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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화)
1장 시론 최후의 날(2)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머리.
붉게 찢어진 두 눈에서는 열기가 흐르고, 잔뜩 일그러진 피부를 따라 푸른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길게 튀어나온 아가리는 인간 남성 오십 명을 거뜬히 물어 죽일 수 있을 만큼 컸으며 그 사이로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누런 침을 머금고 있었다.
검은 숨결을 흐트러뜨리며 다가온 어마어마한 용의 위용에 포이젤 4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잠식당한 국왕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포이젤 4세였지만, 그는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용의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누가라고 했는가…….
용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나를, 우리를 파괴자로 각성케 한 존재는 너희들이니라.
“압니다! 알아요! 당신께서 주셨던 사랑과 가르침을 보존치 못하고 작은 욕망에 눈이 멀어 전쟁과 다툼을 일삼던 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방관해 오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어리석고 가련하도다……. 나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에드문트여. 그것은 방관이 아니었도다. 기회이고 기다림이었나니.
“기회이고 기다림이라니요?”
―너희의 지혜로, 너희의 의지로 전능한 자린께 닿을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우리의 기다림.
“하, 하하, 우하하하하하!”
포이젤 4세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 스민 비애는 간장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전해 왔다.
“수천 년을 기다리셨던 아르 호바여. 인내의 세월이 너무나도 힘드셨습니까.”
―우리 또한 그 기다림 속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
아르 호바의 붉은 눈이 서서히 식어 갔다.
마치 인간의 것과 같은 검은색 동공을 드리우며 용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이 땅의 인간을 지우고, 모든 대륙의 생명체를 말살하셔야 할 만큼 큰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모든 생물들이 두려워하며, 지혜로웠던 이들은 당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할 만큼 당신은 커다란 지혜를 얻은 것입니까?”
포이젤 4세가 절규했다.
“틀렸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한 마리 미친 마수일 뿐, 깨달음을 얻은 현자의 모습이 아니오!”
―친구여…….
포이젤 4세는 문득 용의 숨결에서 예전의 따뜻함을 느꼈다.
―헛된 욕망의 그늘 안에서 태양을 거부했던 인간들이여.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로 탄생한 허물들이여.
“죄의 대가? 허물? 세상 만물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지혜로운 하얀 용, 아르 호바시여!”
―난…… 제르 호바.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흑룡이라.
스스로 검은 용을 뜻하는 ‘제르’라 칭함으로써 신성한 용은 세상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화아악!
제르 호바의 눈이 다시 붉게 타오르고.
수백 개의 이빨이 갈리며 그 사이로 불길이 튀어나왔다.
포이젤 4세의 눈에 제르 호바의 머리가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심연의 동굴과도 같은 어둠 아래에서 화염이 맴도는 광경을 보았다.
늙은 왕은 눈을 감았다.
이글거리는 드래곤 블레이즈.
그 초열의 지옥을 시작으로 문명은 사라지고 암흑만이 남았다.



2장 죽음이 주는 경고(1)


멸망 1년.
일라신이 수확의 기쁨을 노래하는 달.

신성한 백룡, 아르 호바가 인류와 모든 자연물에게 선전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진군으로 단 하루 만에 시론 오왕국 중 하나인 남부의 엘 카로는 잿더미로 변함.
아르 호바와 함께 트라린 대륙을 관할하던 자비로운 일라신과 총명한 탄타쿨도 인류에게 등을 돌림.
지고한 고대용들을 따르던 신룡족은 그들 스스로 흑룡족이라 칭하며 군대를 소집.
강인한 엘 카로의 수호 기사들과 정예병들, 막강한 마법사들이 녹터널 헌터가 되었고, 대지와 숲, 얼음의 요정들 전체가 늪의 요정들로 변모함.
푸른 산호로 가득했던 해양 국가 오르시는 나라 전체가 시론을 배신하고 해적이 되었음을 선언.
7일 후, 남부의 40여 도시 몰락.

멸망 1년.
레스모이가 차가운 입김을 드리우는 달.

900만에 이르는 암흑 군대가 조직.
엘 카로의 검은 마법사 롱 버트, 오르시의 해병 총사령관 토타르퍼스, 발타나의 왕자 노림, 츠카이오 제일의 마검사 헤싸카.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네 명의 초인들은 제렌 디스―흑룡의 종복―라는 이름으로 뭉쳐 암흑 군대를 담당.
암흑 군대 중 600만은 트라린 대륙에, 나머지 300만은 다른 세 개의 대륙으로 흩어짐.
각 대륙에 머물던 나머지 고대의 용들, 아르 호바에게 호응하여 지상에 현신. 대륙을 건너온 암흑 군대와 합류하여 인류 문명을 파괴하기 시작.

멸망 1년.
탄타쿨이 별을 바라보는 달.

그 존재 목적이 불분명했던 방어 요새 켄릴, 열흘 만에 함락.
이때까지 왕국 시론이 보유했던 병력의 8할이 산화.
왕국의 수비 대장 폰테우스는 남은 병력을 규합해 파란티데 평원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

멸망 2년.
자린이 미소 짓는 달.

시론의 국왕, 포이젤 4세. 항전을 포기하고 남은 국민과 병사들을 북부로 피신시킴.
왕국의 보물 호난의 태양과 아슐라탄의 창―또는 검―이 폰테우스에게 수여됨.
같은 달, 시론 멸망. 동시에 백룡 아르 호바는 흑룡 제르 호바로서 세상에 군림.

멸망 2년.
아르 호바가 지혜를 전하는 달.

모든 대륙들에 걸쳐 인간이 이룩했던 문명의 9할이 사라짐.
화염의 라흐다, 차가운 레스모이가 트라린 대륙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동.
울지 않는 세미토우르, 그녀가 지배했던 대륙 이라스에서 인간의 잔여 세력에 최후 통첩을 보냄. 이때 북쪽에서 미묘한 움직임이 감지됨.

멸망 2년.
라흐다의 불이 한풍을 잠재우는 달.

용감한 베텔기우스, 처음으로 진격을 멈추고 제르 호바의 뜻을 거부함.
분노한 제르 호바가 베텔기우스를 호출하였으나 이 또한 거부.
암흑 군대가 트라린 대륙 중부와 북부를 나누는 거대 산맥, ‘춤추는 뱀’ 근처에 주둔을 시작.

멸망 2년.
베텔기우스가 씨앗을 뿌리는 달.

자비로운 일라신이 제르 호바에 반기를 들고 춤추는 뱀 산맥 북부로 피신.
그곳에서 저항군을 이끌던 폰테우스에게 용언을 가르침.
얼마 후, 폰테우스가 인간 최초로 흑룡족의 장군을 격살하여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림.
그리고…….
이라스 대륙 북부에서 그들이 나타남.
이제껏 사태를 관망하던 ‘죽지 않는 자들’이 용암의 바다를 넘어와 세미토우르의 군대와 격전을 벌임.
엄청난 군세와 무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암흑 군대를 남쪽으로 밀어냄.
인류의 잠재적인 위협으로 규정되었던 그들이 왜 인류를 위해 제르 호바의 암흑 군대에 공격을 가했는지는 불명.

멸망 2년.
세미토우르가 비를 내리는 달.

죽지 않는 자들, 이라스 대륙을 점령. 세미토우르와 암흑 군대는 트라린 대륙으로 물러남.
그리고 같은 공격이 트라린 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2개 대륙에서 벌어짐.
베텔기우스, 죽지 않는 자들과 전쟁을 포기하고 잠적. 그에게 속해 있던 제렌 디스인 헤싸카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트라린 대륙으로 후퇴.
제르 호바, 고대용으로 현신하여 죽지 않는 자들의 땅으로 떠남.
전권을 위임받은 라흐다, 전군에게 북부로 진군할 것을 명령.

멸망 2년.
일라신이 수확의 기쁨을 노래하는 달.

암흑 군대가 산맥을 넘기 직전.
용감한 베텔기우스, 완전 무장한 중간체로 현신하여 암흑 군대의 앞에 재등장.
푸른 용은 수백만 군세와 홀로 대적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혀 그 용맹함을 세상에 과시.
그러나 마지막 결전의 장소인 포트 할라드에서 레스모이와 긴급히 투입된 세미토우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함.
왜 베텔기우스가 일라신의 편에 섰는지 그 이유는 불명.

멸망 2년.
레스모이가 차가운 입김을 드리우는 달.

일라신, 시론의 잔존 세력 및 북부인 전체를 모아 반격을 시도, 춤추는 뱀 산맥 전역에서 대전투를 벌임.
전술적 후퇴를 통해 암흑 군대를 북부의 초원과 열대우림 지역으로 끌어들인 뒤, 결국 전략적 승리를 얻어 냄.
암흑 군대, 산맥 이남으로 후퇴. 이후, 춤추는 뱀 산맥은 자비로운 용의 이름을 따서 일라시니아 산맥이라 불림.
암흑 군대가 패배하였음에도 제르 호바는 돌아오지 않음.

멸망 2년.
탄타쿨이 별을 바라보는 달.

트라린 대륙 외, 전 대륙에서 암흑 군대의 자취가 완전히 말살됨.
동시에 죽지 않는 자들, 더 이상 개입을 멈추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감.
세미토우르는 베텔기우스에게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유력.
드래곤 하트가 부서지지 않는 한, 용은 생명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략을 시도하던 레스모이.
잠시 전투를 멈추고 일라신과 회담 중 느닷없이 본체로 현신해 버린 일라신이 그에게 드래곤 블레이즈를 쏟아 냄.
레스모이 전사.
이후 암흑 군대는 남쪽으로 끝없는 후퇴를 시작함.

멸망 3년.
자린이 미소 짓는 달.

화염의 라흐다, 후퇴 중 행방불명.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남부에 머물던 총명한 용, 탄타쿨에게 자동적으로 군권이 넘어감.
탄타쿨, 암흑 군대의 패배를 선언.
더불어 전군에 해산을 명함. 전쟁의 종식이 가까워 옴.
이에 반발한 제렌 디스 롱 버트와 헤싸카, 노림은 병력을 수습해 얼음 대지 경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중부로 진격을 준비.
이는 흑룡족이라 불리던 드래곤들 대부분이 베텔기우스에게 참살당했기에 인간인 제렌 디스들의 위상이 커진 결과였음.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제렌 디스 토타르퍼스는 이때 종적이 묘연해짐.
탄타쿨, 일방적으로 암흑 군대를 공격.
고대용으로 현신한 탄타쿨, 종전을 거부하고 반항하는 암흑 군대 전체를 녹여 버림.
세 명의 제렌 디스들, 간신히 살아남아 얼음 아래로 피신.

멸망 3년.
아르 호바가 지혜를 전하는 달.

흑룡 제르 호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용암의 바다를 걸어서 넘어 트라린 대륙 북부에 등장.
그와 죽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음.
제르 호바는 그 어떠한 자연물에도 손상을 입히지 않고 그대로 남부를 향함.
그를 막아선 일라신,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책임을 물어 제르 호바를 공격.
현신한 두 드래곤의 싸움으로 북부의 일부 지역이 황폐해짐.
결국 일라신은 제르 호바의 브레스에 형체를 잃고 사라짐.
이후 제르 호바는 3일 만에 얼음 대지에 도착.
그곳에서 제렌 디스들에게 동면을 명하고 탄타쿨과 대면.
둘의 대화는 열흘 가까이 이어졌고 그 후, 탄타쿨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음.
제르 호바가 그를 살해한 것으로 짐작할 뿐.

멸망 3년.
라흐다의 불이 한풍을 잠재우는 달.

제르 호바, 예언을 남기고 스스로를 대기 중으로 분산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