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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6화)
3장 합숙소의 아이들(2)


“난 저 야만인이 싫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 저놈 정말로 강하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푸른 불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일반적인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약하지 않아. 넌 어디 가서 맨몸으로 얼음 덩어리를 불러내는 사람 본 적 없지? 난 가능해.”
“그건 나도 인정.”
데일이 순순히 루산의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우리 둘을 네가 눌러 버렸어. 그냥 그 작은 손으로 우리의 팔뚝을 잡기만 했는데.”
“흠…….”
“말해 봐. 그거.”
“뭘 말해야 할까?”
“대충 알면서 왜 이러실까. 딱 봐도 하나는 싸움 잘해서 그렇다 치고, 하나는 음…… 좀 잘생겨서, 여기 이 아리따운 아가씨는…… 어디라 그랬지?”
루산이 리디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과학대학 산하 위생학부.”
리디아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맞아. 리디아는 의학적인 지식이 무척이나 풍부하지. 함께 오는 길에 내 직접 봤으니 그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거든.”
갑자기 데일이 리디아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리디아. 내 손을 잡아 줘서. 덕분에 빨리 일어났어.”
“천만에, 데일.”
리디아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힘이 쭉 빠졌어. 네 손에 잡혔을 때.”
루산의 음성이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착각일 뿐일까.
그러나 데일은 살짝 인상을 쓰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 표정을 풀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왜?”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지.”
“헐…….”
루산은 데일의 표정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읽었다.
합숙소에서 네 사람이 처음 만난 날.
키릭과 루산은 서로에게 이유 없는 증오심을 품고 격렬한 싸움 직전까지 갔었다.
그것을 한순간에 잠재워 버린 이가 바로 데일이었다.
데일은 키릭과 루산이 서로에게 가하려던 치명적인 공격을 무의 상태로 돌려 버렸다. 그것도 살짝 둘의 팔을 잡기만 했는데.
그런 뒤 데일은 바로 쓰러져 거의 하루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만약 리디아가 데일의 곁에서 그녀가 가진 능력으로 치유를 행하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일은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몰랐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루산도, 키릭도, 리디아도 일반인들과 다른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특채에 뽑혔을 터, 따라서 평범함 그 자체로 보이는 데일이지만, 그에게도 분명 흉내 낼 수 없는 힘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루산은 그것을 물어본 것이었다.
저 작은 소년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라는.
“난 공부를 잘해.”
“잉?”
“배운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또 상상력도 풍부한 편이야. 역사에 살을 붙여 재해석하기를 좋아하고. 아, 어렸을 때 지역 신문에 내 이름이 난 적도 있어. 문학 신동이 나타났다고.”
루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데일을 바라본다.
“옛적에 다른 6개 언어를 익혔어. 서부 누미비아 어, 북부 우들란트와 젝스 어, 남동부 프리즈 언어에다 옛 볼란 방언이랑 고대 용언이라 알려진 중앙어까지. 작년에 농업학교 문학 선생님이랑 유적 발굴 현장에 다녀온 적도 있어. 당시 현장에 중앙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한 번 말문이 트이자 데일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글씨도 멋들어지고 서류 정리도 잘하는 편이지. 따로 철 해 놓지 않아도 어느 부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다 알거든. 즉, 무엇이든 기억한다는 말이야. 또 재작년도 콜로스카 사범대학 논술시험 문제였던 ‘합리적인 행정 절차에 관한 주관적 생각을 서술하시오.’를 모의고사 형식으로 단 10분 만에 스무 장 분량으로 만들어 제출했더니 학교장님께서 거품을 물고 놀라시더라.”
데일의 얼굴에는 은은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해서 학교장님과 문학 선생님의 추천으로 로슈르 국립대학교 행정대학 서기관 양성학부에 특채로 입학할 자격을 얻은 거야. 이제 됐어?”
“……천재란 말이구먼.”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있음을 알지만 루산은 그저 데일의 말에 수긍하는 척하며 한숨을 쉬었다.
키릭도 놀란 눈치가 역력했다.
수도로 오는 중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데일과 만나, 꽤 험난한 길을 뚫고 도착했지만 데일에 과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데일도 키릭의 과거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
“뭐, 같이 있다 보면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겠지.”
루산 깍지를 끼고 뒷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도 답답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인 듯.
“한데 데일 넌 고향이 어디냐.”
“콜로스카. 방금 언급했을 텐데.”
“흠, 농부의 아들이네.”
콜로스카 지방은 대륙 제일의 곡창지대인 볼라스카 지방 다음으로 유명한 곡물 생산지였다. 따라서 루산의 짐작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 아버지께서는 제국의 군인이셨어.”
“이셨어? 그럼 지금은.”
“전사하셨지.”
“……얼음의 대지?”
“응.”
북부 자유무역연합과는 안정된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에 제국의 군인이 전사할 만한 곳은 남부 외에는 없었다. 그곳은 아직도 침략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들 간에 전투가 계속되는 저주받은 땅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물어봤네, 미안.”
“괜찮아. 난 아버지가 자랑스러우니까.”
데일의 말을 들은 루산의 얼굴에 약간의 어둠이 감돌았다 사라졌다.
루산은 결코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오히려 증오에 가깝다고나 할까.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들을 모이도록 한 합숙소 사감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키릭.
책상에 누런 종이를 펼쳐 놓고 뭔가를 계속 써 내려가는 데일.
눈을 감고 태양을 향한 기도문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리디아.
그리고 이들과 달리 계속 몸을 움찔거리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루산.
결국 루산이 또 터졌다.
“내가 전에 북쪽에 갔을 때 말이야. 어디더라…… 음, 맞아. 뮈란드.”
뮈란드라는 말에 키릭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정말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싶었지. 거리엔 넘쳐 나는 게 사람인지 쓰레긴지 분간이 안 가더라니까. 들어 보니 옛날에는 잘사는 왕국이었다지?”
루산은 분명 키릭에게 어떤 도발을 하고자 말을 꺼냈음이 틀림없다.
“특히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눈뜨고 못 보겠더군. 진흙을 구워 과자처럼 씹는 꼴이란…….”
데일도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루산을 돌아본다.
“그게 다 한 사람 때문이래. 뮈란드라는 왕국 인구의 절반을 날려 버린.”
드디어 키릭이 몸을 돌려 루산을 쏘아보았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키릭의 불같은 얼굴과 마주한 루산.
“그래, 폴몬트 디록. 또는 마스터 디록. 뮈란드에선 그 이름이 악마라는 단어와 동의어라고 하더라.”
“왜?”
리디아가 루산에게 물었다.
“북부인들 저들끼리도 서로 말이 다르긴 한데, 뮈란드가 나머지 연합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고, 잘사는 뮈란드를 질투한 다른 연합국들이 계략을 꾸몄다는 말도 있지. 한데 중요한 점은 뮈란드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사실. 그것도 한 사람이 이끄는 군단에 의해서 말이야.”
데일은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유무역연합 제 1보병군단, 거기 군단장이었던 폴몬트 디록. 아마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라지? 북부 전체의 영웅이기도 하고.”
키릭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반란 진압을 위해 출정하기 전, 자기가 이끄는 군단 내 뮈란드 출신 병사들 전원을 처형하는 것으로 반란군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더군. 국경을 넘자마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대학살을 감행했고. 남녀노소, 키우던 병아리 한 마리까지 반죽을 만들었다 하니까.”
“그만해라.”
키릭의 낮은 음성에 그와 친한 데일조차 소름이 돋았다.
“디록은 가장 앞서 힘없는 뮈란드인들의 목을 잘랐다고 하지. 그가 애용하던 클레이모어에 희생된 이들은 무려 만 명. 이건 아마 세계 신기록일 거야, 큭큭큭.”
우지직.
키릭이 팔꿈치를 기대었던 책상의 일부가 깨져 나갔다.
“그는 후에 모습을 감추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대. 왜일까? 필요 이상의 학살에 대한 죄책감? 어쩌면…… 천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쿵!
키릭이 벌떡 일어났다.
그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주변을 데운다.
“왜, 네 사부에 대해 언급하니까 기분이 나쁜가?”
키릭의 사부가 마스터 디록?
“어찌 알았느냐 묻는다면 네가 들고 다니는 클레이모어에 새겨진 글자를 봤기 때문이라 말해 주지. 세이비어. 북부어로 구원자라는 뜻 맞지? 그 이름과는 전혀 딴판이지만, 디록이 한시도 몸에서 멀리하지 않았던 거대한 검. 그게 너한테 있으니 짐작하기 어렵지 않더라.”
“죽고 싶나.”
“좋았어!”
루산이 기다렸다는 듯 신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반응이 오는군. 얼마나 기다렸는지.”
루산은 일부러 키릭을 도발하기 위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키릭은 거기에 보기 좋게 넘어갔고.
“너 정말 싫다.”
키릭이 이를 갈며 말했다.
“나도. 넌 정말 재수 없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밀리지 않고 답하는 루산.
“처음 볼 때부터 싫었다.”
“난 태어나기 전부터 너 싫었거든?”
키릭의 주위에 감도는 열기와 루산이 내뿜는 냉기가 묘하게 어우러져 공간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데일은 뜻밖의 상황에 멍한 얼굴을 할 뿐이었고, 리디아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둘 다 쫓겨나고 싶어?”
리디아의 말에 키릭은 잠시 쥐었던 주먹을 풀었으나 루산은 여전히 올린 입꼬리를 내리지 않고 키릭을 노려보았다.
“자신 있으면 덤벼 보시든가. 한 대 정도는 맞아 주지.”
얄밉게도 뺨을 쏙 내밀며 키릭을 놀리는 루산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키릭이 행동한다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라면.
으드드득.
키릭이 다시 주먹에 힘을 가했다.
뜨거움이 가득한 푸른 기운을 담은 채.
닿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것만 같은 힘.
키릭의 무력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
만약 데일이 키릭과 함께했던 여정 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보았다면 분명 키릭을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그 당시, 자신조차 모르는 미지의 힘이 데일의 의식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
“키릭.”
데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힘을 알고 루산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기억 안 나? 우리 둘이 함께 대학에 들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졸업하자고 했던 말.”
“…….”
“아울도, 너를 이끌고 오셨던 분도 그것을 바라고 떠나셨다면서.”
아울이라는 이름과 키릭의 안내자였던 이에 대해 데일이 말하자 키릭의 눈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어떤 추억이나 그리움이 아닌 미세한 슬픔 같은 것이 들어 있다.
키릭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데일을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친구는 모른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자신과 데일이 합숙소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피와 죽음의 길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