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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3화)
5장 깨어나기 시작하는 태고의 힘(2)
데일은 키릭이 겪었던 전투를 보지 못했다. 따라서 롱 버트라는 놈을 몰라야 하는 것이 정상.
“하나같이 비정상이야, 우리는.”
루산도 머리가 아픈지 코끝을 찡그린다.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겠지.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좀 더 말해 봐.”
“인간이 아닌 것들의 습격이 있었다. 날 제거하고자 했고, 데일을 납치하려 했지. 우릴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나중에는 쉽게 여기에 도달할 거라 생각했었고.”
“그런데?”
“드래곤.”
“잉?”
“드래곤이 우릴 노렸다. 정확하게는 나를.”
“장난하냐.”
루산은 키릭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용은 곧 전설. 실재하지 않는 환상 속 존재다.
“그때 우리의 조력자들이 모두 죽었어. 불타는 하르실라에서. 비숍도 폰도…… 드래곤은 다음에 보자고 말한 뒤 떠났지.”
“헐…….”
‘가만, 비숍? 폰? 둘 다 체스판의 피스를 일컫는 명칭. 그럼 설마…….’
움찔하는 루산을 보던 키릭이 입을 열었다.
“뭔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나.”
“조금 더 확실해졌을 뿐이야. 옛날에 죽을 뻔한 날 구해 준 사람의 이름이 나이트였거든. 그렇다면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이 아니라 퀸이겠군. 여기 오기로 한 다른 특채생 옆에는 룩이 있을 테고.”
키릭 또한 루산의 말을 듣고 상황을 짐작했다.
다섯 아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다섯 피스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먼 길.
그러나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은 배움의 전당인 대학교가 아닌, 어둠과 피로 얼룩진 음모의 한복판.
이 음모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한쪽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들을 지켜 내 뭔가에 이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자신들을 죽여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고.
어느 쪽이든 기분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총장.”
루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자가 열쇠를 쥐고 있어.”
“그건 무슨 말이냐.”
“들었거든. 며칠 전 소장을 만나러 왔던 길쭉한 녀석, 기억하지? 소장과 녀석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루산의 은신 능력이라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길쭉한 놈도 이번 특채에 관해 의문을 품더군. 그리고 그 핵심에는 부총장이 있다고 확신했고. 이거 생각보다 복잡해. 여러 조직이 얽혀 있는 것 같으니까. 게다가 우릴 습격한 괴물들의 정체도 대충 견적이 나와.”
“말해라.”
“남쪽의 미치광이들. 아직도 기이한 전설이 꿈틀거리는 마법의 얼음 대지. 괴물들은 거기서 올라왔어. 한층 강해진 힘을 얻고서.”
루산은 그 시작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모른다. 롱 버트의 부활이라는 재앙의 시작이.
“곧 여길 떠나려 한다, 데일을 데리고. 그럼 너를 보며 더 이상 짜증날 일도 없을 테지.”
키릭이 간단하게 스스로의 결론을 말했다.
“이봐, 이봐. 잘 생각해 봐. 수도로 오기 전까지 괴물들은 우릴 끊임없이 괴롭혔어. 나야 리디아를 만난 뒤 편안하게 왔지만, 너흰 달랐잖아. 여길 벗어나는 순간 또다시 괴물들이 공격할 거야.”
“어찌 확신하나.”
“어휴, 딱 보면 모르겠어? 라로시르로 들어온 때부터 우린 안전해졌다는 말이야. 수만의 근위대가 지키고 수십만의 시민들이 우글거리며, 위대한 마법사와 강력한 기사들이 버티는 곳이 바로 여기야. 무엇보다 황제가 있어. 수도에서 사건이 터진다면 놈들도 끝장이라고. 당장 수백만 제국군을 동원해 남부를 쓸어버릴걸? 이미 제국 쪽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으니.”
키릭은 루산의 말에 일부는 동의했다.
그러나 루산은 롱 버트의 막강한 능력에 대해 모른다.
또 검은 용의 씨앗, 헤테르프에 대해서도.
드래곤이 마음만 먹으면 도시 하나 정도는 단번에 쑥대밭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롱 버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검과 창, 투석기와 말에 의존하는 인간은 결코 불을 뿜어내고, 숨결로 바위를 부수며 날갯짓으로 건물을 붕괴시키는 드래곤에 맞설 수 없다.
잠깐 맛만 보았지만 롱 버트의 힘도 마찬가지다.
허공에서 번개를 불러 생명체를 일격에 태워 버리는 마력은 갑주를 걸친 기사단 따위는 순식간에 통구이로 만들 수 있다.
키릭이 일부 동의한 것은 현재는 자신들이 안전한 보호 속에 있다는 사실뿐.
마지막 적의 목줄을 끊은 뒤, 수도의 성벽이 보이는 곳부터 적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아마 비숍이 가끔 언급했던 그의 주인 덕분일 것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조차 경이롭다는 그 주인의 힘.
루산과 키릭은 보는 방향은 달랐지만, 일단 같은 명제에 대해서는 수긍한다.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
“그럼 순서는 정해졌군. 우선 사감부터 시작해 부총장까지.”
키릭은 여전히 단순하게 말했다. 루산이 인상을 쓴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아, 이 자식이 좋게 설명해 주니까 알아먹지를 못하네, 정말.”
루산이 으르렁거리자 키릭도 얼굴을 굳히고 푸른 열기를 방출했다.
“그냥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너 때문에 리디아가 힘들어 하는 거 보기 싫으니까.”
역시나 루산의 머릿속에는 리디아 생각뿐이었다.
“나중에야 어찌 됐든 리디아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야 해, 귀족이 되어 당당하게 남부로 가서 불행한 이들에게 힘이 되겠다는. 이대로 그냥 쭉 가면 가능한 꿈이야. 네가 나서서 틀어 버릴 권리는 없다.”
“오늘밖에 생각 못하는 놈. 너도 우리가 정상적인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알 텐데?”
키릭의 말은 어차피 리디아나 자신들은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국립대학교는 그저 이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내외적인 핑계에 불과하고.
“그건 안다. 나도 생각 안 해 본 것은 아니야. 하지만 조용히 움직여도 충분해. 시작부터 저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 당장 돌아가서 잠이나 자. 이 치사한 음모를 밝혀내는 것은 내가 할 테니까. 음모는 음모고 학교는 학교야.”
으드득.
키릭이 이를 갈았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왔다.
약하지만 분명히 발현된 각자의 기운이 충돌하는 상황.
두 사람을 묶어 버린 증오라는 운명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때였다.
데일이 잠든 양호실 문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뭐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루산을 뒤로하고 키릭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둘을 덮쳤다.
“으어억!”
순간 키릭과 루산은 각자만의 환상 속으로 들어갔다.
루산은 낯선 풍경 속에 있었다.
높이 솟은 수 개의 산을 따라 이어진 거대한 산맥.
그리고 산꼭대기에 쌓인 만년설.
그 위로 바다보다 푸른 하늘이 세상을 덮고 있다.
시선을 내린 루산은 곧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았다.
수백만의 대병력이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돌진하는 모습들을.
그들 중에는 인간도 있었고, 추악한 요정도 있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형태의 괴수들도 있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는 병력들 위에 그것들이 존재했다.
아득한 과거, 하늘을 지배했던 고차원적 생물.
드래곤.
드래곤들이 멀리 보이는 산맥을 향해 포효했다.
루산은 본능적으로 한 점을 향해 눈을 돌렸다.
‘오.’
저도 모르게 나오는 감탄.
거기엔 푸른 괴물이 있었다.
상처 가득한 몸에서 끝없이 흐르는 초록색 피를 닦지도 않고, 그 앞에 선 모든 적들을 막아 내며 수백 단위로 파괴해 버리는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저것은…… 뭘까.
한 주먹에 일개 대대에 맞먹는 적들을 분쇄한 괴물이 루산을 바라보았다.
‘헉!’
놀라 숨을 삼키는 루산에게 괴물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가오라 손짓한다.
입가에 가득, 슬픈 미소를 머금은 채.
‘나?’
루산의 물음이 채 가시기도 전, 하늘의 드래곤들이 또다시 포효하며 푸른 괴물을 향해 날았다.
그 숫자는 못해도 천.
푸른 괴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드래곤들이 멈췄다.
펄럭거리는 드래곤들의 날갯짓도 결코 괴물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드래곤들의 눈이 빛나며 그 길고 끔찍한 아가리가 크게 벌어졌다.
잠시 후.
천 마리의 드래곤이 내뿜는 블레이즈가 푸른 괴물을 목표로 쏘아졌다.
‘맙소사. 끝장이야.’
순간, 루산의 귓가에 푸른 괴물의 음성이 들렸다.
디펜덤.
세상의 모든 물리력, 마법, 저주를 막아 낸다는 절대 방어의 상징.
전능한 자린이 오직 그만을 위해 준비한 무적의 방패.
그것이 하늘에 벽을 그렸다.
천 개의 화염이 공간의 벽에 막혀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 아아…….’
너무나도 장엄하고 너무나도 아름답게만 보이는 그 광경에 루산은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나의 친구, 나의 연적, 용감한 방패의 주인…… 베텔기우스.’
영원할 것 같던 용들의 불 잔치가 끝났다.
그리고 지옥의 화염을 무로 돌려 버린 푸른 괴물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루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푸르게 발광하는 빛을 향해 무형의 활을 잡아 시위를 당긴다.
“없어!”
루산은 키릭이 지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뭐?”
“데일이…… 여기 없다.”
루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침상을 확인한 뒤 신음을 흘렸다.
키릭의 말은 진짜였다.
그곳에는 잠들어 있어야 할 데일이 없었다. 흔적조차.
“어떻게 된 거지?”
“…….”
“미치겠네. 이건 또 뭔 일이래.”
키릭의 떨리는 눈은 끝까지 침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키릭…… 방금 너도 뭔가를 봤지?”
갑자기 루산이 물었다.
키릭이 천천히 루산을 돌아보았다. 루산과 마주한 키릭의 눈.
잠시 머리를 스쳤던 환상 속에서 보았던 무언가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푸른 괴물이 루산에게 보냈던 슬픈 시선과.
***
‘응…….’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달이었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 있는 듯 동공을 꽉 채운 달.
데일은 지금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구름들 아래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산맥.
어둡기만 한 세상이었지만 점점 그 모양들이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꿈이려나.’
꿈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멀리, 아주 멀리 반짝이는 녹색의 불빛을 보았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다가온다. 아니, 데일이 그곳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데일은 그것을 보고 마음이 편해졌다.
‘어서 와…….’
왜 그 빛을 향해 이런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저 반가운 감정만이 앞설 뿐.
슈우우우웃!
빛을 향해 다가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가슴 가득 포근함을 느끼며 데일이 눈을 감는다.
―조금만 더 자도록 해.
귓가에 누군가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