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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5화)
2장 죽음이 주는 경고(4)
꿀꺽.
“우리에게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애써 웃으며, 모로와 대화를 나누던 스타비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테지. 저들에게도 시간은 ‘황금’과 같으니까. 귀중한 밤을 우리로 인해 소비했으니 당분간 총명한 황금 비늘의 주인이자 운명의 중심인 그 아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한번 당해 봤으니 폰도 정신을 차렸을 테고.”
모로가 무기를 꽉 쥐어 올려 두목을 가리켰다.
“이보게들, 이따가 만나세. 따스한 자린의 품에서.”
농담처럼 말하는 모로를 향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다졌다.
쿠아아아아아!
커맨더 모로의 마지막 전투는 롱 소드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 아아.”
양다리가 잘려 나가고 가슴이 갈라져 피와 더운 김을 흘리는 스타비챠의 일인.
그의 힘겨운 숨이 허공으로 퍼지며 고통과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그의 눈에 꺼져 가는 전장의 불꽃이 보였다.
스타비챠 전원 사망.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끝없이 난도질하는 녹터널 헌터들.
모로는 놈들의 수장과 장렬한 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하고 밤의 악령에게 몸을 내주고 말았다.
태양의 축복을 머금은 갑옷이 박살나고 고대인의 열기를 담은 롱 소드도 수백 조각으로 깨졌다.
모로는 자신의 목을 감은 덩굴이 살을 파고들어도 신음을 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희미한 비웃음을 띄고 놈의 추악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모로의 머리가 잘려 날아가자 녹터널 헌터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시체를 유린했다.
저벅, 저벅.
그가 죽어 가는 스타비챠를 향해 다가왔다.
덜덜거리는 손을 들어 놈을 가리키는 최후의 한 사람에게 그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스윽.
놈이 발바닥으로 스타비챠의 목을 밟는다.
뿌드득.
스타비챠의 눈이 생기를 잃어 갔다.
***
그로부터 4일 후.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위성도시 하르실라에서 거대한 불꽃이 일어났다.
도시 외곽 일부가 완전히 재가 되었고, 1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화재가 일어났으리라 여겨지는 중심부와 주변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기에 결국, 원인 규명을 하지 못했다.
다만, 화재 현장에 접근하던 치안대와 소방대원 일부가 불의 장막이 가로막은 안쪽에서 기괴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3장 합숙소의 아이들(1)
로슈르 제국의 역사는 깊다.
초대 군주 발타스 세프라임은 남부 얼음 대지 출신이었다.
드래곤과 인간의 전쟁―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이 끝나고 100년이 채 안 되었던 시기.
여전히 어둠과 공포에 쌓여 있던 남부를 관통하고 세프라임이 등장했다.
당시는 수백 개 이상의 나라들이 이 대륙에 난립하던 때였다. 당연하게도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각각 연맹 단계에 머물던 소국들이 대부분인 상태.
위대한 세프라임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용병단을 만들어 각지의 전쟁에 참여해 명성을 떨쳤다.
그는 후에 시론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왕국, 라로시르의 공주와 혼인하여 국가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섭정을 행했고, 결국 왕위를 넘겨받아 국왕으로 등극,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한다.
세프라임 국왕이 왕비의 이름을 따 나라를 로슈르로 개명하고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후계자들은 정복 전쟁을 시작해 일라시니아 산맥 북쪽과 남부 얼음 대지를 제외하고 상당 부분의 땅을 차지했다.
200년 뒤, 남아 있던 9개 왕국을 정벌한 왼손잡이 왕, 보트 세프라임은 로슈르를 왕국에서 한층 격상시켜 제국으로 명명하고, 4개 위성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절대군주인 황제로서 세상을 다스린다.
그로부터 5000년이 지난 지금.
로슈르 제국은 5개의 제후국과 2개의 자치령, 14개의 특화 지구를 거느린, 침범할 수 없는 이름의 대명사로서―사전에 ‘로슈르’라는 단어는 신성, 무적, 부유함 등과 같은 뜻을 가졌다고 쓰여 있다― 만물 위에 군림했다.
하나의 거대한 국가가 분열이나 황조의 바뀜 없이 500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로슈르 제국이 얼마나 탄탄한 기초 위에 세워졌는지 충분히 짐작케 해 준다.
과학과 기술, 문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제국의 수도 라로시르―옛 왕국의 이름에서 유래―는 그 이름을 다른 대륙에까지 떨쳤다.
모든 지식이 모이는 용광로.
그중에서 제국의 제 1대학교인 로슈르 국립대학교의 명성은 산맥 북부에서조차 동경할 정도였다.
제국 유수의 가문이 이곳을 모태로 일어났고, 수많은 관료들, 저명한 지식인, 명망 있는 과학자들, 심지어 360만 제국군의 고위 장성과 장교들까지 사관학교가 아닌 국립대학교 기사단양성학부 출신이라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제국 내 모든 젊은이들의 꿈이자 동경의 대상인 로슈르 국립대학교는 그만큼 입학이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귀족들과 부유층 자제들에게는 그나마 문턱이 낮았으나, 그 외의 계층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라는 입학 과정.
그 관문을 뚫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 바로 국립대학교 부설 합숙소.
수도 라로시르 외곽에 위치한 산 전체에 건립된 이곳은 대학 입학을 희망하는 이들 중 선발되었거나, 특채로 지명된 이들이 모여 자격을 심사받는 곳이다.
현재 합숙소에는 네 명의 젊은이들만이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
“지루해…….”
책상에 푹 엎드린 채 중얼거리는 소년의 음성을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넓은 교실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은 네 사람.
그들 중 진한 녹색의 사냥꾼 복장을 한 남자 아이는 다른 세 명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며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네 사람의 면면은 너무나도 달랐다.
황금빛 머리칼이 탐스러운 작은 소년은 큰 눈에 지혜를 가득 담은 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고, 투명한 베일을 쓴 소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잠시 투덜거리는 소년을 흘기다 곧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금발 소년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덩치를 한 거인이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깊게 들어간 눈, 약간 휘어진 코와 꽉 다문 입.
전투의 장소가 아님에도 가죽옷 위에 철구를 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북부인이었다.
“7일 동안 아무것도 안 했어.”
또 사냥꾼 차림의 소년이 중얼거렸다.
“밥은 늘 배터지게 먹었고. 그래, 좋아. 내 살면서 이렇게 편해 본 적은 처음이긴 해. 누가 나 따위한테 따뜻한 음료와 편안한 침대를 주겠어. 술을 못 마시는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밤에 억지로 자야 한다는 것도. 규칙적인 생활은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는 법이지, 암.”
두서없이 지껄이던 그가 훅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재미가 없잖아. 여기는 늑대도 없고, 샤벨 타이거도 없고, 독수리도, 상어도 없어. 그 흔한 토끼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꼴을 못 봤지. 답답해…….”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묵묵히 앉아 있는 거인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이봐, 야만인. 넌 안 심심해?”
“…….”
“나 같으면 말이야……. 내 머리통만 한 그 손으로 주방장을 박살이라도 내겠어. 항상 네가 먹는 밥에 고기를 덜 얹어 주잖아, 안 그래? 널 차별하는 것이 틀림없어. 말라 가는 너의 몸을 봐. 아주 살을 쪽 빼 놔서 나중에 요리할 생각일 거야. 이 나라 사람들은 북부인을 상당히 싫어한다지?”
은근히 도발을 감행하는 그의 말에도 거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거 있잖아. 옛날에 너네랑 여기랑 전쟁 났을 때. 네 조상들이 이곳 아이들을 불에 구워 먹었잖아. 어휴, 확실해. 저 주방장은 다음 달 식단표에 북부인 바베큐, 북부인 스프, 북부인 내장 조림을 써 놓았겠지. 그 밑에 작은 글씨로 네 이름을 적어 두었을 테고. 흠,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을 거야. 오늘 밤에도 칼을 갈며 잠을 못 이룬다에 내 롱 보우를 걸지. 복수는 원래 대를 이어 가는 거니까.”
“루산.”
베일의 소녀가 사냥꾼 복장의 아이, 루산에게 그만하라는 뜻을 표했다.
“아, 맞다, 리디아. 네 고향 볼라스카도 당시에 야만인 놈들에게 크게 당했다지? 혹시 아냐. 키릭의 조상이 네 조상의 고기를 씹었을지도.”
리디아라 불린 소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만 좀 해.”
“큼…….”
다시 정색을 한 리디아의 말에 루산도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이, 꼬마.”
이번에 루산의 목표는 금발 소년이었다.
“만날 신비로운 척만 하지 말고 오늘은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동안 우리가 나눈 건 대화가 아니었어?”
금발 소년의 입에서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것을 대화라고 한다면 그것도 맞겠지. 하지만 누군가가 대화는 서로의 입 냄새를 음미하는 거라더라. 넌 나의 역겨운 향기를 잔뜩 들이켰겠지만, 난 너의 취할 듯한 입 냄새를 맡아 본 기억이 없거든.”
“풋.”
금발 소년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데일, 너 무섭더라.”
“뭐가?”
루산의 눈과 금발 소년, 데일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여기 온 첫날, 저 덩치랑 나랑 식당에서 한바탕했을 때.”
“그게…… 뭐.”
“몰라?”
“난 그냥 너랑 키릭을 말리려 했을 뿐이야.”
데일의 말에 은발 거인, 키릭도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 또한 그날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