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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1화)
4장 지켜보는 시선(4)
“데일 잉그하임, 일단은 통과!”
“꺄오!”
데일은 교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질렀다.
활을 처음 들어 본 게 한 달 전이었다.
교양 과목의 하나인 궁술은 귀족들이 즐기는 중요한 여가 활동 중 하나.
앞으로 귀족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큰 국립대학교 특채생들에겐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서는 당연하게도 국립대학교에서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었기에 교관이 매긴 점수는 데일에게 희망과도 같았다.
첫날부터 우아한 자세로 과녁의 정중앙을 관통시킨 리디아.
눈을 감고 세 발을 연달아 쏘아, 먼저 박힌 화살을 뒤의 화살들이 쪼개고 들어가는 신기를 보여 준 루산.
롱 보우 두 개를 부러뜨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날아간 화살이 과녁을 통째로 박살내는 괴력을 선보인 키릭.
그들에 비해서 불쌍하게도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못했던 데일은 꾸준한 연습과 루산의 특훈을 받아 결국 교관의 합격점을 얻어 냈다.
“좋아 죽네, 죽어.”
데일을 가르친 보람을 느끼며 루산이 피식 웃는다.
“응?”
루산은 순간 멀리서 느껴지는 칙칙한 기운에 반응했다.
“왜?”
리디아는 루산의 동물적인 감각을 잘 안다. 해서 루산의 기분 나쁜 표정을 보고 의문을 나타냈다.
“누가 왔어. 그런데 좀 별로네.”
댕― 댕―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수련장을 울린다.
“오, 알렉 경. 갑작스러운 방문에 미처 환영의 준비를 못 한 점 사과드리지요.”
갈리우스는 자신의 앞에 선 길쭉한 남자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보냈다.
귀족의 칭호와 어울리지 않게 제국 안전부 공무원들이 입는 회색 근무복을 입은 알렉.
갈리우스의 태도로 보아 그보다 더 높은 지위의 귀족임에 분명했다.
“따뜻한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차가운 생과일 음료를 좋아합니다만.”
“아, 예. 준비하지요, 일단 앉으세요.”
오른쪽 뺨에 십자로 깊게 베인 상처가 알렉의 인상을 더욱 차갑게 만든다.
갈리우스가 직접 사과를 갈아 잔에 담아 건네자 알렉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방학 기간이라 합숙소에 많은 인원이 없습니다.”
갈리우스의 말은 알렉이 왜 왔는지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보통, 정부 각 부처에서 미리 심사관을 보내 인재들의 자질을 심사하여 자신들의 업무에 적합다고 판단을 하면 졸업 후 특정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우선권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 기간이고 입학 시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따라서 제국 안전부 고위직인 알렉이 이곳에 올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특채라지요?”
“……예.”
“총장께 알아본 바로는 올해 특채는 전혀 계획하지 않으셨다더군요.”
꿀꺽.
“……부총장님께서 황태자 전하께 직접 재가 받으신 걸로 압니다.”
갈리우스는 무척이나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요?”
알렉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모른 척하고 있지만 사실 갈리우스는 알렉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제국 안전부 산하의 조직이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직속, 또는 마르테의 친위대로 알려진 살루키의 요원.
그것도 마르테 보리스와 독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심복 중의 심복.
“부총장님의 권한이 총장님의 그것 위에 있다고 믿기는 어렵군요. 흔히들 그런 행동을 독단이나 월권이라고 하지요.”
갈리우스는 머금고 있는 차의 맛이 유난히도 쓰게 느껴졌다.
“저야 뭐…….”
“소장, 우리 서로 솔직해집시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잘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말씀해 보세요.”
“리디아 힐겐. 문 레이디, 또는 남부 전장의 백합. 볼라스카 출신이며 어릴 때부터 생명체에 활력을 되돌려 주는 기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입에 대지의 요정이 현신했다는 소문이 오르내리게 만들었던 주인공. 지역구 의원의 권유로 얼음 대지에 간호사로 지원해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고, 전투에 앞서 그녀의 기도를 들은 병사들은 평소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발휘했죠.”
알렉은 갈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산 보우먼. 출신지 불명, 다만 이곳이 아닌 것은 확실. 이쪽은 별로 자료가 없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리디아와 마찬가지죠. 무기에서 냉기를 뿜어낸다든지 하는. 다음은 키릭. 출신지는 산맥 너머 북부 어딘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가는 노인과 함께 호리병 철광산에 나타나 지금까지 지냈다죠. 그곳에서 야생 동물들을 때려잡는 유희를 즐기다가 최근에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곳에 있더군요. 딱히 드러난 능력은 없지만 무지막지한 괴력과 뛰어난 검술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증언을 했습니다. 아, 죽어 가던 노인이 그 유명한 마스터 디록일 수도 있다는 보고는 저도 안 믿습니다.”
갈리우스는 알렉이 아는 부분이라면 보리스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데일 잉그하임. 알고 보니 발라니스 잉그하임의 손자요, 로그 잉그하임의 아들이었습니다. 로그는 남부 제국군에서는 영웅처럼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아시죠?”
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는 특히 더 놀라워요, 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주목했었으니까. 한데 로그의 죽음 이후로 그에 관한 모든 소문이 싹 사라졌죠. 마치 누군가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 버린 것처럼 말이지요. 저희도 얼마 전에 옛 보고서를 펼치고서야 기억해 냈습니다. 공간을 뛰어넘고 미래를 예측한다라…….”
데일에게 그런 능력들이 있었던가.
“더 있긴 하지만 그거야말로 뜬소문일 테니까 빼도록 하죠. 사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 자체가 소설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죠?”
“허허, 예. 그렇군요.”
순간 알렉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같은 나이, 태어난 날도 비슷하고, 인간이라 보기 힘든 이상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 그런 이들만 동시에 특채로 선발되어 한곳에 모였다……. 거기까진 이해할 만해요. 부총장님께서도 자신의 편에 설 후계자들이 필요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총장님과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하잖습니까.”
“제가 그분들의 생각을 어찌 알겠습니까.”
갈리우스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렉의 말은 어쩌면 단순한 학교 내 권력 다툼을 경고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제국 내에서 몇몇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갈리우스는 찻잔으로 가던 손을 멈췄다.
“처음 남부에서 굉음과 함께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지요? 수천의 병사들이 목격했으니 사실일 겁니다. 그 이후로 놈들과 전투를 벌인 횟수가 상당히 증가했고요.”
“…….”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여기까지 갑자기 실종되는 사람들의 수도 늘었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전혀 밝혀진 바가 없지요. 우리가 뭔가 이상을 감지한 것이 그때부텁니다. 전장에서 사망했음이 틀림없는 병사들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전례 없이 마법사를 보았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다 헛소문일 뿐입니다.”
“예, 예. 당연하지요. 마법이란 건 특별한 축복을 받은 이들에게 허락된 고귀한 능력이니까요. 여기 있는 네 아이는 빼고 말이지요.”
알렉은 갈리우스의 속을 파 보고자 하는 듯 그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 하르실라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에 대해 아시리라 믿습니다.”
“들었습니다. 외곽 지역에 위치한 숙박 업소들 수십 채가 전소하고, 사망, 실종을 포함해 1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발생했다더군요.”
사망과 실종.
그 사이에 부상이란 언급은 없었다.
“마르테께서는 그것을 단순한 방화범의 소행이라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래요?”
“그 사건 이전에 모로 경과 그의 부대원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도 있었고요. 혹시나 모르실까 봐 부연하자면 모로 경은 황태자 전하를 모시던 호위대의 대장이셨습니다. 우리는 말도 못 걸 정도의 높은 신분을 가진 분이란 말입니다. 또 더 전에는 정체불명의 검사들 간 다툼이 벌어졌고 훨씬 더 전에는…….”
“알렉 경. 제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갈리우스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알렉의 말을 끊었다.
“잉그하임이요. 그리고 덩치 큰 북부인, 키릭도.”
“예?”
“여러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그 아이가 있더란 말입니다. 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키릭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죠.”
“뭔가 오해를…….”
“저런, 우릴 너무 우습게 보셨군요.”
알렉이 그답지 않게 킥킥 웃었다.
“잉그하임이 추천을 받아 마을을 떠난 이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조직이 그의 흔적을 착실히 지워 나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같았지요. 중간에 싸움도 있었고, 여러 사람……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요. 아무튼 많은 목숨이 증발해 버린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모로 경과 잉그하임이 접촉한 사실도 우린 알아요. 잉그하임과 키릭이 하르실라에 머물렀었다는 것도.”
‘젠장.’
갈리우스는 마르테가 이끄는 국가 조직의 광범위한 정보망에 혀를 내둘렀다.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것은 자신들과 같았으나, 그들을 은근히 무시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비밀 결사였고, 마르테 쪽은 그가 황제의 특명으로 제국의 안전과 외부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비교적 잘 알려진 조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대화를 통해 저들에게도 이제는 어마어마한 힘이 갖추어졌음을 깨달았다.
이런 것을 변수라고 해야 할까.
남부의 괴물들만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거늘 상대해야 할, 아니, 조심히 피해야 할 자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갈리우스는 가슴이 내려앉을 것만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우리의 시선은 사실 남부에 두고 있어요. 놈들이 본격적으로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 사건들은 그에 대한 전조고요. 한데 거기에 데일 잉그하임이 껴 있다는 사실은 솔직히 쉽게 판단 내릴 사항이 아니더군요. 우연일 수도 있겠죠. 부총장께서 계획하고 있는 일과 단순히 겹친 우연.”
“제게 하실 말씀의 결론만 내려 주시죠.”
갈리우스도 약간 비굴해 보였던 태도를 버리고 알렉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켜볼 겁니다. 오늘 제 방문은 마르테께서 주신 경고이자 배려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부총장께서 무엇을 꾸미든, 그것이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라면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 조만간 부총장님과 마르테께서 조촐한 자리를 마련할지도 모르겠군요.”
‘다행이로군. 저들은 아직 사건의 겉만 핥고 있어.’
갈리우스는 마르테의 사냥개들이 속을 파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안심했다.
저들은 남부의 진실한 위협이 무엇인지, 검은 구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하르실라의 비극과 커맨더 모로의 실종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고대용이 한 예언의 해석과 재앙의 시기에 대해 전혀 모른다. 왜 아이들을 이곳에 모아 제렌 디스의 마수로부터 보호하고 있는지도.
그저 최근 일어난 기이한 일들에 대해 조사하던 중 이쪽과 작은 연결 고리가 있음을 발견한 것뿐이다.
‘그게 너희들의 한계야. 자린에 대한 믿음이 없는, 애초에 전설을 부인해 온 인간들의 망각.’
스스슥.
이때 알렉도 갈리우스도 천장 어디선가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사라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갈리우스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알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사건들이 별개의 것이라 친다고 해도 일단 데일 잉그하임에 대해서는 마르테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죠?”
“발라니스 잉그하임의 손자니까요. 두 분의 신분을 떠난 우정은 잘 알려진 미담이랍니다.”
과거 마르테 보리스와 발라니스 잉그하임, 두 사람은 남부의 전장에서 한 명은 총사령관으로, 한 명은 평민 출신 호위대 장교로 함께 종군하며 수많은 적들을 물리친 ‘전우’였다.
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묘한 미소로 알렉에게 묻는 그의 얼굴은 다시 평범한 합숙소 소장의 그것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