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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자린 1권(25화)
외전 데일, 운명의 중심(7)


“술 마실 줄 아나.”
“아, 아뇨. 아니, 아니.”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데일은 저도 모르게 키릭에게 말을 놓았다.
“그럼 내가 알려 주지.”
키릭이 천천히 일어나 선반에 세워져 있는 술병들 중에서 가장 독한 것을 골라 왔다.
꿀꺽.
데일이 찰랑거리는 술을 보며 침을 삼켰다.
“어머니가 술은 늪의 요정들이 만든 사악한 음료라고 하셨는데…….”
“난 요정 따윈 믿지 않아.”
아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보았으니까.
뻥!
마개를 뜯어 내자 향긋하지만, 뭔가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데일을 자극했다.
또르르르르.
데일의 잔에 술을 채우는 키릭.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아까 그 머리 큰 말더듬이와 일행인 듯하구나.”
“으응, 좋은 형이야.”
“콜로스카의 비스텐지아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곳과는 상당히 먼 거리일 텐데 둘이 여행이라도 하나?”
술잔을 바라보며 긴장하던 데일은 키릭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니. 여행은 아니고 아울은 날 이곳까지 돌봐 주기 위해 따라온 거야.”
“무슨 볼일로.”
키릭은 자신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하며 계속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나 추천을 받았거든. 로슈르 국립대학교에.”
데일의 음성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것도 나와 같군.”
“응?”
“나도 국립대학교에 입학하러 왔다.”
“으에?”
“자세한 건 몰라. 기사단 양성학부라고 하더군. 한데 특채가 뭐야?”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
데일은 저도 모르게 들었던 술잔을 한 입에 털어 넣는다.
“흐억!”
처음 맛보는 술은 뜨겁고도 신선한 충격을 데일에게 안겨 주었다.
“켁! 컥, 커억.”
데일과 다르게 키릭은 익숙한 자세로 독한 곡주를 천천히 들이킨다.
“후아! 맛이 뭐 이래!”
데일의 뺨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키릭이 말없이 데일의 잔을 채워 주자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데일이 눈치를 보았다.
“우, 우리 만난 적 있지?”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데일이다.
“그럴 거다.”
“고마워.”
“…….”
“난 네가 현상금 사냥꾼인 줄 알았어. 나와 아울을 위협한 도둑들을 잡으러 온.”
“도둑?”
키릭은 데일이 그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
“응, 굉장히 무섭게 생겼다는 것만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전혀 몰라.”
“다행이로군.”
“엥? 뭐가.”
“아니다.”
키릭은 데일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기분 좋다…….”
“술이란 것, 원래 그래. 하나 심하면 독이 되지.”
“그거 말고…… 난 사실 겁이 났었거든. 국립대학교에 입학하는 거. 아무도 모르고 또 어리기까지 하니……. 그런데 이렇게 든든한 동갑 친구가 생겼잖아.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친구…… 친구라.”
키릭은 데일의 입에서 나온 친구라는 단어를 따라했다.
이 작은 친구는 자신에게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그리고 왜 자신을 막아선 적들이 데일의 앞길에 나타났을까.
일단 공통점은 하나다. 로슈르 국립대학교.
그곳에 어떤 비밀이라도?
비밀이나 음모 따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국립대학교 자체가 중심지가 아닐 수도.
만남.
롱 버트라는 기묘한 마법사로 대변되는 적의 무리는 이러한 만남을 꺼려 했을지도 모른다.
짧게 생각에 잠겼던 키릭은 약간 풀어진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술을 더 달라고 잔을 내미는 데일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

책상다리 여관의 지붕.
새벽이 깊어 가는 난간 끝에 달빛을 머금은 먹구름이 걸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을 쏟아 낸다.
그리고 흐릿한 빛은 반대쪽 난간에 있는 두 개의 형체에 걸려 흩어진다.
두 그림자 중 하나는 오른팔 부위가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머리로 여겨지는 부분이 꽤 크다.
장대비가 내리고 있건만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두 형체를 감싸고 있기에 빗물은 그들을 적시지 못했다.
“멋지군.”
이 음성은 분명 비숍.
“처음 보자마자 저 무뚝뚝한 녀석의 환심을 얻어 내다니. 과연…….”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아울이었다. 말더듬이 청년.
“전설에 따르면 지고한 일곱 존재 중 유일하게 다른 이들과 다툼이 없던 존재였다고 하지. 그것은 비단 그들 사이에서만 영향을 주던 능력은 아니었을 거야.”
아울은 전혀 더듬거리지 않는 말투였다.
그렇다면…….
“왜.”
“그간 데일을 알던, 또 지켜보던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 또한…….”
씨익 웃는 아울의 얼굴에는 거짓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폰. 너는 우리들 중 가장 감정이 없는 피스가 아닌가.”
“그러니까. 물론 저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인간들도, 자연물도 내겐 감흥을 주지 못하는 건 여전해.”
비숍은 의외라는 얼굴로 아울, 아니, 폰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신성한 존재보다 더욱 자린의 오른쪽 자리에 어울리는 이는 총명한 존재가 아닐까. 아, 미안. 너를 불쾌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오른쪽’이란 말을 뱉고 괜히 비숍에게 사과하는 척하는 폰이었다.
당연히 미안하다는 감정 따위는 없었다.
“불쾌하긴, 오히려 다행이라 여긴다. 마스터 디록의 자비심이 아니었다면 떨어진 것은 내 머리였을 테니.”
“다섯 코치 중, 하필이면 디록에게 네가 접근했었던 것이 불운이었다고 생각해.”
다섯 명의 코치.
슈네인과 디록,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
그들 중 둘은 적극적으로 이들에게 협력했고, 먼 곳에 있는 다른 한 명은 방관자로 남길 원했지만, 크게 협조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슈네인.
스스로 피스들의 주인에게 코치로서의 중임을 제안한 자.
어떻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았는지, 왜 다가왔는지 주인을 제외하곤 누구도 모른다.
또한 그 능력과 속을 알 수 없어 더욱 믿음이 가지 않는 남자.
마지막으로 두려움 그 자체였던 북부의 영웅 마스터 디록.
디록의 경우 직접 이들의 주인이 그를 찾아가 맹약을 받아 냈다.
이후 디록은 피를 나눈 약속의 당사자인 주인을 제외하고,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겠다고 말했다.
만일 가까이 온다면 즉시 죽음을 내리겠다고 선언하기까지.
물론 디록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다. 비숍의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나이트가 죽었다지? 작년쯤.”
나이트는 또 다른 아이, 루산을 지켜보던 피스.
“나도 퀸을 통해서 들었다. 안타까웠어.”
비숍이 침울해진 음성으로 답했다.
“제렌 디스의 첫 목표가 차가운 아이였군. 나이트, 그 친구로서는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었을 거야, 당연히 그랬어야 했겠지. 한데 대체 언제 깨어나서 또 언제부터 준비했던 것일까. 도저히 알 수 없군. 설명을 해야 할 나이트가 죽었으니.”
“놈들은 강했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녹터널 헌터들이 제렌 디스들의 동면 이후로 이처럼 전면에 나선 적도 처음이고. 그리고 난…… 롱 버트의 환영을 보았다.”
비숍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 옛 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잘생겼던가?”
비숍은 폰의 물음이 그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놈은 자신의 은총을 블랙 미디엄에 담아 이번 습격을 주도한 자에게 내려 주었어. 겨우 그 정도로도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더군. 롱 버트가 깨어나 움직였으니 놈들이 우릴 농락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도 말이 되지.”
“…….”
갑자기 폰이 침묵했다.
“왜?”
“커맨더 모로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너와 방패의 주인을 따르던 스타비챠들도.”
비숍도 폰도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자식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시간인, 밤을 빼앗기 위해 장렬히 싸우다 자린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결국 주인께서 옳았군.”
“그래서 우리가 서두르는 것 아닌가. 아이들의 능력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봤을 땐…….”
폰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도 충분해. 적어도 데일만큼은.”
“어련하시겠나.”
“아무튼 이제 들어가자고. 저 아이들에게 우리가 모르는 다른 능력들이 잠재해 있을지 몰라.”
“그래. 나중에 보자.”
“아, 그거 알아?”
폰이 비숍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 도시, 하르실라. 그 이름의 유래.”
비숍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말없이 폰을 쳐다보기만 했다.
“북부인들이 믿는 신화의 정점인 윙락. 그의 수많은 자녀들 중 하나인 불의 정령이 바로 하르실라지. 전쟁 중 건설했던 다목적 요새의 이름에 북부인들이 섬기는 정령의 이름을 달아 주어 그들의 신앙심을 농락했다더군. 지금은 그 이름 그대로 계획도시가 되었지만.”
“그런데?”
“그냥 불길해서. 불을 상징하는 하르실라……. 실제로 북부 신화에는 하르실라가 남부로 내려가 얼음을 녹여 마왕의 잠을 깨운 내용이 나와. 분노한 마왕이 세상을 혼돈으로 뒤덮었을 때 북부의 정령들은 그저 떨기만 했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지?”
비숍은 약간 짜증이 섞인 말투로 물었다.
“금기를 범한다는 것. 주어진 이름에는 큰 힘이 있지. 하필 이럴 때, 남부의 얼음이 녹아 제렌 디스들이 눈을 떴을 때, 우리가 하르실라에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공교롭지 않은가.”
“헛소리 그만하지.”
“하르실라는 마왕에게 범해져 수많은 악의 씨앗들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해. 우리가 익히 아는 ‘타락’도 그 씨앗들 중 하나고. 순진한 이 나라의 농민들이 보면 하르실라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공간이라네.”
“짜증나는군.”
비숍이 몸을 휙 돌려 버렸다.
“비숍, 하나만 더 기억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에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리고 언젠가는 이름값을 하게 되지. 그저 내 노파심이라고 생각해도 돼. 하지만 절대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비숍의 모습이 먼저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있던 공간을 빗물이 세차게 덮었다.
“총명한 데일. 네가…… 너의 손으로 전설을 거머쥘 날을 기다리마.”
폰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가식이 아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서.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