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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0화)
4장 지켜보는 시선(3)
키릭이 세이비어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당신께선 아직 깨닫지 못하셨군요.”
뇌 어딘가에서 놈의 음성이 울리는 듯하다.
“복수는 정당한 권리라지요. 당신이 그런 연약한 육체에 깃든 지금이야말로 제겐 최고의 기회입니다. 먼 훗날 아버지께서 다시 세상을 향해 포효하실 때, 당신이 그분 곁에 계시다면 그때 죄를 청하지요.”
아리따운 인간 여성의 몸을 하고 있을 때 어떻게든 끝장을 냈어야 했다.
“……인간의 육체, 인간의 마음, 인간의 기억. 제가 긴 시간 동안 울고 또 울면서 잊고자 했던 것들이었는데, 전 아직도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나 봅니다.”
헤테르프.
북부어로 ‘타락’이라는 뜻을 가진 드래곤의 이름.
“닥쳐.”
쉬이익!
검이 놈의 잔상을 베었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한 드래곤은 그 모습 그대로 키릭을 비웃기만 한다.
“……오랜 세월은 당신들에게 독이 되었군요.”
“입 다물라고!”
심장이 한 번 박동하는 찰나에 여섯 번의 공격이 들어갔다. 그러나 눈앞의 환영은 사라지지 않는다.
쾅!
묵직한 클레이모어가 큰소리를 내며 돌바닥에 박혔다.
“헉…… 헉…….”
웬만해선 지치지 않는 키릭이지만, 이 순간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검에 몸을 의지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이성을 잃은 듯했던 놈은 거대한 공간의 벽에 막혀 사라진 드래곤 블레이즈의 흔적 뒤편에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다시 정신을 차린 드래곤은 곧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키릭과 데일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는 후에 다시 만날 것을 말하며 떠나갔다.
키릭에게 절대적인 절망이라는 숙제를 남기고…….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숨을 고르던 키릭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가 닥치라고 할 때부터.”
마당 구석,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차분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키릭은 예민한 자신의 감각을 뚫고 들어온 존재가 누군지 알았다.
리디아 힐겐.
“경고한다. 다음부턴 함부로 나의 수련을 지켜보지 마.”
“…….”
리디아가 천천히 키릭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키릭은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거…… 뭐였지?”
리디아가 키릭에게 물었다.
키릭은 무슨 소리냐는 듯 비로소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베어 내고자 했던 허상. 그건 결코 인간이 아니었어.”
“……너 무엇을 본 거냐.”
여기서 리디아의 놀라운 능력 하나가 드러났다.
타인의 정신이 형상화한 환영을 그의 감정에 개입해 함께 느낄 수 있는.
“아무것도. 그냥 너의 흔들리는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에 그것이 있다는 것만 알아.”
리디아는 키릭이 떨쳐 내고자 했던 공포의 끝에서 심연과 흡사한 존재가 손짓하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 아닌, 보다 높은 세계에 위치한, 태고의 저주를 닮은 암흑.
“우리가 모르는, 어쩌면 영원히 몰라야만 할 진실. 그 어둠은 내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어.”
“내 입에서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그만해라.”
키릭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리디아와 자리를 더 오래 했다가는 속에 두고 있는 무언가가 저절로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짐이라는 거, 계속 두고 본다면 언젠가 화살이 되어 돌아와. 난 너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짐의 무게를 덜어 줄 수 있어. 나를 여기 있게 한 능력, 태양과 대지의 요정들이 준 치유의 힘으로.”
남부 전장에서 간호사로 종군하며 수많은 병사들의 육체적 상처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보듬어 주었던 리디아였다.
그녀에 대해 외부로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적어도 남부 제국군 내에서 만큼은 문 레이디, 리디아 힐겐을 모르는 병사들은 없었다.
리디아의 손은 죽어 가는 병사에게 온기를 돌려주었고, 리디아의 목소리는 절망에 빠진 부상병에게 희망을 떠오르게 했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기적’을 이룬 리디아.
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키릭의 어둠을 어루만지고자 했다.
그러나 키릭은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능력에 의문을 품어서가 아니었다.
리디아를 볼 때마다, 마치 또 다른 자신이 있어, 그녀를 멀리하라고 끝없이 소리치는 듯한 답답함이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키릭은 세이비어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너와 나…… 과거에 마주친 적 있어?”
뚝.
“없다.”
“그렇지? 그런데…….”
리디아는 키릭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키릭에게서 관심이 멀어진 적이 없었다.
왜?
대체 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에게 끌리는 심정을 거두기 불가능했다.
키릭은 북부인이고, 리디아는 대륙 동쪽 볼라스카 지역민이다.
연결 고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이건만 아득한 과거에 손을 잡고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던 것만 같은 기이한 감정이 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더욱 키릭을 감싸고 있는 어둠과 고통,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의무감에 대해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숙소로 들어가는 키릭의 귀에 리디아의 한숨이 길게 들려왔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리디아도 조용한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짜증나.”
뿌득. 뿌드득.
갑자기 입구 근처 기둥 옆에서 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음이 일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느닷없이 부스스 잘게 쪼개진 얼음 조각을 흘리며 인간의 형체가 나타났다.
전신에 얇은 얼음막을 생성해 달빛을 흡수하여 반대쪽으로 통과시켜 버린 놀라운 은신 능력.
다름 아닌 루산이었다. 가벼움 속에 이런 힘을 갖추고 있었던가.
“초라해지는군…… 옛날처럼. 응? 옛날?”
루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말의 어폐가 안 맞음을 인식하고 스스로 당황해 버린다.
“이봐, 이봐, 리디아. 나도 저놈 못지않게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겪었다고.”
루산 또한 리디아와 합류하기 전까지 라로시르로 향하는 길에 엄청난 괴물들의 습격을 맞이했었다.
다만 그런 좋지 못한 기억들의 편린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리디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루산의 손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피의 흔적들을 볼 수 없었을 뿐.
그것은 루산 특유의 밝은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로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그의 본성 때문일까.
쉬이이잉―
바람이 루산의 몸에서 은빛 조각들을 모조리 날려 주었다.
‘키릭, 너만 이 특채라는 헛짓거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루산은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안다.
연고도 없는 트라폴리아 대륙에 홀로 남겨진 이방인인 자신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사냥꾼일 뿐이었다.
그런 루산에게 친절하게도 숙소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며 시험을 제안했던 포트 노틀의 늙은 사령관.
그는 말년에 얻은 재미라며 마지막 시험을 마친 날, 국립대학교 특채 입학 추천서를 내밀었었다.
루산은 사령관의 선물이 정확히 무슨 의도인지 몰랐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너무나 과한 것이었다.
일개 고아 사냥꾼에게 이름만 들어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국립대학교라니…….
게다가 자신을 습격했던 괴인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루산의 머리를 가져가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던 그들은 예전에 얼음 대지에서 보았던 괴물들과 상당히 비슷했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긴다. ‘왜’라는.
혹시 루산이 사령관의 뜻에 따라 제국의 수도인 라로시르로 가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을까.
죽음의 위기 이후, 리디아를 만나고서야 루산은 뭔가 감을 잡았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녀와 동행해 수도까지 길을 안내했던 제국군 여장교 마리안과 나눈 마지막 대화를 통해서 이 특채라는 명분 뒤에 음모가 있음을 확신했다.
의문을 풀기 위해, 그리고 첫눈에 반한 리디아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국립대학교.
과연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마지막 한 명은 대체 누구지. 우리 모두에게 그랬듯 미지의 괴물들이 나타났음은 분명할 테고. 설마 죽기라도 했나? 하긴, 능력 부족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루산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숙소 앞마당은 완전한 고요에 잠긴다.
같은 시각, 대륙 서쪽 끝.
옛 누미비아의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해안 지역.
모래사장 멀리 밤바다 위로 삐죽 솟은 암초에 파도가 부딪친다.
대낮에도 어부들이 배를 대기 꺼려 할 정도로 위험한 이곳에는 말없는 달빛만이 바다 위로 긴 빛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턱.
유난히 뾰족한 바위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달을 등진 어두운 그림자는 분명 인간의 것.
얼음보다 시린 바닷물을 뚫고 올라온 인간은 매서운 추위에도 전혀 몸을 떨지 않는다.
한데 옷이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굴곡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풍성했다.
길게 풀어진 검은 머리칼. 하얗게 드러난 뒷목의 곡선.
틀림없는 여성.
으드득.
여인이 이를 갈았다.
“울지 않아…… 울지 않아.”
그녀는 로슈르어가 아닌 생소한 언어로 중얼거리며 누군가를 향해 끝없는 적개심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로슈르. 고집불통 아버지. 미친 사부. 썩을 놈의 룩……. 역겨운 괴물놈들.”
여인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욕이 자연스럽게 쏟아지는 것으로 보아 큰 고생을 했거나 정신이 온전치 않을 수도 있다.
순간 여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완전히 드러났다.
작게 찢어져 살짝 올라간 눈. 낮지만 끝이 도톰히 올라간 코. 가늘고 빨간 입술에 백옥처럼 하얀 피부.
전형적인 이라코스타 대륙의 미인상이다.
여인은 그렇게 한참 동안 이를 갈아 대며 욕설과 함께 분노를 발산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눈이 팔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길게 찢어 낸 붉은 천이 단단히 묶여 있었고 거기엔 검은색 염료로 희미하게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헤이룽(흑룡)…….”
이라코스타 대륙을 지배하는 대제국, 시엔의 언어로 헤이룽은 검은 용. 즉, 제르 호바를 상징한다.
어째서 그 불길한 이름이 여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일까.
“아…… 으.”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윽, 아아아아아!”
갑자기 밤하늘을 향해 무한한 분노를 담은 외침을 토해 내는 여인.
그녀의 볼을 따라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