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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4화)
5장 깨어나기 시작하는 태고의 힘(3)


“차아앗!”
펑!
손바닥에 닿은 적의 뱃가죽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푸른 두건을 쓴 해적이 입에서 검은 핏물을 토하며 무너졌다.
“제 모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외치며 다른 해적 하나가 완만하게 휘어진 칼을 휘두른다.
스걱.
긴 흑발의 끝이 조금 잘라져 나갔다.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지쳤다지만 적이 근접해 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낮추어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두 다리를 강하게 차올렸다.
빠그작!
뒤꿈치가 해적의 턱을 강타해 뼈를 잘게 조각내 버렸다.
쓰러지는 해적의 입에서 살덩어리와 끊어진 혀의 일부가 흘러나온다.
“헉, 헉.”
입에서 풍기는 단내가 소녀의 심신이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려 주었다.
이 장소에서 해치운 적은 다섯.
그러나 아직 여섯이 남았다.
“꾼단(꺼져)…….”
소녀, 자오링은 적을 향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이름 모를 해안가에 표류해 온 뒤 한동안 자오링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육체를 극한까지 수련한 자오링이었지만 오랜 시간 차가운 바다에 던져져 있었기에 몸 상태를 쉽게 정상으로 회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오링은 무의식중에, 다가오는 불쾌감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것은 자신이 탄 배를 공격한 해적들의 기운과 일치했다.
수행 무사들을 몰살시키고, 자신을 데리러 왔던 ‘룩’이라는 마법사와 그의 조력자들까지 고기밥으로 만든 원흉들.
그들을 떠올리자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어떤 절망감마저 일어났다.

“고귀한 자오링. 여기까지가 제 한계랍니다.”

무시무시한 마법으로 해적들을 몰아내던 룩은 흑색 판금 갑옷을 입은 거대한 검사와 마주하자 힘없이 말했었다.
그 뒤, 몇 마디 말과 행동을 더 하고 룩은 검은 살기를 풀풀 풍기는 검사를 향해 마력을 날렸다.
순간, 환한 빛과 함께 자오링은 배에서 튕겨져 먼 바다로 추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사라졌다.
자오링은 자신을 쏘아보던 검사의 붉은 눈을 기억했다.
얼굴을 덮은 투구 안쪽에서 강렬하게 빛나던 마왕의 눈.
자오링에게 아득한 공포와 전율을 던져 준 절망 어린 벽.
그것이 해적들과 함께 자신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

통 넓은 바지에 긴 장화, 검푸른 천에 가죽 방어구를 가슴에 두르고, 그 가운데 붉은 염료로 해골 형상을 그려 놓은 해적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낮에는 보통 인간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으나 지금과 같이 밤이 되면 완전히 달라졌다.
힘은 두 배 이상 강해졌고, 팔, 다리가 잘려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집요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눈과 입에서 검은 연기를 흘리며, 마치 시체와 비슷한 몰골로 순식간에 변한다.
그야말로 괴물에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해적들과 전투를 벌인 지가 벌써 3일째.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숲에서, 때로는 넓은 모래사장에서, 절벽 끝에서, 동굴 근처에서 자오링은 끝없이 싸웠다.
일월천하―이라코스타―의 초인이라 불리는 사부, 무극진인 장샤오펭의 혹독한 가르침 덕분에 60년의 내공과 창칼도 막아 내는 신체를 얻었지만,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었다.
해적들의 수는 많았고, 중간중간 강력한 힘을 지닌 자들이 섞여 공격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오링은 내공이 거의 바닥났음을 알았다. 내공이 마르면 이 단단한 육체도 무너진다.
정녕 끝이란 말인가.
자신에게 명령해 트라폴리아 대륙, 로슈르 제국에 유학을 가도록 만든 아버지, 자오 대제와 사부가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자오링은 언젠가 황녀의 신분을 버리고 사부의 뒤를 이어 ‘무인의 숲’을 평정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단꿈을 꿀 수 없을지도…….
“캬아아!”
해적이 괴성을 지르며 칼을 내려쳤다.
척!
팅!
자오링은 손바닥으로 놈의 칼을 비껴 내고 그대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타마더.”
귀하게 자란 황녀의 입에서 차마 나오기 힘든 욕이 술술 흘러나온다.
자오링은 오른손에 남은 내력을 집중했다.
“쓰아압!”
퍼걱.
주먹은 그대로 해적의 뱃가죽을 관통해 들어갔다.
자오링은 놈의 내장이 전해 주는 뜨끈하고 물렁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힘이 솟았다.
놈의 몸에 손을 쑤셔 박은 그대로 자오링은 달렸다. 남은 적들을 향해.
휙! 휘익!
날아오는 단검을 해적의 시체로 받아 내며 자오링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팟!
자오링이 공중으로 뛰었다.
던져 버린 시체가 적들의 시야를 잠시 가린 틈을 타서 놈들의 하나에게 쇄도해 들어간다.
턱!
자오링은 두 종아리 사이에 놈의 머리를 끼우고 한 바퀴 크게 돌아 목을 부러뜨린 뒤 모래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자오링이 핏물을 토했다.
그 색이 무척이나 검은 것으로 보아 내장 기관이 크게 상했음이 틀림없었다.
즉, 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끌어 올렸다는 뜻.
기회를 잡은 해적들 넷이 동시에 칼을 들어 올렸다.
팅! 팅팅팅!
자오링은 몸을 움츠려 팔목과 정강이를 덮은 철구로 공격을 막아 냈다.
“끄윽.”
몸이 조금씩 모래 바닥을 파고 들어갔다.
자오링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직감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이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순간이.
“그릉…….”
해적들이 누르던 힘이 멈췄다.

―조금만 참아. 곧 갈 테니까.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오링에게 속삭였다.

―그러다가 힘이라도 들면 이렇게 말해.

자오링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기이하지만 맑은 음성이 들려 주는 단어를 따라했다.

“……아휀 ……드릴.”

푸아아아앗!

***

새털처럼 몸이 가벼워졌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자오링은 마치 몸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내리누르던 해적들의 압력은 온데간데없고 육체를 갉아 오던 고통도 사라졌다.
‘좋다……. 이런 기분.’
마치 천 년 동안 막혀 있던 동굴이 뚫리는 듯, 기이한 황홀경 속에서 자오링은 처음으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부께서 말씀하셨던 극마지경인가. 내가 기연을 얻었구나.’
화아악!
자오링의 정신이 어딘가로 강하게 끌렸다.
‘어?’
집중된 의식 건너에 누군가가 있었다.
‘누구냐, 너는.’
황금빛으로 밝게 빛나는 인간의 형상.
그러나 그 뒤에 너울거리는 검은 기류는 마치 거대한 날짐승의 날개와 닮았다.
그가 자오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로.
자오링은 기쁘고 반갑지만 한편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거기에 더해 지독한 분노까지.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또 다른 의식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또 다른 감정…… 오천 년의 세월을 넘어 그것이 깨어났다.
자오링의 내면은 그를 알고 있다.
‘탄타쿨? 아니…… 설마 당신인가?’
순간 그의 검은 날개가 더욱 커지며 모든 공간을 덮었다.
그 막대한 압력에 자오링의 정신은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졌다.

“끄악!”
자오링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조금 전까지 분명 따뜻하고 평안한 기분 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차갑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몸을 휘감는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으윽.”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내장을 후벼 내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계속되었고, 뼈마디가 끊임없이 쪼개지는 듯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불쾌감과 즐거움이 섞여 기묘한 혼란을 가져올 뿐이었다.
자오링은 여전히 누운 상태로 팔, 다리를 오므린 자신을 발견했다. 적들의 공격을 막으며 모래사장을 파고들던 그 모습 그대로인.
해적들도 그대로였다. 자신을 둘러싸고 칼을 내려친 모습들.
그러나 그들에게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
달이 구름을 걷어 내고 빛을 보내 왔다.
그리고 자오링은 보았다. 해적들의 몸을 통과해 들어오는 수백, 수천 개의 작은 빛줄기를.
그것은 마치 수많은 바늘들이 몸을 뚫고 지나간 흔적들과 같았다.
스르륵.
해적들이 그제야 무너졌다. 수없이 많은 구멍들에서 미약한 녹색 연기를 뿜으며.
“하아…….”
자오링은 무의식 속에서 무공의 경지가 상승하면서 내뿜는 강력한 기운이 적들을 격살한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누운 채로 자오링은 긴 호흡을 시작했다.
통증이 계속 정신을 어지럽혔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깊고 고른 숨.
일월천하 대륙의 무인들이 자랑하는 내공의 시작이자 끝.
‘허!’
자오링은 고작 몇 번의 호흡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축적되는 것을 느꼈다.
60년의 그릇이 깨지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가니가 새로 생긴 것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눈물이 흘렀다.
정말로, 정말로 극마지경을 뚫어 낸 것이다. 그 시발점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자신의 위치는 사부, 장샤오펭이 말한 그 상태가 확실했다.
‘울고 싶지 않다니까…….’
우두둑.
호흡을 계속할수록 고통이 줄어들면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일었다.
몸이 저절로 최적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수백의 적들을 마주하고도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자오링에게 가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