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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
다섯의 의미



라 자린 1권(1화)
서문


신성한 제르 호바.
자비로운 일라신.
화염의 라흐다.
차가운 레스모이.
총명한 탄타쿨.
용감한 베텔기우스.
울지 않는 세미토우르.

그리고…….
나는 이들의 아버지이자, 만물의 창조주.

전능한 자린.



1장 시론 최후의 날(1)


……해서 육지와 바다는 검은 열기로 뒤덮였다.
누미비아의 어부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함을 원망스러워했고, 볼란의 기름진 대지에서 썩어 문드러진 호박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피난민들의 행렬은 엘 카로 산맥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왕궁을 향해 끝없이 이어졌다.
남부의 얼음이 그분의 숨결로 인해 녹아 사라지고, 신성한 이의 육중한 걸음은 팔십여 도시를 몰락케 했다.
무엇이 신성한 이의 분노를 이끌어 냈는지…….

틱.
크로우펜이 부러지며 머금었던 먹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펜의 주인은 얼굴에 튄 먹물을 닦지도 않고, 이제는 제 존재가치를 상실한 도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흠…….”
주름진 눈가에 달라붙은 피로로 인해 꽤 초췌해 보이는 노인.
뒷머리 부분만 살짝 덮은 후드와 실크 빌로드 재질의 의복은 노인의 고귀한 신분을 짐작케 해 준다.
“여기까지인가.”
노인의 주름 가득한 손이 무언가를 쓰던 두꺼운 책을 조용히 덮었다.
끼이이익.
노인이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권좌 멀리서 들어오는 빛에 잠시 찡그러졌다.
철컥, 철컥.
양쪽에 늘어선 이십 개의 화강석 기둥을 지나 노인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
은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갑옷에서 쇠가 마찰하고, 왕국의 상징인 시론의 새를 수놓은 붉은 망토가 그의 걸음을 따라 출렁거렸다.
“렉시우스.”
노인의 입에서 사내의 이름이 나왔다.
“중부의 지배자시며, 오왕국의 통치자이시고, 아홉 자치령의 보호자요, 몰루크의 승통…….”
“아, 그만 되었네. 이제 남은 것은 없지 않은가.”
왕을 대할 때 의례적으로 읊어야 하는 축언을 중지시킨 노인이 렉시우스를 향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노인의 이름은 에드문트 라 포이젤 4세.
트라린 대륙 최대의 왕국, 시론의 왕이다.
“그래, 하늘은 맑아졌는가.”
“더없이 화창하나이다.”
“요 며칠 저 문을 통해 나갈 일이 없었다네. 흐린 하늘을 보기 싫었던 게지.”
렉시우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포이젤 4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끄응, 나 좀 부축해 주겠나?”
“기꺼이.”
두 사람은 긴 회랑을 따라 빛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오랫동안 거동을 하지 않았는지 포이젤 4세의 걸음이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
“시원하군.”
어느새 왕국의 수도인 아르 시론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성벽 입구에 이른 두 사람.
“……전하를 위해 하늘도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렉시우스는 입으로 축복을 말하고 있지만, 결코 그것이 아님을 서로가 잘 안다.
늙은 왕의 시선이 푸른 하늘에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거쳐 멀리 보이는 농토에 닿았다.
“평화로워. 영원히 그대로일 것처럼.”
“선대왕들께서 이룩하시고, 전하께서 지켜 오신 평화이옵니다.”
“자네 아버지와 형제들의 죽음으로 지켜 온 것이라네. 수없이 많은 백성들의 피 또한 바쳐졌고.”
마지막으로 포이젤 4세의 눈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수도 시민들의 모습에 고정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북쪽 성벽으로 끝없이 이동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늙은 왕의 얼굴에는 비탄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것은 평화가 아니지…….”
아직 왕의 눈이 어둡지 않음을 안 렉시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되었나.”
“……세 개 기사단과 열두 보병대, 이름난 도기 용병단의 활약은 정말 눈부셨습니다. 그들의 용맹은…….”
“결과만 말해 주게나. 내 이 심장은 그 무엇으로도 쉬이 멈추지 않는다네.”
“그분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으로 보였습니다.”
“전멸이로군.”
예상했던 바였다.
남부 팔십여 도시와 왕국을 수호하는 절대의 방어 요새 켄릴을 함락시킨 존재는 더러운 배신자들과 녹터널 헌터들, 늪의 요정들과 푸른 산호섬의 해적들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스승이었던 신성한 이.
거기에 더해 그분을 아버지로 여기던 신룡족, 아니, 이제는 흑룡족이라 불러야 할까.
“왕국 수비대 전원이 파란티데 평원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은 전하를 향한 충성과 왕국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
“다들 물리게나.”
“예에?”
“불필요한 죽음은 남은 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하오나, 전하.”
“내 백성들의 안전을 그들에게 맡기게. 그것이 진정 왕국을 위한 길이야.”
“…….”
우르릉.
파란티데 평원 너머에서 거대한 먹구름과 함께 천둥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렸다.
렉시우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포이젤 4세의 얼굴과 먹구름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드래곤 브레스……. 그분께서 직접 오시는 모양이로군.”
포이젤 4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일까.
아니면 변해 버린 스승을 두 눈에 담아야 한다는 아픔일까.
“렉시우스 미나투르 폰테우스.”
척!
국왕이 근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렉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대에게 수비대, 아니지, 호위대를 총지휘하여 시민들을 북쪽 끝 용암의 바다로 인도하길 명하노라.”
“저, 전하.”
이건 아니다.
누구보다 왕국과 국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렉시우스는 죽음으로 그것을 증명코자 했었다. 하지만 포이젤 4세는 지금 렉시우스에게 생존을 명한다.
눈앞에 국왕의 죽음을 보고 있어야 한다니, 그에게 더할 수 없는 비참함이자 모욕이자, 견딜 수 없는 좌절감을 선사할 것이 분명했다.
하나 주군께서 그러길 원하신다.
……자신은 신하. 명령하는 이는 자신의 왕.
“왕으로서 마지막 명령이네. 더 할 말이 있는가.”
철커덕, 풀썩.
렉시우스는 국왕의 면전에 엎드려 격하게 흐느낄 뿐.
“이보게.”
“흐윽…… 말씀하소서.”
“가는 길이 꽤 험난할 터, 자네에게 선물을 주고자 하네.”
“선물…… 이라시면.”
국왕의 얼굴에 살짝 편안함과 더불어 미소가 잡혔다.
“호난의 태양과 아슐라탄의 창.”
고개를 든 렉시우스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뜨였다.
“오왕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이라네.”
“전하! 제가 어찌 감히…….”
“되었네. 이제 자네가 주인이야. 나의 손을 부끄럽게 하지 말게나.”
오열하는 렉시우스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거리는 포이젤 4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뚜벅, 뚜벅.
어두컴컴한 회랑을 지나는 규칙적인 발소리.
마치 꺼져 가는 심장의 느릿한 박동 소리를 상징하듯 길고 우울하게 울려 퍼졌다.
거의 하루가 지났다.
이제 이 화려했던 도시에 남은 인간은 국왕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끔찍이도 아꼈던 왕자들과 공주들, 왕후와 비빈들 모두 사라졌다.
자식들 대부분은 신성한 이의 분노가 세상을 향한 그때, 대륙의 남쪽 지방 인간들과 더불어 죽음을 맞이했다.
역대 왕들과 그 형제들이 그러했듯 신성하고 자비로우며 총명한 이들 아래에서 고귀한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홀로 원형의 계단을 올라 왕궁 꼭대기까지 올라간 포이젤 4세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노쇠한 몸에 흐르던 땀을 식혀 주는 것을 느꼈다.
“하아…….”
어느새 검은 안개가 도시를 뒤덮었다.
하늘을 가렸던 먹구름은 안개가 되어 지상에 흐르고, 그에 닿은 모든 것들이 부식되어 무너져 내렸다.
아득한 고대의 학자들과 마법사들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용의 숨결.
긴 세월 동안 그 숨결은 축복과 번영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멸망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왕궁 아래까지 흘러온 검은 안개가 벽을 타고 서서히 높이 솟은 첨탑 근처까지 올라왔다.
트득.
와그작.
단단한 돌 벽이 조금씩 흔들렸다.
몇 번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포이젤 4세는 안개 속에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위대하신 분…… 정녕 당신이십니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점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헤아리기조차 힘든 세월. 인간과 요정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스승이셨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신 조정자였으며, 용암의 바다 너머 죽지 않는 자들로부터 대륙을 보호해 오신 당신이 맞으십니까?”
그르릉.
창에 찔려 신음하는 사자의 슬픈 울음과 같은 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려왔다.
“신성한 아르 호바. 꺼지지 않는 하얀빛의 수호자시여.”
아르 호바.
그들 용족의 언어로 ‘아르’는 백룡을 뜻한다.
그리고 이곳 아르 시론은 유일한 백룡 아르 호바를 기리기 위해 건설된 도시.
“당신을 칭송하고 당신을 위해 명예로운 삶을 살아온 우리입니다. 대체 무엇이, 누가 당신에게 우리의 멸망을 바라도록 만들었습니까!”
순간, 수억 마리의 코끼리가 동시에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도시를 강타했다.
위태하게 유지되던 건물들이 형체도 없이 붕괴되고, 철과 돌로 지어진 왕궁도 곳곳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드래곤 로어.
용의 포효는 반경 10㎞에 달하는 도시를 단번에 흙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왕궁은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찬란했던 수도가 폐허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포이젤 4세의 얼굴은 비통함으로 가득했다.
번쩍! 콰쾅!
검은 안개 속에서 천둥과 번개가 몰아쳤다.
잠시 후, 숨결을 헤치고 공포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