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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4화)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6)
쏴아아아!
라로시르에 인접한 위성도시 하르실라.
몇날며칠 내리지 않던 비가 오늘따라 더욱 세차게 내렸다.
하르실라는 라로시르로 가는 여행객들과 이주자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었기에 도시 전체에 숙박업소가 골고루 퍼져 있었고, 각종 편의시설 및 유흥업소가 난립한 환락과 휴양의 도시였다.
책상다리 여관도 여느 다른 곳들과 다르지 않게 숙박 겸 주점의 역할을 하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을 방문한 작은 손님이 있었다.
끼이익.
여관의 정문이 열리자 세찬 바람과 함께 빗물이 들어왔다.
이런 날은 보통 홀 전체에 손님이 바글바글한 것이 정상이지만, 현재는 텅텅 빈 채 주인만이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음에 빠져 있다.
여관에 들어온 이들은 작고 마른 소년 한 명과 큰 머리에 수수해 보이는 청년 한 명, 그리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젊은 병사였다.
청년이 손을 뻗어 소년이 입고 있던 비옷을 받아 든다.
“고마워요, 아울.”
“히히.”
아울이라 불린 청년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소년이 표하는 감사에 부끄러워했다.
물기를 탈탈 털며 홀을 둘러보는 두 사람의 인기척에 주인이 깨어나 눈을 비비며 반가워했다.
“아, 손님이시군요. 세 분?”
“예, 방 있죠?”
“물론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따뜻한 침대와 뜨거운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들어가실 거?”
소년, 데일은 고개를 저으며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했다.
주인이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러 사라지자 세 사람은 가까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모로 경의 배려로 커트가 자신들의 길 안내자가 된 다음 날 아침, 데일은 구슬프게 울면서 잠에서 깨었다.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하던 아울이 놀라 달려왔고, 아직 잠에서 덜 깬 커트는 인상을 쓰며 짜증을 내었다.
“아, 다 큰 녀석이 무슨 꿈을 꾸었기에 애처럼 울고 그러냐.”
그러나 데일은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꿈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가슴을 저려 오는 듯한 아픔과 미지의 슬픔, 이유 없는 분노에 서러움이 섞여 눈물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었다.
“커, 커트 형……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응? 뭐가. 아, 네가 그러니까 나만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누가 보면 나 못 자게 해서 너 구박한 줄 알겠다.”
슬쩍 아울의 눈치를 보며 커트가 오히려 당황해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16살 먹은 남자라지만 생전 처음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고 있으니 속이 얼마나 썩었을까. 야야, 실컷 울어. 남자는 세 번을 운다더라. 첫 번째가 태어났을 때, 두 번째가 여자한테 맞았을 때, 세 번째가…… 그래, 집 떠나왔을 때. 그러니까 넌 울어도 돼.”
호들갑을 떨며 데일의 등을 쓰다듬던 커트였다.
음식이 나오자 셋은 대지의 요정에게 기도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데일은 허겁지겁 음식을 퍼먹는 아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천천히 드세요.”
“우걱우걱. 으, 으응.”
차분히 고기를 썰어 씹던 데일은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저 비는 내일, 모레까지 계속될 터.
수도에 있다는 국립대학교 부속 합숙소로 출발하는 것은 그때 이후가 될 것이다.
‘뭐, 그래도 예정보다는 일찍 도착할 테니 여유를 가져 볼까나.’
데일은 문득, 자신 외에도 특채입학 예정인 다른 이들의 면면이 궁금해졌다.
합숙소에서 두 달 동안 공통 과목인 교양과 승마, 검술, 역사, 지리, 수학 등을 익힌 뒤 각자의 적성에 따라 전공학부로 갈라진다지?
물론, 국립대학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낙오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휴우. 잘 해낼 수 있을까.’
데일은 자신이 힘없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어머니가 본다면 기뻐하실까, 실망하실까에 대해 생각했다.
“……고민이 많으면 머리가 아프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속마음을 내뱉자 아울이 밥을 먹다 말고 데일을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에요. 그냥…….”
커트도 실없는 데일의 말을 듣고 픽 웃더니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형, 내일 부대로 복귀하실 건가요.”
“흠, 하루 정도는 집에서 쉬고 갈라고.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겠냐. 다음 휴가가 언제인지 보이지도 않아.”
“저…….”
“응? 왜.”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형이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될 것만 같은.”
“이여― 네가 정말 날 좋아하긴 하는구나. 그렇게 헤어지는 게 싫어?”
“그런 것도 있지만…….”
“흐흐흐, 내가 비록 충심을 다해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국의 군인이 아니냐. 너도 너의 미래를 위해 지금 멀리 떠나왔잖아. 나도 나의 미래를 위해 계속 정진해야지. 들어서 알겠지만 모로 경은 많이 엄격한 분이시거든. 약간의 책이라도 잡혀서 재수 없게 강제 전역이라도 하면 안 돼지.”
커트가 모로의 이름을 말하자 데일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나이프를 식탁에 떨어뜨렸다.
덜컹!
갑자기 여관의 정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쉬이이이이잉―
셋은 동시에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나같이 문 앞에 선 인물을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데일.
데일의 눈에 클레이모어를 등 뒤에 걸친 큰 덩치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의 뒤에서 불어오는 강한 비바람이 실내에 들이닥친다.
***
‘크다.’
데일이 문을 통해 들어온 인물을 보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거의 자신보다 두 배나 더 큰 신장, 어마어마한 덩치.
그가 걸친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가죽조끼는 비에 흠뻑 젖어 검붉게 얼룩져 있었다.
데일의 머리둘레에 육박하는 팔 근육의 굴곡을 따라 흐르는 빗물이 너무나도 인상적인 사내.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후드의 남자는 오른쪽에 당연히 있어야 할 신체의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봤더라…… 낯설지 않네.’
“으…… 으어.”
아울이 거인을 보고 질렸는지 씹던 음식 몇 조각을 흘리며 얼어붙었다.
“주인 없소?”
외팔이 후드의 사내가 큰소리로 여관의 주인을 불렀다.
“예, 예! 갑니다.”
연속으로 손님을 받아 신났던 주인은 웃으며 나오다 거인, 키릭을 보고 멈칫하며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방 두 개로 하겠소. 우선 돼지구이 5인분 주시오.”
“예…… 옛!”
천적을 만난 초식동물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주인이 땀을 훔치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인장! 고기는 썰지 말고 덩어리째 구워 주시오!”
“예, 예.”
쿵.
키릭이 자리를 잡고 먼저 앉자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가 앉은 의자가 부러질 것처럼 위태하게 삐거덕거렸지만, 키릭은 무표정하게 홀 내부를 둘러보기만 했다.
“일부러 키릭, 널 위해 조용한 여관을 골랐다. 맘에 들어?”
후드의 사내, 비숍의 배려에 키릭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름이 키릭이구나. 아니면 성이거나. 성이라면 북부인?’
키릭과 비숍에게 관심을 가졌던 데일의 생각이다.
그때 비숍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것도 없는 오른쪽 어깨 부위를 흘기며.
“곪았나.”
“끙……. 그나마 너의 사부께서 깔끔하게 잘라 주셔서 이 정도야.”
디록이 잘라 버린 오른팔의 단면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비숍은 최대한 인내하며 말했다.
긴 여행과 궂은 날씨 탓도 있었지만, 키릭과 다른 장소에서 습격한 자들을 상대하느라 무리한 이유가 더 컸다.
“다시 말하지만 나였다면 그렇게 안 했어. 터트려 버렸을 테니까.”
비숍은 그동안 키릭과 함께 동행해 오면서 보아 온 그의 솜씨를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동의한다.
비숍과 대화를 마치고 다시 주변을 돌아보던 키릭은 이내 데일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극히 짧은 순간, 데일이 키릭에게 싱그러운 웃음을 보냈다.
키릭은 원래 타인과의 접촉을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었다.
또한 웬만해서는 눈인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같은 호의적인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 편.
그러나 이상하게 데일이 보내 온 미소에 저도 모르게 살짝 턱이 움직였다.
“데, 데일. 나나……. 바, 밥 다 머, 먹었어.”
아울이 배를 쓰다듬으며 더듬거렸다.
“아, 예. 그럼 올라가요.”
새벽이 되자 비가 더욱 굵어졌다. 더불어 바람도 거세어졌고.
만약 이 여관에 여행객들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시간에는 모두 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홀 가운데 큰 초를 밝히고 앉아 있는 거인이 있었다.
비숍을 먼저 올려 보내고 벌써 몇 시간 째, 자리를 지켰던 키릭이다.
뚜벅뚜벅.
키릭은 위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눈을 떴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여관에 투숙한 손님들은 자신과 비숍, 아까 보았던 꼬마와 머리 큰 남자가 다였으니까.
역시나 발소리의 주인은 데일이었다.
“어?”
데일이 키릭을 보고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데일을 흘끗 바라보는 것으로 키릭은 반응에 답했고.
데일은 조용히 주인 없는 카운터로 들어가 나무로 만든 잔에 물을 담아 홀짝홀짝 마셨다.
꿀꺽.
키릭이 침 삼키는 소리를 내자 데일은 말없이 물을 한 잔 더 부었다.
그러고는 키릭에게 다가간다.
“이건 뭐지.”
“목이 마른 것 같아서요.”
“쓸데없는 친절.”
말은 이렇게 했지만 키릭은 데일이 내미는 잔을 툭 받아 들어 벌컥 물을 들이켰다.
“절 소개해 드릴까요?”
“아까 들었다. 데일.”
“데일 잉그하임. 로그 잉그하임의 아들이자 콜로스카 주 비스텐지아 마을의 자손이죠. 참고로 아버진 제국의 장교로서 얼음 대지의 마귀들을 물리치고 전사하셨답니다.”
데일은 로슈르 제국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한 뒤 키릭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키릭도 이내 입을 열었다.
“난, 키릭.”
“이름이요?”
“그냥 키릭이야. 다르게 불리어 본 적은 없다.”
더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하던 데일은 약간은 허무한 생각에 입을 오물거렸다.
“일라시니아 산맥 북쪽에서 오셨죠?”
끄덕.
“가문의 성을 격음으로 끝내는 것은 북부인들의 전통이라지요.”
디록, 키릭.
심지어 북부 신앙의 대표격인 초자연적 존재, 윙락도 거센 발음으로 끝난다.
“전 16살이에요. 그쪽은요?”
“너랑 같아.”
“에?”
“같다고. 16살.”
“허거…….”
데일은 잠시 멍하니 키릭을 바라보았다.
“원한다면 말 놓아도 된다.”
저 덩치에 저 얼굴이 자신과 같은 16살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데일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