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 자린 1권(8화)
4장 지켜보는 시선(1)


“헛!”
넓게 조성된 잔디 운동장에서 때 아닌 소년의 비명이 울렸다.
“꽉 잡아야지!”
누군가 호통을 치며 소년의 어설픔을 탓한다.
말에 올랐다가 곧바로 땅에 떨어진 데일은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간신히 일어났다.
“잉그하임. 너, 말 타 본 적 없어?”
승마 교관이 한심하다는 듯 데일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농촌 출신 아냐?”
“어머니께서 공부만 하라고 하셔서…….”
“끙.”
교관은 자신이 가졌던 농촌에 대한 선입관을 이 순간부터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힐겐.”
“예.”
“이번엔 네가 말에 올라 봐.”
“예.”
리디아는 방금 데일이 오르려다 실패한 말에게 다가갔다.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뺨을 쓰다듬던 리디아는 곧 익숙한 자세로 훌쩍 말에 오른다.
“그래, 그렇지.”
만족스러워하는 교관을 향해 방긋 웃어 주는 리디아.
데일을 일으켜 흙을 털어 주는 키릭과 달리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루산은 그 모습에 멍한 표정이 되어 넋을 잃는다.
검은색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 교복을 입은 리디아는 정말로 눈부셨다.
그동안 그녀의 얼굴을 가렸던 베일도 사라지고 없는 지금, 마치 태양이 리디아를 따라다니며 빛을 내려 주는 것만 같았다.
“말을 달려 본 경험이 있군.”
“어렸을 때 조금요.”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 지시에 맞춰 한 걸음씩 옮겨 보자.”
타박, 타박.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 지 3일이 흘렀다.
처음 이틀간은 제국의 역사와 체제, 지리와 인문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없던 키릭.
너무 지루한 나머지 발작을 일으키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루산.
펜으로 강사의 말을 받아 적으며 공부에 집중하던 리디아.
그리고 전 수업에 걸쳐 단연 돋보였던 데일.
그 자신의 전문 분야라 할 수 있는 강의에서 데일은 크게 칭찬을 들으며 수업 말미에 진행한 쪽지시험에 만점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부터 예정되었던 야외 교양 수업을 맞이해 데일은 큰 낭패를 당했다.
말에 올라보기도 전에 굴러 떨어져 급우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수업 첫날의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로슈르 국립대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국가기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면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평민에서 귀족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의미.
하지만 귀족이라면 당연히 익혀야 할 승마와 검술 같은 과목에서 낙제를 받는다면…….
스스로 몸치임을 잘 아는 데일로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다그닥, 다그닥!
어느새 리디아는 크게 원을 그리며 운동장을 달렸다.
교관이 계획했던 진도를 몇 단계나 뛰어넘어 버린 그녀의 실력에 데일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걱정 마.”
키릭이 그 기미를 알고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밤에 내가 널 키리코에 태워 특훈을 시켜 주지. 내일 아침이면 엉덩이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끅.”
데일은 키릭이 타고 온 검은 말, 키리코를 떠올리며 겁에 질렸다.
“후우.”
리디아가 몇 바퀴를 더 돌고 자리로 돌아왔다.
교관의 칭찬을 받으며 말에서 내린 그녀의 주변에 은은하게 무지개가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힐겐, 네가 말을 다루는 솜씨는 우수한 편이다. 하지만 국립대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달리고 뛰는 것만이 아닌, 우아함이 필요해. 그것은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제국 여성 귀족들만의 상징이다. 다음 수업부터는 그쪽에 집중하는 법을 알려 주마.”
리디아는 귀족의 명예를 원하지 않았기에 뭐라고 말하려 하였으나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의 시선이 키릭에게 닿았다.
팔짱을 끼고 교관의 눈을 바라보는 키릭.
“넌 오늘 수업 열외.”
“왜요!”
그의 말에 오히려 루산이 반발했다.
“저 녀석은 일단 기본적으로 갖출 건 다 갖췄어. 타고 온 검은 말을 보면 알 수 있지. 내가 올라가 보려 했더니 심하게 반항하더구나. 야생마를 길들인 것이 확실해. 따라서 키릭에게는 기본 수업은 불필요하지. 나중에 기사단의 필수라 할 수 있는 품위만 가르치면 돼.”
루산은 교관의 말에 허점이 없음을 알고 짜증스러워했다.
나름대로 키릭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루산으로서는 적어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은 너다, 보우먼.”
“끄응……. 저도 말 타 본 적 없어요. 샤벨 타이거나 곰이라면 모를까.”
“일단 나와.”
루산의 눈에 리디아와 호흡을 맞추었던 말의 몸에서 열기로 인해 땀이 증발, 허연 김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거기 발 걸치고 위쪽에 튀어나온 것 있지? 그거 잡고 단번에 쭉 올라가.”
루산은 대답 없이 교관의 지시에 따랐다. 훌쩍 몸을 올려 안장에 엉덩이를 올리는 루산.
순간 몸이 크게 흔들리며 균형을 잃는다.
“쯧쯧.”
교관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찬다.
‘이 자식이.’
루산은 알았다. 말이 일부러 뒷다리를 살짝 구부려 자신을 휘청거리게 만든 것임을.
아마 리디아를 태우고 달리다 그녀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리디아를 주인으로 생각해 버린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자신은 불청객. 어쩌면 말이 루산을 거부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연을 벗 삼아 야생을 뛰어다니던 사냥꾼 출신께서 겨우 길들인 말에 오르는 데 과도한 몸짓을 해서 쓰겠나. 무시무시한 야수들도 등을 허락하지 않았던가.”
교관의 놀림 비슷한 언사에 루산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루산은 슬쩍 급우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릭은 일부러 자신 쪽에 눈을 두지 않고 있으며, 데일은 두 손을 모으고 침을 꿀꺽 삼키는 중이다.
루산은 이들 둘에게 자신이 어떤 추태를 보여도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리디아.
리디아에게 만큼은 멋진 남자로 각인되는 것이 목표.
“후우우…….”
툭.
루산은 앞서 본 것처럼 말의 배를 툭 찼다.
“…….”
“어, 어이.”
툭. 툭.
“허, 말에게 지금 무시당하는 건가.”
교관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순간 루산의 몸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 모든 수업에 있어서 너희의 특별한 능력은 사용 금지다.”
“칫.”
루산이 리디아를 또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젠장.’
리디아는 키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아련한 눈길로.
“다섯을 셀 때까지 한 걸음이라도 못 옮긴다면 보우먼, 너도 오늘 수업에서 잉그하임과 마찬가지로 최하점이야. 하나.”
루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말의 귀를 잡아당겨 입을 그 근처로 가져갔다.
“둘.”
말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루산. 키릭이 그의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셋.”
히힝―
말의 긴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데일의 눈에 비쳤다.
툭.
팟!
루산이 아까보다 훨씬 가볍게 말을 배를 찼다. 그와 동시에 말이 훌쩍 뛰어오른다.

***

“아까 뭐라고 한 거야?”
데일은 수업을 마치고 힘없이 걷다가 교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터는 루산을 발견하고 다가가 물었다.
루산이 말을 출발시켰을 때, 교관도 놀랄 정도로 말은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익숙하지는 않아 보였지만, 그럭저럭 균형을 유지하며 빠르게 운동장을 돌아 버리는 루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까와는 딴판으로 신나게 소리마저 질렀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에 교관은 할 수 없다는 투로 루산 역시 다음 수업부터는 바로 몇 단계 위의 기교를 가르치기로 하고 당일 수업을 마쳤다.
“왜, 저 동물이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을까 봐?”
“……그냥 궁금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데일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흠, 나중에 맛난 당근, 실컷 먹여 준다고 했지.”
짓궂은 표정으로 짧게 말을 마친 루산은 곧 리디아의 뒷모습을 따라 서둘러 운동장을 벗어났다.
좌절한 데일이 땅만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키릭이 그에게 다가왔다.
키릭은 데일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입을 열었다.
“……린다고 했다.”
“응?”
데일은 키릭이 했던 말의 앞부분을 제대로 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죽여 버린다고 했다.”
“뭐?”
“저 녀석, 진심을 담아 협박했다.”
“도, 동물을 협박했다고? 죽여 버린다?”
끄덕.
입만 벙긋거리는 것 같았던 루산의 말을 알아들은 키릭도 신기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짐승에게 죽이겠다 협박한 루산은 그야말로 괴짜다.
그에 반응한 짐승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
“인간끼리만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접어.”
“난 잘 모르겠어.”
데일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혹시 그럼 나도 죽인다고 해 볼까? 그럼 얌전해질지도…….”
“키리코에게는 안 하는 것이 좋아. 정말로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