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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19화)
6장 제렌 디스와 또 다른 어둠의 씨앗(2)
“이제 그만 들어가지. 차가운 바람은 네게 좋지 않으니까.”
롱 버트가 헤싸카에게 충고했다.
그의 말대로 불완전한 헤싸카는 차가운 대기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우릴 기다리고 있었단 것만으로도 저들은 충분히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네, 친구여.”
헤싸카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조작된 전설 덕분이야. 저주받을 탄타쿨…….”
롱 버트는 어째서인지 탄타쿨을 거론하며 말을 흐렸다.
“이 더러운 저주. 황금의 주인을 만난다면 두 배로 돌려주겠어. 동면이라, 흐흐흐.”
전설에 따르면 제렌 디스에게 동면을 명한 이는 제르 호바라 알려져 있었다.
한데 탄타쿨? 그것도 저주라니.
그간의 전설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철컹, 철컹.
헤싸카가 다시 석좌로 이동했다. 롱 버트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때.
롱 버트가 처음에 나타났던 어둠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와도 좋다.”
음산하게 울리는 헤싸카의 음성에 어둠 속 인물이 반응했다.
푸른 색 통 넓은 바지. 가슴의 가죽 무구에 그려진 하얀 해골. 그리고 눈 아래 그늘을 드리운 푸른 두건.
‘데일’이 알트로피데스라고 불렀던 해적들의 수장이었다.
알트로피데스가 조용히 걸어 나와 제렌 디스들 앞에 무릎 자세를 취했다.
“푸른 산호섬의 옥토푸스가 신성한 흑룡의 대리자인 제렌 디스를 뵙습니다.”
알트로피데스는 이들에게 자신을 옥토푸스라 말했다. 어느 쪽이 본명일까.
“보고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알고 있으니.”
롱 버트가 차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임무에 실패한 쓰레기 주제에 말이 많구나.”
이번에는 헤싸카.
“하필 그때 스타비챠들이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알트로피데스, 즉, 옥토푸스는 자신이 스스로 수하들을 몰살시킨 행위를 감추고 그것을 스타비챠와 퀸에게 돌렸다.
“변명인가.”
“…….”
“네 변명이 아니라면 그녀의 운명이겠지. 뭐, 상관없다. 신성한 분의 예언이 그리할 것이라 했으니 꼭 네 탓만은 아니야.”
알트로피데스는 몸을 더욱 낮추고 제렌 디스의 자비에 감사했다.
“한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알트로피데스가 롱 버트의 말에 움찔거렸다.
“너흴 버리고 떠난 토타르퍼스를 아직도 기다리나? 그가 다시 나타나 너희 해적들을 거두어 주길 바라나? 그래서 몸을 사리고 기회를 엿보는 것인가.”
“어찌 감히 제가…….”
“그는 돌아오지 않아. 동면의 저주를 받은 이들은 우리 셋이 다니까. 우리의 옛 친구는 ‘인간’으로서 수명을 다했다네. 5000년의 세월은 인간의 육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시간이니까.”
롱 버트는 알트로피데스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말을 계속했다.
“지켜보고 있다, 오르시의 후손이여. 명예로운 해병이 아닌, 교활한 해적의 아들이여. 이번 일은 눈감아 주겠지만 이후로 불미스러운 행동을 약간이라도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제렌 디스의 자비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돌아가라. 푸른 산호섬으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하라. 곧 신성한 제르 호바의 부름이 있을 것이다.”
끼이익.
쿵.
알트로피데스는 제렌 디스의 홀을 벗어난 뒤 문을 닫았다.
지금까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느릿하게 들리는 그의 얼굴은 방금 꾸중을 들은 아랫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상황을 맞이했다는 듯 즐거움과 기대감 어린 웃음을 한껏 머금었다.
“어느 쪽 장단에 춤을 추는 것이 나의 무료함을 달래 줄 것인가.”
복도 끝에서 길게 들어오는 달빛을 향해 천천히 걷는 알트로피데스.
“어리석은 아버지? 욕심 많은 불꽃? 지혜로운 황금?”
나직하게 읊조리며 달빛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척.
잠시 후, 그는 건물의 외벽 바깥으로 난 작은 출구 앞에 섰다.
멀리서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하늘에 하얀 장막을 친 듯 시야를 가린다.
“아버지……. 자린의 순백이 아닌, 칠흑의 영광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어리석은 존재인 아버지.”
제르 호바를 말함이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 욕심인지도 모르고 자신만의 환상에 사로잡힌 화염의 주인.”
라흐다.
“신중하고 지혜로우나 그것 때문에 결국 우리의 미래를 망쳐 버린 불쌍한 황금 비늘.”
탄타쿨.
달을 마주 보고 있는 알트로피데스의 뒤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러났다.
“어느 편을 들어야 이 두근거림이 계속될까. 응?”
그의 그림자가 조금씩 변형되기 시작했다.
“크크. 크크크크크.”
참기 힘든 기쁨에 알트로피데스가 잘게 몸을 떨며 웃었다.
그림자가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두툼한 꼬리. 거대한 날개. 가늘고 긴 목 끝에 위치한 머리와 뿔.
틀림없는 드래곤의 형상.
인간의 그림자가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눈바람 소리와 함께 알트로피데스의 웃음이 날카로운 음파가 되어 얼음 대지로 흩어진다.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1)
“……인간과 빛의 요정, 대륙에 존재하는 다른 여러 종족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일곱 드래곤과 흑룡족, 검은 저주를 듬뿍 받은 어둠의 자식들은 시론을 멸망시키고 북쪽으로 계속 진군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정확히 이십구 명의 소년, 소녀들이 책상을 두고 앉아 모인 교실.
교탁에 선 소년, 데일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영광과 승리를 노래한 단편은 개학 후, 첫 수업 때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분?”
수확 직전의 들녘을 연상케 하는 황금빛 머리칼, 작고 마른 몸이지만 큰 눈과 오뚝한 코, 얇은 입술은 데일의 총명함을 그대로 나타내 주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교실 입구에서 청년의 음성이 들렸다.
“데일, 고생했다.”
데일은 고개를 돌려 청년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씨익 웃는다.
다리를 꼰 채 비스듬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걸친 청년의 이름은 아타르 슈네인.
유서 깊은 비스텐지아 농업학교에서 문학과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약간의 오류를 정정해 주자면, 호난의 태양은 왕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고, 아슐라탄의 무기는 창이 아니라 검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지. 그리고 친위대장 렉…… 시우스? 라고 했는데, 레키우스 미나투르 폰테우스가 맞아. 야슐라탄의 검은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레키우스의 검이라 불렸단다.”
슈네인의 지적에 데일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었다.
“옛 전설을 노래한 열 줄 시구를 이 정도까지 풀어내다니, 너의 문학적 소양은 칭찬받아 마땅하구나.”
삐딱한 자세를 풀지 않고 툭 던지듯 말을 하는 모양새가 칭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데일은 슈네인의 성품을 잘 알았기에 그의 말이 진심임을 의심치 않았다.
“자, 그럼 여기서 숙제.”
데일을 제외한 아이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제르 호바가 말한 죄의 대가와 허물에 관한 역사학적 해석 다섯 가지와, 신화학적 해석 다섯 가지를 각자의 주관을 담아 서술해 오도록.”
슈네인은 아이들의 한숨 소리를 듣자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다들 방학 잘 보내고. 이번 학기 수업은 끝이다.”
반장이 일어나 대표로 인사를 하자 슈네인은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하교를 재촉했다.
“아, 데일. 넌 잠깐 남아.”
“예? 아, 예.”
“여기 네 이름 쓰고 아래에 어머니 도장 받아 와.”
“이게…… 뭔가요?”
“입학 신청서.”
데일은 슈네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읽어.”
그제야 데일은 슈네인이 책상에 펼친 종이를 바라보았다.
“로슈르…… 국립대하…… 헉!”
데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기관 양성학부 특채가 있어. 방학 동안 자질 심사를 거쳐야 정식 입학 허가가 나니까 미리 좋아하지는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슈네인과 달리 데일은 머리가 띵 한지 약간 비틀거리다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설마 저를 추천하시는 건가요?”
“응, 학부에 동기가 근무하고 있거든.”
고작 지방의 농업학교, 그것도 선택 과목에 불과한 문학과 역사를 담당하는 선생에게 국립대학교에 근무하는 동기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데일이 슈네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안 어울려?”
“아, 아뇨.”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평소 괴짜라고만 여겼던 슈네인이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와 신화, 전설과 민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문학에도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긴 했지만.
“수도에 친구 분이 계시는지 몰랐네요.”
“할 거야, 말 거야?”
“제 나이가 아직…….”
“그러니까 특채지. 황제께선 인재를 사랑하신단다.”
데일은 갑자기 찾아온 혼란에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솔직히 장난이시죠?”
“그래 보이냐.”
“그렇잖아요. 학교장 추천도 아니고, 또 제가 무슨 자격으로…….”
데일은 순간적으로 드는 오한에 말끝을 흐렸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남부의 만년설을 떠올리게 하는 슈네인의 차가운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쯤 감긴 눈을 한, 무료한 얼굴로 돌아갔다.
“신문에 연애 소설 몇 편 갈기고 국립대학에 무시험으로 들어간 애송이도 있어. 그 아이가 달리는 토끼라면 넌 창공의 독수리와 같지. 네 자신을 과소평가 하지 마.”
누가 문학 선생 아니랄까 봐.
“싫어?”
“그건 아닌데요.”
“어머니랑 동생 때문인가.”
“…….”
“오전에 뵙고 왔다.”
“예?”
“생각해 보자고 하시더라. 그럼, 여기까지. 가서 잘 말씀드리고 내일까지 도장 받아 오는 것 잊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