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 자린 1권(16화)
5장 깨어나기 시작하는 태고의 힘(5)
털썩.
알트로피데스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차가운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선 모든 것에 임하실 수 있다는걸.”
“중간에 웃기는 일들이 있었다. 이것 역시 그 녀석의 계획이었겠지. 라. 흐. 다.”
고대용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는 데일.
아니…… 전혀 다른 지고한 존재.
“탄타쿨 녀석이 허락해 줬기에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거야. ‘친절’은 녀석의 버려야 할 성품 중 하나지만 말이야.”
알트로피데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었다.
“이제 전 무엇을 하면 되오리까, 아버지시여.”
“하던 대로 해. 대충 봐서 예언을 박살내도 좋고, 이 아이들을 공격해도 무방하다. 단, 선을 넘지는 말고.”
“왜 때를 정하신 겁니까.”
“…….”
“당신께서 하신 예언, 굳이 그날까지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힘이라면 지금도 충분합니다.”
‘데일’은 결국 알트로피데스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애잔한 눈으로 하늘 어딘가를 바라만 볼 뿐.
“‘학살’이여. 네게 말한다. 지금처럼 라흐다의 뜻에 따라 행동하라. 제렌 디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 또한. 그리고 태양과 달과 나머지 여섯 별들이 일직선이 되는 그날에 나의 현신을 기쁘게 받아들여라.”
모래에 얼굴을 파묻을 듯 온몸을 숙였던 알트로피데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데일의 말에 따를 것을 다짐한다.
“가야 할 시간이군……. 보는 눈이 많다는 내 말, 알아들었겠지?”
알트로피데스는 슬쩍 뒤편에 도열하고 있는 해적들을 흘겨본다.
휘이이잉―
바람이 또 불었다.
그 바람을 등지고 알트로피데스가 해적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검은 눈으로 바라보는 데일.
잠시 후, 비명 소리와 함께 100명에 가까운 해적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이 그 어두운 눈동자에 맺혔다.
뚝.
자오링의 얼굴에 뜨끈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뚝. 뚝.
계속해서 떨어지는 이것은 눈물이었다. 데일이 흘리는.
무릎에 자오링의 머리를 올려놓고 부드럽게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데일.
그는 지금 울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데일과 자오링을 쓸고 지나갔다.
순간 데일의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 풍성한 금발이 드러났다.
“다행이야, 속아 넘어가서. 아직 이 몸으로는 그를 물리칠 수 없으니까.”
이 말은 결국 조금 전 알트로피데스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이 그가 생각했던 존재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는 뜻.
“난 아직도 모르겠다. 제르 호바가 왜 우리에게 시간을 준 것인지. 왜 예언을 남겨 모두에게 족쇄를 채웠는지.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데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별들이 일직선이 되는 날…… 그것은 자린께서 그에게 내려 준 약속의 날이란다. 나도, 너희도 몰랐던 감추어진 진실. 어쩌면 라흐다는 그것을 알고 심통이 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이해하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데일이 다시 자오링을 바라보았다.
“사랑했던 친구여. 너희의 운명을 재단할 자격이 내겐 없구나. 지금 나의 개입으로 너희의 앞길에 고난이 드리워졌단다. 제르 호바와 했던 맹세를 어긴 것이지. 지켜보는 자―죽지 않는 자―들도 책임을 묻기 위해 또 다른 행동을 할 거야. 지금껏 조용히 움직였던 것과 달리.”
데일이 얼굴을 내려 자오링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자린의, 제르 호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데일의 몸이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난 가야겠다. 너희와 같이 불운한 육체 속에서, 언젠가는 깨어나길 기다리는 영혼으로 돌아가는 거야. 우리의 ‘유전자’가 명령한 그대로.”
유전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혹시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
“너도 나도 힘들게 왔으니, 이제는 편하게 가야겠지?”
데일이 자신을 감싸고 있던 금빛 아지랑이 일부를 자오링에게 선물했다.
데일의 몸이 점점 흐려졌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기 위해.
“……아버지, 자린을 원망해도 좋아. 하지만 증오하지는 말자.”
잔잔한 미소를 남기고 데일이 완전히 사라졌다.
데일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황금빛 기운은 자오링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달이 서서히 사라질 무렵, 자오링의 몸에서 나온 빛이 긴 줄기를 그리며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그에 맞춰 자오링이 눈을 떴다. 한 방울 눈물을 흘리며.
‘뭘까…… 이 서글픈 감정은.’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리며 오열하고 싶어진다.
몸을 일으켜 바라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바다와 물기 어린 모래사장만이 남았을 뿐.
해적들도, 그들을 지휘하던 수장도 없었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검은 머리의 소년도.
혹시 지금까지 환상 속에 있었던 것일까. 얼굴을 꼬집어 보면 황궁의 침실에서 눈을 뜨지는 않을까.
멍하니 앞만 응시하던 자오링의 귀에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철컥거리며 달려오는 소리. 철갑옷을 입은 군인들의 그것과 흡사하다.
“태양이시여…….”
누군가가 감격하여 외치는 말이 너무나도 잘 들린다.
분명 시엔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멈춰.”
이것은 여인의 음성.
철컥, 철컥.
그녀가 자오링에게 다가왔다.
순간 함께 다가오던 여러 사람들이 넓게 퍼지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쪽에 뭔가 불타서 녹아 버린 흔적이 있습니다. 퀸.”
경계하던 이들 중 한 명이 여인에게 급히 보고했다.
“형체만 보아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마치 인간들을 모아 놓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쉿.”
여인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자오링의 옆에 이르렀다.
“…….”
자오링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멀리 떠오르는 태양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자오링, 우화공츄?”
여인은 시엔의 말을 사용해 자오링에게 물었다.
피식.
자오링은 살짝 웃음이 났다.
상대 여인의 발음이 어색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오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여인은 인내를 가지고 자오링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맞다. 내가 무화공주 자오링.”
“흡.”
“너희 말로 해도 돼.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여인이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자오링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와 마주 섰다.
자오링의 눈앞에 로슈르 제국의 기사를 상징하는 판갑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늦었잖아.”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자오링에게 예를 바친다.
“어찌 된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자오링이 품속에서 붉은 천을 꺼내 여인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여인은 사정을 짐작한 듯 굳은 표정을 짓는다.
자오링은 여인과 그녀가 데려온 자들을 주욱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너희, 로슈르의 군인들이 아니군. 그렇지, 퀸?”
퀸이라 불린 여인이 씨익 웃었다.
“제국군 소속이긴 하지만, 모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 굳이 아버지, 자오 대제께 말씀드리진 않겠다. 너희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으니까. 대신 앞으로 날 불편하게는 하지 마.”
“감사합니다.”
“또 날 공격한 것들이 뭔지, 왜 그랬는지, 너희가 무엇을 꾸미는지도 더 이상 상관치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버지와 사부가 내게 내린 명은 너희 로슈르의 국립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난 그 명령에 충실할 것이다.”
퀸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한데 날 어떻게 찾았나.”
그 말에 퀸이 의아한 얼굴로 자오링을 바라본다.
“공주께서 신호를 보내신 것 아니었습니까? 밝게 빛나는 금빛 신호탄…….”
말을 하던 퀸은 자오링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행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되었다. 배가 고프구나, 가자.”
자오링이 먼저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저쪽에 불탄 시체의 산, 공주께서 하신 일인지요.”
자오링은 퀸의 말에 멀지 않은 곳에 겹겹이 쌓인 채 녹아 버린 시체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고 오묘한 미소를 짓는 자오링.
환상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 검은 머리의 소년이 만들어 낸 작품일 것이다. 검은 머리…….
“빛나는 황금 머리칼…….”
“예?”
자오링은 저도 모르게 ‘검은’이 아닌 ‘황금’을 말했다.
“가자, 배고프다니까.”
어이없어 하는 퀸을 뒤로 두고 자오링은 도열한 채 길을 터 주는 기사들 사이를 걸었다.
“황금. 황금이라…….”
중얼거리는 자오링의 입가에 따뜻한 웃음이 또다시 번졌다.
***
데일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작은 빛 덩어리조차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암흑의 세계를.
여기는 어딘가. 그리고 또 자신은 누군가.
끝없이 걷고 또 걸었으나 그것은 그저 의식하는 움직임일 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감각마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흑발의 여인은 가끔 뒤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보낸다.
‘당신을 알아요.’
데일이 전하는 마음을 느꼈을까. 그녀가 잠시 멈추고 데일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헤테르프. 타락의 또 다른 이름.’
헤테르프가 데일을 살포시 안았다.
왠지 모를 떨림이 데일의 심장을 아리게 만들었다.
팅―!
갑자기 하프 줄이 끊어지는 것만 같은 아찔한 충격이 데일을 강타했다.
그리고 동시에 환한 빛이 그의 온몸을 덮었다.
모래가 잔뜩 낀 돌바닥의 감촉이 이제야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빛으로 인해 감았던 눈을 떴다.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열기는 없었으나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는 공간.
뭐라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헉!’
데일은 거대한 충격과 끝없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의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