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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3화)
2장 죽음이 주는 경고(2)


이후, 석기시대로 돌아갔던 인류는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의 지식과 기술, 지혜를 통해 수천 년간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함.



/옛 전설의 조각 모음, 요약본.
발신 : 비스텐지아 농업학교 8학년, 데일 잉그하임.
수신 : 비스텐지아 농업학교 문학 교사, 아타르 슈네인.

지난 수업 때 과제로 주신 ‘중앙어로 쓰인 흑룡의 예언, 해독.’은 방학 끝나고 제출할게요. 감사합니다.
제자 데일이.


***

로슈르 제국의 수도 라로시르로부터 동쪽으로 80㎞ 떨어진 어느 평원.
음울한 달빛만이 흐리게 퍼지는 대지에 일단의 무리들이 행군을 하고 있었다.
척척척척!
날이 선 미늘창과 은색의 투구가 달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그 수는 약 오십. 차려입은 가죽 전투복 위에 걸친 철구는 이들이 제국의 정규군임을 알려 준다.
그들의 조금 앞에는 체인 메일을 입고, 활을 뒤로 두른 열 명의 경기병들이 말에 올라 터덜거렸고 더 앞쪽으로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판금 갑옷 차림의 기사들 여섯이 있었다.
“정지!”
부관의 외침에 부대원들 전원이 멈췄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하며 수색대를 기다린다!”
대열의 맨앞에 있던 기사가 샐릿을 들어 올렸다. 허연 김을 훅 하고 뿜는 중년의 미남자.
그의 가문 ‘모로’를 상징하는 갈색 멧돼지가 그려진 망토가 약한 바람에 흔들린다.
“이제 복귀하실 겁니까.”
기사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기사의 질문을 받은 지휘관 러델 모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기사는 곧 모로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기사들과 경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자신들의 애마를 쓰다듬었고, 보병들은 보초들을 제외하고 전원 땅에 앉아 투구를 벗고 땀을 닦는다.
“뭐야, 결국 심술이 맞네.”
보병 하나가 옆의 동료에게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차라리 훈련을 하라고 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이들의 태도로 보아 야간의 수색 및 행군에 대해 불만이 상당한 듯했다.
처음 말을 걸었던 병사가 지휘관 모로를 슬쩍 흘겨보았다.
“이런 짓만 안 하면 참 멋진 분인데. 안 그런가?”
“습관이라고 하더구먼.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두드러기가 난다나?”
“킬킬킬킬.”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잡담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때론 욕설이 나오기도 했고 심한 경우 음탕한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삐익!
부관의 신호에 병사들의 소곤거림이 일시에 멈췄다.
부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멀리서 횃불을 들고 복귀하는 수색대가 보였다.
“저 봐. 아무 일 없다니까. 아마 쟤들도 속으로는 쌍욕을 지껄이고 있겠지.”
삐익!
다시 한 번 부관이 신호를 불었다. 한데…….
복귀 중인 수색대에서 같은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휴식 끝! 전원 기립!”
철컥, 철커덕.
보병들이 빠르게 일어나 창을 들었고, 경기병들은 말에 올라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다섯 기사들만이 모로의 주변으로 다가가 멀리 아른거리는 횃불을 응시한다.
삑! 삑! 삐이익!
부관이 세 번의 신호를 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은 없었다.

“뭐야? 쟤네들.”
누군가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병사들의 눈에 수색대의 횃불들이 그 자리에서 정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래?”
“열 받아서 돌아 버렸나.”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것을 시작으로 은근한 두려움이 퍼지기 시작했다.
부관의 지시로 경기병 하나가 말을 달려 수색대에게 달려갔다. 그가 들고 있는 횃불의 흔들림이 병사들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듯했다.
기사들이 자신들의 말에 올랐다.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함일까.
순간 수색대에게 다가가던 경기병이 들었던 횃불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탄 말은 수색대를 지나 먼 평원으로 끝없이 멀어진다.
“헐!”
순간 이곳에 모인 대다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들은…… 수색대가 아니다.
“보병! 밀집 대형으로 전환!”
부관이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그에 맞추어 보병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마치 고슴도치 같이 창을 세우고 방패를 들어 서로를 방어해 주었다.
경기병들은 활을 풀어 살을 먹인 뒤 시위를 당긴 채 ‘적’들에게 겨누었다.
마지막으로 기사들이 샐릿을 눌러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말에 걸어 두었던 랜스를 뽑아 허리에 걸친다.
“모로 경…….”
약간의 불안을 담은 음성으로 기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로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한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경께서 예정에 없던 수색 작전을 명하신 이유가 혹시 저쪽 정체불명의 자들과 연관이 있습니까.”
“…….”
“저희야 지시에 따라 움직였지만, 솔직히……”
기사의 말은 이곳에 있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남부를 제외하고 대륙에 평화가 정착된 지 80여 년이 지났다.
북부의 약탈자들은 제국의 경제력에 예속되어 더 이상 침략을 행할 수 없었고, 다른 대륙에서도 이 땅을 넘보지 못한다.
한데 뜬금없이, 그것도 수도에 비교적 가까운 이곳에서 미지의 ‘적’일지도 모르는 자들과 마주하다니.
어쩌면 일라시니아 산맥을 몰래 넘어온 도적 무리들이거나, 악명 높은 이라코스타 대륙의 해적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튼튼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뚫고 이곳까지 들어올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 내부에서 자생한 역도의 무리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곡식은 넘치고 물산은 늘 풍부했으며, 각종 복지 혜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사회의 최하류층인 농노들조차 타 지역으로의 이동과 몇몇 신분상 제약을 제외하고는 재산을 모으거나 자유로이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제국 내 불만 세력이 나타날 기반 자체가 없는 것이 당금의 현실.
감히 제국 정규군을 향해 이빨을 들이대는 저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
답답한 이들의 심정과는 달리 모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돌린다.

휘이이잉―
바람이 먼지와 마른 풀을 허공에 날렸다. 그리고.
아른거리던 적의 횃불들이 일제히 땅에 떨어졌다.
다그닥, 다그닥!
놈들이 말을 달려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 수는 못해도 삼십.
넷으로 나누어 정찰을 나갔던 수색대에 포함된 기사와 경기병들 전원의 숫자와 거의 일치했다.
지축이 울리자 병사들의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을 용기로 가장하는 방법을 훈련으로 극복했다.
다만, 아군이라 여겼던 이들이 적으로 변해 공격을 가해 오는 이 상황만큼은 합리적인 이해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에 남아 여전한 공포를 선사한다.
두두두두두두!
상대가 전력을 다해 달려온다. 이대로 가다간 보병들의 밀집 대형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불을 던져라!”
부관의 외침에 기병들이 들고 있던 횃불들을 보병대 앞쪽으로 던졌다.
적의 말들을 놀라게 하여 상대를 낙마시키려는 수단이었다.
그중 하나가 비교적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적 하나가 순식간에 그 횃불을 스쳐 온다.
“어?”
누군가가 짧은 순간 불에 비쳤던 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입은 갑옷과 두르고 있는 망토는 제국군의 것이었다. 그것도 모로 가문 휘하의 기사임을 나타내 주는 갈색 멧돼지가 그려진.
그런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머리가.
딱딱하게 굳은 자세 그대로 랜스를 옆구리에 꽉 낀 목 없는 기사.
그의 의지는 사라졌으나 타인의 뜻에 따라 아군이었던 이들을 향해 진격해 온다.
이히히힝!
횃불들 앞에 이르자 기사가 탔던 말이 앞발을 들며 울부짖었다. 그제야 말 주인의 상태를 확인한 다른 병사들이 짧은 신음을 삼킨다.
“흐읍!”
순간 뒤따라오던, 마찬가지로 머리를 잃은 기사와 기병들이 탄 말 일부가 방진을 덮쳤다.
“끄악!”
몇 명의 보병이 말에 밟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말들은 길이 막히자 더 이상 뛰지 않고 허우적거렸다.
쉭! 쉬익!
뒤의 경기병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머지 말들을 향해.
엄격한 훈련 덕분에 기병들은 무리 없이 속사를 감행했고, 달려오던 말들 대부분이 살에 꿰어 구슬프게 울며 쓰러진다.
이미 대형을 어지럽혔던 말들을 진정시키고 몇 명이 말 위의 시신들을 끌어내었다.
잘린 단면에는 말라붙은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하얀 목뼈가 불빛에 비쳐 소름끼치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병사들의 거의 전부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이들이다.
대륙 남부 격전지에 복무하지 않는 한, 평생 전우의 죽음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이들이 동료의, 그것도 끔찍하게 살해당한 시체를 보았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확실한 공포가 되어 모두를 짓누른다.
“우웩!”
누군가 구토를 했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자신들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
“진정하고 대형 유지해!”
슬쩍 돌아본 부관의 얼굴도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만 모로만이 침착하지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을 뿐.
그는 이러한 사태를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바라지 않았지만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라도 한 것일까.
멀리 서 있던 그림자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에는 수색대에 포함된 보병들이라 여겼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긴 침묵이 이들을 사로잡았다.
약간의 바람 소리.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누군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족쇄처럼 이들을 묶어 둔다.
활을 겨누고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던 경기병 한 명의 눈에 식은땀이 들어갔다.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깜박거리던 그는 순간 목젖이 화끈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이 갑자기 하늘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가 머리를 땅으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이.
툭.
뒤통수에 미미한 감각이 잠시 일었다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목을 잃고 하늘 높이 피를 뿌리는 자신의 몸뚱이를 보며 죽음의 세계로 들어갔다.
툭. 툭.
여기저기서 경기병들이 굴러 떨어졌다. 전부 목이 잘린 채로.
“적이다!”
기사 하나가 소리치며 랜스를 버린 뒤 롱 소드를 뽑았다.
그의 눈앞에 번쩍이는 가느다란 빛. 기사는 본능적으로 롱 소드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팅!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전투가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