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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5화)
5장 깨어나기 시작하는 태고의 힘(4)


척. 척. 척. 척.
규칙적인 발소리들은 소수의 인원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50명에서 많게는 100명.
한껏 들떴던 기분이 빠르게 잦아들고 억울함과 짜증이 올라온다.
자오링은 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다가오는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예상했던 그대로 그들은 해적이었고, 그 숫자는 100에 근접했다.
‘아직…… 조금만…….’
척!
자오링을 멀찍이 앞에 두고 해적들이 일제히 멈췄다.
순간 그녀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무리들을 가로지르고 나온 자를 확인했기 때문.
처벅, 처벅.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전투 초반에 룩에게 맹공을 퍼부어 그의 행동력을 저하시키고, 곧바로 자신의 수행 무인들과 룩의 조력자들을 학살하던 해적들의 수장.
검은 갑옷의 검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적들 중 가장 강력했던 자였다.
다른 해적들과 확실하게 구별될 정도로 큰 신장을 하고, 가슴의 해골 문양을 흰 염료로 생생하게 그려 넣은 수장은 전투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작은 상처조차 입지 않았었다.
“후우…… 후우…….”
그를 노려보면서도 자오링은 전신에 내공을 순환시켰다.
그가 방심한 상태라면 부족하나마 일격을 감행할 수도 있기에.
멈춰선 수장과 자오링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토우씨앙(투항), 쓰왕(죽음).”
자오링은 가늘게 떴던 눈을 크게 추켜올렸다.
그의 입에서 유창한 시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고귀한 자오링.”
대제국의 공주인 자오링에게 예를 다하여 말하는 수장의 태도는 도무지 그녀의 목숨을 노렸던 적의 모습이라 여기기 힘들 정도였다.
“장난하는가.”
“방법의 차이였을 뿐입니다. 다른 분들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제외하고 모두 순환의 고리 속으로 다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자오링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분들은 누구고 순환의 고리는 또 무엇인가.
“저희에게 투항하신다면 당신은 다시 신성하신 그분의 곁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우리의 바람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겁니다.”
“신성한? 예전? 너희의 바람?”
끄덕.
“대체 너흰 누구냐. 너희 역도들은 감히 위대한 제국 시엔의 공주인 나를 해하려 했으며 많은 시엔 인들을 죽였다. 자오 대제께서 알게 된다면 당장 수십만 해군을 동원해 너흴 멸살할 것이다.”
“알게 된다면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겁먹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수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젊었고 또 강인해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거인대사―쭤런따스. 즉, 제렌 디스―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거인대사…….”
자오링도 제렌 디스라는 존재에 대해 안다.
옛 전설은 모든 대륙에 동일하게 퍼져 있는―세세한 내용은 약간씩 다르게 해석되었지만―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쳤구나. 허황된 전설을 들먹여 날 어지럽게 할 속셈이더냐.”
“이미 보셨을 텐데요, 거인대사를. 검은 갑옷을 입은 검사, 기억나시죠?”
자오링은 순간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비교적 안정적이던 호흡이 끊겨 애써 모으던 내력이 흩어져 버렸다.
“예언은 실현될 겁니다. 단, 당신들과 관련된 부분은 약간 바뀌겠지만요.”
흑룡, 제르 호바의 예언.
그저 어린아이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괴담에 다를 바 없는 그것을 말함인가.
모든 인간들의 뇌리에서 이제는 완전히 지워진 악몽과도 같은.
자오링은 팔목에서 풀은 뒤 상의 깊숙한 곳에 넣어 둔 붉은 천을 떠올렸다.
검은 용, 헤이룽의 머리를 수놓은 천.
마법사 룩은 검은 갑옷의 검사에게 마력을 퍼붓기 전, 이것을 반으로 찢어 넘겨주면서 말했었다.

“헤이룽의 예언을 상기하세요. 당신들 모두가 함께해야 합니다.”
“뭐?”
“살아남아 로슈르에 도착하신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 동료들이 당신을 맞이할 겁니다. 그때 이 표식을 보여 주세요. 이것은 헤이룽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저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럼 그들은 제 죽음과 더불어 당신의 신분도 확인하겠지요.”
“헤이룽이라니. 뭔 소리냐.”
“자린의 뜻이 당신과 다른 분들께도 함께하길…….”

“흑룡의 예언……. 예언이라.”
“이제 감이 옵니까.”
“퉤!”
자오링이 수장에게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개소리 말고 그냥 죽여!”
눈에서 불길을 쏘아 낼 것처럼 살기를 일으키며 자오링이 외쳤다.
이미 일격은 물 건너 가 버렸다. 오히려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
수장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눈을 좁혔다.
“할 수 없군요. 결국 당신께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군에 동참할 자격을 잃으셨습니다.”
수장이 천천히 칼자루를 잡았다.
“다시 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언젠가 또 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자오링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눈을 감았다.
극마지경을 넘어서자마자 죽음이라니…….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자 곧 마음이 편해졌다.

휘이이잉―
멀리서 바람이 불어와 이곳에 있는 모두를 휘감고 지나갔다.
자오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수장은 칼을 높이 들어 그녀의 목을 쳐 내려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는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먼 곳에서 다가오는 어떤 존재를 느끼고 그 방향에 눈을 고정시킨 채.
죽음을 기다리다 지친 것일까. 자오링이 눈을 뜨고 해적 수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기괴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수천, 수만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자오링은 그의 시선을 따라 몸을 뒤로 돌렸다.
“…….”
누군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작은 점에서 시작해 조금씩 형체를 키우며 다가오는 인물.
스릉.
수장이 칼을 칼집에 넣는 소리를 들으며 자오링은 이제 선명하게 드러난 인물을 살폈다.
작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작은 키를 가진 소년.
잠옷 같은 얇은 의상을 걸쳤음에도 매서운 바닷바람에 조금도 몸을 떨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소년에게서 나는 황금빛 광채였다.
광채……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누구였더라?
자오링은 근처까지 온 소년이 보내는 다정한 웃음을 보았다.
멀리서 온 친구를 환영하는 듯한, 그런 의미를 담은 웃음.
소년을 빛내 주고 있는 광채가 자오링을 포근히 감쌌다.
그 속에서 자오링은 서서히 잠들었다.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끼며.
‘……친구…… 일까. 심연의 어둠보다 더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친구…….’
스르륵.
검은 머리의 소년은 쓰러지듯 잠든 자오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행동을 해적들과 수장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볼 뿐.
잠시 후,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카마…… 바나.”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수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뒤편의 해적들은 소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소년이 말한 단어.
그것은 로슈르 표준어도 아니고, 지역 방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부의 여러 언어들에도 없는 단어였으며 남부의 마귀들이 쓰는 말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장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요탈 자 모르샤. 카마 바나.”
소년이 다시 말했다.
그러자 수장이 이를 악문 뒤 해적들에게 손짓을 해 그들을 멀찍이 이동시켰다.
이제 이 공간에는 소년과 수장, 잠든 자오링만이 남아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옷자락을 내맡긴다.

***

“난, 데일. 데일 잉그하임.”
검은 머리 소년, 데일이 수장에게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
“압니다, 당신이니까 가능한 기적이라는 것을. 황금의 주인이여.”
“훌륭해. 제렌 디스의 다른 하수인들보다 훨씬 똑똑한데?”
“당신이 이곳에 계시다는 건, 녹터널 헌터들과 징그러운 늪의 마귀들이 임무에 실패했다는 뜻이군요.”
“너흰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여전히 서로를 멀리하며 연락 따위는 주고받지 않으니.”
“…….”
데일의 말은 암흑 군대 내부 세력들도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다.
“깨달으신 겁니까. 당신이라는 존재의 진짜 가치를.”
“아니, 아직 멀었어. 난 그냥 좀 답답해서 잠시 외출했을 뿐이야.”
이 말은 자신이 데일과는 또 다른 존재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왜 신성한 예언에 칼날을 드리우는 거지?”
“제렌 디스의 판단입니다. 그들은 결코 예전과 같은 실패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아니, 틀렸어. 중간에 끼어든 자가 있어.”
수장은 데일의 말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 또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일까.
“일단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다. 다섯이 모여야 예언은 실현되니까.”
“그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에 개입하신다는 것 자체가 신성한 예언에 어긋나는 행위일 텐데요.”
“어차피 틀어졌어. 나라도 나서서 돌려놓아야지. 안 그래? 알트로피데스.”
수장은 알트로피데스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불리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왜, 모른다고 생각했나? 그저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해적의 두목으로 여겨지길 바랐을 테지.”
데일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네게 힘을 봉인하고 수천 년간 기다리라 명령…… 아니지. 부탁한 이가 누구지?”
알트로피데스는 이 순간 데일의 또 다른 내면이 자신이 짐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베텔기우스는 아닐 것이고. 일라신?”
알트로피데스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외부로 뿜어져 나왔다.
“황금의 주인이 아니군요.”
“음, 보자…… 오호라! 그로구먼, 화염의 주인.”
알트로피데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로 변하려는 것처럼.
“그만. 함부로 현신했다가는 너와 화염의 주인이 꾀하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될 수도 있어. 보는 눈도 많구먼.”
“으드드득. 정체를 밝히시오.”
“네게 이름을 지어 준 이가 나다. 더불어 네 이름의 뜻을 바꾸어 주기도 했고.”
알트로피데스.
고대 발타나 어로 ‘햇살’을 의미하는 단어.
하지만 멸망의 진군이 시작된 이후 ‘학살’이라는 뜻으로 변질되어 인간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