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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
프롤로그
“피고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뜻입니까? 자신의 개인 비서가 경쟁 회사로 기밀 서류를 빼돌리는 것을?”
“맹세코, 정말로 몰랐습니다.”
남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유주는 긴장한 듯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류를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3월 26일, 4월 17일, 5월 9일, 5월 27일.”
“…….”
“당신의 방에 있는 팩스기를 통해 서류들이 넘어간 날짜입니다.”
“전 팩스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릅니다. 잡일은 비서인 김주희 씨가 모두 처리합니다.”
“잡일이요?”
유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회사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프로젝트 관련 서류를 다른 회사에 넘기는 것도 잡일인가 보죠?”
“말씀드렸다시피 전 아무것도 몰랐…….”
“김주한 팀장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 드려야 할 것 같네요. 23시 14분, 21시 20분, 20시 43분, 22시 27분.”
“…….”
“당신의 방에 있는 팩스기를 통해 서류들이 넘어간 시각입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실 것 같으니 한 가지 더 덧붙이겠습니다.”
또각, 힐이 대리석 바닥을 누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피고석에서 몸을 빙글 돌려 앞을 바라본 유주와 해인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해인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당신과 당신의 개인 비서인 김주희 씨가 사무실에서 사랑을 나누던 시각이죠.”
“이의 있습니다. 원고 측 변호사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있습니다.”
유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냈다.
유주는 자신을 노려보는 해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원고 측, 증거 있습니까?”
술렁이는 법정 안을 진정시킨 판사가 느릿하게 물었다.
이마를 쓸어 넘기는 그에게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CCTV 영상을 증거 자료로 제출합니다.”
판사의 말에 대답한 유주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높은 힐이 바닥에 닿아 울리는 소리가 법정 안에 깔려 있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CD 케이스를 집어 드는 유주의 모습에 조금 전 큰 소리를 냈던 해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언 듯 서 있는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시선이 증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움직였다.
“거짓말이야.”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해인도, 그리고 증거품 제출을 위해 판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유주에게도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증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조금 전까지 서려 있던 긴장을 모두 날려 버린 듯 웃음을 터트렸다.
“회사에 있는 CCTV는 명목상 설치만 해 놓은 거야. 겉만 그럴싸하지, 실제로 녹화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지.”
“그래요? 확신하나요?”
되묻는 유주의 억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해인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김주한 씨,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주한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남자는 여유롭게 깍지를 끼며 유주를 그윽하게 올려다봤다. 감히 어디서 거짓말로 자신을 협박하려 했냐는 얼굴이었다.
“확신해.”
“서한기업은 기업적 가치가 높은 대형 컴퍼니입니다. 그런 회사가 그저 보여 주기 식으로 장난감 CCTV를 설치해 놓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보기보다 순진하시네요.”
“다른 곳은 몰라도 내 방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 내 허락도 없이…….”
“5월 27일 밤 10시. 피고는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하다 잠깐 사무실을 나갔죠? 10분쯤 지나서 다시 돌아왔고요.”
순간 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의 있습니다. 본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입니다.”
해인이 뱉어 내듯 외쳤다.
제법 격앙된 목소리에도 유주는 지지 않고 판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류 유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피고의 말을 반박할 중요 자료입니다.”
“기각합니다. 원고 측 계속하세요.”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판사는 결국 유주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단호한 대답에 해인의 입술이 짓이겨졌다. 유주는 그런 해인을 힐끔 바라보고는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급하게 산 콘돔을 꺼내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는데도 부정하실 겁니까?”
“……!”
남자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해인이 주먹으로 가볍게 탁상을 내리쳤다. 매끄럽게 잘 뻗은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확인한 유주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희열이었다. 저 잘생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유주는 새침하게 웃음을 갈무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말 궁금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김주한 씨, 그 뒤까지 제가 계속 설명하길 원하는…….”
“그 여자가 먼저 유혹했어! 내가 시킨 게 아냐!”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유주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공격하듯 말을 쏘아붙였다.
“불륜 관계 및 기밀 서류 유출까지 인정하시는 건가요?”
“어쩔 수 없었어! 내 자리가 위험했다고!”
남자의 입을 막기 위해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던 해인은, 그의 고함 소리에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유주는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짧게 숙이며 이상이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기 전, 남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증거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깜빡했네요. 조금 전 언급한 CCTV는 회사 건물 옆에 위치한 편의점 영상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구입한 콘돔을 꺼내 확인하는 모습이 찍혀 있더군요.”
그녀의 입술이 예쁘게 휘어지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준(Jun).
3년 연속 로펌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명실공히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회사인 그곳을 대표하는 변호인이자 기업 분쟁 분야에서는 이름 자체가 곧 명함인 여자가 바로 임유주였다.
통장에 넣어 둔 돈에 이자가 차곡차곡 붙듯, 소송을 맡아 진행할수록 차곡차곡 승률 숫자 또한 올라갔다.
“허풍이 아주 수준급이 됐어.”
“칭찬으로 들을게. 실력이 점점 늘지?”
나란히 걷고 있는 남녀는 적당한 체격 차에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잘 어울렸다. 길거리였다면 주위 사람들이 한 번쯤은 쳐다봤을 만큼. 아쉽게도 이곳은 젊은 남녀의 훈훈한 모습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법원이었지만.
“재판은 포커가 아니야. 좋은 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다 들키면 잃는 건 돈만이 아니지.”
“그러는 너야말로 판사를 재판 도중에 헤롱거리게 만들었잖아. 도대체 얼마나 거한 대접을 한 거야? 증거 제출하러 가까이 갈 때마다 술 냄새 때문에 내 속이 다 울렁거렸다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당연히 직접 만나진 않았겠지. 누굴 시킨 거야? 고지훈? 박민우?”
“유부남이 되더니 다들 술이 많이 약해졌어. 옛날 같았으면 판사 정신을 쏙 빼놔서 재판 연기까지 가능했을 텐데.”
해인의 비웃음이 섞인 대답에 유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렇다.
패소라는 단어는 임유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얄밉게 웃고 있는 이 남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주해인. 3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로펌 1위를 차지하고 있던 대명 법률 사무소의 변호인이자 유주의 법대 동기.
3년 전 홀연히 영국으로 날아갔던 그가 어느 날 한국으로 들어오더니 눈앞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3년 동안 안 보여서 속이 다 시원했었는데.
돌아오자마자 대명의 임원진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얼마 안 가 드디어 전쟁터에 뛰어 들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언제쯤 법정에 설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최연소의 나이에 임원진 자리를 꿰찬 주해인의 발에 밟힐 상대가 누가 될지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유주는 그 불쌍한 첫 희생양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재판 2주 전에야 알아챘다.
희생양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유주는 입술을 악물고는 해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이제 알았겠지.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졌다고 누가 그래?”
“판결 못 들었어? 지더니 귀까지 먹었나?”
겉으로는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남녀의 대화에서는 싸늘함과 까칠함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항소할 거야. 불륜 관계만 인정했을 뿐 서류 유출에 관해서는 증거가 불충분해.”
“그렇다고 안 진 게 되는 건 아니지.”
“오늘 저녁에 뭐해?”
독이 바짝 오른 대화의 끝에 갑작스러운 물음이 튀어나왔다.
유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도 문득 튀어나오는 발언과 사람을 당황시키는 능글맞음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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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뜻입니까? 자신의 개인 비서가 경쟁 회사로 기밀 서류를 빼돌리는 것을?”
“맹세코, 정말로 몰랐습니다.”
남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유주는 긴장한 듯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류를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3월 26일, 4월 17일, 5월 9일, 5월 27일.”
“…….”
“당신의 방에 있는 팩스기를 통해 서류들이 넘어간 날짜입니다.”
“전 팩스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릅니다. 잡일은 비서인 김주희 씨가 모두 처리합니다.”
“잡일이요?”
유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회사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프로젝트 관련 서류를 다른 회사에 넘기는 것도 잡일인가 보죠?”
“말씀드렸다시피 전 아무것도 몰랐…….”
“김주한 팀장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 드려야 할 것 같네요. 23시 14분, 21시 20분, 20시 43분, 22시 27분.”
“…….”
“당신의 방에 있는 팩스기를 통해 서류들이 넘어간 시각입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실 것 같으니 한 가지 더 덧붙이겠습니다.”
또각, 힐이 대리석 바닥을 누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피고석에서 몸을 빙글 돌려 앞을 바라본 유주와 해인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해인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당신과 당신의 개인 비서인 김주희 씨가 사무실에서 사랑을 나누던 시각이죠.”
“이의 있습니다. 원고 측 변호사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있습니다.”
유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냈다.
유주는 자신을 노려보는 해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원고 측, 증거 있습니까?”
술렁이는 법정 안을 진정시킨 판사가 느릿하게 물었다.
이마를 쓸어 넘기는 그에게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CCTV 영상을 증거 자료로 제출합니다.”
판사의 말에 대답한 유주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높은 힐이 바닥에 닿아 울리는 소리가 법정 안에 깔려 있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CD 케이스를 집어 드는 유주의 모습에 조금 전 큰 소리를 냈던 해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언 듯 서 있는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시선이 증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움직였다.
“거짓말이야.”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해인도, 그리고 증거품 제출을 위해 판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유주에게도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증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조금 전까지 서려 있던 긴장을 모두 날려 버린 듯 웃음을 터트렸다.
“회사에 있는 CCTV는 명목상 설치만 해 놓은 거야. 겉만 그럴싸하지, 실제로 녹화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지.”
“그래요? 확신하나요?”
되묻는 유주의 억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해인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김주한 씨,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주한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남자는 여유롭게 깍지를 끼며 유주를 그윽하게 올려다봤다. 감히 어디서 거짓말로 자신을 협박하려 했냐는 얼굴이었다.
“확신해.”
“서한기업은 기업적 가치가 높은 대형 컴퍼니입니다. 그런 회사가 그저 보여 주기 식으로 장난감 CCTV를 설치해 놓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보기보다 순진하시네요.”
“다른 곳은 몰라도 내 방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 내 허락도 없이…….”
“5월 27일 밤 10시. 피고는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하다 잠깐 사무실을 나갔죠? 10분쯤 지나서 다시 돌아왔고요.”
순간 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의 있습니다. 본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입니다.”
해인이 뱉어 내듯 외쳤다.
제법 격앙된 목소리에도 유주는 지지 않고 판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류 유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피고의 말을 반박할 중요 자료입니다.”
“기각합니다. 원고 측 계속하세요.”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판사는 결국 유주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단호한 대답에 해인의 입술이 짓이겨졌다. 유주는 그런 해인을 힐끔 바라보고는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급하게 산 콘돔을 꺼내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는데도 부정하실 겁니까?”
“……!”
남자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해인이 주먹으로 가볍게 탁상을 내리쳤다. 매끄럽게 잘 뻗은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확인한 유주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희열이었다. 저 잘생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유주는 새침하게 웃음을 갈무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말 궁금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김주한 씨, 그 뒤까지 제가 계속 설명하길 원하는…….”
“그 여자가 먼저 유혹했어! 내가 시킨 게 아냐!”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유주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공격하듯 말을 쏘아붙였다.
“불륜 관계 및 기밀 서류 유출까지 인정하시는 건가요?”
“어쩔 수 없었어! 내 자리가 위험했다고!”
남자의 입을 막기 위해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던 해인은, 그의 고함 소리에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유주는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짧게 숙이며 이상이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기 전, 남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증거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깜빡했네요. 조금 전 언급한 CCTV는 회사 건물 옆에 위치한 편의점 영상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구입한 콘돔을 꺼내 확인하는 모습이 찍혀 있더군요.”
그녀의 입술이 예쁘게 휘어지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준(Jun).
3년 연속 로펌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명실공히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회사인 그곳을 대표하는 변호인이자 기업 분쟁 분야에서는 이름 자체가 곧 명함인 여자가 바로 임유주였다.
통장에 넣어 둔 돈에 이자가 차곡차곡 붙듯, 소송을 맡아 진행할수록 차곡차곡 승률 숫자 또한 올라갔다.
“허풍이 아주 수준급이 됐어.”
“칭찬으로 들을게. 실력이 점점 늘지?”
나란히 걷고 있는 남녀는 적당한 체격 차에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잘 어울렸다. 길거리였다면 주위 사람들이 한 번쯤은 쳐다봤을 만큼. 아쉽게도 이곳은 젊은 남녀의 훈훈한 모습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법원이었지만.
“재판은 포커가 아니야. 좋은 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다 들키면 잃는 건 돈만이 아니지.”
“그러는 너야말로 판사를 재판 도중에 헤롱거리게 만들었잖아. 도대체 얼마나 거한 대접을 한 거야? 증거 제출하러 가까이 갈 때마다 술 냄새 때문에 내 속이 다 울렁거렸다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당연히 직접 만나진 않았겠지. 누굴 시킨 거야? 고지훈? 박민우?”
“유부남이 되더니 다들 술이 많이 약해졌어. 옛날 같았으면 판사 정신을 쏙 빼놔서 재판 연기까지 가능했을 텐데.”
해인의 비웃음이 섞인 대답에 유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렇다.
패소라는 단어는 임유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얄밉게 웃고 있는 이 남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주해인. 3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로펌 1위를 차지하고 있던 대명 법률 사무소의 변호인이자 유주의 법대 동기.
3년 전 홀연히 영국으로 날아갔던 그가 어느 날 한국으로 들어오더니 눈앞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3년 동안 안 보여서 속이 다 시원했었는데.
돌아오자마자 대명의 임원진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얼마 안 가 드디어 전쟁터에 뛰어 들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언제쯤 법정에 설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최연소의 나이에 임원진 자리를 꿰찬 주해인의 발에 밟힐 상대가 누가 될지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유주는 그 불쌍한 첫 희생양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재판 2주 전에야 알아챘다.
희생양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유주는 입술을 악물고는 해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이제 알았겠지.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졌다고 누가 그래?”
“판결 못 들었어? 지더니 귀까지 먹었나?”
겉으로는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남녀의 대화에서는 싸늘함과 까칠함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항소할 거야. 불륜 관계만 인정했을 뿐 서류 유출에 관해서는 증거가 불충분해.”
“그렇다고 안 진 게 되는 건 아니지.”
“오늘 저녁에 뭐해?”
독이 바짝 오른 대화의 끝에 갑작스러운 물음이 튀어나왔다.
유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도 문득 튀어나오는 발언과 사람을 당황시키는 능글맞음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