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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0화)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2)
‘이건 기회야.’
자신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를,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꿈꾸었던 데일이었다.
다만, 아버지는 제국의 군인으로서 복무하셨지만, 자신은 제국행정부 소속 농업서기관을 목표로 했던 것이 차이.
그러나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데일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 출신이 고급 관료로 출세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여차여차 지방 대학을 나와 시험을 통해 공무원이 된다고 해도 현 세태에서 연줄이 없다면 그저 농촌 행정담당관 정도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국립대학 서기관 양성학부라니.
졸업과 동시에 중앙부처 서기관으로 시작해서 능력만 된다면 관리관, 즉, 차관보까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가 아니던가.
게다가 학생 대부분이 귀족 또는 부유한 상인의 자제들이거나 제국 내 각종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마어마한 인맥을 쌓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출세의 지름길.
로슈르 제국에서 국립대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러했다.
한데 그런 대단한 기회가 주어지다니, 데일은 이것이야말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라더니. 슈네인 선생님께 그런 대단한 동기가 계신 줄 정말 몰랐지 뭐야.”
데일의 눈에 비스텐지아 농업학교의 전경이 보였다.
백 년도 더 전에 지어진 건물이 왠지 정답게만 느껴졌다.
데일이 떠나고 난 자리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해가 넘어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 눈동자는 그 자리를 계속 응시했다.
얇은 뿔테 안경을 쓴 매끈한 얼굴.
호리호리한 체격에 큰 키.
코 아래 짧게 기른 수염과 긴 머리를 묶어 어깨에 걸친 모습의 사내는 슈네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얼굴은 데일을 떨게 했던 그 차가운 냉기를 뿜어냈다.
“고작 서기관?”
슈네인이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슬쩍 눈을 돌렸다.
어둠.
빈 교실 구석에는 그저 밤의 적막만이 남아 있을 뿐.
“쓸데없는 재능 낭비야. 부모, 아니, 모친의 영향 때문이겠지. 어문학 특채라…… 저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아.”
“어차피 명목상일 뿐이야. 진정한 능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 너희들의 할 일이잖나. 설마 진짜 데일이 서기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슈네인이 나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다음 명령을 받은 적은 없다. 아이들을 지금 국립대학교로 보내라는 것이 끝.”
“왜?”
“그분의 속을 어찌 짐작할까.”
슈네인은 상대가 은근히 두려움에 젖어 가는 것을 느꼈다.
“너희 주인이 그리도 무섭나?”
“……나에게 감정 따윈 없어. 있다면 존경이란 거겠지.”
슈네인이 들릴 듯 말 듯 킥킥거린다.
“이봐, 폰.”
어둠 속 인물의 이름인가.
“네 생각은 어때? 데일, 저대로 길을 떠나도 되겠나?”
“무척이나 이른 결정이긴 했지만 주인의 뜻은 무조건 옳다. 또한 나 역시 데일을 믿어.”
“믿는다? 무엇을 보고?”
폰은 잠시 말을 아꼈다.
“2년 전, 제 아비가 죽고 나서 모든 힘이 ‘봉인’되어 버린 데일이야. 천재적인 머리만 남았지. 내가 어떻게 손쓰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변화였어.”
슈네인은 저들 조직의 주인과 맺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아타르 슈네인.”
폰이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믿음이란 건 말이야…… 무엇을 눈으로 봐야 얻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 난 확신해. 감정 없는 피스인 나에게 애정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존재가 데일. 그것만으로도 데일은 합격점이야.”
“모순이로군. 네 스스로 감정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주인에 대한 두려움? 존경? 거기서 이미 네 말은 어긋났어. 쯧쯧.”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폰을 가르치듯 말하는 슈네인이었다.
“그나저나 놀랍기도 하지. 아득한 과거의 일을 어찌 그리 정확하게…… 마치 곁에서 본 것처럼 표현해 내지 않았는가. 단순한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어.”
어둠 속 폰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스며 있었다.
“정확? 곁에서?”
슈네인은 명백한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뭐, 과장해서 그렇다는 말이야. 누구도 그때의 일을 알 수는 없겠지만.”
“멋들어진 소설의 일부라 생각하는 편이 좋아.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모든 것은 저 아이의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 오해는 그쯤에서 끝내.”
“그래도 데일, 저 아이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놀라운 능력들을 따져 본다면…….”
슈네인은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데일 잉그하임.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 총명한 데일.
수천 년 동안 ‘그’의 피를 타고 이어져 온, 무한한 힘을 가진 아이.
슈네인은 까마득한 옛날 ‘아버지’를 원망하며 하늘을 향해 포효했던 존재들을 머릿속에 그렸다.
“이봐, 슈네인.”
“왜.”
“우리의 주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난 널 믿지 않는다. 다른 ‘코치’들과 달리 넌 우리의 선택이 아닌 스스로, 맹약에 다가왔으니까.”
“훗.”
“네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난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마스터 디록이나 장샤오펭처럼 무시무시한 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켈리안처럼 정신적 지배력이 있는 것도 아냐. 또 포트 노틀의 사령관 얀 하스와 같은 지혜와 염동력도 갖추지 못했어.”
“그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힘을 감추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엔 그래. 자고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자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지.”
“크크크크크. 좋을 대로.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훨씬 더 데일을 아껴. 만약 나중에라도 데일에게 해가 가해진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거야.”
어둠이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한데…… 너무 빨라. 데일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한데. 너희 주인의 판단이 실수가 아니었기를 바랄 뿐.”
슈네인의 말투에는 은은한 살기마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말과 행동이 참일까?
또 뭔가를 감추기 위한 거짓 행동은 아니고?
“신성한 제르 호바가 예언한 시기가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어. 남부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제렌 디스들이 긴 동면에서 깨어났다는 증거. 게다가…….”
제르 호바의 수족들이라 여겨지는 제렌 디스를 말하며 어둠 속 인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용암의 바다 너머 죽지 않는 존재들도 이 세상의 일에 간섭한 지 오래다. 평화의 시대는 곧 종말을 고할 거야.”
슈네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무엇이 비치고 있을까.
왠지 모를 아련함이 거기에 감돌았다.
“……자린을 위하여.”
슈네인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자린을 위하여.”
폰 역시 같은 말을 흘리며 자취를 감추었다.
***
‘꿈?’
데일은 완벽하리만치 검은 공간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분명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방향조차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한 공간.
실제가 아니고 꿈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다가 결코 이 꿈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 또한 기이하게 다가온다.
‘뭘까.’
어느 순간부터 데일의 눈에 어둠을 태워 먹는 광휘가 보였다.
저 빛 속에, 저 따뜻함 속에 자신을 기다리는 초월적 존재가 있어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데일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그 빛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 어어!’
순식간에 다가와 데일을 삼켜 버리는 빛 덩어리.
그 안에서 데일은 무언가를 보았다.
찬란한. 그리고 거대하지만 온화한…….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또 다른 자신을.
“끄으응…….”
눈살을 찌푸리며 데일이 깨어났다.
뭔가 머리와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은 기분.
가끔 늦잠을 자게 되는 날이면 항상 드는 느낌이었다.
꿈을 꾼 것 같으면서도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꼭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냥 규칙적인 일상 중 하나의 일탈 정도?
“오빠! 밥!”
동생 뮤이나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데일이 비비적거리며 침상에서 나왔다.
식탁에 데일과 뮤이나, 그리고 어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 둘러앉아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감고 있다. 태양과 곡식의 요정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중.
오늘따라 이상하게 아침 식사 시간이 불편하기만 했다.
무엇을 기도하는지 이맛살을 살짝 찡그린 어머니 때문일까.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데일은 더욱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축복을.”
어머니의 마지막 기원이 끝나자 데일과 뮤이나도 한 목소리로 축복을 기원한다.
보통 이럴 때는 뮤이나의 재잘거림과 핀잔, 데일의 반박, 그리고 어머니의 미소가 섞여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했었으나 오늘은 딱딱거리는 포크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데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뚝.
어머니가 스프를 뜨던 손길을 멈췄다.
“뭐가 말이냐.”
“하지만 이건 기회라고요.”
“누가 뭐라 했니?”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게 더 답답해요.”
“네 말대로 기회가 아니냐.”
어머니와 데일의 대화를 들으며 동그란 눈을 요리조리 굴리는 뮤이나만이 식사를 계속한다.
“어머니가 무얼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네가?”
“튀어나온 돌이 먼저 깨진다는 어머니의 말씀.”
“…….”
“그래서 아버지도…….”
“그만!”
데일의 어머니가 엄한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함부로 네 아버지를 언급하지 말라 했지?”
“어머니, 전…… 정말로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데일의 아버지 로그 잉그하임은 평민 출신으로서, 하급 병사로 제국군에 입대해 기병연대장까지 올랐던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륙 남부, 얼음 대지에서 적의 계략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기병연대와 보병사단을 무사히 후퇴시키고, 자신은 몇 명의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함께 길목을 지키다 전사한 그의 이름은 제국군 명예의 전당에 헌상되어 많은 이들의 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데일의 말은 아버지의 위대한 행적과 관련하여 묘한 여운을 남겼다.
튀어나온 돌…….
“그 자랑스러운 분께서 살아 계셨을 때 항상 하시던 말씀 잊었니? 그것은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두 분 다 너무 걱정만 앞서셨어요. 전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구도 널 대단하게 여긴 적은 없단다.”
“그럼 왜 저를……!”
순간 데일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머니의 슬픈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잘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란 없구나.”
“어머니, 저 잘 해낼 수 있어요. 무려 특채에요, 특채. 나라에서도 절 인정했다는 뜻이죠. 제가 잘되기를 바라신다면…….”
“되었다. 이미 허락했으니 그만하자꾸나.”
가족의 아침 식사는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