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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7화)
3장 합숙소의 아이들(3)
“부탁한다……. 끝까지 놓지 말아 줘.”
“무엇을 말입니까.”
“이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는 데일의 손을…… 그러니까.”
“…….”
“둘이 함께 대학 가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숨 넘어가는, 그러나 유쾌한, 어떤 이의 음성이 키릭의 귓가를 스친다.
“비숍…….”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끝으로 키릭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사그라졌다.
“쳇!”
루산이 혀를 차며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린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만약 키릭이 먼저 선방을 날렸다면 충분히 버텨 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절대 반격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면 일방적인 폭력의 주체인 키릭만 벌을 받을 것이었다.
합숙소 규칙에 따라 짐을 싸서 나갈 확률이 컸고, 그렇게 된다면 이 알 수 없는 분노의 근원은 사라진다.
더불어 키릭에게 가 있는 리디아의 시선도 빼앗아 올 수 있고.
하지만 저 작은 금발 녀석이 끼어들어 계획을 다 망쳐 버렸다.
딩! 딩! 딩!
교실 바깥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틀림없이 사감이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
긴 지루함이 끝에 데일의 눈이 반짝거렸다.
드르륵.
앞문이 열리고 하얀 정복을 입은 사감이 들어왔다.
중간 키에 엄격해 보이는 얼굴, 비교적 매끈한 피부를 소유했지만 반백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사감은 잠시 벌어졌던 소란을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하며 딸랑거리던 작은 종을 교탁에 내려놓았다.
“다들 기립.”
낮지만 똑똑히 들리는 그의 말에 데일과 리디아가 제일 먼저 일어났고, 키릭은 그보다 약간 늦게, 마지막으로 루산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섰다.
“정확한 시간을 어겼다고 해서 너희들에게 욕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난 사감이니까.”
“헐.”
“특히, 너. 앞으로 그 입 웬만해서는 다물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루산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말하는 사감의 이름은 밸류.
그에게서는 왠지 형용하기 힘든 위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지난 7일간 편안하게 잘 지냈나.”
“예. 여행의 피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데일의 대답에 사감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듯하군. 처음 네가 키릭의 품에 안겨 이곳에 왔을 때는 비에 젖어 볼품없는 고양이를 연상시켰으니까.”
데일이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키릭.”
“…….”
밸류가 키릭을 호명했으나 그는 말없이 짧게 고개를 숙일 뿐.
“뭐, 과묵함이 네 특기라면 인정해 주지. 음식은 입에 맞던가?”
“……기름기가 너무 없더군요.”
키릭의 답변에 루산이 큭큭 거린다.
“여긴 북부가 아니다. 그러니 적응하도록 해.”
밸류가 말을 마치고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한층 부드러워진 얼굴을 하고서.
“우리 숙녀 분은 배움을 향한 열망이 넘치는군.”
“제게 주어진 귀한 자리를 빛내는 것 또한 제 의무니까요.”
“후훗, 그래. 좋은 자세야. 미켈리안 대령께서는 잘 계신가.”
“그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신다면 아마 그 모습 그대로일 겁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로군.”
밸류가 어울리지 않게 즐거운 웃음을 보였다.
“오늘 내가 너희를…….”
“저는요.”
루산이 밸류의 말을 끊었다. 순간 확 하고 일그러지는 밸류의 표정.
“음, 저는 더없이 평온하고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신비롭다고나 할까요? 넓은 정원에 넘치는 꽃과 나비, 아름다운 분수에 퍼지는 무지개.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원한 바람과 이가 빠져 버릴 만큼 시린 우물. 모든 것들이…….”
“되었다, 거기까지.”
“……쳇.”
루산은 저 나무 토막 같은 사감이 자신을 싫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가 너희를 모이라 한 것은 본격적인 시험과 수업을 앞두고, 높은 분께서 너흴 격려하고자 방문하셨기 때문이다. 예정보다 약간 늦게 도착하셨기에 너희가 작은 소란을 피울 기회도 있었겠지. 그럼.”
밸류가 교탁에서 잠시 물러나며 입구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입구를 통해 들어온 이는 푸른 비단 재질로 만든 고급 의상을 걸친 노년의 남성이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여덟 가문 중 하나인 안첸트의 문장을 양각한 배지가 그의 소매에 달려 호사스러움을 뽐낸다.
즉, 귀족 중의 귀족.
로슈르 제국인인 데일과 리디아는 그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였으나, 키릭과 루산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다.
“차렷! 부총장님께 대하여 경례.”
부총장이라면 국립대학교의 부총장을 말함이다.
입학과 졸업 때가 아니면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다는.
얼떨결에, 또 황급히 경례를 마친 네 사람은 밸류의 지시에 맞춰 다시 착석했다.
“다들 반갑네.”
마른 몸에 처진 눈을 하였지만 목소리만큼은 묵직한 부총장이 입을 열었다.
“정시에 도착하지 못한 점은 내 사과하지.”
최상위 귀족에게서 사과의 말이 나오자 오히려 밸류가 당황해한다.
“황태자 전하께서 급히 본인을 찾으셔서 잠시 뵙고 오는 길이라네. 이해해 주시게나.”
황태자와 교류를 할 정도로 높은 지위를 가졌던가.
데일은 지금 그런 고위 인사를 마주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러분들은 우리 제국의 귀한 인재라네. 앞으로 만 년, 십만 년을 이어 갈 찬란한 로슈르의 기둥들. 자네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하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구먼. 본인도 여러분들과 같은 나이에 그 자리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지.”
“부총장님께서도 이곳을…….”
“그럼.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자격이 없다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국립대학교의 문이야. 나도 자네들처럼 여기서 여러 시험을 거치고 교양과 지혜를 인정받은 후에야 자랑스러운 국립대학생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네.”
데일은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 같은 평민이, 그것도 제국의 중심부에서 먼 시골 출신인 자신이 제국의 기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내 오늘 여러분들을 보고자 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네. 수년 만의 특채에 뽑힌 훌륭한 재목들을 보고 싶어서야. 젊고 유능한 이들과 마주하는 것은 본인 같은 노인들에겐 큰 즐거움이니까.”
부총장은 듣기 좋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네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데일 잉그하임.”
“예…… 넵!”
“총명하기로 소문난 자네를 보게 되어 기쁘네.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가?”
“비, 비스텐지아 농업학교 교장선생님이 최종 승인하셨고, 문학교사 아타르 슈네인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일개 농업학교의 교사와 교장의 추천 정도로는 특채를 꿈꾸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국립대학에 슈네인 선생의 친구가 있다고 해도.
“슈네인…… 내가 아끼던 제자였지. 여전히 겉멋만 들어 잘난 척하고 있겠지?”
“그, 그게. 슈네인 선생님은 저에게 큰 꿈을 주신 분이십니다. 겉멋은 여전하지만요.”
부총장이 옛일을 떠올리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디아 힐겐.”
“예, 부총장님.”
“자네가 이룬 기적은 이곳에서도 익히 들었네. 제국을 대표해 감사를 전하지.”
“황제 폐하의 신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전…… 아직도 그곳을 잊지 못해요.”
“언젠가 자네가 더 훌륭한 인물이 되어 그곳으로 갈 일이 있을 게야. 자네의 손길과 마음의 힘은 남부 제국군에겐 상징과도 같으니.”
리디아가 부총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루산 보우먼. 우리 제국을 돌아보니 어떠한가.”
“어라? 어찌 아셨어요?”
루산은 놀란 음성으로 부총장에게 반문했다.
밸류의 표정이 찌그러지는 것을 모르고서.
“학생의 신상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겠지. 놀라지 말게나.”
루산은 이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음을 깨닫고 심장이 뜨끔해졌다.
“출신을 떠나서 우리 제국은 인재를 환영한다네. 자네의 실력과 기지, 경험은 분명 자네를 높은 자리로 인도할 게야.”
“…….”
“키릭.”
키릭이 조용히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들었겠지만 우리는 출신을 따지지 않네. 자네가 북부인이라 해도.”
“……전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전 그저 키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입니다. 제게 고향은 의미가 없습니다.”
키릭은 유독 인간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그 대답에 부총장은 만족스러운 듯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디록 경께서는 잘 계신가.”
순간 키릭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어.”
“아마도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름일 겁니다.”
“젊었을 때 그분과 마주했던 적이 있다네. 알다시피 제국의 귀족은 반드시 제국군에 입대해 일정 기간 동안 복무해야 한다네. 그 당시 북쪽 국경에서 연합의 군단장이던 디록 경과 인사를 나누었지. 세상에 그렇게 강인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네.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으신가?”
“아직도 눈빛만으로 마음에 안 드는 자의 팔 하나 정도는 자르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 껄껄껄.”
부총장이 진심으로 즐거운 듯 호탕하게 웃었다.
잠시 훈훈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질문은 하나만 받겠네.”
다들 딱히 할 말이 없는지 부총장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때 리디아가 손을 들었다.
“이번 특채 인원은 총 다섯이라 알고 있습니다. 한데 저희는 아직…….”
“부총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대신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밸류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부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을 대신하도록 허락했다.
“원래는 다섯이 맞아. 나머지 한 명은 꽤 먼 곳에서 출발했지. 그런데 예정보다 너무 늦어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정 기간을 더 두고 보다가 그래도 늦는다면 탈락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게으르다는 뜻 외엔 해석할 수 없으니까. 또 너희를 언제까지 아무런 교육 없이 이대로 둘 수도 없어. 너희가 먹은 음식들과 앞으로 먹게 될 음식들, 편안한 기숙 생활 비용과 지급받게 될 교복, 각종 문구류, 교보재,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제국민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야. 무슨 말인지 알 거라 믿는다.”
데일은 밸류의 뜻을 짐작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부총장은 몇 마디의 덕담을 더 건넨 뒤,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을 남겼다.
“자네들은 제국을 이끌어 갈 인재로 인정받은 소중한 이들이라네. 거듭 당부하지만 그 지식과 가진 능력을 잘 발휘해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네.”
데일은 이번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고난과 위협이 자네들 앞에 있더라도…….”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총명하기로 유명한 데일도 부총장의 말을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흘렸다.
“부디 미래를 빛내 주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자네들에게 맡기지.”
“기립!”
밸류의 구령에 모두가 일어섰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닐세. 저들을 본 것은 내게도 영광이요, 축복이니까.”
밸류와 부총장은 몇 마디 말을 더 나누며 곧 교실 밖으로 나선다.
다들 부총장이 남겨 준 여운을 음미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데일은 분명히 들었다.
문이 닫히며 그 뒤편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부총장의 목소리를.
“자린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