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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언 (1화)


서론
재환은 평범했다. 아니,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꽤 착실했다. 또래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요즘 유행하는 게임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만화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아니며, 밖에 나가서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닌, 가끔 토요일 밤 11시쯤 인터넷 서핑 2시간만을 자신의 여가시간으로 삼는, 모든 부모가 바라는 모범적인 초1. 초2. 초3. 초4. 초5. 초6. 중1. 중2. 중3. 고1. 고2. 고3.
친구는 적었다. 많았던 적도 있었지만. 재환이 경주마처럼 차안대를 쓴 듯 양 시야가 막혀 앞만 보고 달리는 순간, 그때부터 친구는 사라져 갔다. 재환과 다르게 다른 남자 아이들은 요즘 유행하는 게임을 좋아하고, 만화영화를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했다. 재환은 공통분모를 상실한 돌멩이였다. 어느 새인가 반 친구들은 재환에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재환은 신경 썼다. 언제나 신경 썼다. 재환은 요즘 유행하는 게임에도, 만화영화에도, 드라마에도, 축구에도, 야구에도, 친구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다만 차안대를 쓴 경주마는 달렸다.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나 결코 현실 감각은 잃지 않았다. 나를, 혹은 누군가―그게 부모, 선생, 친척 그 무엇이 되었든―를 기쁘게 하는 이 결승점은 결코 마침표가 아니라는 것.
청년실업률은 높아져만 갔고 재환이 아무리 노력하여 명문대를 들어가더라도 안주하지 못하고 취업준비를 해야 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간다는 것은 재환에게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마는 달렸다. 다리가 부러지면 곧 폐사당할 처지지만 달렸다. 왜냐하면 평생 그렇게 키워진 경주마는 그 방법밖에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재환은 퍽 긍정적이었다. 이번 게임이 끝나면 휴식이 찾아오지 않을까. 혹은, 내가 정말 부자가 되어서 나중에 조금은 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 차안막이.
벗겨질 날은.
그러한 기대가 산산조각 난 것은 생각보다 빨랐다. 수능이 끝나고 마지막 수시 면접마저 끝난 어느 날. 수능 성적발표와 대학 발표, 그사이 재환이 유일하게 가졌을 휴식 3개월을 남겨둔 채, 재환의 부푼 가슴은 자신을 땅 밑으로 끌어당기는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경주마의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급작스러운 순간에 재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지막 면접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당한 봉변이었다. 사실 이것은 봉변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랄 터였다. 갑자기 땅에 구멍이 뚫리다니. 그것도 모자라 손이 나오다니. 재환은 어안이 벙벙하여 두뇌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싱크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모두 이해불능이었다.
자신이 떨어진 곳은 어느 방. 사람은 하나, 둘. 다 합쳐서 두 명. 모두 외국인. 둘 다 남자. 하나는 짙은 갈색머리, 하나는 이상하게도 붉은, 마치 타오르는 태양으로 치장한 듯한 머리. 하나는 늙었고 하나는 젊다. 그리고 복색마저도 이상했다. 그 어느 책에서도 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서양의 전통 복장만 같았다. 아니면 고대 그리스와 같은 복장.
하지만 재환이 이해할 수 없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화가 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재환의 뺨을 때렸다.
[아! 왜, 왜, 이, 이, 러세요!]
그리고 재환은 그 상태로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
강간당했다.
물론, 재환은 훌륭하게 반항했다. 소리 지르고, 맞고, 기고, 맞고, 때리고, 맞고, 울고, 맞고, 빌고, 맞고 다시 울고, 맞고, 빌고, 맞고, 또 다시, 울고, 맞고, 빌고, 맞고, 울고, 맞고, 빌고, 맞고, 맞고, 맞고, 침묵.
재환이 반병신이 되어 갔지만 분노한 남자는 재환의 바르작거림을 용서하지 않았다. 재환은 그렇게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게 되었다.
마구 내리는 몽둥이에 짐승들이 두려움을 알고 배우듯이, 지난 19년 생애 동안 너무나도 훌륭한 학생이었던 재환은 단 한 번의 행위로 두려움을 배웠다. 꺽꺽거리는 소리마저도 없이 음소거. 성대를 제거 당한 개처럼 재환은 침묵했다. 그사이 차안막 안쪽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붉은 눈. 그렇게 재환은 기절했다.
재환이 눈을 뜬 것은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아니, 그것은 기적에 의해 강제로 행해졌다. 분명 재환이 살던 곳에서는 이런 행위를 기적이라고 불렀다. 어떤 늙은 여자가 재환을 눈부신 빛으로 치료했던 것이다. 그 눈부신 빛에 재환의 상처가 낱낱이 드러났지만 늙은 여자는 동정하지 않았다. 재환을 동정하기에는 이곳은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가 다가와 재환의 몸을 닦고 씻겼다. 젊은 여자 또한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투했다. 이곳에서 붉은 남자의 잠자리 시중은 바로 영광됨과 부귀를 뜻했다. 그대로 젊은 여자가 물러나고 붉은 남자는 재환의 뺨을 때렸다.
재환은 강력한 충격에 눈을 떴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붉은색의 남자. 재환은 숨이 멎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상냥한 곳은 아니었다.
곧바로 다시 강간.
물론, 재환은 훌륭하게 침묵했다. 아니, 소리가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뇌는 과부하가 되어서 돌아가지 않았다. error. 잘못된 접근. 이러한 메시지가 수십 번 뜨고 나서야 남자는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재환은 여전히 두려웠다.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노여움 대신 두려움이 재환의 세포단위 하나하나까지 차올랐다. 남자가 그대로 나가고 재환은 눈을 감았다. 재환이 할 수 있는 것은 잠드는 것뿐이었다.
그러한 일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처음, 여기가 어디지, 했던 재환의 물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재환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알고 싶은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재환은 그냥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이토록 맹목적으로 집을 바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을 뜨면 ‘아, 오늘도 아직 여기구나’ 생각했다. 그 생각이 ‘아직 살아 있구나’로 바뀐 것은 그리 오래도 아니었다. 남자가 발길을 끊은 것 역시 그리 오래도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남자가 오지 않았을 때 재환의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재환은 거기서도 두려움을 느꼈다. 붉은색만 보아도 발작을 하는 재환이었지만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난 뒤, 재환은 자신의 효용이 사라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젠 정말로 죽는 건가.
재환은 그렇게도 눈을 뜨는 아침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제발 이럴 바엔 나를 죽여 달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싶지 않았다.
재환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이 셀 수 없이 너무 많아서 양 손에 가득 끌어안으면 넘쳤다.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재환은 하고 싶은 것을 옆쪽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해 본 것은 하나도 없이 남자에게 강간당하다가 죽다니. 재환은 입을 씰룩거렸다.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재환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들키면 붉은 남자가 다시 올 것만 같았다. 재환은 그렇게 숨죽여서 웃었다.
그렇지만 재환은 죽지 않고 계속 살게 되었다. 재환은 어느새 수긍했다. 남자가 자신에게 질린 것이리라. 그리고 죽이지도 않으리라. 그렇게 숨을 죽이고 살기를 며칠, 어느 날, 재환은 자신에게 식사 거리를 가져다준 여자에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여자가 무어라 무어라 말했지만 재환은 그 말을 해석할 수 없었다. 여자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재환은 그 모습에 기가 죽고―잠시 나가더니 책을 던져 주었다. 글자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재환은 그 얇은 책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다. 아이에게나 주는 초급 글 교본. 여자는 그 책 하나로 재환에게 말했다. 글이나 배워. 재환은 수긍했다. 그리고 바로 착수했다.
경주마는 다시 달린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었다. 재환은 19년 생애를 훌륭한 학생으로 보내왔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여자는 하루 세 번 들어왔고 재환은 하루 세 번 여자에게 글씨의 발음과 단어의 발음을 배웠다. 여자는 처음에 귀찮은 듯하더니, 곧 어느 정도 가여움을 느낀 듯―그것이 무엇인지는 재환도 잘 알 수 없었지만―성실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재환은 한 달 만에 다섯 살배기 정도의 언어를 구사할 수준이 되었다.
재환이 물었다.
“제가 집에 갈 수 있나요?”
“아니요.”
여자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재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었다. 그의 책은 이제 단순히 그림과 단어 하나가 있는 수준에서 벗어나 그림 한 장에 조금 커다란 글씨가 있는 동화책 정도였다. 재환은 글씨를 하나하나 읽었다. ……캐롤라인이 말했습니다. 여기가 어디죠? 여기는 --들의 나라란다…….
“이 --는 뭐예요?”
“천사입니다. 신의 종. 날개 달리고, 신의 명령을 전하는.”
……천사들의 나라란다. 환영한다……. 재환은 그대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어 썼다.
“밥을 먹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노하실 거예요.”
“노한다는 게 뭐죠?”
“화내신다는 겁니다. 노하다.”
“입맛이 없어요.”
“그래도 먹어야 합니다.”
여자는 침대로 다가와 재환을 거칠게 일으켰다. 재환은 그 손길에 망석중처럼 끌려 올라왔다. 네, 먹을게요. 재환이 희미하게 말했다. 귀찮게 하긴. 여자는 퉁명스럽게 재환을 털어 내었다.
재환은 자는 것조차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한 채 다시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희멀건 한 죽과 빵을 먹었다. 묵묵히 식사를 하니 이제는 과일이 나왔다. 재환은 그 또한 묵묵히 먹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죠?”
“축복받은 붉은 사자의 땅. 영광으로 아십시오.”
“영광이 뭐죠?”
“영광. 영예 같은 거. 빛나고 아름다운. 그냥 감사하라는 겁니다.”
재환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자도 되나요? 네. 재환은 그렇게 현실에서 도피했다.



1.


일상은 지루하게 이루어졌다. 재환은 어느새 어느 정도의 어휘 수준을 갖추었으며 꽤나 말을 잘하게 되었다. 식사는 하루 세 번 꼬박 들어왔고, 재환은 꾸역꾸역 그것들을 다 먹었다. 단순한 생존본능이었다.
가끔은 그랬다. 가끔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깜짝깜짝 놀라며 자지러졌다. 물론, 들어오는 사람은 알레스티아밖에는 없었지만.
알레스티아는 말은 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재환을 퍽 한심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루는 재환에게,
“아페네. 놀라는 게 지겹지도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재환은 그저 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계속해서 문을 노려보고 또 보았다. 마치 누가 구둣발로 무례하게 방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처럼.
방은 상당히 넓고 쾌적했다. 처음 왔을 때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탁자, 고급스러운 도자기, 꽃, 그림, 호사스러운 장식이 있는 커다란 거울, 부드러운 오리털 이불과 베개, 그리고 입혀진 비단 옷……. 모든 것이 낯설고 호사스러웠다. 분에 넘치도록 호사스러웠다.
그러나 모두 다 입식. 좌식은 하나도 없고 방 안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야만성. 그리고 올라오는 음식들은 수저와 젓가락 혹은 나이프나 포크도 없이 오로지 맨손으로 먹는 것들. 욕조는 뜨거운 물이 전연 나오지 않아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시녀 셋이 물을 데워 들고 왔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사치와 비문명의 경계에 선 방. 재환이 느낀 방은 그러했다. 영광이든, 붉은 사자든, 왕이든 모두 다 죽어 버리라지.
재환은 아직도 꿈을 꿨다. 그리고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지 않아도 발작을 일으키며 자지러졌다. 매일 마다 그렇게, 그러한 것들은 반복되었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그래도 재환은 방 안에 붉은색이 하나도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로운 삶이라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찾아오나니, 그것은 갑자기 찾아들어온 갈색 머리의 남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재환은 알레스티아가 아침을 들고 오면서 아리스페에라고 소개한 갈색 머리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환은 그 남자를 알았다.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맨 처음 이 땅에 끌려왔을 때, 붉은 머리의 남자와 함께 있던 남자였다. 재환은 그대로 잠시 헐떡인 뒤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재환이 깨어난 것은 한참 뒤는 아니었다. 다만, 아침에서 점심으로 건너뛰었을 뿐. 침대에 눕혀졌던 재환이 일어나니 남자는 아직 가지 않고 있었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아리스페에 올가입니다.”
재환은 아리스페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재환은 그때 손가락을 꺾였었다. 새끼손가락이었는데, 그 때문에 손가락을 모으면 단정한 선을 이루던 그것은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새끼손가락은 아직도 조금 비뚤어진 모양새로 붙어 있었다.
“…….”
“반갑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릴 일은 아페네께서 축복받고 복된 붉은 사자의 땅에 어떻게 오셨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알레스티아.”
“네.”
“지도를 펼치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레스티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아리스페에는 그중 한 장을 집어 들더니 재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륙은 우리가 존재하는 사르피에 대륙, 남대륙 체카, 그리고 사르피에의 동쪽 분들에게는 동대륙이겠지만 저희 입장에서 서대륙 아칵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사르피에 대륙이라고 설명했던 대륙을 크게 확대해 놓은 지도를 하나 집어 들며 다시 설명했다.
“그중 대륙, 그러니까 이 사르피에 대륙은 총 7인의 왕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먼저, 동쪽 산맥의 흰 호랑이 을미찬, 동북쪽 고원의 검은 매 산 제이치 베이, 동남쪽 열대림의 은빛 코끼리 아쉬뚱 마쯔산 아웅, 중앙 초원의 푸른 산양 하레미아 테놈 아힘쉬, 서북쪽 설원의 회색 늑대 깔리야예느 예비아 노람쉬라, 서남쪽 사막의 황금 여우 푸티아 알 미야,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서쪽 초원의 붉은 사자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이 분들의 존함은 차차 외우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성이신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전하의 존함은 속히 외우셔야 할 것입니다. 아페네, 당신의 부군 되실 것이니까요.”
“네?”
“하여간 글을 읽고 쓰실 수 있으시다면서요? 훌륭합니다. 역시 아페네. 여기 전하의 존함을 써 드릴 테니 오늘 안에 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니, 아니, 저는 무슨 말인지 잘…….”
“참, 너무 빠르게 말을 했나 보군요. 그래도 그 정도면 능숙합니다. 좋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러니까, 당신께서는, 아페네, 메히온 전하와 혼인하실 것이고 당신은 왕의 존함을 외우셔야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네?”
“좋아요. 아페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알레스티아.”
“네.”
“나중에 메히온 전하의 존함을 외우시도록 도와 드려라.”
“네, 알겠습니다. 아페네께서는 영민하신 분입니다.”
“사감은 필요 없네. 그러니까, 아페네. 아페네께서 이곳에 온 것은 신 칼라의 뜻입니다. 축복이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여기에 오다니. 게다가 당신께서는 왕을 보좌할 가장 큰 위치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아, 아페네에게 이런 축복이.”
“왕이 누군데요?”
“아페네, 그분이십니다. 아페네에게 승은을 내려 주셨던.”
“승은이 뭐죠?”
재환의 질문에 알레스티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아페네. 전하께서 당신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네?”
“전하께서 당신과 침소에 드시지 않았습니까.”
“아.”
아, 재환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 새인가 길게 자란 머리가 볼을 스쳤다. 아, 다시 한 번, 짧게. 숨을 들이키면서, 아, 어째서? 하지만 재환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란 어찌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법이었다. 언제나. 사실, 그것이 누구라도 그러하지만. 재환은 새끼손가락을 잠깐 감싸 쥐었다.
누군가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고마운 것이다.
이 간격은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인가. 단지 태어나고 살아 온 환경에서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 본래부터 가져 온 가치관의 문제인 건가.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은 당연하지 않다. 그들이 병신인 건가 자신이 병신인 건가. 재환은 새끼손가락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그게 왜, 승은이…….”
“물론, 그런 성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찾으시던 분은 전무후무하지요. 그 어떤 여성과 남성도 받지 못한 은혜입니다.”
“아, 그 무슨.”
재환이 헐떡였다. 알레스티아가 그 모습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고는 아리스페에에게 조언했다.
“아페네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각이 없으십니다. 더 이상 말하셨다가는 일의 진행이 늦어질 것입니다.”
“이런.”
아리스페에는 머리를 잠깐 짚더니 좋습니다, 하고 일어났다.
“알레스티아. 그러면 아페네의 교육은 네가 맡아라. 나는 도저히, 당최…….”
아페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니. 아리스페에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도들은 알아서 치우게. 이 지도는 우리 데카리아 전도이지 않나. 군사기밀이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페네, 안녕히. 그렇게 흐느끼는 재환을 뒤에 두고 아리스페에는 혀를 쯧쯧 찬 후 돌아갔다.
알레스티아는 그런 아리스페에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재환의 손을 잡았다.
“아페네. 진정하세요.”
“아니, 하, 아니, 어떻게 이곳은, 뭔데.”
“네. 아페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그딴 게 승은이…….”
“아페네.”
알레스티아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영원한 왕 메히온께서는 신성이십니다. 우리의 신 칼라께서 직접 보내신 일곱 명의 핏줄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과 잠자리를 가졌으니 당연히, 아페네, 승은입니다.”
[개새끼.]
재환은 작게 말했다. 뭐라고요? 알레스티아가 반문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환은 그러나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여기는 모두 개새끼들뿐이야.
“그럼 그 사람도 죽나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이생의 삶이 끝난다면 신 칼라의 권좌 아래쪽에서 계시겠죠.”
다 개새끼들뿐이야.


재환은 그날은 아니었지만 그다음 날까진 왕의 이름을 외워야만 했다. 자비로운 알레스티아의 처사였다.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재환은 그 이름자를 적으며 많은 감정들을 생각했다.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이것은 증오의 이름이다.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이것은 고통의 이름이다.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이것은 원망의 이름이다. 이것은 절망의 이름이다. 이것은 분노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포의 이름이다.
알레스티아는 틈틈이 공포를 물어보았다.
“아페네. 왕의 존함은 무엇이지요?”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재환은 누가 봐도 훌륭한 학생이었기에 그런 몇 음절과 어절로 이루어진 문자 따위야 금세 외웠다. 1900M를 달려온 장거리 경주마에게 500M를 그저 달려 보기만 하라는 요구는 너무 쉬웠던 것이다.
알레스티아는 재환이 책을 읽는 중에도, 밥을 먹는 중에도, 손을 씻는 중에도, 매일같이 공포를 물어 보았고, 재환은 누구보다 능숙하게 공포를 대답했다. 그러자 공포는 곧 화석처럼 변모하였다.
시간은 가장 컸던 공룡마저도 화석으로 만든 업적이 있었다. 그런 시간에게, 오랫동안 보지 못한 이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히고 겉껍질을 씌워서 침전시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재환은 평온해졌고 알레스티아는 안심했다. 교육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알레스티아는 재환에게 진정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궁에 들어와 아페네를 모시는 이상 사감과 사견은 금물이었지만, 그래도 재환의 불행에 어떠한 첨언을 얹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재환은 일단 난데없이 끌려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왕을 모시게 된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알레스티아는 재환을 이해하지 못했다. 재환은 아페네였고 알레스티아가 보기에 이는 원래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때문에 재환이 발작하고 길길이 날뛰다가 낙심하는 것은 과장된 반응이라 느껴졌던 것이다.
인간의 좌뇌와 우뇌가 나뉘었기 때문인 걸까. 감성은 자유롭게 날다가 갇힌 새처럼 떨고 있는 애처로움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은 그 새의 육신의 평안과 풍족한 먹이, 금으로 된 새장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레스티아의 논리는 견고했다.
따라서 알레스티아는 생각했다. ―아페네는 거만하다.
재환에게는 알레스티아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너무나 많았다. 아페네는 거만하다. 세상에는 굶주리는 자들이 많다. 자신만 해도 신전에 부모가 동화 한 개를 받고 온전히 바친 것을 왕께서, 아 은혜 갚을 길이 없다, 거두어 주시지 않았는가. 신전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자신은 그저 신전 앞마당을 쓸다가 죽어 버렸겠지.
물론 바깥보다는 평안한 삶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빈민을 안타깝게 여긴 신전이 아이들을 구제하려 했지만 신전의 수와 크기는 한정되어 있었고, 빈자의 자식들은 많다. 결국 신의 종이 빈민 구제를 포기한 것이 5년 전. 세상은 비통에 잠겨 있다.
전하께서 그런 세상을 구원하셔야 하고, 이를 위하여 자신과 그 모든 전하의 통치하에 있는 개인과 동물과 식물들은 기꺼이 그 미천한 몸을 전하께 바쳐야만 한다. 설사 아무리 고귀한 신분일지라도.
알레스티아는 재환이 책을 읽으며 어설프게 사과를 집다가, 흘리자, 버리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손가락은 희고 가늘다. 언어습득 또한 매우 빠르고, 사고방식 자체가 훌륭하게 교육받았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순종적이다. 글을 배우라고 하면 배웠고, 책을 주면 읽었으며, 먹으라면 먹고, 씻으라면 씻었다.
알레스티아는 그 간극에 대해 생각했다. 오만하고 굴종적이다. 하지만 아페네는 아페네. 그가 어디서 왔는지, 과거의 신분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알레스티아에게, 이 대륙의 누군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순종적일지라도, 전하에 대한 불복종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이다.
“아페네, 아페네께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