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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그 여자, 그 남자(2)
결혼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에게도 일단은 꿈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꿈 어디에도 여덟 살 연상의 아저씨와 결혼한다는 대목은 절대로 없었다. 사모님과의 거래는 둘째 치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정략결혼이라든지, 갑과 을이라든지 하는 부분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편안한 소파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봤다. 눈칫밥 인생 어언 15년. 그녀는 누구보다 예민한 눈치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직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소한 이유로 계속 바람을 맞히는 것으로 보아 상대도 이 결혼을 그다지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당사자들을 뺀 나머지 관계자들만 예의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 하는 중인 것이다.
“멍청한 자식, 제대로 된 남자라면 확 엎어 버릴 줄 아는 강단도 있어야지. 바보처럼 계속 바람만 맞힐 게 아니라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란 말이야. 나는 ‘을’이라서 흔한 거부권도 없는데.”
누가 들을세라 나직한 목소리로 울분을 토하며 그녀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계속 바람만 맞아 가며 마음을 졸이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퇴짜를 맞는 것이 백번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불공정 계약과도 같은 사모님과의 약속을 뒤로하고 상처받은 영혼인 척 눈물을 뿌리며 떠나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후우, 언제쯤 이 일이 끝날까?”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자의든 타의든 결혼이 파투 나 버리면 사모님에게는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이제 곧 졸업이니까. 처음부터 학교만 졸업하면 서로 다시 볼 일이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시기가 딱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강 혼자서 벌어먹고 살 만한 나이가 되면 사모님 가족의 후원도 바로 끊어지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동안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 야무지게 돈을 모아 둔 것이 아닌가.
“좋아. 기숙사에서 나오면 지낼 방을 먼저 구해 보자.”
방 구할 생각을 하려니 마침 사모님이 ‘아무리 꾸며도 없는 티가 난다’며 구입해 넌지시 옆구리에 끼워 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묵직하고 반질반질한 것이 ‘나 원래 좀 비싼 가방’이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이 그랬다. 이 작은 가방은 그녀가 평생 동안 야무지게 모은 전 재산보다 더 비쌌다. 그래서 혹시 흠집이라도 날까 봐 지금도 가장 안전한 자리에 곱게 모셔 두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도 부럽지 않아. 전 재산을 팔아도 이런 가방 하나 못 사는 인생이지만 마음 편히 살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보다는 괜찮을 거야.”
스스로 한 말에 깊은 동감을 표하듯 혜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 비싼 집에서 비싼 가방 들고 누군가가 부리는 인형처럼 사는 인생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말고,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기숙사 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뒤엉켜 사는 것 말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꽤 간절하다. 작지만 아담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만들고 싶은 옷을 마음껏 만들면서 사는 것이 그녀의 오랜 꿈이었다. 그래서 이 당치도 않은 정략결혼 얘기가 부디 저쪽의 거절로 끝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오늘도 나오지 마라, 제발 나오지 마라. 후우,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에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일이나 하자.”
차를 골라 한 잔 시켜 놓은 후 혜주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곱게 천을 걸어 놓은 수틀과 바늘을 꺼내 잡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요즘 그녀는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배운 천연옷감 만들기와 염색기법으로 한복을 응용한 이브닝드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밑단에 들어갈 꽃 자수였다.
작업한 시일이 꽤 되어서 드레스는 어느 정도 모양이 완성되었지만 모델에게 입혀 놓고 이곳저곳 다시 사이즈를 맞춘 다음 무대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서 요즘엔 그저 앉기만 하면 바늘을 드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녀는 곧 익숙한 동작으로 바늘귀에 실을 걸고 차분한 시선으로 수틀을 살피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 하루만 더 하면 다 끝나겠어. 역시 시간을 보내기엔 일이 최고지.”
스스로의 준비성에 만족하며 혜주는 한껏 미소 지었다.
지난번, 반나절 만에 바람맞았을 때를 거울삼아 이번엔 아예 일거리를 준비해 왔으니 이제는 한나절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나름 뿌듯해하면서 그녀는 잘 세팅해 빗어 내린 머리까지 대강 틀어 올리고 바로 일에 빠져들어 갔다.
빨간 실, 파란 실, 노랑 실을 차례로 걸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같은 동작의 무한반복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녀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댔다. 그 결과, 바늘이 지날 때마다 직접 물을 들인 풀색 천 위에 예쁜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나고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태경의 얼굴에 문득 짜증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누군데?”
“태하.”
“그 녀석이 왜?”
“어딜 좀 대신 가 달라는데?”
“와아, 간도 큰 새끼. 저보다 더 바쁜 형님에게 잘도 그런 부탁을 하는구나.”
“그러게 넌 왜 쓸모없는 남동생을 그리도 오냐오냐 키운 거냐? 몽둥이는 뒀다가 뭣하고?”
형제 많은 집안의 장남다운 동휘의 발언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남이라는 입장은 다들 비슷해서 남의 동생은 물론이고 제 동생들의 안녕 따위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동시에 당연하게도 태경 또한 그들과 별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다만, 놈들과는 사정이 조금, 아주 조금 다를 뿐.
“글쎄, 몽둥이 정도로 말을 들을 놈 같았으면 써도 벌써 쓰지 않았을까?”
“하긴, 네 동생은 태하지.”
“태하 같은 놈이 동생이면…… 하는 수 없는 거지, 뭐.”
“동구보다 더 불쌍한 자식.”
“젠장.”
회의 어린 시선이 잠시 친구 놈들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막 끊어진 핸드폰을 노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 녀석은 평소 버릇대로 또 제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딱 끊어 버린 뒤였다. 더구나 오늘은 아프다는 핑계까지 있으니 다시 걸어 봤자 전화를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은 도로 일어서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먼저 일어난다.”
“어? 가게?”
“응. 어쨌거나 일은 벌어졌으니 수습을 해야지.”
“야, 그래도 밥은 먹고 가라. 조금 늦게 간다고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굶고 다니냐?”
“세상이 멸망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세상은 아직 멀쩡하고 동생은 사고를 쳤으니 문제인 거야.”
그 말과 함께 벗어 두었던 재킷을 도로 걸치고 간다는 말도 없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여어! 다들 모여 있었구나.”
결혼 준비를 한답시고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승후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센티한 가을바람까지 거느린 채 싱글거리는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순간,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멤버들의 얼굴 위로 깊은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더러운 커플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
“저 자식, 좋아 죽는 거 봐라. 그사이 얼굴이 아주 확 피었구먼.”
“아, 입맛 떨어졌어.”
“난 갑자기 배가 아파 오는 것 같다.”
“왜 왔냐? 장가간다고 자랑하러 왔냐?”
시기 어린 모두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강한 놈답게 승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뿐.
“우리 재아한테 결혼 안 한 친구들이 제법 된다지, 아마?”
“……!”
“……!”
“다들 예쁘다던데. 다리를 놔줘, 말아?”
그 순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모두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언제 왁자하게 떠들었었냐고 말하듯 그 넓은 홀에 흡사 죽음 같은 막막한 침묵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갑자기 동휘가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까지 벌리고 미친 소처럼 놈에게로 달려드는 거다. 그러곤 격하게 꽉 끌어안으면서 소리쳤다.
“보고 싶었다, 친구!”
“잘 왔네, 동지.”
“안 그래도 연락을 해 보려고 했어. 난 예전부터 네 결혼식에는 꼭 가고 싶었던 거 있지?”
“난 출장도 미루고 휴가를 내서라도 간다.”
간사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라더니.
“쯧, 저 자식들은 어째 변하지를 않냐.”
허탈한 한마디와 함께 재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곧 다다다 달려가 모두를 밀어내고 저도 승후의 등짝에 넙죽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하여간에,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째서 이 클럽엔 정상적인 놈이 없는 걸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태경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승후가 넌지시 눈인사를 보냈다.
“벌써 가는 거냐?”
“그렇게 됐다.”
“밥 먹을 시간도 없고?”
“태하가 사고를 쳐서.”
“아아.”
나직한 한숨과 함께 승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자식 동생은 그 이름도 유명한 사고뭉치 최태하였지. 역시 하늘은 공평하다. 언제나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귀족적인 외모부터 시작해 빈틈없는 성격과 인품, 유난히 끈끈한 정이 넘치는 완벽한 가족, 그리고 거대 그룹의 후계자라는 신분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놈에게 이 동네의 재앙 같은 녀석을 동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래, 왕후장상이면 뭘 하겠냐. 딸린 혹 건사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인데.”
남 말 할 처지도 아니면서 승후는 태경을 향해 치미는 진득한 감정의 파도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동정이라거나, 동정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였다, 이 장남클럽의 불온한(?) 무리들을 위해 준비해 온 물건을 통째로 덜컥 내민 것은.
“이거라도 가져가라.”
“뭔데?”
“초콜릿. 우리 호텔 파티쉐들의 교육을 맡은 파리의 제과장인인 장이 하나하나 공을 들여 만든 작품들이지.”
정말이다. 장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그가 미리 경험해 봐서 잘 안다. 무심히 받아 온 초콜릿 속에 69도가 넘는 압생트가 들어가 있는 줄을 누가 알았을까마는, 덕분에 그는 재아에게 덮쳐지는 아주 끝내주는 경험을 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두 볼이 붉어지면서 몸뚱이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였다. 그러니 이번 작품도 아주 환상적일 게 틀림없었다. 결혼 선물이라고만 해서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그도 정확히 모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먹고 죽을 물건은 아니겠지. 장이 그렇게까지 독한 인간은 아닐 거야. ……아마도.’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어쨌거나 승후는 웃었다. 이건 분명히 인간 최태경의 인생사에 큰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경이 상자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래도 빈속으로 가는 것보단 낫잖아. 가뜩이나 냉정한 면상을 한 놈이 배고프다고 더 살벌하게 굴면 상대가 얼마나 무서워하겠냐.”
아니, 그렇게까지 예의 없는 인간성은 아닌데.
부인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도 태경은 결국 상자를 받아 들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강승후라는 놈은 일단 성격이 나쁘고 그 못지않게 고집도 셌던 것이다.
“몸에 좋은 거니까 남 주지 말고 혼자 먹어라. 꼭꼭 씹어 먹어.”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승후가 길게 소리쳤다.
“몸에 좋다고?”
고작 초콜릿이 몸에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저런 소리일까.
“아무래도 수상한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강승후라는 이유만으로 까닭 없이 등골이 오싹해졌다. 원래 성격 더러운 놈치고 친절한 놈 없는 법인데 문득 돌아보니 오늘따라 놈이 지나치게 친절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절대로 먹지 말아야겠군.”
어쩌면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심히 중얼거리며 그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살롱(salon)의 눈치 빠른 집사가 미리 연락을 해 두었는지 정문 앞에 그의 차가 얌전히 대기해 있었다. 마침 일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그에, 모처럼 직접 차를 끌고 나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뜻하지 않게 이런 귀찮은 일이 찾아오고 말았다. 운전석에 올라타면서 태경은 사이드미러 속의 저를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냐오냐하기는 누가. 하필이면 동생이라고는 그놈 하나뿐이어서 차마 죽이지 못하는 것뿐이지.”
깎아 만든 듯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1. 그 여자, 그 남자(2)
결혼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에게도 일단은 꿈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꿈 어디에도 여덟 살 연상의 아저씨와 결혼한다는 대목은 절대로 없었다. 사모님과의 거래는 둘째 치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정략결혼이라든지, 갑과 을이라든지 하는 부분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편안한 소파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봤다. 눈칫밥 인생 어언 15년. 그녀는 누구보다 예민한 눈치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직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소한 이유로 계속 바람을 맞히는 것으로 보아 상대도 이 결혼을 그다지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당사자들을 뺀 나머지 관계자들만 예의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 하는 중인 것이다.
“멍청한 자식, 제대로 된 남자라면 확 엎어 버릴 줄 아는 강단도 있어야지. 바보처럼 계속 바람만 맞힐 게 아니라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란 말이야. 나는 ‘을’이라서 흔한 거부권도 없는데.”
누가 들을세라 나직한 목소리로 울분을 토하며 그녀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계속 바람만 맞아 가며 마음을 졸이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퇴짜를 맞는 것이 백번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불공정 계약과도 같은 사모님과의 약속을 뒤로하고 상처받은 영혼인 척 눈물을 뿌리며 떠나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후우, 언제쯤 이 일이 끝날까?”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자의든 타의든 결혼이 파투 나 버리면 사모님에게는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이제 곧 졸업이니까. 처음부터 학교만 졸업하면 서로 다시 볼 일이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시기가 딱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강 혼자서 벌어먹고 살 만한 나이가 되면 사모님 가족의 후원도 바로 끊어지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동안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 야무지게 돈을 모아 둔 것이 아닌가.
“좋아. 기숙사에서 나오면 지낼 방을 먼저 구해 보자.”
방 구할 생각을 하려니 마침 사모님이 ‘아무리 꾸며도 없는 티가 난다’며 구입해 넌지시 옆구리에 끼워 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묵직하고 반질반질한 것이 ‘나 원래 좀 비싼 가방’이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이 그랬다. 이 작은 가방은 그녀가 평생 동안 야무지게 모은 전 재산보다 더 비쌌다. 그래서 혹시 흠집이라도 날까 봐 지금도 가장 안전한 자리에 곱게 모셔 두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도 부럽지 않아. 전 재산을 팔아도 이런 가방 하나 못 사는 인생이지만 마음 편히 살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보다는 괜찮을 거야.”
스스로 한 말에 깊은 동감을 표하듯 혜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 비싼 집에서 비싼 가방 들고 누군가가 부리는 인형처럼 사는 인생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말고,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기숙사 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뒤엉켜 사는 것 말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꽤 간절하다. 작지만 아담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만들고 싶은 옷을 마음껏 만들면서 사는 것이 그녀의 오랜 꿈이었다. 그래서 이 당치도 않은 정략결혼 얘기가 부디 저쪽의 거절로 끝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오늘도 나오지 마라, 제발 나오지 마라. 후우,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에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일이나 하자.”
차를 골라 한 잔 시켜 놓은 후 혜주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곱게 천을 걸어 놓은 수틀과 바늘을 꺼내 잡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요즘 그녀는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배운 천연옷감 만들기와 염색기법으로 한복을 응용한 이브닝드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밑단에 들어갈 꽃 자수였다.
작업한 시일이 꽤 되어서 드레스는 어느 정도 모양이 완성되었지만 모델에게 입혀 놓고 이곳저곳 다시 사이즈를 맞춘 다음 무대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서 요즘엔 그저 앉기만 하면 바늘을 드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녀는 곧 익숙한 동작으로 바늘귀에 실을 걸고 차분한 시선으로 수틀을 살피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 하루만 더 하면 다 끝나겠어. 역시 시간을 보내기엔 일이 최고지.”
스스로의 준비성에 만족하며 혜주는 한껏 미소 지었다.
지난번, 반나절 만에 바람맞았을 때를 거울삼아 이번엔 아예 일거리를 준비해 왔으니 이제는 한나절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나름 뿌듯해하면서 그녀는 잘 세팅해 빗어 내린 머리까지 대강 틀어 올리고 바로 일에 빠져들어 갔다.
빨간 실, 파란 실, 노랑 실을 차례로 걸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같은 동작의 무한반복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녀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댔다. 그 결과, 바늘이 지날 때마다 직접 물을 들인 풀색 천 위에 예쁜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나고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태경의 얼굴에 문득 짜증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누군데?”
“태하.”
“그 녀석이 왜?”
“어딜 좀 대신 가 달라는데?”
“와아, 간도 큰 새끼. 저보다 더 바쁜 형님에게 잘도 그런 부탁을 하는구나.”
“그러게 넌 왜 쓸모없는 남동생을 그리도 오냐오냐 키운 거냐? 몽둥이는 뒀다가 뭣하고?”
형제 많은 집안의 장남다운 동휘의 발언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남이라는 입장은 다들 비슷해서 남의 동생은 물론이고 제 동생들의 안녕 따위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동시에 당연하게도 태경 또한 그들과 별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다만, 놈들과는 사정이 조금, 아주 조금 다를 뿐.
“글쎄, 몽둥이 정도로 말을 들을 놈 같았으면 써도 벌써 쓰지 않았을까?”
“하긴, 네 동생은 태하지.”
“태하 같은 놈이 동생이면…… 하는 수 없는 거지, 뭐.”
“동구보다 더 불쌍한 자식.”
“젠장.”
회의 어린 시선이 잠시 친구 놈들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막 끊어진 핸드폰을 노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 녀석은 평소 버릇대로 또 제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딱 끊어 버린 뒤였다. 더구나 오늘은 아프다는 핑계까지 있으니 다시 걸어 봤자 전화를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은 도로 일어서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먼저 일어난다.”
“어? 가게?”
“응. 어쨌거나 일은 벌어졌으니 수습을 해야지.”
“야, 그래도 밥은 먹고 가라. 조금 늦게 간다고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굶고 다니냐?”
“세상이 멸망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세상은 아직 멀쩡하고 동생은 사고를 쳤으니 문제인 거야.”
그 말과 함께 벗어 두었던 재킷을 도로 걸치고 간다는 말도 없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여어! 다들 모여 있었구나.”
결혼 준비를 한답시고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승후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센티한 가을바람까지 거느린 채 싱글거리는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순간,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멤버들의 얼굴 위로 깊은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더러운 커플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
“저 자식, 좋아 죽는 거 봐라. 그사이 얼굴이 아주 확 피었구먼.”
“아, 입맛 떨어졌어.”
“난 갑자기 배가 아파 오는 것 같다.”
“왜 왔냐? 장가간다고 자랑하러 왔냐?”
시기 어린 모두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강한 놈답게 승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뿐.
“우리 재아한테 결혼 안 한 친구들이 제법 된다지, 아마?”
“……!”
“……!”
“다들 예쁘다던데. 다리를 놔줘, 말아?”
그 순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모두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언제 왁자하게 떠들었었냐고 말하듯 그 넓은 홀에 흡사 죽음 같은 막막한 침묵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갑자기 동휘가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까지 벌리고 미친 소처럼 놈에게로 달려드는 거다. 그러곤 격하게 꽉 끌어안으면서 소리쳤다.
“보고 싶었다, 친구!”
“잘 왔네, 동지.”
“안 그래도 연락을 해 보려고 했어. 난 예전부터 네 결혼식에는 꼭 가고 싶었던 거 있지?”
“난 출장도 미루고 휴가를 내서라도 간다.”
간사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라더니.
“쯧, 저 자식들은 어째 변하지를 않냐.”
허탈한 한마디와 함께 재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곧 다다다 달려가 모두를 밀어내고 저도 승후의 등짝에 넙죽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하여간에,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째서 이 클럽엔 정상적인 놈이 없는 걸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태경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승후가 넌지시 눈인사를 보냈다.
“벌써 가는 거냐?”
“그렇게 됐다.”
“밥 먹을 시간도 없고?”
“태하가 사고를 쳐서.”
“아아.”
나직한 한숨과 함께 승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자식 동생은 그 이름도 유명한 사고뭉치 최태하였지. 역시 하늘은 공평하다. 언제나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귀족적인 외모부터 시작해 빈틈없는 성격과 인품, 유난히 끈끈한 정이 넘치는 완벽한 가족, 그리고 거대 그룹의 후계자라는 신분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놈에게 이 동네의 재앙 같은 녀석을 동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래, 왕후장상이면 뭘 하겠냐. 딸린 혹 건사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인데.”
남 말 할 처지도 아니면서 승후는 태경을 향해 치미는 진득한 감정의 파도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동정이라거나, 동정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였다, 이 장남클럽의 불온한(?) 무리들을 위해 준비해 온 물건을 통째로 덜컥 내민 것은.
“이거라도 가져가라.”
“뭔데?”
“초콜릿. 우리 호텔 파티쉐들의 교육을 맡은 파리의 제과장인인 장이 하나하나 공을 들여 만든 작품들이지.”
정말이다. 장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그가 미리 경험해 봐서 잘 안다. 무심히 받아 온 초콜릿 속에 69도가 넘는 압생트가 들어가 있는 줄을 누가 알았을까마는, 덕분에 그는 재아에게 덮쳐지는 아주 끝내주는 경험을 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두 볼이 붉어지면서 몸뚱이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였다. 그러니 이번 작품도 아주 환상적일 게 틀림없었다. 결혼 선물이라고만 해서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그도 정확히 모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먹고 죽을 물건은 아니겠지. 장이 그렇게까지 독한 인간은 아닐 거야. ……아마도.’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어쨌거나 승후는 웃었다. 이건 분명히 인간 최태경의 인생사에 큰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경이 상자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래도 빈속으로 가는 것보단 낫잖아. 가뜩이나 냉정한 면상을 한 놈이 배고프다고 더 살벌하게 굴면 상대가 얼마나 무서워하겠냐.”
아니, 그렇게까지 예의 없는 인간성은 아닌데.
부인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도 태경은 결국 상자를 받아 들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강승후라는 놈은 일단 성격이 나쁘고 그 못지않게 고집도 셌던 것이다.
“몸에 좋은 거니까 남 주지 말고 혼자 먹어라. 꼭꼭 씹어 먹어.”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승후가 길게 소리쳤다.
“몸에 좋다고?”
고작 초콜릿이 몸에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저런 소리일까.
“아무래도 수상한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강승후라는 이유만으로 까닭 없이 등골이 오싹해졌다. 원래 성격 더러운 놈치고 친절한 놈 없는 법인데 문득 돌아보니 오늘따라 놈이 지나치게 친절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절대로 먹지 말아야겠군.”
어쩌면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심히 중얼거리며 그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살롱(salon)의 눈치 빠른 집사가 미리 연락을 해 두었는지 정문 앞에 그의 차가 얌전히 대기해 있었다. 마침 일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그에, 모처럼 직접 차를 끌고 나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뜻하지 않게 이런 귀찮은 일이 찾아오고 말았다. 운전석에 올라타면서 태경은 사이드미러 속의 저를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냐오냐하기는 누가. 하필이면 동생이라고는 그놈 하나뿐이어서 차마 죽이지 못하는 것뿐이지.”
깎아 만든 듯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