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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1화
# 프롤로그
혹시,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사실, 나는 어느 부잣집에서 잃어버린 귀한 외동딸이라 언젠가는 진짜 부모님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는 게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해야 할 때, 혹은 너무너무 외로워서 정말로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 보게 되잖아요.
그냥 생각만.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더없이 달콤하고 안전한 그런 상상. 아마도 그래서일 거예요, 누구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은.
“쟨 내 딸이야!”
분위기는 시리다 못해 차라리 뜨거웠다.
“조카겠지. 정혜가 낳은 내 딸이니까. 유전자 검사는 이미 마쳤어. 법원에도 서류를 제출할 예정이야.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유괴범이 되고 싶지 않다면.”
“유괴범이라고? 너, 지금 말 다했어!”
나직하게 두런거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버럭 커지면서 성난 고함 소리가 방문을 타고 넘어와 쨍 하니 귓전을 두드렸다. 혜주는 어깨를 한번 움찔 떨고는 반사적으로 더 작게 몸을 말았다. 평소엔 그녀의 작은 몸 하나 숨기기에도 좁던 책상 밑이 오늘따라 너무 넓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쁜 자식! 칠 년이었어. 칠 년 동안 사귄 여자 버리고 갈 때도 넌 그렇게 냉정했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뭐? 정혜가 살아 있을 땐 왜 안 찾았는데?”
“남녀가 사귀다 헤어지는 일은 흔한 거야. 우리, 서로 합의하에 헤어졌어. 하지만 그때도 애를 가졌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 누가 피해자인지 아직도 구분이 안 돼?”
“피해자? 해고 통보하듯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버렸잖아. 그러곤 한 달 만에 다른 여자랑 결혼한 놈이 피해자?”
“마음은 변하는 거야. 정혜는 다 납득하고 받아들였어. 우린 각자의 길을 간 것뿐이야. 아이 일도 미리 알렸으면 방법을 취했겠지.”
“바, 방법? 너, 너…….”
“왜 놀라지? 뭐, 다른 말이라도 듣길 원했어? 미안하지만 난 그럴 이유가 없어.”
놀랍도록 냉정한 말에 장내엔 잠시 충격 어린 침묵이 내려앉았다. 책상 밑 구석에 처박힌 혜주의 몸이 더 바짝 오그라들었다. 점점 더 짙어지는 불안으로 인해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어서 아이나 내놔.”
“닥쳐! 누가 내주기나 한다고?”
“흥! 내주지 않으면?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마. 이 거지 같은 곳에 살면서 자네가 저 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뭔데? 보나 마나, 대학을 보내기도 힘들겠지. 듣자니, 친자식이 둘이나 더 있다지? 그 애들은 어쩌고? 키우는 동안 그 애들이랑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웃기는 소리. 그래서 오늘이 생일인데도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은 건가?”
“그, 그건…….”
“위선 떨지 말고 이거나 받아. 네 아내가 요구한 거야. 일면식도 없는 나를 찾아와 아이에 대해 알리면서 10억을 요구하더군. 너도 결국 이런 걸 바랐잖아. 안 그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고함 소리가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목이 졸리는 듯한 괴괴한 적막이 찾아와 있었다. 예정된 결말이 서서히 다가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울던 것도 잊은 채 혜주는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친아버지라며 갑자기 찾아온 그 남자 때문에 집 안은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 허름한 빌라 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을 하고 나타난 남자는 그 사실을 강조하듯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채 그렇게 현관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 더러운 곳엔 잠시라도 발을 딛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빨래를 하다 말고 반강제로 끌려나와 마주한 그의 인상은 그토록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그녀를 보던 시선은 또 어떠했던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던 그의 무심한 시선이 아직 선명했다. 희미한 분노로 물든 차고 투미한 눈빛. 그것은 애타게 딸을 찾는 아버지의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대박, 완전 대박! 혜주야, 넌 정말 좋겠다. 진짜 부자아빠가 생겼잖아.”
방문에 코를 박고 있던 혜정 언니의 목소리가 아프게 허파를 찔렀다. 기대에 찬 눈동자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혜주는 자신에게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은 저 밖의 낯선 남자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짐처럼 얹혀사는 형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그런 가족에게서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났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무섭고 떨리고 외로웠다. 엄마가 갑자기 떠났을 때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던 것 같았다.
‘엄마, 엄마, 엄마…….’
애타는 목소리가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1. 그 여자, 그 남자(1)
Que te importa que te ame
Si tu no me quieres ya?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전에 사랑했었다는 게 다 무슨 상관인가요?
El amor que ya ha pasado
No se debe recordar.
이미 지나간 사랑은 기억해선 안 되겠지요.
Fui la ilusion de tu vida
Un dia lejano ya.
먼 옛날 나는 당신의 꿈이었는데
Hoy represento al pasado
No me puedo conformar.
지금은 과거를 의미할 뿐이고
나는 그때와 같아서는 안 되겠지요.
문득 시선을 든 것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누군가의 핸드폰 벨소리 때문이었다. 탱고 선율에 맞춰 절절하게 흐르는 남녀의 목소리가 거의 졸음에 가까운 멍한 정신을 단박에 현실로 되돌린 것이다. 덕분에 꽤 멀리까지 달아났던 생각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생각의 잔재를 털어 버리듯 머리를 한 번 가볍게 털어 주고 혜주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거울로 시선을 던졌다. 등 뒤로 단정하게 늘어뜨린 긴 생머리, 한 듯 만 듯 한 느낌을 주는 엷은 화장, 깨끗하게 다듬은 맨손톱, 그리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굽의 구두와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원피스 정장.
“좋아, 완벽해.”
인형처럼 서 있는 그녀를 두고 스타일리스트가 짐짓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모든 것이 정말 완벽하게 그분의 취향이에요.”
“그래?”
“네, 사모님. 원래 그분이 과하게 꾸미는 걸 싫어하셔서 주로 단정한 이미지를 가진 분들하고만 만나 오셨거든요. 믿으세요. 이번엔 반드시 통할 거예요.”
말도 안 된다.
별을 따려면 하늘을 보아야 하고 통하고 싶으면 일단 눈빛이 마주쳐야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게 지금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바람맞은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무슨 자신감의 발로인지 벌써 들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두 여인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혜주는 속으로 쓰린 한숨을 삼켰다. 차마 소리 내어 말은 못 하지만 상황이 점점 더 참담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휴우, 오늘은 꼭 결론이 났으면 좋겠는데.’
마음은 굴뚝 같은데 그러면 뭣할까. 아무리 목을 빼고 기다려도 상대가 워낙 비싸고 고귀한 양반이라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고 있는 것을. 내심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혜주는 지난 시간들을 차례차례 반추했다.
첫날은 가볍게 2시간 정도 기다렸던 것 같다.
뭣도 모르고 잔뜩 차리고 나간 자리였다. 그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시간은 착착 지나고……. 결국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돌아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남자는 아예 나올 생각이 없었다더라. 그쪽 누군가가 그의 바쁜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쪽의 말만 듣고 대강 잡은 약속이었다나?
두 번째는 반나절을 기다리다 바람맞았다.
이번에는 꼭 나올 거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독박을 쓴 케이스였다. 주말에 출근을 했다는 사실도 어이없어 죽겠는데 회의만 끝내고 온다던 사람이 그놈의 회의가 자꾸자꾸 길어지는 바람에 결국은 회사에서 밤을 지새울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회사의 명운이 갈리는 비상 상황이었단다. 너무 설득력 있는 이유라 차마 화를 낼 생각도 못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지 간에, 그렇게 두 번이나 연속으로 바람을 맞아 놓으면 누구라도 화가 나서 이런 선 따위는 당장 집어치우려고 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혜주도 그러고만 싶었다. 선을 보고 다니기엔 아직 어린 나이인 데다 결혼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착착 잘만 돌아가 주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왜 생기겠나.
“잘 해.”
약속 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사모님이 말했다.
“그깟 바람 몇 번 맞았다고 버릇없이 굴어선 안 돼. 이건 단순한 맞선이 아니라 사업이니까.”
“네.”
“너에게도 그리 나쁜 자리는 아니야. 아니, 잘만 된다면 정말 최고로 좋은 자리가 될 수도 있겠지. 누가 뭐래도 그 남자는 ‘후계자’니까.”
시기 어린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신은 갖지 못한 것을 그 남자는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녀가 질투하는 대상은 아마도 그 남자를 낳은 여자 쪽일 것이다. ‘후계자’를 낳은 어머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오랜 이상형이 아니었던가.
“믿지 않겠지만, 많이 고르고 고른 자리야. 조건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별 볼 일 없는 너에 비하면 과분할 정도로 괜찮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하지 마.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네.”
“……그래.”
경멸인가, 혐오인가.
골격이 선명한, 화려한 이목구비 위로 빠르게 스쳐 가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고도 혜주는 짐짓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날카로운 시선이 스윽 훑고 지나갔다. ‘흥’ 하는 나직한 비웃음 한 조각이 짧은 순간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잘 견뎌 냈다.
“다 왔구나. 가 봐.”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사모님.”
꾸벅 고개까지 숙여 보이고 혜주는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마침 나와 있던 사람의 안내를 받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약속 장소로 돌진했다. 그녀도 안다. 지금 자신이 흡사 쇼생크에서 탈출하는 죄수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또 뭘 어쩔 것인가. 매번 봐도 매번 어색한 사람과 이 마당에 맞선을 빙자한 사업을 주제로 수다를 떨 수도 없지 않나. 서로에게 별로 즐거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 원래부터 정략결혼은 그냥 결혼이 아니라 비즈니스라고들 하더라.”
세 번째라서 그런지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카페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 남자는 갑, 나는 을이잖아.”
그래서 구석구석 그 남자의 취향대로 꾸미고 나선 길이었다. 간택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나선 여러 세자빈 후보 중 하나처럼 말이다. 아니, 세자빈은 차라리 낫다. 세자와의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아도 7살 이상은 안 날 테니.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아저씨에게 간택되길 기다려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까?”
혜주의 얼굴이 어쩔 수 없이 시무룩해졌다.
1화
# 프롤로그
혹시,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사실, 나는 어느 부잣집에서 잃어버린 귀한 외동딸이라 언젠가는 진짜 부모님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는 게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해야 할 때, 혹은 너무너무 외로워서 정말로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 보게 되잖아요.
그냥 생각만.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더없이 달콤하고 안전한 그런 상상. 아마도 그래서일 거예요, 누구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은.
“쟨 내 딸이야!”
분위기는 시리다 못해 차라리 뜨거웠다.
“조카겠지. 정혜가 낳은 내 딸이니까. 유전자 검사는 이미 마쳤어. 법원에도 서류를 제출할 예정이야.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유괴범이 되고 싶지 않다면.”
“유괴범이라고? 너, 지금 말 다했어!”
나직하게 두런거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버럭 커지면서 성난 고함 소리가 방문을 타고 넘어와 쨍 하니 귓전을 두드렸다. 혜주는 어깨를 한번 움찔 떨고는 반사적으로 더 작게 몸을 말았다. 평소엔 그녀의 작은 몸 하나 숨기기에도 좁던 책상 밑이 오늘따라 너무 넓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쁜 자식! 칠 년이었어. 칠 년 동안 사귄 여자 버리고 갈 때도 넌 그렇게 냉정했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뭐? 정혜가 살아 있을 땐 왜 안 찾았는데?”
“남녀가 사귀다 헤어지는 일은 흔한 거야. 우리, 서로 합의하에 헤어졌어. 하지만 그때도 애를 가졌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 누가 피해자인지 아직도 구분이 안 돼?”
“피해자? 해고 통보하듯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버렸잖아. 그러곤 한 달 만에 다른 여자랑 결혼한 놈이 피해자?”
“마음은 변하는 거야. 정혜는 다 납득하고 받아들였어. 우린 각자의 길을 간 것뿐이야. 아이 일도 미리 알렸으면 방법을 취했겠지.”
“바, 방법? 너, 너…….”
“왜 놀라지? 뭐, 다른 말이라도 듣길 원했어? 미안하지만 난 그럴 이유가 없어.”
놀랍도록 냉정한 말에 장내엔 잠시 충격 어린 침묵이 내려앉았다. 책상 밑 구석에 처박힌 혜주의 몸이 더 바짝 오그라들었다. 점점 더 짙어지는 불안으로 인해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어서 아이나 내놔.”
“닥쳐! 누가 내주기나 한다고?”
“흥! 내주지 않으면?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마. 이 거지 같은 곳에 살면서 자네가 저 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뭔데? 보나 마나, 대학을 보내기도 힘들겠지. 듣자니, 친자식이 둘이나 더 있다지? 그 애들은 어쩌고? 키우는 동안 그 애들이랑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웃기는 소리. 그래서 오늘이 생일인데도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은 건가?”
“그, 그건…….”
“위선 떨지 말고 이거나 받아. 네 아내가 요구한 거야. 일면식도 없는 나를 찾아와 아이에 대해 알리면서 10억을 요구하더군. 너도 결국 이런 걸 바랐잖아. 안 그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고함 소리가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목이 졸리는 듯한 괴괴한 적막이 찾아와 있었다. 예정된 결말이 서서히 다가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울던 것도 잊은 채 혜주는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친아버지라며 갑자기 찾아온 그 남자 때문에 집 안은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 허름한 빌라 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을 하고 나타난 남자는 그 사실을 강조하듯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채 그렇게 현관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 더러운 곳엔 잠시라도 발을 딛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빨래를 하다 말고 반강제로 끌려나와 마주한 그의 인상은 그토록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그녀를 보던 시선은 또 어떠했던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던 그의 무심한 시선이 아직 선명했다. 희미한 분노로 물든 차고 투미한 눈빛. 그것은 애타게 딸을 찾는 아버지의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대박, 완전 대박! 혜주야, 넌 정말 좋겠다. 진짜 부자아빠가 생겼잖아.”
방문에 코를 박고 있던 혜정 언니의 목소리가 아프게 허파를 찔렀다. 기대에 찬 눈동자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혜주는 자신에게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은 저 밖의 낯선 남자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짐처럼 얹혀사는 형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그런 가족에게서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났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무섭고 떨리고 외로웠다. 엄마가 갑자기 떠났을 때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던 것 같았다.
‘엄마, 엄마, 엄마…….’
애타는 목소리가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1. 그 여자, 그 남자(1)
Que te importa que te ame
Si tu no me quieres ya?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전에 사랑했었다는 게 다 무슨 상관인가요?
El amor que ya ha pasado
No se debe recordar.
이미 지나간 사랑은 기억해선 안 되겠지요.
Fui la ilusion de tu vida
Un dia lejano ya.
먼 옛날 나는 당신의 꿈이었는데
Hoy represento al pasado
No me puedo conformar.
지금은 과거를 의미할 뿐이고
나는 그때와 같아서는 안 되겠지요.
문득 시선을 든 것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누군가의 핸드폰 벨소리 때문이었다. 탱고 선율에 맞춰 절절하게 흐르는 남녀의 목소리가 거의 졸음에 가까운 멍한 정신을 단박에 현실로 되돌린 것이다. 덕분에 꽤 멀리까지 달아났던 생각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생각의 잔재를 털어 버리듯 머리를 한 번 가볍게 털어 주고 혜주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거울로 시선을 던졌다. 등 뒤로 단정하게 늘어뜨린 긴 생머리, 한 듯 만 듯 한 느낌을 주는 엷은 화장, 깨끗하게 다듬은 맨손톱, 그리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굽의 구두와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원피스 정장.
“좋아, 완벽해.”
인형처럼 서 있는 그녀를 두고 스타일리스트가 짐짓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모든 것이 정말 완벽하게 그분의 취향이에요.”
“그래?”
“네, 사모님. 원래 그분이 과하게 꾸미는 걸 싫어하셔서 주로 단정한 이미지를 가진 분들하고만 만나 오셨거든요. 믿으세요. 이번엔 반드시 통할 거예요.”
말도 안 된다.
별을 따려면 하늘을 보아야 하고 통하고 싶으면 일단 눈빛이 마주쳐야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게 지금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바람맞은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무슨 자신감의 발로인지 벌써 들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두 여인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혜주는 속으로 쓰린 한숨을 삼켰다. 차마 소리 내어 말은 못 하지만 상황이 점점 더 참담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휴우, 오늘은 꼭 결론이 났으면 좋겠는데.’
마음은 굴뚝 같은데 그러면 뭣할까. 아무리 목을 빼고 기다려도 상대가 워낙 비싸고 고귀한 양반이라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고 있는 것을. 내심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혜주는 지난 시간들을 차례차례 반추했다.
첫날은 가볍게 2시간 정도 기다렸던 것 같다.
뭣도 모르고 잔뜩 차리고 나간 자리였다. 그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시간은 착착 지나고……. 결국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돌아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남자는 아예 나올 생각이 없었다더라. 그쪽 누군가가 그의 바쁜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쪽의 말만 듣고 대강 잡은 약속이었다나?
두 번째는 반나절을 기다리다 바람맞았다.
이번에는 꼭 나올 거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독박을 쓴 케이스였다. 주말에 출근을 했다는 사실도 어이없어 죽겠는데 회의만 끝내고 온다던 사람이 그놈의 회의가 자꾸자꾸 길어지는 바람에 결국은 회사에서 밤을 지새울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회사의 명운이 갈리는 비상 상황이었단다. 너무 설득력 있는 이유라 차마 화를 낼 생각도 못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지 간에, 그렇게 두 번이나 연속으로 바람을 맞아 놓으면 누구라도 화가 나서 이런 선 따위는 당장 집어치우려고 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혜주도 그러고만 싶었다. 선을 보고 다니기엔 아직 어린 나이인 데다 결혼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착착 잘만 돌아가 주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왜 생기겠나.
“잘 해.”
약속 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사모님이 말했다.
“그깟 바람 몇 번 맞았다고 버릇없이 굴어선 안 돼. 이건 단순한 맞선이 아니라 사업이니까.”
“네.”
“너에게도 그리 나쁜 자리는 아니야. 아니, 잘만 된다면 정말 최고로 좋은 자리가 될 수도 있겠지. 누가 뭐래도 그 남자는 ‘후계자’니까.”
시기 어린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신은 갖지 못한 것을 그 남자는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녀가 질투하는 대상은 아마도 그 남자를 낳은 여자 쪽일 것이다. ‘후계자’를 낳은 어머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오랜 이상형이 아니었던가.
“믿지 않겠지만, 많이 고르고 고른 자리야. 조건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별 볼 일 없는 너에 비하면 과분할 정도로 괜찮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하지 마.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네.”
“……그래.”
경멸인가, 혐오인가.
골격이 선명한, 화려한 이목구비 위로 빠르게 스쳐 가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고도 혜주는 짐짓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날카로운 시선이 스윽 훑고 지나갔다. ‘흥’ 하는 나직한 비웃음 한 조각이 짧은 순간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잘 견뎌 냈다.
“다 왔구나. 가 봐.”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사모님.”
꾸벅 고개까지 숙여 보이고 혜주는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마침 나와 있던 사람의 안내를 받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약속 장소로 돌진했다. 그녀도 안다. 지금 자신이 흡사 쇼생크에서 탈출하는 죄수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또 뭘 어쩔 것인가. 매번 봐도 매번 어색한 사람과 이 마당에 맞선을 빙자한 사업을 주제로 수다를 떨 수도 없지 않나. 서로에게 별로 즐거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 원래부터 정략결혼은 그냥 결혼이 아니라 비즈니스라고들 하더라.”
세 번째라서 그런지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카페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 남자는 갑, 나는 을이잖아.”
그래서 구석구석 그 남자의 취향대로 꾸미고 나선 길이었다. 간택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나선 여러 세자빈 후보 중 하나처럼 말이다. 아니, 세자빈은 차라리 낫다. 세자와의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아도 7살 이상은 안 날 테니.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아저씨에게 간택되길 기다려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까?”
혜주의 얼굴이 어쩔 수 없이 시무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