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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4화)
2장 죽음이 주는 경고(3)


처음 희생자들은 밀집 대형 밖에 위치했던 경기병들이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어두운 그림자들은 동시에 그들의 목을 끊어 버렸다.
그림자들을 발견한 다섯 기사들이 먼저 살벌한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결국 말에서 내려 모로를 중심으로 원형을 유지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의 무기를 쳐 냈다.
부관 또한 서둘러 대형 안으로 진입해 보병들을 지휘했다.
삑!
신호에 맞추어 보병대가 방패를 모았다.
사방으로 뻗친 미늘창은 적어도 2~3m 정도 적들의 접근을 막아 줄 것이다.
척! 척! 척!
방진이 발맞추어 기사들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그곳을 중심으로 움직였기에.
모든 병사들이 같은 공포에 잠식된 상태. 그러나 조밀하게 짜인 대형의 정면, 또는 측면을 뚫고 들어올 적은 없었다.
휙!
어둠들이 순식간에 기사들에게서 멀어져 눈앞에서 사라졌다.
기사들의 단단한 갑옷 여기저기에는 가는 금들이 그어져 있고 양손으로 쥔 롱 소드도 벌써 날이 상했다.
“헉…… 헉…….”
기사 하나가 참았던 숨을 뱉으며 힘겨워했다.
“여기 계속 버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부대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태양의 축복은…… 밤의 사나움에게서 우릴 지켜 줄 수 없으니까요.”
다른 기사가 모로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모로는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표정.
병사들 모두가 모로를 바라보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때, 방진이 뚫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은 내부에서 나타났다.
스걱.
발목이 잘린 병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너졌다. 갑자기 쓰러진 동료를 바라보는 자의 눈동자에, 쓰러진 병사의 목젖에 어둠이 뾰족하고 가느다란 송곳을 쑤셔 넣는 장면이 맺혔다.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굳은 채 그것을 바라보는 병사를 향해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밤과 동화된 듯 칠흑 같이 검은 망토와 거기에 연결된 후드.
그 아래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입은 입술이 없어 날카로운 치아만이 번들거린다.
풀썩, 풀썩.
몇 명이 더 쓰러지며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들어왔다! 컥!”
누군가가 적의 출현을 알리다 말고 발목에서 피를 뿌리며 넘어갔다.
“산개! 산개!”
부관의 울부짖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뒤에 벌떡 일어난 그림자가 부관의 척추를 가른 뒤, 목을 뒤로 돌려 버렸기 때문.
부관이 내린 마지막 지시는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다.
병사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다섯 씩 짝을 이루어 흩어졌고, 지금과 같은 어이없는 죽음은 일단 피할 수 있었다.
“젠장!”
팅!
기사 한 명이 등을 치고 튕겨 나간 공격에 욕을 쏘아 내며 롱 소드를 휘둘렀다.
적은 그 궤적을 가볍게 흘리며 다시 기사에게 육박한다.
팅! 티잉!
적의 무기가 기사의 갑옷과 무기에 부딪치며 작은 불똥을 튀겼다. 불똥들이 사라지면서 허공에 안개와 같은 무언가를 내뿜는다.
태양의 은혜.
태양을 숭배하는 로슈르 제국의 정통 사제들이, 공인된 기사들에게만 부여한다는 축복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축복은 무척이나 희미해 보였다.
밤의 상징은 달과 어둠.
태양과 빛으로부터 보호받는 기사들에게 밤은 취약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기사 한 명당 그림자 둘이 붙었다. 그리고 모로에게는 무려 다섯이.
병기들이 내는 굉음 속에서 흩어진 보병대도 본격적인 전투에 임했다.
가가가각!
그림자 하나가 병사들을 가르고 지나가자 조밀하게 들었던 방패들이 피해를 막았다.
“찔러! 여기야 여기!”
소리치는 자의 음성은 매우 다급했다.
다들 정신없이 창을 질렀다 빼며 혼돈에 빠져 있을 때, 한 무리의 적들이 넷으로 줄어 버린 다른 병사들을 빠르게 덮쳤다.
일제히 쓰러져 당황하는 그들을 포위한 그림자들이 레이피어와 흡사한 형태의 검을 들어 올려 사납게 내려찍었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반복적으로 찍었다 빼는 검을 따라 튀기는 핏물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우…… 우윽!”
기사 하나가 고통스러워하며 무릎을 꿇었다.
갑옷의 틈, 겨드랑이 부분을 깊게 찔린 그가 무기를 떨어뜨리자 적이 다가와 샐릿을 벗기고 목을 긋는다.
보병들도 점점 숫자가 줄었다. 이제 두 개의 분대만이 남아 힘겹게 방어를 지속했다.
푹!
살을 파고드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또 한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

달린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인간이 이처럼 빨리 달릴 수 있기나 한 걸까. 웬만한 말이 달리는 속도를 능가할 정도.
“제기랄!”
전력으로 질주하면서도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던 이의 입에서 짜증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우릴 기다리지 못했나!”
누구를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것일까.
“피 냄새가 여기까지 풍기고 있다. 거의 다 온 듯.”
옆에서 다른 이가 말했다.
“저기다!”
칭!
소리치던 자가 무기를 빼들었다. 동시에 함께 이동하던 모든 이들도.
멀리서 병기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이들이 본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오십에 이르던 보병들과 열 명의 기병들 전원이 비참하게 죽어 있었고, 기사도 단 한 명만이 남았다.
끝까지 버티던 그는 사내들이 채 도달하기 전, 그림자의 공격에 결국 목숨을 잃는다.
모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사내들과 그림자들이 붙었다.
이쪽의 숫자는 열이 넘었고, 적들은 겨우 둘.
두어 번의 공방으로 적의 머리를 날려 버린다.
“……다 해서 삼백이 전멸이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상대는 일당백의 괴물들인데.”
으드득.
이를 갈며 누군가 말했다.
전부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이 느끼는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콰아아아아!
멀리서 불꽃이 솟았다.
“커맨더 모로!”
사내들이 소리치며 그쪽을 향해 날았다.

모로는 무려 이십이 넘는 그림자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주변에 흩어진 시체들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방금 솟았던 불꽃에 의한 공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로의 구원자들이 그림자들을 덮쳤다.
다시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까 보병들과는 달리 상당한 실력으로 적들을 몰아내는 사내들.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빠르게 그림자들을 헤치고 모로의 곁에 이른다.
치이이이.
모로가 흘린 땀이 그의 갑옷에 닿자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어찌 된 겁니까!”
“보다시피.”
숨을 고르던 모로가 차분히 대꾸한다.
“당신께 전언을 보낸 것은 이렇게 행동하라 한 뜻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자네들을 기다리고 또 경계를 강화하라는 의미였겠지.”
“한데 왜요!”
“보고 싶었거든. 황금 비늘의 주인을.”
모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 낮에 만났던 소년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웃음 속에 거대한 광휘를 감추고 있었던.
“나에게,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 존재들이 아닌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당신을 포함해 삼백, 아니, 이제는 우리까지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잖습니까.”
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왔음을 알리는 사내다.
“뭐,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이었어. 한데 그를 만나고 나니 깨닫게 되더군.”
“무엇을요.”
“그는 단순히 우리가 이름 붙인 ‘운명의 중심’으로서 존재하는 이가 아니라는 것. 수십 평생을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온 내 직감이라고 해 두지.”
사내는 침묵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주인께서도 그렇고, 자네들도 그래. 한없이 긴 시간은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지. 대를 이어 지켜 온 우리의 사명 또한. 난 그것을 경고해 주고 싶었네.”
“일부러 놈들을 유인했다는 말씀이군요. 당신의 죽음으로 주인께 상황의 심각성을 경고하겠다는…….”
“또 있어.”
모로가 주변에 늘어선 그림자들을 빙 둘러본다.
“아마 보고 있을지도 몰라.”
“예?”
“그의 무한한 능력은 마주했던 모든 것들의 운명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전설이 아닌 진실 어린 역사라면……?”
사내가 풋 하고 웃었다.
“짓궂으십니다. 그에게 죽음이라는 숭고함을 통해 더 큰 짐을 지우려 하십니까.”
“맞아. 그리고 이곳은 ‘자린’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불태울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림자들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대열이 갈라지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다른 적들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을 한 그는 그림자들을 이끄는 지위에 있음이 분명했다.
달빛조차 흡수해 버린 듯, 깊은 어둠만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촉수처럼 너울거렸다.
“두목이로군. 녹터널 헌터…….”
“스타비챠.”
으스스한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 기괴한 목소리가 썩어 버린 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스릉.
모로가 놓았던 롱 소드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 검면에 쓰인, 뜻 모를 고대어를 타고 열기가 흘렀다.
휙!
적의 수장을 먼저 제거함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고래로 최선의 전략이다.
게다가 놈은 모로의 코앞에 있지 않은가. 스타비챠라 불린 이들 중 두 명이 먼저 날았다.
평범한 성인을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두목에게 접근한 두 스타비챠의 검이 번뜩였다.
놈이 목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츠아앗!
가느다란 무언가가 그들을 휘감았다.
“커억!”
그것은 가시덩굴이었다.
두목의 망토 아래에서 뻗어 나온 덩굴이 어느새 둘을 꽉 조인 채 허공에서 하늘거렸다.
빠지직.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덩굴. 그것이 인간의 육체를 강하게 조인다.
퓻!
가시에 찔린 구멍에서 피가 튀었다. 입까지 틀어막은 덩굴로 인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스타비챠들.
덩굴에 힘이 가해졌다 느낀 순간, 두 생명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져 버렸다.
퓨악!
후두둑.
핏물과 살점이 공중에 잠시 머물다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사납게 내리는 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