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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막힘없이 지절지절 떠드는 사내의 궤변에 오복의 입이 다시 딱 벌어졌다.
이번엔 기가 막혀서가 아니라 고함을 지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배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배에 들어간 힘이 채 빠지기도 전에,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거지가 날아올랐다. 달밤을 비행하는 한 마리 야조처럼 담을 박차고 달님을 향해 붕 날아올라…… 툭 떨어졌다.
쿵!
“어이쿠!”
담에서 추락해 볼썽사납게 자빠진 사내가 사지까지 바르르 떨면서 한참을 격하게 꿈틀거리더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부끄러운지 벌게진 얼굴을 슬며시 들어 올리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렸다.
“아, 너무 굶어서 힘이 다 빠져 버렸구나.”
“……!”
“저기, 미안한데 밥 좀 주시오.”
놀라 휘둥그레져 있던 오복의 얼굴이 이번엔 스산한 빛으로 물들었다.
거지 같은 몰골로 담을 타고 넘어온 주제에 사내는 어느새 제 안방인 양 아예 편안히 모로 드러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척 받친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또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이틀이나 굶었더니 정신이 다 혼미해서 그렇소. 이런 정신으로는 볼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게 아니오?”
“흥!”
“안 주시면 예서 소리를 지르겠소.”
“뭐, 뭐예요?”
“어허, 이것 참 수상하구나. 흠흠, 다 늦은 밤에 과년한 처자가 사내를 몰래 불러들여 무슨 짓을 하려 하였을꼬. 설마, 이런 짓? 저런 짓? 아니! 그 보따리는 또 뭐지? 설마 야반도주를 하려고?”
“쉿! 쉬잇!”
난데없는 지적에 오복은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안고 있던 보따리를 얼른 뒤로 감추었다. 그러고는 혹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 봐 황급히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난입해서 자리 깔고 누운 저 거지 한 마리 말고는. 확인하는 순간 보스스 안도의 한숨이 쏟아졌다.
담벼락 아래에서 헤매다 갑작스레 낯선 이와 마주치는 바람에 잠깐 나갔던 넋도 그제야 슬슬 돌아왔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상황을 잊은 채 예서 고함이라도 질렀다면 정말 어쩔 뻔했단 말인가.
“보셔요.”
조금 늦었지만 어쨌거나 간신히 상황 파악도 되었겠다, 오복은 쌍심지를 켜고 사내를 홱 돌아보면서 나직이 이를 갈았다.
“거지 아니라 하더니!”
“아니오. 다시 말하지만, 과객이오. 그나저나 밥 아직 멀었소? 보아하니, 그쪽도 오늘 밤 꽤 바쁜 일이 예정되어 있는 것 같소이다만.”
오복은 잠시 갈등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녀에게 바쁜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헌데, 단단히 작심을 한 것이 무색하게끔 미처 담을 넘기도 전에 예고도 없이 웬 거지와 마주치더니 그 거지가 저보다 먼저 담을 타고, 그것으로 모자라 밥까지 요구하고 나오자 속에서 불같은 열기가 올라왔다. 튈 땐 튀더라도 저 거지 같은 인간은 잡아 놓고 튀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민스러울 정도였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발각될지도 모르는데…….”
그녀의 갈등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거지 사내가 또 얄밉게 훈수를 두었다. 오복의 어깨가 어쩔 수 없이 푹 내려앉았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 상황이 그녀에게 더 불리하다는 점만은 거의 사실처럼 보였다. 그는 잡혀도 어차피 거지이므로 그냥 도로 내쳐지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그녀는 저 빼고 이 집 안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도 모르는 몹쓸 년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오복은 또 하는 수 없이 입을 댓 발이나 내민 채 부엌으로 가 주섬주섬 상을 차려 내왔던 것이다.
찬밥에 소채가 전부인 그 상을 사내는 아주 반갑게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정말 사흘 굶은 거지처럼 허겁지겁 쓸어 먹더니 거하게 트림까지 하고 나서야 살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기 시작한 건 그 한숨이 다 꺼지기도 전이었다.
“수수하구만.”
“뭐, 뭐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대의 생긴 모습이 마치 털 빠진 약병아리처럼 그다지 볼품이 없다는 말이외다.”
“내, 내가 그리 어여쁘게 생기지 않았음은 내가 제일 잘 아니 굳이 가르쳐 주실 것 없습니다.”
“흠, 그거 불행 중 다행이오. 지기(知己)를 행하고 계신다면 인생을 좀 더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 무엇보다 다른 사내가 꼬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평생 안 해도 되겠소이다.”
음? 이것은 칭찬인가, 아니면 놀림인가.
“이자가!”
가뜩이나 심란하고 속상하여 죽을 지경인데 이제는 지나가던 거지에게조차 놀림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성이 난 오복은 이를 앙다물고 야무지게 손을 들었다.
짝!
경쾌한 소음과 함께 사내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어이쿠!”
예상치 못한 봉변이었는지 사내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얼굴 한쪽을 부여잡은 채 놀라고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삐죽 돌아보고 있었다. 팔짝팔짝 뛰면서 얼얼한 손바닥을 호호 불고 있다가 그 모양을 본 오복의 두 눈썹이 또 하늘 높이 곤두섰다.
“어찌 그리 보셔요? 한 대 더 쳐 달라는 뜻인가요?”
“아, 아니오. 됐소이다. 이미 충분히 아프오. ……잘못했소이다. 한 번만 봐주시오.”
“흥!”
덩치는 산만 한 자가 괜히 연약한 척 구는 모습에 오복은 짐짓 콧방귀를 날려 주고 주섬주섬 빈 상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둥그런 머리 꼭대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사내는 문득 빙긋 웃더니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뒷짐을 턱 지면서 이제껏 들어 본 적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색이 좋고 얼굴빛이 밝으며 눈동자는 흑백이 뚜렷하고 영민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데다 또 얼굴은 갸름하고 입술 모양도 도톰하고 색이 좋으니 과연 총명하고 잘생긴 자손을 낳을 상이로세.”
이건 또 웬 뜬금없는 풍월이지?
잘잘잘 이어지는 요상한 소리에 오복은 상을 치우다 말고 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잘못 맞고 실성을 한 건가 싶어서.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하얀 이를 보기 좋게 드러내고 씩 웃으면서 호쾌하게 말을 이었다.
“그 외 다소 부족한 외양이야 가꾸면 되고 심성도 그만하면 충분하니. 좋소. 흡족하지는 않으나 대강은 봐 줄만 하오. 그럼 난 이만 가 보리다. 아, 밥 잘 먹었소.”
아까는 긴한 볼일이 있다 하더니? 설마, 밥 얻어먹는 일이 그 긴한 볼일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녀가 의심을 품는 순간 사내는 어느새 벌떡 일어나 또 부지런히 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담 위에 척 걸터앉더니 문득 그녀를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투아이목과(投我以木瓜) 보지이경거(報之以瓊쩆) 비보야(匪報也)는 영이위호야(永以爲好也)라.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시경(詩經)이라는 책에 있는 글이라오. 만나서 반가웠소. 그럼, 다시 봅시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내는 그녀를 향해 한 번 씩 웃어 보였다. 이상한 일은 바로 그때 벌어졌다. 휘영청 밝은 달빛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미친 것인지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괜히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차마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가 부끄러워질 만큼 아름다운 사내가 거기에 있었다.
오복은 홀린 듯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칼날처럼 뻗어 올라간 새카만 눈썹과 흑백이 뚜렷한 두 눈동자가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 내었다. 비록 땟국에 절어 있긴 하지만 찬찬히 보니 반듯한 콧날과 선홍빛이 도는 적당히 두툼한 입술, 사내다운 강직한 턱 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지꼴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데다 귀한 빛조차 어려 있는 얼굴이었다. 너절한 차림새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찬밥을 훌훌 퍼먹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지나가던 과객이 아니라 아예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리 잘생긴 사람을 오복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설핏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제법 신기한 물건 보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신이 다 혼미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서 꼬옥 움켜쥐었다.
거지가 귀공자로 보이다니. 못 볼 것을 본 기분이었다. 혹시 헛것을 본 것인가 싶어 오복은 가만히 돌아서서 두 손으로 눈까지 비볐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수줍어하면서 조심조심 담벼락을 향해 돌아섰다.
“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건들거리며 시를 읊조리던 사내는 사라지고 텅 빈 담 위엔 누런 달빛만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꾸, 꿈을 꾸었나?”
슬며시 허벅지를 꼬집어 보면서 오복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어안이 다 벙벙했다. 눈앞에 사내가 쓸어 먹은 밥상이 없었다면 정말로 꿈을 꾸었다 여겼을지도 몰랐다. 어디서 빌어먹던 거지인지, 치고 빠지는 솜씨가 진정 능숙한 자가 아닌가.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빈 담만 바라보다 오복은 슬슬 제정신을 찾았다.
난데없는 일을 겪긴 했지만 어쨌거나 오늘 하려던 일을 마저 해야 했다. 일단, 밥상을 치우고 나서 다시 담을 넘든지 아니면 그냥 대문을 열고 나서리라. 그런 생각과 함께 밥상을 불끈 들어 안으려는데 문득 그녀의 예리한 눈에 낯선 것이 들어왔다.
“이게 뭐지?”
뽀얗게 빛나는 옥가락지 하나가 밥상 위에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빙 둘러 가며 금을 박아 넣은 금입사 백옥가락지였다.

―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아까 전 사내가 읊조리던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가고 있었다.
“밥을 줬더니 옥가락지로 갚는다?”
전혀 수지타산이 안 맞는 계산법이었다.
그냥도 얻어먹을 수 있는 찬밥 한 덩이가 어떻게 쌀 한 가마니를 살 수도 있는 옥가락지와 맞먹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는 그녀에게 한 대 처맞기까지 했는데!
“혹, 밥이 두 그릇이었으면 가락지도 두 개가 되었으려나?”
어리둥절하면서도 귀한 반지가 생겼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오복은 저도 모르게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제껏 이렇게 비싸고 귀한 물건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감마님께서 사용하시는 청자연적을 가끔 닦을 때가 있었는데 그걸 닦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후아, 후아……. 이, 이걸 어쩌지?”
가락지를 두 손으로 고이 받쳐 들고 오복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다. 아무래도 돌려주는 것이 옳은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갑자기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사람을 이 밤중에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다시 올지도 모르니 잘 두었다가 돌려줘야지.”
야반도주를 하려던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고 오복은 슬그머니 반지를 챙겼다. 보따리에 잘 넣어 두었다가 도로 찾으러 오면 내주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 어라? 이게 어디로 갔지?”
밥상을 내오느라 잠시 내려 두었던 보따리가 보이질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뒤꼍을 뱅뱅 맴돌면서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아도 이놈의 보따리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기라도 한 것인지 통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설마!”
더듬이가 고장 난 귀뚜라미처럼 제자리에서만 뱅뱅 맴돌던 그녀의 뇌리로 뒷짐을 지고 공연히 풍월을 지절거리던 사내의 모습이 스쳐 간 건 그야말로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쓸데없이 널찍하던 소맷자락하며 엉금엉금 담벼락을 기어오르던 그자의 품이 유난히 풍성하던 것까지 차례로 떠올랐다.
그즈음에서 오복은 남의 집 담벼락을 타는 자들의 직업을 떠올리고 멍청하게 하늘을 보았다. 거지도 아니고 지나가던 과객도 아닌 그들의 직업은 이래 봬도 군자였다.
“양상군자. 도둑!”
긴한 볼일이 있다 해 놓고 그냥 갈 때부터 어쩐지 수상하다 했더니. 기막힌 한숨과 함께 그녀의 입이 다시 딱 벌어졌다.

봉채 행렬이 도착한 것은 오복의 야반도주 행각이 실패로 돌아간 날로부터 꼭 이틀이 지난 저녁 즈음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저녁 무렵 마을 어귀에 나타난 수레 행렬은 거짓말 조금 보태 십 리나 이어질 것처럼 길었다. 소가 수레를 끌고 장정들이 짐을 지고 또 몇몇 아낙들이 말을 탄 채 뒤를 따르는 등, 근래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많은 혼수품을 김 진사는 웃는 기색 하나 없는, 거의 우울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말로 아씨 대신 시집을 가게 된 오복도 우울했다.
사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날 이후 그녀는 줄곧 우울했다. 누구의 말처럼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털 빠진 약병아리 몰골로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아니 그럴까. 그냥 거사만 실패했어도 우울했을 텐데 거기에 더해 그녀는 눈 뜬 채 보따리도 도둑맞았다.
‘속곳은 거기 다 넣었는데. 그자는 내 속곳을 어쩌려고 들고 튀었을까.’
설마하니 사내가 계집의 속곳을 입으려 들지는 않을 터이지, 하면서도 흡사 볼모를 잡힌 사람처럼 그녀는 거의 안절부절못했다. 속살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치부를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려고 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