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 자린 1권(12화)
5장 깨어나기 시작하는 태고의 힘(1)


사방에서 용암이 분출되는 이곳. 데일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곳이다.
처음 보는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고, 아무렇게나 깎아 세운 검은 기둥들 끝에서 환한 빛이 들어온다.
‘어딜까.’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의식이 흘렀다.
점점 그곳을 향해 다가가자 높이를 알 수 없는 천장 끝까지 개방된 홀의 입구가 보였다.
‘아…… 아름답다.’
밖에 존재하는 풍경을 본 데일은 저도 모르게 포근해지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끝없는 대지를 덮은 하얀 눈.
만년설을 간직한 산들. 그중 가장 멀리 존재하는 산에서 붉은 용암이 내뿜는 열기가 이곳까지 오는 듯했다.
넋을 놓고 풍경을 감상하던 데일은 곧 고고한 자세로 등진 채 밖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가 입은 흑색의 로브와 외부의 하얀 풍경이 대비되어 그 또한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데일의 존재를 느낀 것일까.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데일을 향해 섰다.
그의 얼굴은 빛을 등지고 있기에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다만 살짝 휘어진 입가의 미소만이 데일을 반길 뿐.
‘당신은 누구십니까…….’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느릿하게 몸을 굽혔다. 마치 세계의 왕을 향해 축언을 올리는 사제의 모습으로.
그의 입이 오물거리는 것을 통해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점점 그에게 가까워지는 데일.
거의 2m 이내로 다가갔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름 없는 중년 미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데일에게는 전혀 생소한 얼굴.
그러나 데일은 그와 마주한 순간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분노, 슬픔과 저주의 감정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데일은 그를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깊은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내면은 그를 안다.
데일에게 공손한 자세로 손바닥을 보이며 손을 들어 올리는 미남자.
그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할까, 아니면 화를 내며 떠나야 할까.
데일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 기미를 파악한 미남자의 입가에 차가움이 감돌았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데일의 의식이 급속도로 그에게서 멀어져 어둠을 향해 날아갔다.
꿈과 환상의 공간에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인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데일의 다른 내면이 의식을 덮는다.
‘롱 버트…… 나의 충성스러웠던 제자. 그리고…… 친구.’
롱 버트.
엘 카로의 총리 대신.
스스로 제르 호바를 수호하는 제렌 디스가 되어 암흑 군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배덕자.
녹터널 헌터들을 지배하는 절대의 마왕이며, 인간계 최강의 마법사라고 불리었던 검은 영웅.
‘롱 버트…… 내 친구여……. 너의 잠을 그 누가 깨웠는가…….’
눈물 속에서 어둠이 빛을 가린다.

***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데일이 깨어났다.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며 발버둥 친다.
“야, 야야. 데일! 괜찮아?”
루산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자 데일도 차츰 진정의 기미를 보였다.
“흑, 흐윽.”
잔디에 누워 신음하는 데일을 두고 세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루산이 자신을 째려보는 리디아에게 힘없이 말했다.
“데일이 잘못되면 넌 내 손에 죽는다.”
나직하게 말하는 키릭의 음성은 누가 들어도 소름끼칠 정도였다.

오전 수업은 주드폼이라는 체육 활동이었다.
작은 공을 서로 쳐 내며 격하게 움직이는 것을 통해 신체를 골고루 단련할 수 있는 이 운동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종목 중 하나였다.
데일은 루산과 한 조가 되어 공을 주고받으며 땀을 흘리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데일이 구름을 뚫고 내려온 햇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았다.
팅!
그것을 보지 못한 루산이 강하게 공을 쳐 데일에게 보냈다.
“헛!”
공은 정확하게 데일의 관자놀이를 가격했고, 그대로 쓰러진 데일은 한참이나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보는 이들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큰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 못 봤어. 끙…….”
루산이 사과했지만 데일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아까와 같은 멍한 표정을 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있어. 지금 데일은 뇌가 크게 흔들려서 아직 정신이 몽롱할 거야.”
리디아가 차분하게 말하며 잡았던 데일의 손을 놓았다.
“……롱 버트.”
“응? 지금 뭐라 했어?”
데일이 갑자기 입을 열자 놀란 루산이 되물었다.
“용암을 다스리는 피의 마법사.”
“무슨 말이야?”
슬슬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데일의 정신을 붙잡고자 리디아도 말을 건다.
“…….”
그런 데일을 바라보는 키릭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렸다. 데일의 입에서 롱 버트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아, 일단 양호실로 데려가자. 여기선 뭘 해도 안 되겠어.”
루산이 서둘러 데일을 업고 숙소로 뛰어갔다.
그 모양을 굳은 표정으로 응시하는 키릭. 그리고 키릭을 슬쩍 곁눈질하며 한숨을 쉬는 리디아.
잠시 후, 둘은 숙소로 함께 들어갔다.

세상에 어둠이 내린 밤.
루산과 리디아는 이미 각자의 잠자리에 들었지만 키릭은 깨어 있었다.
양호실 침상에 누워 잠든 데일의 곁에서.
마치 작고 어린 곰을 돌보는 거대한 어미 곰을 연상케 하는 키릭은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미동 없이 자리를 지켰다.
작은 창에서 달빛이 들어와 편안하게 돌아온 데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와 반대로 어둠에 가려진 키릭의 얼굴은 낮에 보였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변해 있다.
“데일…… 놈을 보았나.”
키릭은 깊은 잠에 빠져, 자신의 말을 들을 수도 그에 대답할 수도 없는 데일에게 말을 걸어 본다.
“너도 놈을 느꼈느냔 말이다.”
키릭은 데일의 입에서 나온 롱 버트라는 이름을 안다.
처음 황금빛 이끌림에 의해 데일을 보게 되었던 그날.
괴인의 손에서 데일을 구해 냈던 그날.
키릭은 롱 버트를 보았다.
흐트러지는 검은 연기 속에서 자신을 향해 인사를 올리던 어둠의 마법사를.
누구도, 심지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여겼던 비숍도 키릭에게 롱 버트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키릭은 롱 버트가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또한 데일에게는 더욱 커다란 위협인 것도.
겨우 롱 버트의 힘 일부만을 담았던 블랙 미디엄이라는 마법 구슬이 내뿜은 강대한 마력은 키릭을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갔지 않았던가.
하지만 데일은 그를 몰라야 했다.
롱 버트가 보낸 괴물들을 쳐부순 것은 자신이었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기만 했던 데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데 데일이 롱 버트를 말했다. 그것도 흐릿한 정신 속에서.
“비숍이 틀렸군. 이곳도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해. 아무래도 오래 머물긴 어렵겠구나.”
키릭은 이 특채가 정상적인 과정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동안 겪었던 혈로가 상식 밖의 일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다.
겨우 16살의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러 가는 길에 발생한 소동치고는 정도가 과하다.
데일과 키릭, 어쩌다 끼어든 커트를 제외하고 관련된 모든 이들이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비숍의 유언처럼 자신의 역할이 데일의 지키는 것이라면―물론 키릭 나름대로 해석했을 때― 이대로 있어서는 곤란했다.
키릭은 분명 무언가를 아는 것이 확실한 사감 밸류를 만나 폭력을 써서라도 이 음모로 가득한 상황을 파악하기로 결심했다.
스윽.
키릭이 일어나 양호실을 나왔다.
그리고 밸류가 머무는 방을 향해 걸었다.
뚜벅, 뚜벅.
뚝.
세 걸음도 걷지 않고 키릭이 멈췄다.
“꺼져.”
키릭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루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곤란해.”
뜬금없는 루산의 말.
“사감을 조져 봐야 그 무거운 입을 열긴 힘들 거야.”
이미 키릭의 뜻을 짐작하고 있는 루산이었다.
“…….”
“너희 둘, 비밀이 너무 많아.”
“너 따위에게 해 줄 말은 없다.”
“이거 왜 이러실까. 함께 커 나가야 할 동료 아냐?”
우드득.
키릭의 주먹에서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린다.
“데일, 저 녀석은 모를 거야. 그저 국립대학생이 된다는, 출세를 한다는,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꿈에 젖어만 있겠지. 하지만 너는 달라.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거든.”
루산이 단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루산의 짐작은 틀렸다.
키릭은 의문 정도가 아닌 이미 확신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세상에 보기 드문 괴물들과 싸우며 이곳에 왔을 테지.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키릭은 루산도 비슷한 전투를 경험했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
“웃기잖아? 왜, 누가 우리의 길을 막으려 한 걸까. 남들과 조금 다른 능력을 가졌을 뿐인데.”
사실 키릭도 ‘적’들의 진정한 의도와 정체는 모른다.
데일과 자신을 죽이거나 납치하려 했던 행동 뒤에 숨겨진 목적.
그리고 롱 버트라는 마법사와 그가 부리는 추악한 괴물들.
왜 자신들이었을까. 거기에 루산까지 더해서.
“……리디아도 습격을 당했나.”
“몰라. 하지만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단정은 못해.”
“…….”
비밀은 키릭과 데일,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루산도 리디아도 이들 못지않게 감추었던 일들이 많았다.
“롱 버트가 누구야?”
“데일과 나를 공격했던 자들의 주인.”
“낮에 네 표정은 데일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
“맞다. 데일은 놈을 본 적이 없으니까. 늘 잠들어 있었지.”
“태평하군…….”
루산은 키릭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