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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7화)
5장 깨어나기 시작하는 태고의 힘(6)
드래곤.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빛나는 황금빛 비늘.
산 하나를 통째로 옮겨 놓은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몸집.
유선형으로 부드럽게 이어진 머리와 목, 그리고 몸에는 피 같이 새빨간 돌기들이 수백 개가 열을 이루어 있었다.
머리 위쪽으로 두 개의 뿔이 앞쪽으로 휘어져 광채를 머금고, 꼬리에서부터 이어진 외골격이 등을 지나 이마를 거쳐 감은 두 눈 사이에서 끝난다.
‘이, 이건 또 뭐야. 꿈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드래곤은 그저 수천 년 전의 전설일 뿐이다.
데일은 항상 고대의 신비롭고 불행한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았기에 옛 영웅들과 세상을 불로 뒤덮었던 마수들을 상상해 왔었다.
하지만 데일이 그렸던 드래곤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했던 황금의 용.
그것도 너무나 실제처럼 자신의 꿈속에 들어왔다.
그릉.
용이 움직였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감겨 있을 것 같았던 눈을 뜬다.
‘흐읍!’
데일은 또다시 미지의 충격을 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옛 용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인간은 돌이 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만큼 공간을 짓누르는 막대한 기운을 간직했다는 뜻일 터.
사방으로 퍼졌던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제야 데일은 용의 눈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데일이 본 황금빛 드래곤의 눈은……. 도마뱀의 그것처럼 차갑지도 않았고, 늑대의 그것처럼 살기 어리지 않았다.
길게 난 속눈썹과 맑은 동공.
마치 선량한 인간의 눈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데일이었다.
‘당신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누굴까. 저 부드럽고 따뜻한 눈을 가진 용은.
반쯤 내리깔은 눈 속에 지혜를 가득 담은 존재.
저 안에는 제르 호바의 위엄도, 라흐다의 과격함도, 베텔기우스의 용맹함도, 세미토우르의 무자비함도, 일라신의 자애로움도, 레스모이의 냉혹함도 없었다.
‘그대, 빛나는 당신. 혹시…….’
일곱 드래곤들 중 가장 총명하고 사려 깊었으며 아버지 자린의 사랑을 제일로 받았다는 분신.
탄타쿨.
순간 데일은 어떤 전율에 휩싸여 격하게 몸을 떨었다.
소름? 아니다.
그것은 표현 불가능한 환희와도 같았다.
황금의 탄타쿨이 웅크렸던 몸을 느릿하게 펼쳤다.
마치 데일을 향해 반가움 또는 환영을 표하는 것처럼 길게 갈라진 주둥이 끝이 묘하게 올라가며 육중한 몸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으어어!’
용이 그 위용을 드러내자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중압감이 데일을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탄타쿨의 머리가 향했던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둘을 감쌌고 그 따스함에 데일은 평온함을 느꼈다.
데일의 눈은 탄타쿨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따라갔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던 먼 하늘에 태양인지 달인지 모를 빛 덩어리가 존재했다.
‘제게 뭔가를 보라는 뜻인가요?’
탄타쿨은 데일의 물음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저기에, 저 먼 하늘에 무엇이 있기에.’
데일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탄타쿨과 같은 것을 보기 위해 애썼다.
‘응?’
저건 뭐지?
빛 속에,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
그리운, 하지만 원망스러운 존재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라…… 자린. 태양이라는 이름의 아버지…….
***
“응.”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데일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머리가 약간 띵한 것이 잠을 설친 것 같기도 했지만 특별히 피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던 데일은 가슴이 왠지 모르게 시린 느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항상 꿈이 생각나지 않아.”
누구에게 들으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꿈을 꾼 듯한 날이면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으면서도 아쉬움과 서글픔이 일어나곤 했다.
“팔자 좋으셔.”
“어?”
데일은 누군가 내뱉는 말에 흠칫 놀라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데일이 바라본 곳에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루산이 있었다.
늘 그랬듯 사냥꾼 모자를 푹 눌러쓰고서.
“넌 사람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고개를 약간 들어 올리며 말하는 루산의 얼굴에 미약한 놀라움이 보인다.
“네가 왜…….”
말을 하면서 얼굴을 돌리던 데일은 자신이 누워 있는 침상 옆에 굳은 자세로 앉아 있는 키릭을 발견했다.
그의 표정도 루산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안심했다는 감정이 섞인 것이 차이였다.
“설마 둘이 밤새 날 지켜본 거야?”
“지켜봐? 허!”
루산이 혀를 차며 팔을 풀었다.
“너 하나도 기억 안 나지?”
“…….”
“내가 쳐 낸 공에 맞아 기절한 건.”
“……안 나.”
“이상한 말 지껄인 건.”
“내가?”
데일은 루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분통이 터진 루산이 화를 내려는 찰나.
“그만 하지. 데일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먼 길을 다녀왔을 테니.”
키릭이 루산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키릭, 무슨 소리야. 먼 길이라니?”
데일은 두 사람의 이상한 행동에 답답하다 못해 짜증마저 나려고 했다.
키릭이 데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걸로 되었다.”
키릭이 천천히 일어나 루산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참! 둘이 나한테 뭐라는 거냐고.”
키릭은 말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리고 루산은 묘한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다가 곧 키릭을 따라 나간다.
“진짜 왜 저래…….”
데일은 둘이 자신에게 못된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상했지만, 이내 마음을 풀고 창가에 섰다.
멀리서 태양이 떠올라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합숙소 관리인 몰케가 부지런히 밤새 더러워진 길을 닦는 모습이 보인다. 정원사 비트만은 가위를 들고 수풀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 근처에선 그의 아내가 분수에 떨어진 낙엽을 치운다.
부드러운 눈으로 펼쳐진 전경을 감상하던 데일은 그보다 더 먼 곳을 응시했다.
“기분이 좋구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보고 싶었던 누군가가 이곳을, 자신을 찾아올 것 같은 느낌.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데일은 표현하기 힘든 즐거움에 휩싸여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서 와…….”
지금 데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데일에게 아침 해가 축복을 내려 주듯 환한 빛을 드리운다.
“……너.”
양호실을 떠나 한참을 걷던 키릭이 뒤에 따라오는 루산에게 입을 열었다.
“왜.”
“오늘 있었던 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왜.”
“그 머리 계속 달고 다니고 싶으면 입 다물어.”
“싫은데?”
키릭은 루산의 저런 태도가 자신에 대한 반감임을 안다.
“쓸데없는 관심만 키울 뿐이야.”
“누구? 아, 내가 말한 그 길쭉한 녀석? 알렉인가 뭔가 하는.”
루산은 데일을 기다리는 동안 키릭에게 알렉과 갈리우스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내가 그랬지? 너희 둘 비밀이 너무 많다고.”
“말하기 귀찮을 따름이다.”
“그런 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필요 이상의 과묵함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거, 넌 모르겠지.”
“피해를 줄 생각은 없다.”
“없다고? 크크크. 아니, 너흰 벌써부터 나와 리디아에게 위험 요소가 되었어.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장 학교 생활이 피곤해질 게 자명한데. 아까의 그 신비로운 현상, 못 본 척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 내 입을 막으시겠다? 그래서 너희 둘의 아름다운 우정과 비밀을 지킬 것이고.”
키릭이 걸음을 멈췄다.
“그냥 눈을 감았다 뜬 것이 다야. 한데 침상에 금발의 작은 친구가 있더군. 처음부터 있었던 걸 내가 없었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안한 모습을 하고서. 내가 바보, 미친놈이 된 기분이었어. 넌 아니겠지만.”
“…….”
“깨어나고서 보여준 태도, 그게 더 기가 막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니, 자신이 무얼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행동……. 정상은 아니지.”
루산의 마지막 말은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다. 그 자신도 비정상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루산.”
“어쩌라고.”
“너도 알겠지만 데일에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러니까 더 짜증난다고.”
“난 그것을 위해 우리가 이곳에 모였다고 생각한다.”
“난 아닌데?”
키릭은 루산의 삐딱한 태도와 말장난에도 화내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나와 데일을 위해 죽어 가던 이가 내게 말했다. 데일이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내가 그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감동적이군.”
루산은 여전히 비아냥거린다.
“그리고 헤테르프.”
“그건 뭔데.”
“날 공격했던 드래곤의 이름이다.”
“드래곤도 이름이 있나? 풋.”
루산은 끝까지 드래곤의 존재를 부정한다.
“놈은 날 죽이고자 했다.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한데…… 데일이 날 살렸다.”
“……?”
“놈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 낸 뒤, 난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죽음만을 기다렸지. 그런데 드래곤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어. 놈의 시선은…….”
진지하게 말하는 키릭의 태도에 루산도 조금은 신중한 표정으로 변했다.
“데일에게 향해 있었다. 나에게 보여 주었던 극악한 살기를 담았던 눈이 아닌, 부드럽고 따스한 감정을 담아서. 난 그때 놈과 데일이 어떤 정신적 교감을 이룬 것이라 판단한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너와 귀찮은 대화를 나눌 일도 없겠지.”
“잠들어 있어야만 뭔가 한다는 뜻인가, 저 녀석.”
“아직은 그럴지도. 데일에게 담긴 미지의 힘과 운명.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데일이 주목받게 할 수 없다.”
루산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루산은 키릭의 말 전부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본 이상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또한 데일이라는 작은 친구에게 정말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루산도 잘 알았다.
능력자 스스로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이들의 눈길을 받아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이도 동의할 것이다.
“일단은 뭐, 나도 너희의 비밀에 동참하지.”
키릭이 루산을 향해 고맙다는 듯 고개를 힘주어 끄덕인다.
“하지만 절대 리디아가 신경 쓸 일은 만들면 안 돼. 조용히, 조용히 지내라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숨을 쉬는 키릭과 루산에게 복도의 창문을 통해 태양이 빛을 뿌렸다.
그로부터 5일 후.
한 대의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합숙소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다섯 번째 특채생을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