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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3화)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5)
데일과 아울이 떠나고 난 뒤.
적막한 숲 속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은밀하게 주변을 정리하며 뭔가를 찾는 다섯 사내들.
그들은 데일 일행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중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땅이 움푹 들어간 곳을 유심히 살핀다.
“치명상이군.”
마치 용암이 돌을 녹인 것처럼 걸쭉하게 변한 자리는 결코 빗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두 명이 다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단해. 우리가 뒤를 따를 필요조차 없겠어.”
“이것으로 확실하게 결론이 난 듯하다. 비숍 쪽은 두 명만 남기고 모두 이쪽으로 빼. 정작 신경 써야 할 인물은 따로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또다시 놈들이 양동작전을 시행한다면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귀중한 동료 스물을 잃은 교훈이라면 교훈이겠지.”
잠시 이들 사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한데 놈들의 정체가 뭐였을까? 고도의 훈련을 받은 우리를 단 셋으로 유린하다니. 게다가 비숍을 습격한 놈들은 더 강했다고 하더군.”
“비숍 쪽도 대단했지만 여기가 메인이었어. 방패의 주인보다 운명의 중심을 더 중하게 여겼다는 증거겠지.”
처음 땅을 살피던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풀과 나무들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그들의 눈에는 격렬했던 싸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미세하게 튄 무언가가 나뭇잎과 풀잎들의 일부를 녹여 버린 기이한 흔적들.
“방패의 주인은 마스터 디록의 제자야. 다시 말해 차세대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뜻. 그런 그가 놈을 한 번에 베지 못했어. 치명상을 입혔지만, 확실하게 제거한 것도 아니고. 이곳에 나타난 자가 놈들을 이끌던 수장이 확실해.”
“주인께 말씀드려서 증원을…….”
그때 천막이 있던 장소를 치우던 자가 소리쳤다.
“이봐! 여기 폰이 비문을 남겼어!”
모여 있던 세 사내가 후다닥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깨알같이 새겨진 암호가 있는 작은 돌이 있었다.
한 명이 긴장한 듯 그것을 들어 천천히 해독을 시작했다.
“맙소사…….”
해독을 마친 그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떠올랐다.
“왜! 폰이 뭐라 남겼기에.”
“제렌 디스…… 롱 버트.”
“뭐?”
나머지 넷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렇다면 이번 습격은.”
“녹터널 헌터들이다.”
“이럴 수가.”
누군가가 드드득 이를 갈았다.
“우리의 이목을 속이고 남부를 벗어나 이곳까지 왔을 줄이야.”
“롱 버트의 검은 은총이라면 가능했을 거야. 녹터널 헌터들은 그의 손발이나 마찬가지. 롱 버트가 완전히 깨어나 힘을 갖추었다면 놈들의 능력도 상승했을 터.”
“서둘러 주인께 보고하자.”
잠시 후 숲에서 다섯 마리의 독수리가 날아올라 각자 어디론가 날아갔다.
“자린을 위하여.”
점이 되어 사라지는 독수리를 보며 처음 비문을 발견한 자가 중얼거렸다.
***
데일과 아울은 간만에 떠오른 태양의 따스함을 즐기며 하르실라로 향했다.
숲을 떠난 지 약 반나절 정도가 흘렀다.
아직 마르지 않은 평원은 며칠간 내린 빗물을 고스란히 머금고 이들의 길에 신선함을 드리운다.
간밤의 소동이 주었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긴 여행길에서 뜻하지 않게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데일은 차츰 그것을 마음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과 도둑 사이를 막아섰던 거인의 모습은 뇌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어마어마한 인상을 남겼던 전사의 넓은 등.
2m 크기의 클레이모어 검면에 북부어로 새겨진 단어 ‘세이비어’를 타고 흐르던 빗물.
자신에게는 괴물, 또는 엘 카로 근위 기사로 비쳤던 도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방패의 주인.
하지만 무엇보다 데일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것은 거인에게서 느껴졌던 지극한 친밀감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이별했던 친구를 만난 듯했던 감정.
단순히 구원받았다는 안도감과는 전혀 다른 반가움과 애틋함.
그런 것들을 떠올리자 데일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데, 데일. 저어 쪽에…….”
아울이 더듬거리며 명상에 잠겼던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예?”
아울이 겁을 집어먹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준 데일은 마찬가지로 뭔가를 보고 크게 놀랐다.
멀리 평원 끝에서부터 수백에 이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의 병사들이었다.
“무, 무서워.”
“아울, 괜찮아요. 저들은 우리를 지켜 주는 고마운 분들이에요.”
‘근처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나? 남쪽을 제외하고는 이동이 드물다고 들었는데.’
점과 선으로 보였던 제국군들은 어느새 긴 창을 들고 대열을 갖춘 보병들과 철갑을 두른 말 위의 기사들, 가벼운 체인 메일을 걸치고 활을 둘러멘 경기병단의 모습을 드러내며 가까워졌다.
“정지!”
지휘관의 외침에 삼백의 군대가 일시에 멈췄다.
꿀꺽.
아울이 마른 침을 삼키며 데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대들은 어디서 오는 이들인가.”
얼굴을 덮었던 샐릿을 벗은 중년의 지휘관이 물어왔다.
“콜로스카 주 비스텐지아에서 라로시르로 가는 중입니다.”
“콜로스카라…… 꽤 먼 여행길이로군.”
지휘관은 아직은 차가운 대기 탓에 얼굴에서 더운 김을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저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혹, 오는 길에 수상한 이들을 못 보았는가?”
수상한 이들? 전날 자신들을 털어먹으려 했던 도둑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뇨. 숲에서 비를 피하느라 며칠간 나오지 못했습니다.”
지휘관이 데일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도에는 무슨 볼일로?”
데일이 품에서 추천서를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호, 국립대학교 입학 추천서라. 부총장의 직인이 있군.”
위조 가능성을 살피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만져 본 뒤에야 의심을 푼다.
“다음 세대에 제국을 이끌 인재로구먼.”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짓는 그를 향해 데일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지역에 불손한 자들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네. 우리 군으로서는 신민의 안전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지. 잠시 실례한 점 사과하네.”
추천서를 다시 데일에게 건네고 지휘관은 샐릿을 눌러쓴다.
“참고로 라로시르에 가기 전 하르실라를 거칠 예정이라면 길을 잘못 들었어.”
“예? 그럴 리가요.”
데일이 아울을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쪽 길로 쭉 간다면 남부야. 하르실라는 조금 더 북쪽 방향이지. 아마 자네의 하인이 착각한 듯하군.”
아울을 데일의 하인 정도로 오해한 지휘관이 뒤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그의 행동에 젊은 보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섰다.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니 안내자를 붙여 주겠네. 이 병사는 하르실라 출신이니 자네의 길에 불편이 없을 걸세.”
“지나친 배려십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니야. 뭐, 나중에 한 자리하면 잘 봐달라는 뜻이니 부담 가지지 말게.”
휘이익―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부관이 신호를 했다.
다시 철컥거리며 이동을 시작하는 병사들.
엉겁결에 큰 도움을 받게 된 데일은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때 데일은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만 같은 아픔에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들었다.
“어?”
데일은 자신의 눈에 비친 광경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다.
자신들이 떠나온 숲 방향으로 진군하는 그들의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아, 아울. 저거 보여요?”
데일의 말에 아울도, 안내 병사도 눈을 돌려 군인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 뭐가?”
“병사님, 당신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병사도 데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구름…… 나에게만 보이는 건가?’
데일은 불길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닐 거야.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삼백의 병사들을 휘돌던 검은 구름은 어느새 흩어지고 맑고 푸른 하늘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휴우…….”
병사의 이름은 커트. 입대한 지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신출내기 병사였다.
군을 전역하면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보고 선택한 군인의 길이기 때문에 제국군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로 없는 가벼운 친구다.
환락과 유흥의 도시 하르실라 출신답게 상당히 재미있고, 장난기 많은 그는 어느새 데일과 꽤 친해졌다.
“아, 그럼 형이 복무하는 부대는 완벽하게 독립된 편제라는 말씀?”
“어. 지역 군단장의 지휘를 받지 않는 특수부대라고나 할까?”
허풍인지 진짜인지 알 길은 없지만 데일은 일단 그의 말에 박자를 맞춰 주었다.
“어디까지가 우리 윗선인지는 몰라. 하지만 너에게 말을 걸었던 모로 경께서 예전에 황태자 전하를 호위하던 근위기사단 출신인 건 확실해. 따지고 보면 우린 근위대대나 마찬가지라고, 크크크.”
“후아, 그런 대단한 분께서…….”
“그러니까 특수부대지. 흐흐.”
덜거덕거리는 수레 위에서 입담을 과시하는 커트와 연신 감탄하는 데일.
아울은 그저 무엇이 좋은지 실실 웃으며 나귀를 이끌 뿐이다.
“갑자기 소집령이 떨어졌어. 지역민들의 안전을 위한 수색 정찰이라나? 여기가 얼음의 대지도 아니고 안전은 무슨 안전. 다들 모로 경의 변덕이라고만 생각하지. 원래 남들 편한 꼴은 못 보는 분이거든.”
귀찮다는 표정으로 커트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한데 난 봤어.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와 모로 경께서 머무는 대대장 관사로 들어가는걸.”
“독수…… 리요? 아!”
군대나 치안대 쪽에서 독수리나 비둘기를 이용해 급한 소식을 전달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다.
“웃기는 일이지만, 우린 날짐승의 명령을 받아 움직인 거야. 에효…….”
‘독수리. 독수리라…… 비둘기도 아니고 독수리를 연락책으로 사용할 정도라면 꽤 고위급에서 내려온 전언이 분명할 텐데. 독립적인 특수부대라 하지만 수도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곽에 머무는 작은 부대. 그러나 지휘관은 황태자 전하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최상위 귀족. 그런 대단한 기사를 움직이게 만든 전언이라. 혹시 어제의 그 일? 설마…… 겨우 우리와 도둑 몇 명, 바운티 헌터들이 관련된 사건일 뿐인데. 게다가 어찌 보면 소동에 불과한 것이고 목격자가 있었다면 나와 아울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
“야, 뭘 그리 정신을 놓고 있어?”
커트의 말에 데일은 생각을 멈추고 싱긋 웃었다.
“아뇨. 잠시 커트 형이 참 대단한 분과 함께하는 멋진 병사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 억!”
수레가 돌에 걸려 크게 요동치자 커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울을 쏘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