 데도 남자는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문이라도 닫아야 했지만 저 문을 닫으면 바람구멍이 막혀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얼른 전화나 끊어야겠는데 전화기 저편에서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웬 박 사장? 이것이야말로 총체적 난국임에 틀림없었다.
─너 사주에 올해 남자 못 만나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고 법륜 스님이 말씀하셨어. 박 사장 딴 데 선본다는 거 내가 말려서 데려왔다. 한 시간 후에 비행기 뜬다. 6시까지 나와!
“엄마! 박 사장 숏다리라서 싫다고 했잖아! 나보다 키도 작다구!”
박 사장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박 사장이라니! 젊은 나이답지 않게 탐욕스러움이 뚝뚝 떨어지고 선명한 ‘M’자를 그리고 있는 번들거리는 넓디넓은 이마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숏다리 박 사장이라니……. 뭐 좀 크긴 하지만 슈퍼마켓 주인을 사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러다 슈퍼마켓 사장의 사모님이 되어서 뭐 하루 종일 바코드 찍고 돈이나 계산하라고?
─남자 키 잡아먹고 사는 거 아니다. 그 나이에 그렇게 큰 마트 가지고 있는 거 드물어. 너처럼 게을러빠지고 제 밥벌이 못 하는 애한테는 박 사장도 감지덕지야! 지금 박 사장이 좋다고 쫓아 다닐 때 얼른 잡아야 해! 그리고 결혼해서 네가 내 눈앞에서 사는 거 봐야겠다. 서울 집 관리는 돈 주고 맡기면 된다. 안 되면 뭐 팔아 버리든지! 그러니까 당장 준비하러 나가!
청천벽력이라는 게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아니, 이 집을 팔다니! 내 이 아름다운 보금자리이자 은신처를 내주고 그 갑갑한 제주도에서 만날 바다만 보고 살라고?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사랑하는 차도녀 고정원을 뭘로 보고…….
“어……. 엄마 잠깐만, 난 진짜로…….”
너무 기가 막혀 화려한 말발의 그녀가 말을 다 더듬을 지경이었다.
─뭐 다른 남자라도 있어? 나오기 싫으면 모시러 갈 테니까 집이라도 치우든지! 들어서 너 끌고 갈 테니까 5시까지 준비 마쳐!
“잠깐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