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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8화)
6장 제렌 디스와 또 다른 어둠의 씨앗(1)
콰쾅!
강한 눈보라가 치는 대지 멀리 벼락이 떨어졌다. 검은 하늘과 하얀 눈이 쌓인 땅.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곳이 얼음 대지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콰콰쾅!
벼락이 또다시 떨어졌다. 그곳은 높이 솟은 화산의 정중앙이었다.
끓어오르는 용암이 요동치며 벼락의 기운을 뜨거운 표면 위에 골고루 흩뿌렸다.
화산을 지나 길게 이어진 산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중 가장 거대한 산의 중턱에 신전 형태의 건물이 여러 채 보인다.
뚝. 뚝.
바깥의 추운 기온과 달리 신전의 안쪽의 공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데워진 공기가 입구에서 차가운 대기와 만나 물방울을 형성해 바닥에 떨어뜨렸다.
검붉은 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흐르는 용암과 내부에 솟은 몇 개의 기둥들 위로 용암이 흘러내리며 가공할 열기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기 때문.
신전 중앙에 검은 돌로 만든 거대한 크기의 석좌가 존재했다.
그리고 거기엔 그에 어울릴 만큼 큰 덩치를 한 누군가가 앉아 위용을 자랑한다.
검은 판금 갑옷. 아니, 검다고 표현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완전한 어둠을 연상케 하는 기류가 감돌고 있는 갑옷이었다.
끼릭, 끼리릭.
갑옷의 검사가 팔뚝 부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철컥.
팔꿈치 부분부터 팔목까지 덮은 철편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쩔그렁.
철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사는 곧바로 철 장갑마저 벗어 땅으로 집어 던졌다.
얼굴 전체를 가리고 눈 부위만 열린 투구 안쪽에서 붉은 점 두 개가 번쩍거렸다.
그것은 눈이었다. 틀림없는 마왕의 눈.
그 붉은 눈은 외부에 드러난 자신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굵은 힘줄과 핏줄이 터질 듯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 구토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기괴하게 일그러진 피부는 인간의 것이라 보기 힘들다.
치이이익.
갑자기 공기와 닿은 피부에서 연기가 났다.
순간 멀쩡하던 팔과 손이 급격하게 녹아 흘러내렸다.
철퍽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검사의 팔. 누런 진물과 흐물거리는 살덩어리들만이 쑤다 만 죽처럼 변해 땅에 퍼진다.
“역겨워.”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검사의 뒤편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어두운 그림자를 뚫고 누군가 검사에게 다가왔다.
칠흑 같이 검은 로브. 그리고 그 주변에 일렁거리는 붉디붉은 마력의 기운.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며 나타난 그는 움직이고 있으나 몸의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마치 허공을 유영하는 것과 같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네 더러운 취미는 여전하구나. 굳이 안 봐도 될 것들을 보려고 하는 것.”
로브의 남자가 검사의 옆에 선 뒤 말했다.
“더 지저분한 것도 보여 줄 수 있지. 롱 버트, 내 친구여.”
갑옷의 틈새에서 유령의 그것처럼 울려 퍼지는 낮은 음성. 분명 검사의 답변이었다.
“완전함을 갖추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가.”
로브의 마왕, 용암의 롱 버트가 검사에게 물었다.
“필요 없다. 이대로도 충분해.”
“충분하기는 무슨. 암흑의 무구가 없으면 형체도 유지하지 못할 놈이…….”
“네놈 덕분이지. 억지로 나의 잠을 깨웠잖은가.”
검사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지금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롱 버트의 마력이 그의 길었던 동면을 강제로 해제시켰고, 때문에 뒤틀린 무언가가 완전한 부활을 방해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과 같이 갑옷을 벗으면 몸이 녹아내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비해 반의반, 또 그 반에도 못 미치게 만들어 주신 분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너도 이해했지 않은가. 헤싸카.”
폭풍의 헤싸카.
츠카이오 최강의 마검사였으며, 제르 호바의 종복을 자처했던 제렌 디스의 일인.
자오링과 룩이 보았던 검은 판갑의 검사는 바로 제렌 디스, 헤싸카였다.
멀쩡해 보이는 롱 버트와 불완전한 모습의 헤싸카.
그 둘의 차이는 부활을 시킨 주체에 있었다.
롱 버트는 루산의 실수로 인해 깨어났고, 헤싸카는 롱 버트가 직접 부활 의식을 주관했다.
루산과 롱 버트는 존재적 가치의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이유였다.
“차라리 노림처럼 얌전히 ‘프로즌 아일’에 틀어박히지 그랬나. 그럼 그런 못난 꼴도 안 봤을 텐데 말이야.”
천둥의 노림. 발타나의 왕자이자 또한 제렌 디스. 그도 부활했다는 말인가.
헤싸카가 말없이 철편과 철 장갑을 주워 본체에 결합하기 시작했다.
롱 버트는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볼 뿐.
철컥.
팔과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갑옷의 일부가 완전히 결합했다.
잠시 후.
바닥에서 꿀렁 거리던 헤싸카의 덩어리들이 연기를 내며 타올랐다.
그리고 그 연기는 안쪽이 비어 있는 팔 부위 갑옷의 좁은 틈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간다.
슈우우.
살덩어리들이 완전히 증발하여 사라졌다.
끼릭.
철 장갑에 달린 손가락들이 움직였다.
“친구여. 나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나의 혀는 적의 피를 맛보길 원한다네. 불규칙적인 이 심장의 고동은 내 검에 베어질 적들의 그것과 같으며, 내쉬는 숨 속에 응어리진 증오는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지.”
“…….”
“그리고 그 끝에는 살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분들이 존재해.”
“불경스럽군…….”
롱 버트는 혀를 찼다.
자신과 달리 헤싸카는 정말 거침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상기했기 때문.
“탄타쿨…… 일라신…….”
헤싸카가 고대용들의 이름을 부른다.
“베텔기우스……. 세미토우르. 아, 멍청한 레스모이. 큭크크.”
레스모이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오는 헤싸카였다.
그는 제르 호바와 라흐다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않았다.
“눈물의 주인, 세미토우르만큼은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네 충고를 저버리고 대양으로 나간 게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잖은가. 나처럼.”
롱 버트도, 헤싸카도 결국 다섯 아이들을 막지 못했다.
“어차피 너도 한번 건드려 본 것이 아니던가? 신성하신 그분의 예언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불경함.”
롱 버트가 씨익 웃었다.
헤싸카가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 냈기 때문이다.
“조금 빨리 움직였을 뿐이라네. 덕분에 소득도 있었고.”
“무슨 소득?”
“방패의 주인이 헤테르프를 이 세상에 나오도록 만들었다.”
“호오.”
헤싸카는 의외의 성과에 관심을 보였다.
“5000년이 되도록 원한을 잊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 어떤 드래곤보다 인간의 마음을 동경해 왔던 그녀다운 집념이지.”
“지금 헤테르프는 어디에 있나.”
“몰라. 헌터들을 보내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워낙 음침한 구석이 있는 드래곤이라. 어쨌든 그분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만은 확실해. 그녀 스스로가 그분의 자식임을 잊지 않았다면.”
헤싸카가 석좌에서 일어났다. 롱 버트와 나란히 서자 그의 큰 덩치가 더욱 돋보인다.
철컥, 철컥.
헤싸카는 밖이 보이는 입구까지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롱 버트는 여전히 허공에 뜬 채 그 뒤를 따른다.
휘이이잉―
강한 바람이 불어 발코니까지 나온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그들의 앞에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졌다.
산 아래쪽에 백만이 넘는 대군이 밀집해 횃불을 들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남부의 ‘인간’들인 송곳 전사들.
눈처럼 하얀 털옷을 입고 그 아래에 단단하게 저민 가죽 무구를 걸친 송곳 전사들.
그들은 얼음 대지 암흑 군대의 핵심이자 장차 벌어질 대전쟁을 이끌어 갈 잔인한 투사들이다.
녹터널 헌터와 늪의 요정, 홀리 고스트와 칼마이라, 데스 라이더와 같은 마법의 창조물들은 그들이 속한 어둠 속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터.
“만족스럽군…….”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헤싸카는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5000년을 기다려 온 이들이라네. 그리고 지난 수백 년간 수많은 전투를 통해 실전을 거듭해 왔지. 그 수는 무려 천만. 고대용이 현신하지 않는 한, 누구도 저들의 앞길을 막을 순 없다.”
롱 버트가 자랑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옛 생각이 절로 나는군. 그때 우리 앞을 가로막던 존재들은 이제 그 힘을 잃고 단지 예언에나 등장하는 신세로 전락했다지?”
헤싸카의 말은 롱 버트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에게 용기를 심어 주듯 다짐한 말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 아니야. 욕망 또한 없고. 우리의 사명은 신성한 것. 더 이상 실수나 실패는 없어.”
롱 버트가 차갑게 웃는다. 그 역시 강한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이 없었다.
척!
헤싸카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순간 백만 대군이 일제히 자세를 갖추고 횃불을 들어 올렸다.
호흡 소리마저 조심스러운 공간.
일렁거리는 불빛을 반사하는 각각의 눈동자들은 검은 갑옷의 검사에게 고정되었다.
“죽여라! 더 이상 흘러내릴 피가 부족해질 때까지.”
“먹어라! 너희의 위장과 창자가 터질 때까지.”
“갈라라! 속에 든 내장의 온기가 식을 때까지.”
“찔러라! 너희의 칼이 더 이상 갈 곳 없을 때까지.”
두근.
두근두근.
백만 송곳 전사들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헤싸카의 잔혹한 외침에 모두가 살 떨리는 감동을 받고 있다는 증거.
“오랜 세월, 참아 왔던 복수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득한 옛날, 조상들이 나아갔던 길. 이젠 너희가 그 길의 주인이니라. 비참하게 살아온 지난날들은 따뜻하고 풍요로운 대지와 곡식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보아라!”
척!
헤싸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백만 대군의 얼굴이 일제히 돌아갔다.
“저 너머에 그들이 있다. 우릴 학살하고, 우리의 터전을 짓밟고,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의 육체를 유린하던 사악한 적들이. 보이는가?”
두두두두두두두두.
송곳 전사들이 한꺼번에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접한 롱 버트도 길게 숨을 내쉰다.
“긴 세월 동안 대륙을 지배하던 거짓 제국, 거짓 황제가 우리의 칼날을 기다리고 있도다. 그의 목에 분노의 얼음송곳을 꽂아 넣을 자, 누가 될 것인가! 바로 너희다. 중부를 관통하고 북부에 얼음을 가져다 줄 자, 그것 또한 너희다! 그리고 우린 바다 건너 다른 대륙들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5000년 전, 우리의 조상들에게 비겁한 암수를 날렸던 ‘인간’들 모두에게 복수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
대지가 울리고 산맥이 떨었다.
송곳 전사들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에 불을 지핀 헤싸카는 함께 고함을 지르며 모두와 감동을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