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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1>
1화
서(序)
“네가 대신 혼인을 해 주어야겠다.”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에 오복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오복은 제가 미쳐서 헛것을 들은 줄만 알았다. 안 그래도 열흘 전 빙인(氷人)이 다녀간 후로 줄곧 노심초사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이런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별채에 계신 아씨께서 한양 땅에 사는 누군가와 태중 정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안 날부터 그녀의 고민은 오직 하나였다.
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넉넉하게 먹고 사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난데없이 혼인 이야기가 나왔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혼례 준비며, 또 새서방님께서 지내실 곳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을 다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느라 열흘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다른 생각 같은 것은 할 겨를도 없었다.
“대, 대감마님 소녀는 아직 어리어 호, 혼인할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사온데…….”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바짝 마른 입술에 슬며시 침을 바르고 그녀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그녀의 나이도 어느덧 꽃다운 열여섯이 되었다.
업둥이로 이 집안에 들어온 날부터 차곡차곡 헤아려 올해로 꼭 열여섯 해가 되었다니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아무튼, 어느새 무르익은 제 나이를 자각한 것도 열흘 전 빙인이 다녀간 후부터였다.
저보다 딱 한 살 더 많은 아씨의 나이를 생각하다 어느덧 꽉 차 가는 제 나이를 떠올렸고 저도 여인이라고 또 자연스럽게 혼인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씨께서 혼인을 하고 나시면 저도 곧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때때로 마음이 조금 두근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하여라.”
“예에?”
“혼인할 생각을 해 두란 말이다. 근일 중에 납채(納采)가 올 것이니.”
농이 아니었다.
오복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대감마님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그리 표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껏 대한 적 없는, 무섭도록 차고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없던 서러움이 다 몰려오는 것만 같아 눈앞이 금방 부옇게 흐려졌다.
“아, 아씨께서, 아씨께서 계시는데…….”
“몸이 불편한 아이다. 너는 그 아이가 혼례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
“치른들, 사람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오래도록 데리고 살아 줄 이가 있겠느냐? 보나마나 골방에 숨겨지거나 이혼(離婚)을 당하겠지. 나도 염치가 있느니라. 간신히 체면치레나 하고 사는 처지에 사위를 들임은 말도 아니 되는 일이지. 다행히 저쪽이 의리가 깊은 집안이라 이렇게 의혼(議婚)이라도 받아 보는 것임을 안다. 양심이 있다면 거절하여야 마땅함도 알아.”
알지만 이쪽의 사정이 깊어 차마 그리할 수 없다.
사뭇 비통하기까지 한 말에 오복의 고개가 힘없이 도로 떨어졌다. 대쪽 같은 성품으로 누구에게도 아쉬운 말씀 한 번 하시는 법이 없으신 분이 그나마 오랜 약조라고 의리를 다하려 하는 집안을 상대로 속이고자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아프게 가슴을 찔러 왔다. 말씀은 안 해도 흡사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심정이시리라.
이리 말을 꺼내기까지 숱한 밤을 고민하셨다는 것도 이제 알겠다. 그날로부터 꼬박 열흘이나 곡기까지 하는 둥 마는 둥 하시며 혼자서 끙끙 앓고만 계셨으니. 좋은 소식을 받아 놓고도 어찌 저러시나 생각했었는데 이러시려고 그러셨던가 보다. 하지만, 하지만……!
‘차라리 거절을 하시어요. 만에 하나, 신부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 그땐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못하나, 그녀가 아는 것을 대감마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신 건 아닐 터였다. 그러니 결국은 최악의 결과까지도 모두 각오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고 온 식솔들의 목숨을 내려놓고 역모를 도모하듯 그렇게.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오복은 특히 두려웠다.
“혼례를 치르거든 그날로 신랑을 따라가거라.”
“예에?”
시커멓게 죽은 얼굴에서 이번엔 핏기가 가셨다.
기함을 하고 놀란 오복은 또 고개를 번쩍 들고 대감마님을 바라보았다.
남귀여가(男歸女家)라 했다. 혼인을 치르면 신랑이 처가로 들어와 함께 지내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 자라서야 친가로 돌아가는 것이 혼인의 법이었다. 헌데, 그날로 따라나서라니. 이것은 그냥 내쳐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왕조가 바뀌었고 법이 바뀌었다. 그리 감도 이제는 허물이 아닐 것이니 딴생각은 말아라. 네가 가고 나면 욱이도 곧 탁탁한 집안 찾아 장가를 들일 것이다.”
“……!”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이것이 최선임을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니. 너희들 각각 짝지어 다 떠나보내고 제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저 불쌍한 것에게 말년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나를 생각하여라.”
단호한 한마디와 함께 김 진사는 그대로 두 눈을 꾹 감고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던 눈물도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말 한 마디도 못 해 보고 결국은 떠밀리듯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갈대처럼 흔들거리는 몸뚱이로 오복은 간신히 대청에 나와 섰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한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당연하게 건넌방을 찾았다. 꼭 닫힌 장지문 너머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한참이나 애타게 찾아 헤맸다.
언제나 그렇듯, 거기에 계심을 알지만 수줍어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의 그림자는 오늘따라 더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저분도 이 일을 알고 계실까.
생각하는 순간, 두 눈이 불끈 감겨졌다.
‘도련님!’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一. 시집가는 날
여염집 아낙들이 대개 다 그렇듯 오복은 항상 바빴다.
이 집안에 살림을 할 사람이라곤 그녀 하나밖에 없는 까닭에 그녀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바쁘게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 다음 거기에 더해 밥벌이까지 해야 했다. 오늘도 그녀는 대감마님께 불려 갔었던 일 따윈 모른다는 듯 혼인의 ‘혼’자도 입에 담지 않은 채 묵묵히 제 할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먼저, 대감마님과 도련님께 소세할 물을 올리고 아침 진짓상을 올린 다음 저도 아씨와 함께 밥을 먹고 이런저런 수발을 들었다.
반신이 불편한 초희 아씨는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였다. 해서, 오복은 아씨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는 일부터 이런저런 사소한 심부름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다행히 아씨는 얌전하고 착한 사람이라 심부름이랍시고 무언가를 시키는 법이 드물어서 그녀는 대개 아씨의 곁에 앉아 수를 놓거나 실을 잣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엔 끝내어 놓은 일감들을 가져다주고 삯과 새로운 일거리를 받아 가지고 왔다. 그것으로 곡식도 사고 찬거리도 사고 뫼시고 사는 분들에게 필요한 것들도 장만한 다음, 다시 저녁을 해서 올렸다. 하여, 수틀을 잡은 것은 그렇게 고단한 하루가 거의 끝나 가는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곧 장가를 든다는 누군가의 혼례복을 받아다 놓고 오복은 벌써 사흘째 한 땀, 한 땀 자수를 들이고 있었다.
‘우리 도련님께 입혀 드리면 더 잘 어울릴 텐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쪽빛 천을 유심히 살피면서 오복은 그런 생각을 했다.
본래부터도 귀한 것들을 보면 그녀는 버릇처럼 도련님을 먼저 떠올리곤 했는데 아무리 아닌 척해도 이미 들어 놓은 말이 있는 까닭인지 오늘따라 이 혼례복이 더욱 눈에 밟혔다.
― 욱이도 곧 탁탁한 집안 찾아 장가를 들일 것이다.
저를 혼인시킨다는 말은 날름 까먹고 오복은 도련님 장가보낸다는 말만 찰떡같이 떠올렸다.
업둥이로 들어온 몸을 수양딸로 삼아 주신 대감마님께는 죄송하나 오복은 언제인가부터 사랑채 도련님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간이 흘러 제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적어도 사흘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더랬다.
“후우.”
그녀의 입에서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련님의 일을 떠올렸더니 애써 한편으로 제쳐 놓고 있던 일들까지 칡넝쿨 딸려 올라오듯 한꺼번에 우르르 딸려 올라온 까닭이었다. 그 덕에, 바삐 움직이던 그녀의 손도 점점 더 느려지다가 어느 순간 가만히 멈추었다.
그런 오복을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한 쌍이 아까부터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많긴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는 두렵다는 듯 한껏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그 눈빛은 마치 꼬리처럼 오복의 뒤를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것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있었던 오복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
두려움마저 담긴 여린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열일곱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고 여린 체구의 소녀 하나가 금방이라도 물기가 묻어날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복은 슬쩍 돌아앉으며 그녀의 슬프도록 하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 아씨.”
“저기이…….”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셔요? 자리를 옮겨 드릴까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단단히 굳어 움직이지 않는 반신을 끌고 엉덩이를 조금 들썩이다가 초희 아씨는 그냥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오복의 작은 간도 덩달아 떨어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오복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저가 대신 하게 될 혼인의 일이 궁금한 것이리라.
아씨는 누구보다 영민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몸이 조금 불편하여 마음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바보가 아니니 그녀라고 요즈음 집안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태중 정혼자를 빼앗길 처지라는 것 또한 미루어 짐작하고 계시리라. 그러니 말을 안 할 뿐 저분도 지금은 속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비통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오복은 차마 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복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아씨는 황급히 고개를 젓는 시늉을 했다. 굳어 버린 반신 때문에 그저 조금 까딱거리다 마는 몸짓이 더 애처롭게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졸린 척 하품을 하고 이부자리를 파고들더니 혼자 힘으로 끙끙거리면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 작고 외로운 등을 가만히 보다가 오복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 때였다.
“난 괜찮아.”
나직한 한마디가 이불 속에서 흘러나왔다.
“아씨.”
“사실은, 조금 무서웠어. 네가 싫다고 할까 봐.”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아까 떨어질 뻔했던 간이 이제는 바짝 오그라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쥐고 오복은 그녀가 누운 이부자리 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자 이불 속에서 다 꺼져 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인 이야기……. 미안해. 사실은, 다 나 때문이야.”
“……?”
“아버님이 그리 결정하신 건, 더 늦기 전에 나를 용한 의원에게 보이고 싶으신 욕심에…….”
“하지만 그러자면 돈이……!”
돈이 든다. 그것도 아주 많이 든다. 아씨의 병은 오래되어 약 몇 첩 먹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시간을 들여 그 의원에게 침이며 뜸을 비롯해 약까지 제대로 써서 끝까지 치료를 받아야 그나마 가망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깟 허름한 와가(瓦家)가 아니라 논 몇 마지기를 팔아도 모자랄 만큼 큰돈이 들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헌데, 그 많은 돈을 어찌 구하셨을까 생각하다가 오복은 퍼뜩 입을 다물었다.
“호, 혼수.”
혼수가 온다.
오복은 돌처럼 굳어 멍하니 소리가 새어 나오는 이불더미를 바라보았다.
“중매하는 이가 저쪽에서는 뭐든 바라는 대로 다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해서 아버님은 그저 생각 없이 욕심을 조금 내어 보셨는데, 그게…….”
“…….”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셨어. 이런 나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 거절하면 그걸 빌미 삼아 혼인은 없던 일로 하려고 하셨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어.”
생각도 못 해 본 말에 오복의 정신은 더더욱 멍청해졌다.
1화
서(序)
“네가 대신 혼인을 해 주어야겠다.”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에 오복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오복은 제가 미쳐서 헛것을 들은 줄만 알았다. 안 그래도 열흘 전 빙인(氷人)이 다녀간 후로 줄곧 노심초사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이런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별채에 계신 아씨께서 한양 땅에 사는 누군가와 태중 정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안 날부터 그녀의 고민은 오직 하나였다.
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넉넉하게 먹고 사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난데없이 혼인 이야기가 나왔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혼례 준비며, 또 새서방님께서 지내실 곳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을 다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느라 열흘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다른 생각 같은 것은 할 겨를도 없었다.
“대, 대감마님 소녀는 아직 어리어 호, 혼인할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사온데…….”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바짝 마른 입술에 슬며시 침을 바르고 그녀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그녀의 나이도 어느덧 꽃다운 열여섯이 되었다.
업둥이로 이 집안에 들어온 날부터 차곡차곡 헤아려 올해로 꼭 열여섯 해가 되었다니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아무튼, 어느새 무르익은 제 나이를 자각한 것도 열흘 전 빙인이 다녀간 후부터였다.
저보다 딱 한 살 더 많은 아씨의 나이를 생각하다 어느덧 꽉 차 가는 제 나이를 떠올렸고 저도 여인이라고 또 자연스럽게 혼인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씨께서 혼인을 하고 나시면 저도 곧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때때로 마음이 조금 두근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하여라.”
“예에?”
“혼인할 생각을 해 두란 말이다. 근일 중에 납채(納采)가 올 것이니.”
농이 아니었다.
오복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대감마님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그리 표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껏 대한 적 없는, 무섭도록 차고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없던 서러움이 다 몰려오는 것만 같아 눈앞이 금방 부옇게 흐려졌다.
“아, 아씨께서, 아씨께서 계시는데…….”
“몸이 불편한 아이다. 너는 그 아이가 혼례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
“치른들, 사람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오래도록 데리고 살아 줄 이가 있겠느냐? 보나마나 골방에 숨겨지거나 이혼(離婚)을 당하겠지. 나도 염치가 있느니라. 간신히 체면치레나 하고 사는 처지에 사위를 들임은 말도 아니 되는 일이지. 다행히 저쪽이 의리가 깊은 집안이라 이렇게 의혼(議婚)이라도 받아 보는 것임을 안다. 양심이 있다면 거절하여야 마땅함도 알아.”
알지만 이쪽의 사정이 깊어 차마 그리할 수 없다.
사뭇 비통하기까지 한 말에 오복의 고개가 힘없이 도로 떨어졌다. 대쪽 같은 성품으로 누구에게도 아쉬운 말씀 한 번 하시는 법이 없으신 분이 그나마 오랜 약조라고 의리를 다하려 하는 집안을 상대로 속이고자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아프게 가슴을 찔러 왔다. 말씀은 안 해도 흡사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심정이시리라.
이리 말을 꺼내기까지 숱한 밤을 고민하셨다는 것도 이제 알겠다. 그날로부터 꼬박 열흘이나 곡기까지 하는 둥 마는 둥 하시며 혼자서 끙끙 앓고만 계셨으니. 좋은 소식을 받아 놓고도 어찌 저러시나 생각했었는데 이러시려고 그러셨던가 보다. 하지만, 하지만……!
‘차라리 거절을 하시어요. 만에 하나, 신부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 그땐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못하나, 그녀가 아는 것을 대감마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신 건 아닐 터였다. 그러니 결국은 최악의 결과까지도 모두 각오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고 온 식솔들의 목숨을 내려놓고 역모를 도모하듯 그렇게.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오복은 특히 두려웠다.
“혼례를 치르거든 그날로 신랑을 따라가거라.”
“예에?”
시커멓게 죽은 얼굴에서 이번엔 핏기가 가셨다.
기함을 하고 놀란 오복은 또 고개를 번쩍 들고 대감마님을 바라보았다.
남귀여가(男歸女家)라 했다. 혼인을 치르면 신랑이 처가로 들어와 함께 지내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 자라서야 친가로 돌아가는 것이 혼인의 법이었다. 헌데, 그날로 따라나서라니. 이것은 그냥 내쳐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왕조가 바뀌었고 법이 바뀌었다. 그리 감도 이제는 허물이 아닐 것이니 딴생각은 말아라. 네가 가고 나면 욱이도 곧 탁탁한 집안 찾아 장가를 들일 것이다.”
“……!”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이것이 최선임을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니. 너희들 각각 짝지어 다 떠나보내고 제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저 불쌍한 것에게 말년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나를 생각하여라.”
단호한 한마디와 함께 김 진사는 그대로 두 눈을 꾹 감고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던 눈물도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말 한 마디도 못 해 보고 결국은 떠밀리듯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갈대처럼 흔들거리는 몸뚱이로 오복은 간신히 대청에 나와 섰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한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당연하게 건넌방을 찾았다. 꼭 닫힌 장지문 너머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한참이나 애타게 찾아 헤맸다.
언제나 그렇듯, 거기에 계심을 알지만 수줍어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의 그림자는 오늘따라 더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저분도 이 일을 알고 계실까.
생각하는 순간, 두 눈이 불끈 감겨졌다.
‘도련님!’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一. 시집가는 날
여염집 아낙들이 대개 다 그렇듯 오복은 항상 바빴다.
이 집안에 살림을 할 사람이라곤 그녀 하나밖에 없는 까닭에 그녀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바쁘게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 다음 거기에 더해 밥벌이까지 해야 했다. 오늘도 그녀는 대감마님께 불려 갔었던 일 따윈 모른다는 듯 혼인의 ‘혼’자도 입에 담지 않은 채 묵묵히 제 할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먼저, 대감마님과 도련님께 소세할 물을 올리고 아침 진짓상을 올린 다음 저도 아씨와 함께 밥을 먹고 이런저런 수발을 들었다.
반신이 불편한 초희 아씨는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였다. 해서, 오복은 아씨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는 일부터 이런저런 사소한 심부름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다행히 아씨는 얌전하고 착한 사람이라 심부름이랍시고 무언가를 시키는 법이 드물어서 그녀는 대개 아씨의 곁에 앉아 수를 놓거나 실을 잣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엔 끝내어 놓은 일감들을 가져다주고 삯과 새로운 일거리를 받아 가지고 왔다. 그것으로 곡식도 사고 찬거리도 사고 뫼시고 사는 분들에게 필요한 것들도 장만한 다음, 다시 저녁을 해서 올렸다. 하여, 수틀을 잡은 것은 그렇게 고단한 하루가 거의 끝나 가는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곧 장가를 든다는 누군가의 혼례복을 받아다 놓고 오복은 벌써 사흘째 한 땀, 한 땀 자수를 들이고 있었다.
‘우리 도련님께 입혀 드리면 더 잘 어울릴 텐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쪽빛 천을 유심히 살피면서 오복은 그런 생각을 했다.
본래부터도 귀한 것들을 보면 그녀는 버릇처럼 도련님을 먼저 떠올리곤 했는데 아무리 아닌 척해도 이미 들어 놓은 말이 있는 까닭인지 오늘따라 이 혼례복이 더욱 눈에 밟혔다.
― 욱이도 곧 탁탁한 집안 찾아 장가를 들일 것이다.
저를 혼인시킨다는 말은 날름 까먹고 오복은 도련님 장가보낸다는 말만 찰떡같이 떠올렸다.
업둥이로 들어온 몸을 수양딸로 삼아 주신 대감마님께는 죄송하나 오복은 언제인가부터 사랑채 도련님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간이 흘러 제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적어도 사흘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더랬다.
“후우.”
그녀의 입에서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련님의 일을 떠올렸더니 애써 한편으로 제쳐 놓고 있던 일들까지 칡넝쿨 딸려 올라오듯 한꺼번에 우르르 딸려 올라온 까닭이었다. 그 덕에, 바삐 움직이던 그녀의 손도 점점 더 느려지다가 어느 순간 가만히 멈추었다.
그런 오복을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한 쌍이 아까부터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많긴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는 두렵다는 듯 한껏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그 눈빛은 마치 꼬리처럼 오복의 뒤를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것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있었던 오복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
두려움마저 담긴 여린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열일곱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고 여린 체구의 소녀 하나가 금방이라도 물기가 묻어날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복은 슬쩍 돌아앉으며 그녀의 슬프도록 하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 아씨.”
“저기이…….”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셔요? 자리를 옮겨 드릴까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단단히 굳어 움직이지 않는 반신을 끌고 엉덩이를 조금 들썩이다가 초희 아씨는 그냥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오복의 작은 간도 덩달아 떨어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오복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저가 대신 하게 될 혼인의 일이 궁금한 것이리라.
아씨는 누구보다 영민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몸이 조금 불편하여 마음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바보가 아니니 그녀라고 요즈음 집안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태중 정혼자를 빼앗길 처지라는 것 또한 미루어 짐작하고 계시리라. 그러니 말을 안 할 뿐 저분도 지금은 속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비통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오복은 차마 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복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아씨는 황급히 고개를 젓는 시늉을 했다. 굳어 버린 반신 때문에 그저 조금 까딱거리다 마는 몸짓이 더 애처롭게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졸린 척 하품을 하고 이부자리를 파고들더니 혼자 힘으로 끙끙거리면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 작고 외로운 등을 가만히 보다가 오복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 때였다.
“난 괜찮아.”
나직한 한마디가 이불 속에서 흘러나왔다.
“아씨.”
“사실은, 조금 무서웠어. 네가 싫다고 할까 봐.”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아까 떨어질 뻔했던 간이 이제는 바짝 오그라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쥐고 오복은 그녀가 누운 이부자리 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자 이불 속에서 다 꺼져 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인 이야기……. 미안해. 사실은, 다 나 때문이야.”
“……?”
“아버님이 그리 결정하신 건, 더 늦기 전에 나를 용한 의원에게 보이고 싶으신 욕심에…….”
“하지만 그러자면 돈이……!”
돈이 든다. 그것도 아주 많이 든다. 아씨의 병은 오래되어 약 몇 첩 먹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시간을 들여 그 의원에게 침이며 뜸을 비롯해 약까지 제대로 써서 끝까지 치료를 받아야 그나마 가망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깟 허름한 와가(瓦家)가 아니라 논 몇 마지기를 팔아도 모자랄 만큼 큰돈이 들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헌데, 그 많은 돈을 어찌 구하셨을까 생각하다가 오복은 퍼뜩 입을 다물었다.
“호, 혼수.”
혼수가 온다.
오복은 돌처럼 굳어 멍하니 소리가 새어 나오는 이불더미를 바라보았다.
“중매하는 이가 저쪽에서는 뭐든 바라는 대로 다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해서 아버님은 그저 생각 없이 욕심을 조금 내어 보셨는데, 그게…….”
“…….”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셨어. 이런 나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 거절하면 그걸 빌미 삼아 혼인은 없던 일로 하려고 하셨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어.”
생각도 못 해 본 말에 오복의 정신은 더더욱 멍청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