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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2화)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4)


번쩍!
쿠아아앙!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쳤다.
잠시 환해진 세상 속에서 굳어 버린 데일이 언뜻 보였다.
일말의 미동도 없이 천막을 향해 서 있는 데일.
창백하게 변해 버린 얼굴은 추운 날씨 탓이 아니었다.
뒷머리를 긁어 오는 극심한 공포.
먹이를 만난 사나운 야수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데일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짙은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콰앙!
또다시 번개가 떨어져 주변을 밝혔다.
‘사람.’
찰나의 순간 데일은 보았다.
극악한 짐승이라 생각했던 공포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거칠게 엮은 망토를 두르고 거기에 연결된 후드가 머리 전체를 덮어 그 안쪽을 전혀 알 수 없는 모습.
두려움과 추위에 오들거리는 데일과 달리 어둠 속 인간은 약간의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조각상과도 같이.
다만 그가 내쉬는 숨결이 김이 되어 허공으로 퍼지는 모습을 통해 살아 있는 존재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사람이라면 말이 통할 테니. 노잣돈을 노리고 온 도적? 아울, 아울도 이들을 보고 도망쳤구나. 몇 명이 따라갔을 테고. 제발 무사하길.’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상대를 관찰하던 데일은 앞에 선 인간의 침묵과 기괴한 모습, 그에게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어둠에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저…….”
데일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보았다.
턱.
그가 움직였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한 걸음 물러난다.
“저, 저기요.”
우르릉! 쾅!
코앞에서 번개가 터졌다.
그리고 데일은 숨이 막혀 버리는 충격에 말문이 잠겨 버렸다.

번갯불이 보여 준 괴인의 얼굴.
그것은 보통 인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모양이었다.
뾰족한 가시덩굴을 눈과 코 부분에 촘촘하게 감은 뒤 중앙 부위에 은회색 염료로 하나의 눈과 거기에서 핏물이 터지는 형상이 첨가된 그림.
입술이 누군가에게 뜯어먹힌 듯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위, 아래 잇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아래, 위로 누렇고 검은 치아가 불규칙하게 배열된 귀신을 연상케 하는 모습.
그것은 마치 전설 속에 표현된 ‘녹터널 헌터’를 떠올리게 했다.
“그, 그어억!”
말할 수 없이 추악한 괴인을 보며 데일이 공포에 떨었다.
창백함을 넘어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얼굴은 데일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나타내 주었다.
스윽.
괴인이 손을 들어 데일을 가리켰다.
가늘기만 한 손가락에는 손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버르시……. 비타 누 트라고”
그가 데일을 향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순간 데일의 눈동자에서 황금빛 광채가 흘렀다.

―……순수한…… 용의 아이여…….
데일의 귀에 괴인의 음성이 로슈르어로 들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신성한 제르 호바를 수호하는 제렌 디스의 명에 따라 그대를 데리러 왔노라.
데일의 눈에 비친 그는 조금 전의 추한 모습이 아니었다.
검붉은 판금 갑옷에 유선형 투구를 쓴 다부진 기사.
고대 트라린 대륙을 지배하던 시론의 오왕국 중, 남부 엘 카로의 근위 기사를 그린 그림과 정말로 똑같았다.
―가자. 그분과 함께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만나러.
데일의 손이 저절로 들려 엘 카로 근위 기사의 손을 잡으려 한다.
기사가 보내는 따뜻한 미소에 데일 또한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두 손이 닿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쿠앙!
비에 젖은 땅이 갈라지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커억!”
데일은 광휘에 휩싸였던 환상 속 공간에서 돌아와, 차가운 현실 세계의 빗물이 얼굴을 때리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한참이나 뒤로 밀려 바닥에 주저앉은 데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분석할 겨를마저 없이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다.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고 바라본 정면의 상황.
데일은 또다시 의외의 장면에 경악했다.
진흙을 굳게 밟고 선 두 다리.
그것을 따라 올려다본 인간의 덩치는 너무나도 컸다.
거의 데일의 두 배에 가까운 신장.
투박한 우의가 그 넓은 등에 걸쳐져 빗물을 흘린다.
데일의 허리둘레보다 두꺼운 팔뚝에서 꿈틀거리는 근육.
그리고 그 묵직한 손에는 거의 2m에 이르는 거대한 클레이모어가 들린 채 반대쪽 어깨까지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비가 더욱 거세어졌다.
작은 소년과 추악한 괴인, 그리고 북부의 전사와 흡사한 거인.
세 사람 주변에 감도는 묘한 어둠과 멀리서 치는 번개의 빛이 이들 사이에서 대비된다.
그리고 침묵을 깨는 괴인의 음성.
“브라니! 프리에타 누 칼카.”
데일의 머릿속에서 또다시 괴인의 말이 해석되어 떠올랐다.
“용감한…… 방패의 주인.”
입 밖으로 그 뜻을 중얼거리며 데일은 정신을 잃었다.

***

“끙.”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아울이었다.
울상을 짓고 안절부절못하던 아울은 데일의 신음을 듣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환호를 질렀다.
“아…….”
여기는 어딜까.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돌려 바라본 전경은 여전히 천막 안이었다.
비가 그쳤는지 바깥에서 영롱한 새소리가 들리고, 입구의 작은 틈으로 환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온다.
“악몽이었나.”
꿈이라면 너무나 선명한 기억을 남겼다.
빗속의 괴인.
순수한 용의 아이.
제르 호바와 제렌 디스.
그리고…… 용감하고 묵직한 방패의 주인.
‘옛 전설에 너무 심취해 있었나 보다.’
“아울, 저 좀 일으켜 주세요. 힘이 하나도 없네요.”
“으응.”
아울이 데일을 부축해 일으켰다. 한데 그의 동작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지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특히 팔.
“어디 아파요?”
“아, 아니…….”
말을 흐리며 데일을 앉히는 아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봐요. 팔을 다친 것 같은데.”
순간 데일의 머릿속에 뭔가 찡하는 것이 스쳐 갔다.
‘꿈’에서 아울은 비명을 지르며 무언가에 쫓겨 도망쳤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에게.
“잠깐만요. 팔 좀 걷어 봐요.”
아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데일이 그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
피가 밴 천이 팔뚝에서 팔꿈치까지 둘둘 말린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데일.
“꿈이 아니었나.”
“이, 이거 아, 아침에 넘어…… 져서.”
“거짓말.”
분명히 꿈이 아니었다.
뇌 속에 각인된 기억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말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일의 재촉에 아울이 더듬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배가 아파 급히 나가는 순간 검은 물체가 눈앞을 지나갔다.
아울은 그것이 몇 명의 좀도둑인 것을 알고 두려움에 무조건 달렸다.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뒤에 따라오는 도둑은 두 명이었고, 더욱 힘내서 뛰다 나무에 걸려 넘어졌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칼을 들고 다가오는 도둑을 공포 어린 눈으로 보던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 또한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며 아울은 그가 도둑들과 한 패라 여기고 좌절했었다.
그러나 그는 도둑들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리고 아울을 구한 뒤 이곳까지 업고 왔다.
돌아와 본 광경은 데일이 쓰러진 채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전부.
아울을 구한 자는 방금 있었던 일을 데일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그냥 떠나갔다.

“그게 다예요?”
아울의 말을 들은 데일이 허탈한 마음을 내비쳤다.
“휴우…… 확실히 도둑들이 오긴 왔었나 보네.”
그럼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울을 쫓아간 자들을 제외하고 하나가 더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자가 자신을 해치려 했고.
결국 아울을 구한 이, 아니면 그의 동료가 도둑을 잡고 자신의 생명도 지켜 준 것이 틀림없다.
현실과 악몽이 뒤섞인 기억. 그것으로 상황에 대한 추측이 가능했다.
정말로 기막힌 우연이었다.
폭우가 내리는 외딴 숲 가운데 야영을 한 자신들과 불운한 여행객들을 노리던 도둑들.
또한 최악의 순간에 등장해 해를 막아 준 은인들.
평생을 살면서 이런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왜 그냥 가 버렸을까요. 감사의 인사라도 받지…….”
말로만 듣던 바운티 헌터들일까. 현상 수배범들을 잡아 포상금을 먹고 산다는 사람들.
그들이 추적하던 범죄자들이 데일 일행을 노렸고, 헌터들은 뜻하지 않게 도움을 주게 된 것일지도.
“아무튼 이곳에도 대지의 요정들이 있나 봐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 준 분들을 보내 주셨으니.”
데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울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가 그친 지금,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둘은 서둘러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