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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9화)
4장 지켜보는 시선(2)
네 아이들이 승마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합숙소 부지 중앙에 높이 솟은 탑.
그 꼭대기에는 태양의 제국, 로슈르를 상징하듯, 비상하는 불새를 음각한 원형 철판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난다.
바로 아래에는 그와 대조적으로 어둡기만 한 공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네 아이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요.”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내는 이는 사감, 밸류였다.
“새삼스럽게.”
밸류의 말에 응답하는 이는 이 합숙소의 소장, 갈리우스.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능력들이 아니던가. 아무리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갈리우스의 말에 밸류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코치들이 저들을 훌륭히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특히, 키릭은 말이지요.”
“그래. 정말로 괴물을 만들어 냈어. 아니, 원래의 자리로 잘 이끌어 주었다가 정답이겠지.”
“솔직히 잉그하임은 좀 실망스럽습니다.”
“…….”
갈리우스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아타르 슈네인이라면 그의 진정한 능력을 일깨워 줄 것으로 기대했지요. 한데 오히려 처음 보고를 받았던 것보다 훨씬 퇴보한 듯합니다.”
“2년 전…… 저 아이의 아비, 로그 잉그하임이 전사했다지? 그때 이후로 우리가, 주인께서 바랐던 능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군.”
“정신적인 충격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하지만 슈네인은 별말이 없었어. 답답한 건 오히려 우리였지. 주인께서도 슈네인을 무척 신뢰하시니까. 그냥 두고 보라는 식이었고.”
“시간이…… 부족합니다.”
“난들 어쩌겠나. 어디에 누군가가 그 시기를 앞당겼음이 확실하니. 롱 버트의 부활이 확인되었고, 또 그로 인해 우리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 게다가…….”
“키릭과 잉그하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스타비챠들이 전부 죽었고 폰, 비숍 또한.”
“키릭이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네. 우린 그저 우리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하면 돼. 그리고 이라코스타의 일은 아직?”
“……예.”
이라코스타라면 로슈르 제국이 위치한 트라폴리아 서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대륙이다.
“폭풍우를 만났다고 해도 룩의 마법이라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터. 다른 무언가가, 보다 상위의 존재가 개입했다는 뜻이야. 우리도 시간이 부족하지만 놈들도 필사적이니까.”
“스타비챠 중 8개 전단이 투입되어 그녀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
갈리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언제까지나 특채라는 명분으로 이곳을 빌리기도 힘듭니다. 아시다시피 마르테 보리스의 사나운 개들은 작은 변화나 일 점의 어긋남에 무척이나 민감하니까요.”
갈리우스는 주름 가득하고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입매가 찌그러졌다.
대체 자신들의 주인은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도 왜 전면에 나서서 일을 처리하려 하지 않을까.
롱 버트가 깨어났고 태양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벌써부터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수백이 넘는 스타비챠가 허무하게 죽었고, 조직 최강이라 자부하던 피스들 중 나이트, 비숍, 폰이 생을 다했다.
커맨더 모로는 실종 처리 되었지만, 그 또한 죽었을 것이다. 또 위성도시 하르실라 일부가 불바다로 변해 제국의 사냥개들을 자극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제르 호바의 예언.
적어도 몇 백 년은 더 지나야 실현될 것으로 여겼건만 어째서인지 약 20년 전에 첫 번째 징조가 일어났다.
옛 학자들의 해석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하긴 벌써 5천 년이 지나 버렸으니 어느 정도의 시간적 오류는 이해할 만하다.
다행이었던 것은 지금 세상에 예언에 등장하는 다섯 존재들이 동시에 태어났다는 점.
첫 징조가 일어나고 얼마 안 되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모습을 보였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이는 예언의 시기상 오류를 빼고 보면 정확히 일치하는 순서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자신의 대에 재앙이 벌어질 것을 생각하니 갈리우스는 더욱 골치가 아파진다.
이러한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주인은 침묵도, 외면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일 뿐.
그 무엇도 상관치 말고 그저 각자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 주인이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예언은 언제든지 빗나갈 수 있지.”
“예?”
“예언이란 것,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야. 만약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간다면 저 넷은 지금 다섯이 되었거나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안 그런가?”
갈리우스의 말은 조직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던 의문을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길 바랐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 주게.”
“예.”
***
키릭은 불바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온몸에 깊은 상처가 가득했고, 아랫배가 갈라져 창자의 일부가 삐죽 튀어나온 채 꿈틀거린다.
누군가 키릭에게 고함쳤다. 피하라는 뜻일까.
어디선가 강렬하고도 뜨거운 기운이 키릭에게 쏟아졌다.
지이잉―
키릭은 팔을 들어 푸른 방패를 불러냈다.
콰콰콰콰!
불덩어리가 방패에 걸려 크게 타원을 그리며 흩어졌다.
키릭은 순간 자신에게 불을 쏘아 낸 존재의 눈을 보았다.
어둠. 그리고 그 안에서 노랗게 빛나는 눈.
눈 아래 눕힌 반달 모양으로 벌어진 입에서는 차가운 대기와 만난 열기로 인해 허연 김이 뿜어져 올라온다.
키릭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힘주어 쥐었다.
마치 심장의 고동과 같은 규칙적인 진동이 이 거대한 검, 세이비어에서 느껴진다.
이제 끝장인가.
팅! 티잉!
검고 거대한 괴물을 공격하는 이가 있었다.
키릭에게 탈출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한 마지막 발악.
괴물이 키릭에게서 시선을 돌려 방금 공격을 가한 자를 노려보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폰.
데일의 곁에서 그를 지켜 온 보호자요, 동반자.
또한 비숍과 같은 조직의 일원.
왜 그들은 키릭과 데일을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것일까.
아그작.
괴물의 눈길을 빼앗고, 또 공격을 계속하던 폰이 사라졌다.
괴물이…….
드래곤이 그의 상체를 씹어 삼키는 광경이 똑똑히 보인다.
인간의 피와 살점을 삼킨 것에 희열을 느꼈을까.
드래곤은 한껏 날개를 펼치며 환희를 담아 괴성을 지른다.
기회였다. 키릭은 남은 힘을 짜내어 놈에게서 멀어져 끝없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키릭은 공간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점을 보았고, 그곳을 목표로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데일.
그곳에는 키릭의 유일한 친구가 된 작은 소년이 편안한 자세로 누운 채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투성이 남자가 선혈을 줄줄 흘리며 키릭을 맞이한다.
그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녹슨 검이 반대쪽 어깨 위로 삐죽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살기는 틀린 것 같다.
어둠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 조용히 퍼지는 웃음.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비숍이 키릭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것을 듣자 왜 이렇게 서글픈 감정이 일어나는지 키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비숍이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키릭은 천천히 데일을 안아 일으켰다.
친구의 온기가 상처 입은 키릭을 포근히 감싸 온다.
그릉.
놈이다.
하르실라의 일부를 불지옥으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녹여 버린 드래곤.
폰을 씹어 먹었으며, 비숍이 녹터널 헌터들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도록 만든 원흉.
저 괴물은, 저 추악한 드래곤은, 저 북부인의 이름을 가진 고대의 악몽, 헤테르프는.
키릭에게 지독한 원한을 가졌다. 그리고 키릭은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
가가가가가가!
크게 벌어진 드래곤의 아가리 속에서 밝은 빛이 올라왔다.
드래곤 블레이즈라…….
하르실라 성벽이 녹아 흘러내릴 정도로 초극의 열기를 머금은 용의 불덩어리는 키릭도, 잠들어 있는 데일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다.
‘디…….’
키릭은 머릿속을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따라 말했다.
쿠아아아아!
어둠을 살라 버리고 둘에게 쏘아지는 블레이즈.
죽음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키릭은 왠지 모를 따스함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디. 펜. 덤.’
환한, 그리고 뜨겁지 않은 빛이 둘을 감쌌다.
번쩍!
눈을 뜬 키릭이 제일 먼저 본 것은 천장에 매달린 방사형 모양의 등불 받침대들이었다.
온몸에서 흐른 땀이 침상을 가득 적셨고, 격렬하게 뛰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없다.
잔뜩 긴장한 근육으로 인해 지급받은 잠옷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것을 확인한 키릭은 곧 침상에서 일어났다.
‘지독한 꿈이로군.’
꿈이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잊고 싶으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
그 사건의 한복판에서 살아남는 이는 키릭 자신과 커트라는 이름을 가진 제국군 하급 병사뿐이었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키릭은 커트를 협박해 발설을 막고, 자신도 뇌 속 깊은 곳에 그날의 일들을 잠재워 두었다.
세상에 드래곤이라니……. 그것도 키릭과 데일을 잘 아는.
현실 세계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능력자인 키릭도 드래곤이라는 과거의 망령을 보고 환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었다. 그만큼 고대 하늘을 지배했던 최상위 포식자의 출현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라 여겼던 순간, 자신이 읊조렸던 단어.
이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단어를 말하자마자 마법과 같은 것이 키릭과 데일의 목숨을 구했다.
“후우…….”
데일은 그날의 일들을 알고 있을까.
눈을 감고 다 들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있고 다음 날 아침, 너무나도 차분하게, 너무나도 신비로운 얼굴을 한 채 눈을 뜬 데일.
데일은 키릭과 커트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 보이는 제국의 수도, 라로시르의 성벽과 황궁의 흐릿한 형체를 보며 눈을 빛냈을 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키릭은 방을 나섰다.
터벅터벅.
어두운 복도를 벗어나 숙소 외부로 나온 키릭.
상의를 탈의한 채, 전사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검회색 가죽 바지와 검은 가죽 장화를 착용하고 나온 키릭은 사부 디록이 물려준 마검, 세이비어를 들고 숙소 마당에 섰다.
부웅―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검의 무게가 오히려 키릭에게 편안함을 준다.
원을 그리며 멈추지 않고 끝없이 휘도는 하얀 검의 궤적.
달빛을 받아 구슬프게 빛나는 검면은 언뜻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키릭은 눈앞에 놈이 있다고 상상했다.
사부를 떠나 세상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절망을 주었고, 죽음을 떠올리게 한 괴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