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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를 알 수 없는 해인의 물음에 대화가 뚝 끊기자 유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였다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뱉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 보기 힘들다는 주해인의 난처한 얼굴을 본 날이었다.
주해인을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세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다.
주해인은 항상 내 희생양이었어.
잠깐 입을 다물었던 그녀는 욕 대신 입꼬리만 살짝 올려 그의 가슴을 노크하듯 손등으로 가볍게 쳤다.
“조심해. 한 번만 더 이상한 수 쓰다 걸리면 가만 안 둬. 선 넘기 직전이야, 너.”
경고를 내뱉은 그녀가 해인을 앞서 걸어갔다.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가득 울렸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사라져 가는 유주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던 해인은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가슴팍을 조심스레 쓸었다.
“곤란한데…….”
실력뿐만 아니라 매력까지 느는 건 반칙이라고.
“뭐가?”
해인의 혼잣말에 언제부터 옆에 서 있던 건지 지훈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해인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훈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눈빛만으로도 살인을 낼 것 같았다.
죽일 듯한 눈초리에 복도 끝을 바라보고 있던 지훈이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친하다며? 형 동생 하는 사이라며?”
“아니, 분명히 잘 부탁한다고 말해 놨는데…….”
씹어뱉는 듯한 해인의 물음에 지훈은 말끝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발언하는 꼴을 못 보고 있던데? 형 동생이 아니라 부모의 원수, 뭐 그런 거 아냐?”
해인의 핀잔에 마른침을 삼키던 지훈은 문득 조금 전 법정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널 싫어하는 거 같긴 하더라. 이의 제기하는 족족 기각시키고.”
“널 믿은 내가 바보지.”
“아니, 술자리 분위기는 진짜 좋았다니까. 송 판사도 네 소문 많이 들었다고, 기대하겠다고 했단 말이야. 저 양반이 먹은 양주 값만 해도 내 월급…….”
“됐고, 김주한 씨 어디 있어?”
지훈의 말을 끊어낸 해인이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씩씩거리면서 흥분을 못 가라앉히기에 화장실 들어가서 열 좀 식히라고 했어. 야, 그런데 진짜 어떡하냐? 불륜이라니. 너도 모르고 있었던 거 맞지?”
해인은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릴 뿐이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승부욕을 자극받은 남자 특유의 그것이었다.
“워밍업 끝났으니까, 본격적으로 해 봐야지.”
해인이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 유주의 뒷모습을 좇으며 중얼거렸다.
재판도, 그녀를 잡는 것도.
1. Betman VS Bondgirl
오후 2시.
보통 사람이라면 밀려오는 식곤증에 나른해지기 딱 좋은 시각이었지만, 점심을 굶은 채 오전 7시부터 밀려드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유주에겐 예민함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대였다.
맞춤처럼 몸에 붙는 흰 셔츠와 검은색 정장 치마가 찌푸려진 그녀의 얼굴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임 변호사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정은이 사무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책상 한편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 또 하나의 종이를 올려놓은 유주는 그녀의 말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는 미팅 일정이 없는 걸로 아는데?”
“네. 연락 없이 오셨습니다.”
그제야 책상에 박혀 있던 유주의 고개가 들렸다. 곤란한 웃음을 띠고 있는 정은의 모습에 유주는 무슨 의미냐는 눈짓을 보내며 되물었다.
“내가 약속 없이 찾아온 사람을 그냥 만나 줄 만큼 한가하던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지.”
대답은 정은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정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는 해인이 그녀의 뒤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주의 얼굴이 버릇처럼 구겨졌다.
“커피 드릴까요?”
“필요 없어. 5분 내로 나가실 거야.”
냉정하게 중얼거리는 유주의 모습에 정은은 더 이상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사무실을 나섰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해인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걸음을 옮겨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난 정은 씨가 타 주는 커피 좋아하는데.”
유주가 책상에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해인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는 그 모습에 그녀가 작게 혀를 찼다.
“뭐하는 거야?”
“딱히 성희롱적인 발언은 아니었어. 진짜 맛있게 타더라고.”
“왜 찾아왔는지를 묻고 있잖아.”
“5분 안에 끝내기엔 좀 긴데. 내가 요약하는 걸 잘 못 하거든.”
“그게 변호사라는 사람이 할 말이야?”
날이 잔뜩 서 있는 목소리로 비꼰 유주가 해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리를 꼬았다. 치마 밑으로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가 교차하며 겹쳐지는 모습에 해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녀의 사무실은 언제 찾아와도 항상 깔끔했다.
넓은 공간 안에 있는 거라고는 책상과 소파, 테이블이 전부였고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창에는 블라인드를 달지 않아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잡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해인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주해인 변호사님, 무슨 일이시냐고요.”
뜸을 들이는 모습에 유주가 한 번 더 사무적으로 물었다. 주해인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시간을 투자해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보통 그 목적은 유주의 이익에 반(反)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 그대로 달갑지 않은 손님.
긴장한 채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유주와 눈을 맞춘 해인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늘였다.
“까칠한 거 보니까 점심 굶었구나.”
“……먹었어.”
마치 자신에 대해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해인의 중얼거림에 괜히 오기가 생긴 유주가 시선을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그의 입술이 조금 더 올라갔다.
“그래? 뭐 먹었는데?”
“초밥.”
“가게 이름이 뭔데?”
“몰라, 제대로 안 봤어. 정은 씨가 사 온 거라.”
“정은 씨가 사 온 거라면 맛있었겠네.”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태연함을 유지하며 대답한 유주가 다시 눈동자를 해인에게 고정시켰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본론을 꺼내라는 재촉 어린 눈빛에도 해인은 느긋하게 등을 소파에 기댔다.
“같이 점심이라도 하려고 했더니. 나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같이 식사한 적 없잖아.”
“바빴어.”
“소송 외에 따로 맡고 있는 일 있어?”
“…….”
유주가 소리 없이 입술을 악물었다. 말의 속뜻을 파악하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임원진도 아닌데 뭐가 바빠?’
더 정확히 해석하자면 이랬다.
‘난 임원진이라고’.
성악설, 성선설 등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기질이 정해져 있다는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유주였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면 그런 말들에 자신의 의견을 조금 보태고 싶어졌다.
선천적으로 얄미움을 장착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그러는 넌 왜 이렇게 한가해? 밥 타령하러 여기까지 왔어? 우리가 점심시간에만 만나는, 다른 반으로 찢어진 여고생들은 아니잖아?”
가만히 있을 유주는 아니었다. 톡 쏘아붙이자 해인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웃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합의하자. 20억에.”
“……장난해?”
유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왕림했는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목적은 확실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확실하지 않은 프로젝트였잖아.”
“그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유출당했고.”
“성공했을 때 예상 가능한 수입은 10억이야.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제시한 거고. 욕심부리지 말고 이 정도에서 끝내.”
10억이라니. 무슨 자료를 바탕으로 뭘 어떻게 도출하면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유주는 회사의 사활이 달린 프로젝트였다며 머리를 감싸 쥐던 클라이언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해인 변호사님. 제가 이 말 했던가요?”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자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이 진해졌다.
해인은 관심이 있다는 듯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턱 밑에 손을 갖다 대고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넌 정말 밥맛이야.”
냉정하게 끊어지는 말에도 해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 실망했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했어. 2학기 두 번째 수업 시간이었나?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날 노려보며 중얼거렸지. 4년 전 저작권 소송 때도 법원 화장실 앞에서 마주치자마자 그렇게 말했어.”
“됐고.”
유주는 다시 얼굴을 굳힌 채 그를 노려보았다.
“합의는 없어.”
“후회할 텐데.”
“내 사무실까지 찾아와 우물을 팔 정도로 목말라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알겠어. 이번 승자는 나야. 패자는 너고. 합의라니, 그런 아름다운 결말을 내가 너에게 하사할 것 같아?”
해인은 그녀의 입술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원하는 금액이 없으시다?”
“몇 번을 말해야 돼?”
“난 분명히 얘기했어. 재판은 포커 게임이 아니라고. 그럼 법정에서 보자.”
슈트 재킷의 단추를 정갈하게 채우며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해인을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세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다.
주해인은 항상 내 희생양이었어.
잠깐 입을 다물었던 그녀는 욕 대신 입꼬리만 살짝 올려 그의 가슴을 노크하듯 손등으로 가볍게 쳤다.
“조심해. 한 번만 더 이상한 수 쓰다 걸리면 가만 안 둬. 선 넘기 직전이야, 너.”
경고를 내뱉은 그녀가 해인을 앞서 걸어갔다.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가득 울렸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사라져 가는 유주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던 해인은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가슴팍을 조심스레 쓸었다.
“곤란한데…….”
실력뿐만 아니라 매력까지 느는 건 반칙이라고.
“뭐가?”
해인의 혼잣말에 언제부터 옆에 서 있던 건지 지훈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해인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훈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눈빛만으로도 살인을 낼 것 같았다.
죽일 듯한 눈초리에 복도 끝을 바라보고 있던 지훈이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친하다며? 형 동생 하는 사이라며?”
“아니, 분명히 잘 부탁한다고 말해 놨는데…….”
씹어뱉는 듯한 해인의 물음에 지훈은 말끝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발언하는 꼴을 못 보고 있던데? 형 동생이 아니라 부모의 원수, 뭐 그런 거 아냐?”
해인의 핀잔에 마른침을 삼키던 지훈은 문득 조금 전 법정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널 싫어하는 거 같긴 하더라. 이의 제기하는 족족 기각시키고.”
“널 믿은 내가 바보지.”
“아니, 술자리 분위기는 진짜 좋았다니까. 송 판사도 네 소문 많이 들었다고, 기대하겠다고 했단 말이야. 저 양반이 먹은 양주 값만 해도 내 월급…….”
“됐고, 김주한 씨 어디 있어?”
지훈의 말을 끊어낸 해인이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씩씩거리면서 흥분을 못 가라앉히기에 화장실 들어가서 열 좀 식히라고 했어. 야, 그런데 진짜 어떡하냐? 불륜이라니. 너도 모르고 있었던 거 맞지?”
해인은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릴 뿐이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승부욕을 자극받은 남자 특유의 그것이었다.
“워밍업 끝났으니까, 본격적으로 해 봐야지.”
해인이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 유주의 뒷모습을 좇으며 중얼거렸다.
재판도, 그녀를 잡는 것도.
1. Betman VS Bondgirl
오후 2시.
보통 사람이라면 밀려오는 식곤증에 나른해지기 딱 좋은 시각이었지만, 점심을 굶은 채 오전 7시부터 밀려드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유주에겐 예민함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대였다.
맞춤처럼 몸에 붙는 흰 셔츠와 검은색 정장 치마가 찌푸려진 그녀의 얼굴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임 변호사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정은이 사무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책상 한편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 더미에 또 하나의 종이를 올려놓은 유주는 그녀의 말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는 미팅 일정이 없는 걸로 아는데?”
“네. 연락 없이 오셨습니다.”
그제야 책상에 박혀 있던 유주의 고개가 들렸다. 곤란한 웃음을 띠고 있는 정은의 모습에 유주는 무슨 의미냐는 눈짓을 보내며 되물었다.
“내가 약속 없이 찾아온 사람을 그냥 만나 줄 만큼 한가하던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지.”
대답은 정은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정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는 해인이 그녀의 뒤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주의 얼굴이 버릇처럼 구겨졌다.
“커피 드릴까요?”
“필요 없어. 5분 내로 나가실 거야.”
냉정하게 중얼거리는 유주의 모습에 정은은 더 이상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사무실을 나섰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해인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걸음을 옮겨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난 정은 씨가 타 주는 커피 좋아하는데.”
유주가 책상에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해인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는 그 모습에 그녀가 작게 혀를 찼다.
“뭐하는 거야?”
“딱히 성희롱적인 발언은 아니었어. 진짜 맛있게 타더라고.”
“왜 찾아왔는지를 묻고 있잖아.”
“5분 안에 끝내기엔 좀 긴데. 내가 요약하는 걸 잘 못 하거든.”
“그게 변호사라는 사람이 할 말이야?”
날이 잔뜩 서 있는 목소리로 비꼰 유주가 해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리를 꼬았다. 치마 밑으로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가 교차하며 겹쳐지는 모습에 해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녀의 사무실은 언제 찾아와도 항상 깔끔했다.
넓은 공간 안에 있는 거라고는 책상과 소파, 테이블이 전부였고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창에는 블라인드를 달지 않아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잡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해인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주해인 변호사님, 무슨 일이시냐고요.”
뜸을 들이는 모습에 유주가 한 번 더 사무적으로 물었다. 주해인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시간을 투자해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보통 그 목적은 유주의 이익에 반(反)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 그대로 달갑지 않은 손님.
긴장한 채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유주와 눈을 맞춘 해인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늘였다.
“까칠한 거 보니까 점심 굶었구나.”
“……먹었어.”
마치 자신에 대해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해인의 중얼거림에 괜히 오기가 생긴 유주가 시선을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그의 입술이 조금 더 올라갔다.
“그래? 뭐 먹었는데?”
“초밥.”
“가게 이름이 뭔데?”
“몰라, 제대로 안 봤어. 정은 씨가 사 온 거라.”
“정은 씨가 사 온 거라면 맛있었겠네.”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태연함을 유지하며 대답한 유주가 다시 눈동자를 해인에게 고정시켰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본론을 꺼내라는 재촉 어린 눈빛에도 해인은 느긋하게 등을 소파에 기댔다.
“같이 점심이라도 하려고 했더니. 나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같이 식사한 적 없잖아.”
“바빴어.”
“소송 외에 따로 맡고 있는 일 있어?”
“…….”
유주가 소리 없이 입술을 악물었다. 말의 속뜻을 파악하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임원진도 아닌데 뭐가 바빠?’
더 정확히 해석하자면 이랬다.
‘난 임원진이라고’.
성악설, 성선설 등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기질이 정해져 있다는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유주였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면 그런 말들에 자신의 의견을 조금 보태고 싶어졌다.
선천적으로 얄미움을 장착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그러는 넌 왜 이렇게 한가해? 밥 타령하러 여기까지 왔어? 우리가 점심시간에만 만나는, 다른 반으로 찢어진 여고생들은 아니잖아?”
가만히 있을 유주는 아니었다. 톡 쏘아붙이자 해인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웃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합의하자. 20억에.”
“……장난해?”
유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왕림했는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목적은 확실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확실하지 않은 프로젝트였잖아.”
“그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유출당했고.”
“성공했을 때 예상 가능한 수입은 10억이야.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제시한 거고. 욕심부리지 말고 이 정도에서 끝내.”
10억이라니. 무슨 자료를 바탕으로 뭘 어떻게 도출하면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유주는 회사의 사활이 달린 프로젝트였다며 머리를 감싸 쥐던 클라이언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해인 변호사님. 제가 이 말 했던가요?”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자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이 진해졌다.
해인은 관심이 있다는 듯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턱 밑에 손을 갖다 대고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넌 정말 밥맛이야.”
냉정하게 끊어지는 말에도 해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 실망했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했어. 2학기 두 번째 수업 시간이었나?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날 노려보며 중얼거렸지. 4년 전 저작권 소송 때도 법원 화장실 앞에서 마주치자마자 그렇게 말했어.”
“됐고.”
유주는 다시 얼굴을 굳힌 채 그를 노려보았다.
“합의는 없어.”
“후회할 텐데.”
“내 사무실까지 찾아와 우물을 팔 정도로 목말라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알겠어. 이번 승자는 나야. 패자는 너고. 합의라니, 그런 아름다운 결말을 내가 너에게 하사할 것 같아?”
해인은 그녀의 입술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원하는 금액이 없으시다?”
“몇 번을 말해야 돼?”
“난 분명히 얘기했어. 재판은 포커 게임이 아니라고. 그럼 법정에서 보자.”
슈트 재킷의 단추를 정갈하게 채우며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