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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나이츠 1권 (4화)
Episode 01 에페로 자작가의 위기(1)


1

시간이 흐른 옛 프라인 백작가의 집무실.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설어 보인다. 책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휘장이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프라인 백작가의 휘장이 아닌 다른 휘장이 걸려 있다.
그리고 언제나 프라인 백작이 앉아 있어야 할 책상에는 앳되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이 지긋한 노인도 보인다.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그녀는 매우 심각한 표정이다.
그녀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맺혔고, 예쁜 얼굴에도 어두운 그늘이 어려 있다. 그녀는 서류를 훑어보고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본다.
잔뜩 긴장한 표정인 그녀는 그 노인을 향해 입을 연다.
“어떻게 됐나요? 집사님.”
그 노인은 바로 집사였다. 그녀의 물음에 집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담보가 없는 이상 더는 돈을 융통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집사는 거의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였다.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그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녀의 모습에 집사도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힘없이 대답했다.
“면목 없습니다. 아이린 아가씨.”
“아니에요. 집사께서 열심히 힘써 줬다는 것을 잘 알아요. 단지 제가 힘이 없어서 그렇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저희 에페로 자작가문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집사가 강하게 말을 하며 아이린을 위로했다. 아이린은 씁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달랐다. ‘힘들다. 혼자 짊어지고 가려니 너무나도 힘들다. 누군가, 아니, 오라버니 한분이라도 내 옆에 있다면 힘들지 않을 텐데.’
아이린은 그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쓸쓸한 눈으로 벽에 걸린 휘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부를 상징하는 새가 그려져 있다. 일명 ‘골드리버’라고 하는 황금색 새였다.
골드리버가 그려진 휘장은 한때 왕국 제일의 상인 가문이었던 에페로 자작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군소 상단에게조차 돈을 빌리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휘장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급기야는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게 다 이 영지 때문이야.”
아이린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생각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싼값에 나왔다지만 그때 이 저주받은 영지를 사는 것이 아니었어.’
그녀는 속으로 깊은 후회를 하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다.
태평성대를 유지하던 카론 왕국에 때 아닌 내분이 일어났다. 왕권 다툼과 그에 따른 귀족들의 분열. 이 일로 말미암아 카론 왕국의 국력이 급격히 무너졌다.
단 일 년 사이에 카론 왕국은 귀족들의 전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땅은 신음을 내뱉었고,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고통과 굶주림에 모두들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그에 따라 카론 왕국의 왕권은 점점 약해졌다. 단 하나 유일하게 중립을 외친 프라인 백작가만이 왕권에 힘을 보태 주었다.
그러나 어찌 프라인 백작가의 힘만으로 날뛰는 귀족들을 저지할 수 있겠나. 어찌 하나의 가문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프라인 백작은 홀로 신음을 삼키며 귀족전쟁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적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프라인 백작은 즉시 폐하께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정찰병을 국경으로 급파했다. 그에게서 올라온 보고를 확인한 프라인 백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론 왕국과 인접한 마론 왕국과 하버트 왕국의 대규모 연합군이 이미 국경에 집결한 상태였고, 곧바로 쳐들어올 태세라는 것이다. 게다가 모인 병력 수가 무려 10만에 육박하는 대부대였다.
그 보고를 확인한 프라인 백작은 절망감에 빠졌다. 현재 국경을 지키고 있는 병력이 약 1만 정도 자신이 보유한 병력이 고작 4천.
한창 내부 분열로 국력이 약해진 카론 왕국이기에 아무리 병력을 모집한다고 해도 고작 5만을 넘지 않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왕국을 내줄 수도 없었다.
프라인 백작은 한창 전쟁 중인 귀족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귀족들도 그 사실을 접하고 전쟁을 잠시 휴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보내져 온 병력을 모아 국경으로 향했다.
역시 프라인 백작이 예상한대로 카론 왕국에 남아 있는 병력은 5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프라인 백작은 그 병력으로 국경에서 적들과 당당히 맞서 싸웠다.
그러나 대규모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적들과 이미 내부 전쟁으로 힘이 빠진 병사들로는 적들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두 왕국의 협공과 이미 힘을 다한 기사들과 병사들.
카론 왕국의 멸망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카론 왕국은 두 왕국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파브안 대륙에서 카론 왕국은 저 멀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카론 왕국을 멸망으로 이끈 마론 왕국과 하버트 왕국은 각각 카론 왕국의 땅덩어리를 반으로 나눠 가졌다.
마론 왕국은 남부를, 하버트 왕국은 북부를 차지했다. 땅덩어리가 늘어난 만큼 그들 왕국은 유력한 귀족들에게 차지한 영지를 싸게 팔게 되었다.
에페로 남작가는 그 당시에 이름뿐인 귀족이었다. 다만 상단을 운영해 돈을 벌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그곳에 군수품을 대면서 에페로 남작가는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다.
에페로 남작은 영지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전쟁으로 쌓은 돈으로 영지를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는 국왕과 다섯 공작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치고 영지를 사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이곳 프라인 백작령이었던 것이다.
프라인 백작령의 새로운 주인이 된 에페로 남작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 자신도 어엿한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남작이었던 신분이 자작으로 승격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겹경사의 일로 에페로 자작가는 정말 풍요롭게 생활을 영위했다. 하나 그 기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마도 에페로 자작가에 불행이 찾아온 것이 영지를 사고 불과 1년밖에 안 지났을 때의 일이다.
약 3년 전 에페로 자작가에 찾아온 첫 불행은 바로 에페로 자작 본인이었다.
에페로 자작은 언제나처럼 상단을 꾸려 상행에 나섰다. 그러던 중 산적들이 습격을 해 왔다. 원래 그곳은 산적이 없던 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산적에 의해 에페로 자작은 물품을 지키려다가 사망을 하고 말았다. 물론 가져갔던 물품들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첫 번째 불행이었다.
두 번째는 장남인 아론 에페로였다.
그는 에페로 자작의 대를 이어 작위와 상단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않게 되었다. 그 원인이 독에 의한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지만 어느 누가 독을 풀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아론이 먹은 독이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주변 인물들을 샅샅이 뒤지고 독을 푼 자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독은 푼 자를 찾지 못했다.
하물며 성에 있는 하인과 하녀들은 모두 예전 저택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모두 에페로 자작가문에 오랫동안 함께해 온 그들이기에 조금의 의심도 할 수 없었다.
세 번째 불행은 바로 차남 아크 에페로의 일이다.
아크는 일 년 전 아버지 에페로 자작의 원수를 갚겠다며 기사들을 이끌고 산적들의 은신처를 공격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물며 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설령 포로로 잡혔다고 하면 몸값을 요구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완벽히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에페로 자작가에 남은 사람은 외동딸 아이린 혼자였다. 어린 나이에 에페로 자작가의 모든 대소사를 맡게 된 그녀는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되었다.
하지만 자기가 하지 않는다면 영지와 상단을 지킬 수 없을 뿐더러 에페로 자작가문은 파산에 이르게 되어 또다시 영지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동안 이루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막기 위해 아이란 홀로 고군분투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갔다.
그 이유는 에페로 자작이 벌여 놓은 일들이 워낙 많고, 그것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으면서 전부 빚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영지가 풍비박산이 나기 직전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린은 예전에 알고 지냈던 상단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도 예전에 에페로 자작에게 도움을 받았던 터라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급한 불은 껐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빚은 계속해서 불어났고, 알고 지내던 상단들에게조차 더 이상의 도움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페로 자작가는 서서히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솔직히 도움을 준 상단도 한두 번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만 계속해서는 무리였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현재 에페로 자작가에 처한 현실이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런 식으로 있다가는 몇 달 안에 파산이에요. 그럼 모든 것을 잃게 돼요.”
“…….”
그녀의 말에도 집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집사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집사를 보며 말했다.
“그럼 파산을 하기 전에 영지를 파는 것은 어때요? 그래요, 이 저주받은 영지를 팔아 버려요.”
그녀의 말에 굳게 다문 집사의 입이 열렸다. 그는 힘없이 대답했다.
“지금으로서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리해야겠죠.”
“달리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네,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집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본인 입으로 그것도 이 가문의 집사라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집사 본인 스스로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 영지를 사고 얼마나 기뻐하셨는데요. 저도 영지를 가질 수 있어 좋았는데…….”
아이린은 절로 슬픔이 밀려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이 되고 가슴이 떨려 왔다. 집사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 지금은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영지를 팔아 버리라고 한다.
그렇다고 빚을 계속해서 늘려가며 이 영지를 유지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걱정이 들었다. 과연 이 저주받은 영지를 팔수는 있을까? 사려고 하는 귀족들이 과연 있을까?
아니, 제값을 받을 수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 걱정이 앞섰다.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집사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제값에 팔 수 있을까요? 영지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제값 받기도 힘들 거예요. 그쵸?”
아이린은 아무 감정 없이 말한다고 하지만 내뱉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사실 영지를 받자마자 일 년도 되지 않아 영주가 죽었고, 장남은 병으로 앓아누워 있다. 그리고 차남은 복수를 하러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처럼 저주받은 영지라 불리는 이곳을 어느 누가 비싸게 살려고 하겠는가. 아이린 본인이라고 해도 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무리 싼값에 내놓아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고 신중히 결정할 것이다.
“후우―”
아이린의 한숨이 깊어 갔다.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이린이 이마를 짚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집사는 그런 아이린의 결정에 수긍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집사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아이린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