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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1화
Prologue. 그의 뒷모습을 만나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죽을 듯 고통스러운 상처라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에는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더 긴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고 한다. 한때의 아픔도,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무뎌지고 결국에는 잊혀진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고통도…… 있다.
10월의 마지막 날, 기억 속 그날처럼 또다시 비가 내렸다.
창가에 선 여은은 비가 훑고 지나가는 유리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낡은 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오래전 그 가을날 아파하며 흘렸던 자신의 눈물 같았다. 유리창으로 손을 뻗었다. 굵은 눈물방울처럼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의 궤적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싸늘한 한기가 손끝을 타고 가슴까지 흘러들었지만 창 저편에 있는 물기는 만져지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분명 울고 있는데…… 눈가는 건조하기만 했다. 저 빗물처럼 자신의 눈물도 안에서만 흘러 쌓이는 것일까. 아니면 울지 못하는 눈을 대신해서 가슴이 울고 있는 것일까. 가슴이 막혀 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파……. 너무 아파.’
여은은 비옷을 잡아채서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리는 한산했다. 온종일 내리는 가을비는 도시를 온통 우울한 잿빛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을 실내에 묶어 두었다. 바람은 거세게 불어 대고 쌓인 낙엽 위로 비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여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젖은 낙엽의 쿰쿰한 냄새가 코를 통해 몸 한가득 들어왔다.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들이쉬고 내쉬고, 또다시 들이쉬고 내쉬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여은은 숨쉬기에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일 듯 달려드는 아픈 기억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기억을 밀어내고 아픔을 삼키며 여은은 오래도록 비가 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세차게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어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기댈 곳 없는 마음이 걸음을 멈추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걷고 또 걸었다. 지쳐서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나서도 목적지 없는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마침내 비가 그쳤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도 멈췄다. 낯익은 남자의 낯선 뒷모습을 발견하고.
그 남자의 뒷모습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기대고 싶을 만큼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 날, 비 내리는 호숫가에서 그를 보았다.
1. 마주하다(1)
[으라차차.]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여은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거리로 난 창문으로 달려갔다.
올겨울은 유난히 일찍부터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시작되자,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더니 첫눈이 내렸다. 만 하루 동안 내린 눈은 도시를 온통 하얗게 뒤덮고 한동안 그 기능을 마비시켰다. 눈이 그친 지 겨우 이틀, 연이어 며칠 내로 기록적인 폭설이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창 너머로 내다본 이른 새벽하늘은 짙은 어둠에 뒤덮여 고요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나.]
여은은 창에서 등을 돌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잠기운을 떨쳐 버리려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쪽.
[굿모닝, 토니.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오늘도 변함없이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들어 입을 맞추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한동안 액자 안에서 웃고 있는 작은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여은은 시간을 확인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분침이 6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늦겠다. 오늘은 출근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서둘러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의 다급한 몸짓 뒤로 욕실의 문이 기운차게 닫혔다.
이십 분 후, 여은은 빵 한 조각에 딸기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재빨리 먹어치우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아차차.]
파카를 걸치고 막 현관문을 나서던 그녀는 재빨리 옷장으로 뛰어가 하얀 모자를 찾아 눌러썼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씩씩하게 달려 나가는 그녀를 사진 속의 어린 소년이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배웅했다.
예상대로 출근길은 만만치 않았다. 제설차가 인도 위로 밀어 놓은 눈 더미 탓에 지하철 입구까지의 짧은 거리를 차도 위로 걸어가야 했다. 군데군데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데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를 피해 비켜서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으악!]
잘못해서 얼음 위로 발을 디딘 여은이 휘청거렸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중년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헤이, 키드, 조심해야지.”
남자는 새하얀 파카와 모자로 중무장을 한 키 작은 그녀를 아이로 착각한 듯했다.
“아, 고맙습니다.”
여은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다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녀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직장이 있는 맨해튼의 중심에 있는 파크 에비뉴에 도착했을 때는 시계가 벌써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 뒤편에 따로 마련된 직원용 입구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자, 김여은, 오늘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자고. 파이팅!]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만큼이나 문을 열고 직장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걸음은 씩씩하고 활기찼다.
날이 밝고도 흐린 하늘은 개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대기가 싸늘한 습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내려앉더니 싸라기눈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던 폭설이 드디어 시작되려는지 바람은 한층 더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따뜻한 실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와야 했던 불운한 사람들은 코트 깃을 세우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후 세 시, 퇴근 준비를 마친 여은은 그 모습을 창 너머로 내려다보다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지하철역이 있는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선 채 망설이던 그녀는 곧 지하철역 반대편에 있는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센트럴 파크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암울한 하늘과 그보다 더 암울해 보이는 삭막한 풍경이 잘 정돈된 공원 안 호숫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차들의 소음과 매연을 피해 도망쳐 온 바람들이 그 주변을 두서없이 이리저리 쓸고 다녔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벌거벗은 채 바람에 떨고 있었다.
조금씩 굵어지는 눈발에 공원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갔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이들 중 몇 명은 막 공원으로 들어서는 여은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은의 시선은 스쳐 가는 사람들이나 풍경이 아닌 저 멀리 보이는 호숫가를 향해 있었다.
[아.]
호숫가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남자를 발견한 여은은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녀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호수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멈췄다. 여은은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가끔씩 지나쳐 가던 사람들이 남자를 의아한 눈으로 힐끗거렸다. 그러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혼자 남은 남자의 검은 코트 위로 꽤 굵어진 눈발이 하얗게 쌓여 갔다.
“그러다 얼겠어요.”
작은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보라색 우산이 드리워졌다. 마크 라일리는 눈 내리는 호수의 정경에서 시선을 떼어 낯선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오른쪽으로, 그리고 아래로 내렸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여자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익숙한 반응에 마크는 무심히 시선을 비끼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가 그의 시선을 되돌려 놓았다.
“찬바람을 맞으면 상처가 아플 텐데…… 괜찮아요?”
의외의 말에 마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자는 그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에 커다란 하얀색 파카를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 작은 키로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우기 위해 한 팔을 치켜 들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깊게 눌러쓴 후드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래 반쯤 가려진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는 또렷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왜 울지?”
그의 말을 듣고서야 여은은 자신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놀라서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낯선 감촉이 눈가에 맺힌 물기를 거두어 갔다. 투박한 남자의 손가락이 닿자, 여은은 심장이 발끝으로 뚝 떨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남자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집요한 시선이 불편해진 여은은 눈을 내리뜨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르자 여은은 다시 눈을 들었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에 드리운 야릇한 빛에 작게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자신의 입술인 것을 깨달은 여은은 그때까지도 씹어 대고 있던 입술을 황급히 꼭 맞물었다.
하지만 곧 그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녀의 입술이 입안으로 사라지자 목적지를 잃은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눈으로 와 박혔다.
“왜 울었지?”
그가 다시 물었다.
“…….”
여은은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정말 왜 울었을까. 왜 이 남자의 눈을 마주하자 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밖으로 흘러나왔을까. 스스로를 위해서는 울지 못하던 자신의 눈이 왜 이 남자 앞에서 눈물을 비쳤을까. 왜 자신은 이 남자의 외로운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까. 왜…….
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지만, 여은은 그를 알고 있었다.
마크 라일리. 자신의 보스. 그녀가 일하는 곳의 주인이자 그녀의 급여를 지불해 주는 사람.
지난 이 년간 파크 에비뉴에 있는 그의 건물에서 일하면서 몇 차례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그는 항상 묵직한 존재감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볼 때마다 비서들과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그녀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먼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날 우연히 그의 뒷모습을 발견할 때까지는…….
두어 달쯤 전 늦가을 빗속을 정처 없이 헤매던 끝에 여은은 이 호숫가에서 자신만큼이나 외로워 보이는 그를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이곳에 올 때마다 스스로가 의식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 남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더 혼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궂은 날 늦은 오후면 종종 이곳을 찾는 것 같았다.
오늘도 창 너머로 눈이 날리기 시작하자 여은은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일을 마치자 그녀의 발길은 집이 아닌 이곳으로 향했다. 염려대로 그는 떨어지는 눈에 온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것이 한 시간이었다. 눈발이 굵어지고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도 그는 눈 내리는 호수를 내려다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모든 인적이 끊어지고 그의 검은 코트의 어깨가 하얗게 변했다. 쌓여 가는 눈만큼 여은의 가슴 속에서도 안타까움과 걱정이 켜켜이 쌓여 갔다.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린 것도 잠시,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딸려 가듯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 결과, 지금 여은은 암울한 겨울 하늘을 닮은 이 남자의 회색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마크는 눈앞의 작은 여자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자신의 질문에 여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굳게 다물어져 열릴 줄 모르는 입술 대신 여자의 두 눈은 많은 말을 품고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젖은 여자의 눈에 비쳐 함께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의 눈가로 또다시 물기가 차올라 넘실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손이 뻗어 나갔다.
다시 와 닿은 그의 손길은 여은에게 처음과 똑같은 충격을 주었다. 펄쩍 뛰다시피 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크는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거두어 코트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닿아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아……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말을 걸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여은은 당황해서 버벅거리다가 사과를 사과로 되돌렸다. 뒤늦게 그가 자신이 말을 건 것을 기분 나빠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김여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왜 쓸데없이 나서서는…….’
여은은 평소 그녀답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하며 어떻게 이 자리를 자연스럽게 뜰 수 있을까 궁리했다.
마크는 눈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말갛다. 이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여자는 없었다. 사고 전, 그를 보는 여자들의 시선 속에는 항상 탐욕과 욕망이 넘실거렸다. 사고 후, 그에게 향하는 그녀들의 시선 속에는 혐오와 공포, 위선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지금까지 보아 온 감정들 중 어느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있다면 희미한 걱정이나 염려뿐.
“전 그럼 이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여자가 말했다.
“아파.”
그의 의도대로 멀어지던 여자의 발길이 멈췄다.
“네?”
불안하게 주변을 헤매던 말간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크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당겨. 쑤시기도 하고.”
“…….”
여은은 그제야 그가 자신의 첫 질문에 답을 해 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상처가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여은의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여은은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살폈다.
휭.
눈발을 가득 실은 거센 바람이 매몰차게 둘을 치고 지나갔다. 여은의 작은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여은은 둘러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상처를 그렇게 찬바람에 노출시키면 좋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손수건을 받을 생각을 않자 여은은 머뭇거리며 그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일단 이 수건으로라도 가리세요. 수시로 약도 발라 주고 잘 관리해야 덧나지 않고 흉터도 나아져요.”
자신의 손으로 옆얼굴을 가리는 시늉까지 해 보이며 여은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흉터가 희미해지기도 하나?”
“그럼요.”
여은은 문득 그가 피부에 새겨진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게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와 깊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한 여은이 재빨리 말을 쏟아 냈다.
“전 그만 집으로 가봐야 해요. 점점 더 추워지네요. 그쪽도 눈보라가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세요. 제가 이 우산 드릴 테니 눈 맞지 마시고요.”
여은은 그의 앞으로 우산을 든 손을 내밀었다.
마크는 자신 앞에 또다시 내밀어진 작은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작은 손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마크는 여자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1화
Prologue. 그의 뒷모습을 만나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죽을 듯 고통스러운 상처라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에는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더 긴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고 한다. 한때의 아픔도,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무뎌지고 결국에는 잊혀진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고통도…… 있다.
10월의 마지막 날, 기억 속 그날처럼 또다시 비가 내렸다.
창가에 선 여은은 비가 훑고 지나가는 유리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낡은 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오래전 그 가을날 아파하며 흘렸던 자신의 눈물 같았다. 유리창으로 손을 뻗었다. 굵은 눈물방울처럼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의 궤적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싸늘한 한기가 손끝을 타고 가슴까지 흘러들었지만 창 저편에 있는 물기는 만져지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분명 울고 있는데…… 눈가는 건조하기만 했다. 저 빗물처럼 자신의 눈물도 안에서만 흘러 쌓이는 것일까. 아니면 울지 못하는 눈을 대신해서 가슴이 울고 있는 것일까. 가슴이 막혀 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파……. 너무 아파.’
여은은 비옷을 잡아채서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리는 한산했다. 온종일 내리는 가을비는 도시를 온통 우울한 잿빛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을 실내에 묶어 두었다. 바람은 거세게 불어 대고 쌓인 낙엽 위로 비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여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젖은 낙엽의 쿰쿰한 냄새가 코를 통해 몸 한가득 들어왔다.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들이쉬고 내쉬고, 또다시 들이쉬고 내쉬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여은은 숨쉬기에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일 듯 달려드는 아픈 기억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기억을 밀어내고 아픔을 삼키며 여은은 오래도록 비가 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세차게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어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기댈 곳 없는 마음이 걸음을 멈추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걷고 또 걸었다. 지쳐서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나서도 목적지 없는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마침내 비가 그쳤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도 멈췄다. 낯익은 남자의 낯선 뒷모습을 발견하고.
그 남자의 뒷모습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기대고 싶을 만큼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 날, 비 내리는 호숫가에서 그를 보았다.
1. 마주하다(1)
[으라차차.]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여은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거리로 난 창문으로 달려갔다.
올겨울은 유난히 일찍부터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시작되자,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더니 첫눈이 내렸다. 만 하루 동안 내린 눈은 도시를 온통 하얗게 뒤덮고 한동안 그 기능을 마비시켰다. 눈이 그친 지 겨우 이틀, 연이어 며칠 내로 기록적인 폭설이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창 너머로 내다본 이른 새벽하늘은 짙은 어둠에 뒤덮여 고요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나.]
여은은 창에서 등을 돌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잠기운을 떨쳐 버리려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쪽.
[굿모닝, 토니.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오늘도 변함없이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들어 입을 맞추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한동안 액자 안에서 웃고 있는 작은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여은은 시간을 확인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분침이 6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늦겠다. 오늘은 출근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서둘러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의 다급한 몸짓 뒤로 욕실의 문이 기운차게 닫혔다.
이십 분 후, 여은은 빵 한 조각에 딸기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재빨리 먹어치우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아차차.]
파카를 걸치고 막 현관문을 나서던 그녀는 재빨리 옷장으로 뛰어가 하얀 모자를 찾아 눌러썼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씩씩하게 달려 나가는 그녀를 사진 속의 어린 소년이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배웅했다.
예상대로 출근길은 만만치 않았다. 제설차가 인도 위로 밀어 놓은 눈 더미 탓에 지하철 입구까지의 짧은 거리를 차도 위로 걸어가야 했다. 군데군데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데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를 피해 비켜서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으악!]
잘못해서 얼음 위로 발을 디딘 여은이 휘청거렸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중년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헤이, 키드, 조심해야지.”
남자는 새하얀 파카와 모자로 중무장을 한 키 작은 그녀를 아이로 착각한 듯했다.
“아, 고맙습니다.”
여은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다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녀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직장이 있는 맨해튼의 중심에 있는 파크 에비뉴에 도착했을 때는 시계가 벌써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 뒤편에 따로 마련된 직원용 입구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자, 김여은, 오늘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자고. 파이팅!]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만큼이나 문을 열고 직장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걸음은 씩씩하고 활기찼다.
날이 밝고도 흐린 하늘은 개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대기가 싸늘한 습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내려앉더니 싸라기눈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던 폭설이 드디어 시작되려는지 바람은 한층 더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따뜻한 실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와야 했던 불운한 사람들은 코트 깃을 세우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후 세 시, 퇴근 준비를 마친 여은은 그 모습을 창 너머로 내려다보다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지하철역이 있는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선 채 망설이던 그녀는 곧 지하철역 반대편에 있는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센트럴 파크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암울한 하늘과 그보다 더 암울해 보이는 삭막한 풍경이 잘 정돈된 공원 안 호숫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차들의 소음과 매연을 피해 도망쳐 온 바람들이 그 주변을 두서없이 이리저리 쓸고 다녔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벌거벗은 채 바람에 떨고 있었다.
조금씩 굵어지는 눈발에 공원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갔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이들 중 몇 명은 막 공원으로 들어서는 여은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은의 시선은 스쳐 가는 사람들이나 풍경이 아닌 저 멀리 보이는 호숫가를 향해 있었다.
[아.]
호숫가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남자를 발견한 여은은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녀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호수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멈췄다. 여은은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가끔씩 지나쳐 가던 사람들이 남자를 의아한 눈으로 힐끗거렸다. 그러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혼자 남은 남자의 검은 코트 위로 꽤 굵어진 눈발이 하얗게 쌓여 갔다.
“그러다 얼겠어요.”
작은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보라색 우산이 드리워졌다. 마크 라일리는 눈 내리는 호수의 정경에서 시선을 떼어 낯선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오른쪽으로, 그리고 아래로 내렸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여자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익숙한 반응에 마크는 무심히 시선을 비끼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가 그의 시선을 되돌려 놓았다.
“찬바람을 맞으면 상처가 아플 텐데…… 괜찮아요?”
의외의 말에 마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자는 그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에 커다란 하얀색 파카를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 작은 키로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우기 위해 한 팔을 치켜 들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깊게 눌러쓴 후드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래 반쯤 가려진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는 또렷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왜 울지?”
그의 말을 듣고서야 여은은 자신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놀라서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낯선 감촉이 눈가에 맺힌 물기를 거두어 갔다. 투박한 남자의 손가락이 닿자, 여은은 심장이 발끝으로 뚝 떨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남자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집요한 시선이 불편해진 여은은 눈을 내리뜨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르자 여은은 다시 눈을 들었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에 드리운 야릇한 빛에 작게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자신의 입술인 것을 깨달은 여은은 그때까지도 씹어 대고 있던 입술을 황급히 꼭 맞물었다.
하지만 곧 그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녀의 입술이 입안으로 사라지자 목적지를 잃은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눈으로 와 박혔다.
“왜 울었지?”
그가 다시 물었다.
“…….”
여은은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정말 왜 울었을까. 왜 이 남자의 눈을 마주하자 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밖으로 흘러나왔을까. 스스로를 위해서는 울지 못하던 자신의 눈이 왜 이 남자 앞에서 눈물을 비쳤을까. 왜 자신은 이 남자의 외로운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까. 왜…….
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지만, 여은은 그를 알고 있었다.
마크 라일리. 자신의 보스. 그녀가 일하는 곳의 주인이자 그녀의 급여를 지불해 주는 사람.
지난 이 년간 파크 에비뉴에 있는 그의 건물에서 일하면서 몇 차례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그는 항상 묵직한 존재감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볼 때마다 비서들과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그녀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먼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날 우연히 그의 뒷모습을 발견할 때까지는…….
두어 달쯤 전 늦가을 빗속을 정처 없이 헤매던 끝에 여은은 이 호숫가에서 자신만큼이나 외로워 보이는 그를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이곳에 올 때마다 스스로가 의식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 남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더 혼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궂은 날 늦은 오후면 종종 이곳을 찾는 것 같았다.
오늘도 창 너머로 눈이 날리기 시작하자 여은은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일을 마치자 그녀의 발길은 집이 아닌 이곳으로 향했다. 염려대로 그는 떨어지는 눈에 온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것이 한 시간이었다. 눈발이 굵어지고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도 그는 눈 내리는 호수를 내려다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모든 인적이 끊어지고 그의 검은 코트의 어깨가 하얗게 변했다. 쌓여 가는 눈만큼 여은의 가슴 속에서도 안타까움과 걱정이 켜켜이 쌓여 갔다.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린 것도 잠시,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딸려 가듯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 결과, 지금 여은은 암울한 겨울 하늘을 닮은 이 남자의 회색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마크는 눈앞의 작은 여자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자신의 질문에 여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굳게 다물어져 열릴 줄 모르는 입술 대신 여자의 두 눈은 많은 말을 품고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젖은 여자의 눈에 비쳐 함께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의 눈가로 또다시 물기가 차올라 넘실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손이 뻗어 나갔다.
다시 와 닿은 그의 손길은 여은에게 처음과 똑같은 충격을 주었다. 펄쩍 뛰다시피 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크는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거두어 코트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닿아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아……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말을 걸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여은은 당황해서 버벅거리다가 사과를 사과로 되돌렸다. 뒤늦게 그가 자신이 말을 건 것을 기분 나빠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김여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왜 쓸데없이 나서서는…….’
여은은 평소 그녀답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하며 어떻게 이 자리를 자연스럽게 뜰 수 있을까 궁리했다.
마크는 눈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말갛다. 이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여자는 없었다. 사고 전, 그를 보는 여자들의 시선 속에는 항상 탐욕과 욕망이 넘실거렸다. 사고 후, 그에게 향하는 그녀들의 시선 속에는 혐오와 공포, 위선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지금까지 보아 온 감정들 중 어느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있다면 희미한 걱정이나 염려뿐.
“전 그럼 이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여자가 말했다.
“아파.”
그의 의도대로 멀어지던 여자의 발길이 멈췄다.
“네?”
불안하게 주변을 헤매던 말간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크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당겨. 쑤시기도 하고.”
“…….”
여은은 그제야 그가 자신의 첫 질문에 답을 해 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상처가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여은의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여은은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살폈다.
휭.
눈발을 가득 실은 거센 바람이 매몰차게 둘을 치고 지나갔다. 여은의 작은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여은은 둘러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상처를 그렇게 찬바람에 노출시키면 좋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손수건을 받을 생각을 않자 여은은 머뭇거리며 그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일단 이 수건으로라도 가리세요. 수시로 약도 발라 주고 잘 관리해야 덧나지 않고 흉터도 나아져요.”
자신의 손으로 옆얼굴을 가리는 시늉까지 해 보이며 여은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흉터가 희미해지기도 하나?”
“그럼요.”
여은은 문득 그가 피부에 새겨진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게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와 깊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한 여은이 재빨리 말을 쏟아 냈다.
“전 그만 집으로 가봐야 해요. 점점 더 추워지네요. 그쪽도 눈보라가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세요. 제가 이 우산 드릴 테니 눈 맞지 마시고요.”
여은은 그의 앞으로 우산을 든 손을 내밀었다.
마크는 자신 앞에 또다시 내밀어진 작은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작은 손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마크는 여자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