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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1화)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3)
어머니는 데일을 대단치 않게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로슈르 제국 콜로스카 주 비스텐지아는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그래도 천 명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데일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시를 잘 짓고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그 어렵다는 고대 언어학과 철학을 열 살이 되기 전에 완벽하게 제 것으로 소화해 냈기 때문에?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지식의 백과사전.
한마디로 데일은 천 년이 지나도 보기 힘들다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러나 데일의 진정한 특별함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데일이 어릴 적, 보통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짜를 정확히 맞추고, 마을의 누군가에게 해가 닥치기 전 그것을 알아차렸으며, 가뭄과 홍수를 예견하기도 했다.
갑자기 사람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고, 또 어느 순간에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데일이 머무는 곳에 기이한 광채가 일어나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는 현상 정도는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든다면…….
“폴 아저씨!”
농기구를 정리하던 대머리 중년인을 보며 데일이 소리친다.
“어? 데일 어디 가냐!”
“이따가 놀라지 마세요! 독 없어요!”
폴을 보자 독이 없는 뱀이 바로 떠올랐고, 심장이 약한 그에게 경고를 해 주었다.
그것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폴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데일의 눈에 배가 잔뜩 부른 여인 한 명과 그녀의 남편, 동생들이 모여 태어날 아이의 성별 맞추는 내기를 하는 장면이 보였다.
“아들!”
짓궂게 웃으며 데일이 소리치자 모두들 맥 빠진 얼굴이 되어 내기를 포기해 버린다.
“다리 뒤에 숨었어!”
데일은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아이에게 다른 아이가 숨은 장소를 알려 주며 킬킬거린다.
데일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떠난 자리.
그곳에서 금빛 꽃잎이 만개한, 이름 모를 식물이 아이들 무릎 높이까지 자라 반나절 동안 짙은 향기를 뿌렸다. 마치 날갯짓하는 대지의 요정과도 같이…….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아버지 로그의 전사 소식이 전해진 2년 전까지 계속되다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데일은 그저 똑똑하고 성실하며 문학을 사랑하는 학생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많이 달랐었다는 기억만을 간직한 채.
과거 데일의 특별함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비스텐지아 마을 특유의 폐쇄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또.
자연스러움.
데일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은, 그래야 하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묘한 자연스러움이 마을 사람들에게 자리했다.
그리고 현재, 모든 이들은 데일이 가진 특별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그들에겐 당연한 것이었기에.
“아우울!”
허름한 수레의 마부석에 앉아 있던 머리 큰 청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멍한 표정을 풀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차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작은 소년은 데일.
간소하게 정리한 짐을 등 뒤로 메고 뛰어온 데일은 마차 앞에 이르러서야 헉헉 숨을 몰아쉰다.
“난 안 보이냐?”
“헉헉……. 아! 슈네인 선생님.”
눈곱이 낀 나귀 옆에 서 있는 슈네인을 그제야 발견하고 데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2년 전 마을 농업학교로 부임해 온 슈네인.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물론 데일에게만.
자신도 잘 모르는 묘한 능력으로 타인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일이었지만 유독 슈네인만은 달랐다.
특정하기 힘든 거리감.
그는 다른 학생들에게 보이는 태도와 똑같이 데일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데일과 슈네인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만 같았다.
또한 지금처럼 데일의 시야가 닿지 않는 어떤 공간에 위치한 듯, 그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가 있어 가끔 놀라곤 한다.
“걱정했다. 못 나올까 봐.”
별로 걱정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선생님의 강력한 설득 덕분에 어머니도 허락하셨잖아요. 감사드립니다.”
“됐다,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나 망신시키지 말고.”
“옙!”
슈네인은 데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아울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아울은 헤벌쭉 웃으며 뒷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그럼, 아울. 데일을 잘 부탁해.”
“히히, 예.”
데일이 수레에 오르자 아울이 나귀를 출발시켰다.
덜그럭거리던 수레가 마을 광장을 떠나 점점 멀리 사라져 간다.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던 슈네인.
이윽고 수레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평온해 보이던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황금빛 비늘의 주인. 네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그의 오래된 염원을 막을 것인지, 아니면 네가 또 다른 광기의 군주로 우뚝 설 것인지…….”
슈네인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돌아선다.
덜그럭, 덜그럭!
불규칙적인 수레의 진동을 음미하던 데일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집 앞에서 뮤이나의 손을 잡고 자신을 배웅하던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신나서 폴짝폴짝 뛰던 뮤이나와 달리 살짝 손을 흔들던 어머니.
그때 어머니에게서 보였던 안타까움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를 잃고 졸지에 집안의 기둥이 되어 버린 데일.
그런 아들과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섭섭함이 치밀어 올라서였을까.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뭔가 여운이 있었다.
그것은 총명한 데일도 해석하기 어려웠고,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답답함을 전해 주었다.
데일은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스윽 닦았다.
“휴우…….”
뺨을 두어 번 치고 복잡한 생각을 거둔 데일은 곧 분주히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좀 시원한 얼굴로 돌아와 먹먹하던 가슴을 조금 풀어 내었다.
“아울.”
“으, 으응.”
“마을 밖은 어떤 세상이에요?”
아울은 2년 전, 머리를 크게 다친 상태로 마을 어귀에서 발견되었다.
치료를 했지만 뇌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는지 다른 모든 기억들은 살아 있었으나 자신이 누군지, 왜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지능도 어린아이 수준이 되고 말까지 더듬었다.
“커, 아, 아아주 많이.”
“에이, 그건 저도 알죠.”
“으, 으응.”
“……어머니는 마을 밖, 먼 곳에는 대지의 요정들이 없다고 하셨죠. 시끄러운 것들을 싫어한다고. 또 인정도, 배려도, 협동과 양보도 없는 그런 세상…….”
정말 그럴까? 아들을 품에 두고 싶어 했던 어미의 마음이 아니고?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죠?”
이 질문은 아울에게 던진 것이 아니다.
***
쏴아아아아!
달을 가린 먹구름이 세찬 비를 쏟아 내었다.
대륙 동쪽의 볼라스카 대평원을 타고 온 남동 기류가 콜로스카로 넘어오면서 대륙성 고기압을 만나 차츰 북서쪽으로 이동 후 긴 비구름을 형성하기에 이처럼 폭우가 내린다.
이때만큼은 콜로스카의 농부들도 일손을 거두고 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드넓은 농토도, 우거진 숲도 하늘이 주는 비를 먹으며 다음의 풍요를 예비하지만, 몇몇 여행객들에겐 짜증스러운 날씨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우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예년보다 빨랐다.
거의 한 달 정도?
마치 누군가가 구름을 억지로 끌어당긴 것만 같았다.
“에고, 언제 그치려나.”
이름 모를 숲에 자리를 잡은 데일과 아울. 벌써 하루가 넘게 이동을 포기한 상태였다.
혹시 모를 벼락을 피해 비교적 나무가 없는 곳에 큰 천막을 친 사람은 아울이었다. 아마 예전에 야영의 경험이 꽤 있었던 듯.
보글보글 끓는 스프를 호호 불면서 즐거워하는 아울을 보던 데일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번쩍!
콰아앙!
“힉!”
아울이 멀리서 친 번개를 보고 두려워하자 데일이 그를 안심시킨다.
“괜찮아요, 괜찮아.”
간신히 아울을 진정시킨 데일은 그저 빨리 비가 그치기만을 대지의 요정들에게 기원했다.
“보자…… 하르실라까지 3일 정도면 도착할 거고. 아, 물론 비가 그쳐야겠지.”
솔직히 데일도 겁이 났기에 일부러 말을 입 밖으로 내본다.
“거기서 하루 쉬고, 또 3일이면 라로시르. 뭐, 금방이네.”
그동안 한 달 가까이 이동해 온 두 사람이었다.
이제 이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데일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은 하르실라에서 다시 마을로 돌아갈 거고. 그때부턴 정말 나 혼자네.”
품에 잘 간직하고 있는 입학 추천서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본다.
그릉.
유난히 밝은 데일의 귀가 쫑긋거렸다.
빗소리에 섞여 아주 약하게 들린 울림.
그것은 누군가의, 아니, 보다 짐승의 것에 가까운 숨소리.
아울은 소리를 못 들었는지 싱글거리며 그릇을 핥는 중이었다.
“아울…….”
아울은 끄억, 트림을 한 뒤 입맛을 다실 뿐.
데일은 정신을 집중해 천막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 가운데 아까의 미약한 숨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일까? 사람이라면 이런 외진 숲에, 그것도 폭우가 쏟아지는 이때 들어올 일은 거의 없을 텐데.’
큰 덩치를 가진 야수도 아니다.
이 지역 전체를 통틀어 인간을 공격할 만한 짐승은 이미 없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냥 배고픈 살쾡이? 그렇다면 다행이고. 육포 몇 조각 던져 주면 끝이니까.’
머리를 굴려 판단해 본 결과 소형 육식 동물임이 타당할 것으로 여겨졌다.
“밖에 뭔가가 있어요. 아마 비 때문에 먹이를 구하지 못한 작은 짐승일 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데일은 슬쩍 아울을 돌아보았다. 순간 빠르게 표정이 변하는 아울.
약간은 차갑고 진지한 듯했던 아울의 눈이 다시 풀리는 것을 본 데일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잘못 보았나.’
데일은 찰나에 느꼈던 아울의 다른 모습을 길게 생각하지 않고 육포를 찾기 위해 짐을 뒤졌다.
“데, 데일.”
“예, 잠깐만요. 짐승들이 먹을 만한 것 좀 찾아보고요.”
“나, 나나. 크, 큰 거.”
한숨이 나왔다.
소변이라면 천막 구석에서 어떻게든 해결하겠지만 이런 때에 대변을 보겠다고 말하는 아울이 살짝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으으, 모, 못 참아! 아윽!”
갑자기 아울이 배를 움켜쥐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기름먹인 천을 들고 튀어 나갔다.
“엇! 아울, 잠시만!”
“히익!”
밖으로 뛰어간 아울이 놀라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후다닥 움직였다.
“끼아아아아!”
아울이 길게 소리를 치며 어디론가 달려가자 소리를 낸 ‘짐승’들이 아울을 따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요!”
데일은 크게 놀라 급히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어둠과 세찬 비만이 데일을 반긴다. 어찌나 빠르게 도망쳤는지 아울도, 짐승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걸 어째.”
허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 마음에 데일이 신음을 흘렸다.
무척이나 난감한 이 상황에 데일도 한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숲의 어두운 곳만을 바라볼 뿐.
“하아.”
일단은 아울을 찾아야 했다.
서둘러 우의를 챙기고 횃불용 막대에 기름을 먹이려 천막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쭈삣!
온몸의 모든 털들이 일시에 곤두서는 것만 같은 엄청난 공포가 데일에게 엄습했다.
뭔가가 하나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