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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언 (2화)


재환은 읽던 책을 덮었다. 알레스티아는 요즘 들어 재환에게 더 붙어 있기 시작했다. 예전 글을 처음 배울 시기에는 하루 세 번. 식사를 들고 와서 재환의 시중을 들고, 재환이 식사를 끝마치면 그대로 나가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을 들고 들어온 뒤 남은 잔해는 다른 시녀들에게 맡겨 두고선 거의 하루 종일 재환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환의 일상이 딱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재환은 알레스티아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여유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조급하지도 않게 행동했다.
이곳에도 배울 것은 많았다. 재환은 새로운 배울 것에 몰두했다. 좀 더 적은 삽화, 좀 더 작은 글자, 좀 더 어려운 내용. 지식이 채워질수록 백치처럼 머리가 비워진다. 그렇게 차근차근 읽어 나가다 보면 옛날 자신이 읽던 책이 생각나며 마치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재환이 그런 행복에 휩싸이면 알레스티아는 다시 아니요. 하고 대답했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이제 예식 준비를 해야겠군요.”
“예식? 무엇을요?”
“혼인 말입니다. 아페네.”
“그거 진심이에요? 전 남자예요.”
“남자인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하지…….”
“불행하게도.”
알레스티아 또한 읽던 책을 완전히 덮었다.
“아페네. 저희도 아페네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좀 더…… 골격이 크고 남자다운 사람을 원했거든요. 그런데 아쉽게도…….”
“저를, 저를 원한 게 아니면 돌려보내시면 되잖아요.”
“아페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이미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아페네와.”
“저하고요?”
“아니요. 다른 아페네입니다.”
“다른 아페네요? 아페네가 뭔데요? 아페네가 또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씩 대답하자면 그렇습니다. 아페네는 당신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알레스티아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하는 눈치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끌어냈다.
“그러니까, 아페네는 여러 가지 뜻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이방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다른 곳에서 온 사람 말입니다. 현재 저희가 확인한 아페네는 지금 여기 계신 아페네까지 네 명. 그렇지만 전하께서 약속한 아페네는 하나. 그는 지금 늑대의 영지에 계시죠. 그리고 정상적인 아페네는 사실, 저희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는 전적으로 신 칼라의 뜻으로, 선택하신 사람을 보내십니다. 각 세대의 왕에게, 아페네는 왕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될 수도, 반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를 사용하는 방법은 왕에게 달렸습니다. 우리의 왕, 붉은 사자의 약속을 받아 낸 아페네는 회색 늑대 깔리야예느의 반려로서 저희 왕과는 전연 상관이 없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페네. 이러한 사고는 종종 일어났죠. 이를 전하께서는 인정하기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래서 강구해 낸 것이 아페네, 당신입니다.”
“저요?”
“네, 전하께서는 이 세계의 문을 주관하는 흑룡 퓌티온에게 당신을 불러올 것을 허락받으셨습니다. 물론, 이는 신 칼라의 뜻과도 상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불러올 수 있었죠. 이에는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고, 흑룡 퓌티온의 힘을 빌려 약속을 받았던 아페네와 같은 곳에서 당신을 불러오는 것은 성공했지만, 글쎄, 그와 비슷한 아페네는 아니군요. 그래서 전하의 분노를 산 것이겠지만. 차라리 검은 매 산을 우리 왕의 아페네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싶기도 합니다. 반발이야 둘째치고 말이죠.”
알레스티아는 제 딴에 농담이라고 덧붙인 듯 했지만 재환은 정말로 기쁘지 않았다. 다른 아페네? 그리고 비슷한 사람? 결국 이 말들을 종합하자면 그러하다. 자신은 누군가의 대용품으로 온 것이다. 재환은 그냥 웃음이 났다. 결국 이 꼴은 누구의 기쁨도 되지 못하고 효용이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일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신을 불러온 왕마저 기쁘지 않는다면. 이러한 모욕은 도대체, 왜.
“그럼, 안 똑같으니까. 돌려보내 주세요.”
“안 됩니다. 아페네.”
“돌려보내 주세요.”
“안 됩니다.”
“돌려보내 주세요.”
“안 됩니다.”
“왜요? 왜 안 돼요!”
재환이 소리 질렀고 알레스티아 또한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리 질렀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방금도 말했지 않습니까! 전하는 약속을 이행해야 합니다!”
“약속이 뭔데요?”
알레스티아는 피곤하다는 듯이 다시 의자에 기댔다.
“회색 늑대의 반려가 된 아페네에게 왕께서 정식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의 아페네와 혼인을 하겠다고. 왕의 약속은 강력합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왕에게 돌아가게 되죠.”
“그, 그건 그 사람 사정이고요, 새로 불러오면 되잖아요. 새 아페네를,”
“아페네, 기억하십시오. 신은 기회를 단 한 번 주십니다.”
“아, 제발.”
그냥 절 돌아가게 해 주세요. 제발……. 재환이 말했다. 제발. 알레스티아는 그를 어리석게 여기며 대답했다. 아페네, 신이 주시는 기회는 단 한 번입니다. 망연자실한 재환을 보고 알레스티아는 그래도 어느 정도 미지의 세계에 온 이에 대한 동정심은 있었던지 조언했다.
“하지만, 아페네. 약속은 언제나 허점이 있습니다. 왕께서는 당신과 정혼하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후궁일진데, 기뻐하세요, 당신에게 주어진 부(富)를 차 버리는 어리석은 아페네. 왕이 정혼을 맺게 되면 후궁은 모두 퇴궐해야만 하며, 그리고 그를 기다리지 않아도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신은 퇴궐하실 수 있습니다. 약간의 재산과 혼처와 함께.”
재환이 속삭였다.
“기쁜 것인가요?”
“예. 만약 제가 당신이라면 기꺼이 뛰어들 만큼. 물론 아페네께서는 아페네이신지라 궁의 관리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등청도 해야 할 것이고요. 전하를 어느 쪽이든 보필하는 것은 아페네의 의무이니.”
“전하가 허락하실까요?”
“누구보다 기꺼이.”
재환은 바깥을 바라보려 애썼다. 하지만 걸쇠가 달린 이 방의 창은 오직 바로 앞 정원만을 비출 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숲과 하늘.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밤에 애써 하늘을 보려 했을 때 이 행성의 위성은 지구와 같은 한 개였지만 수도라고 하는 이곳은 지구 그 어느 곳보다 쏟아지는 하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을 지구가 아니라고 짐작하는 까닭은 그 어느 곳에서, 서양의 그 모든 곳에서 들어 볼 수 없었던 말과, 자신을 급작스럽게 깨운 기적과, 시녀들, 하인들, 어리석은 제도와, 개인을 말살하는 행위들과, 그를 기꺼워하는 행위와…….
그러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어법, 왠지 지구의 백인을 닮은 그 얼굴들, 과일, 새, 꽃, 풀, 탁자, 침대. 공통점과 차이점은 이토록이나 많다. 어쩌면 자신의 의지대로 진행되지 않는 자신의 인생마저도.
이곳의 신은 나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 재환은 깨달았다. 이곳의 신은 이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왕에게 자비롭게 한 번의 기회를 준 신 칼라. 신은 왕에게 준 한 번의 기회로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사실 그 모든 것이 존재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인지 그녀인지도 모르는 신은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잔인한 검을 휘두른다. 자신이 그, 혹은 그녀의 어린 백성이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은 영원히 아페네. 영원히 이방인. 신의 안배가 무엇이든 무자비한 저울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만을 고귀하게.
“저를 다시 찾으시지도 않겠죠?”
“물론.”
“그럼 제가 할 일은 뭐죠?”
“아, 아페네, 이제라도 알아들으시니 편하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알레스티아가 중얼거렸다. 재환은 왠지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이 쉬운 것 하나 못 알아듣다니, 하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저희는 아페네의 재능을 찾아 드릴 겁니다. 전하께서 아페네와 혼인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퇴궐하시게 될 것은 당연지사니까요. 물론 이는 올가 백작님과 저의 생각입니다. 하여간 퇴궐하신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 왕국에 기여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페네, 당신의 능력은 전하의 명성과도 결부되니 꼭 그리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일단, 아마도……. 아페네의 몸을 보니 전하의 호위기사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군요.”
알레스티아가 재환의 몸을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학자나 신관, 마법사, 술사 등 여러 가지의 재능 중 단 한 가지라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시험해 보는 겁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학자의 자질은 충분하신 것 같군요.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만……. 학자는 많습니다, 아페네.”
“많다는 건?”
“많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말하기 쉬운 직함입니다. 아페네께서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내시기 전까지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그래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레스티아가 말했다. 재환은 신관이니, 마법사이니, 술사이니 하는 단어들을 이질감에 곱씹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혼인에 관해서는 사실 준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요?”
“후궁의 정치적 권한이 전무합니다. 그리고 후궁은 그저 전하께서 진짜 반려를 맞이하기 전에 전하의 상대들의 거처를 뜻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후궁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고 그 누구도 그것에 관해 왈가왈부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일을 잡아 신방을 차리고 아페네께서는 전하를 기다리시는 것이 혼례의 전부입니다.”
“다행인가요?”
“네. 그 길일이 일주일밖에는 남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렇군요.”
모두 행(幸)이군요. 네. 행(幸)입니다.
“역사서와 철학서를 좋아하시는 듯한데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 이제는 과학 관련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혹은 제가 가지게 될 직업에 관한 책도 있나요?”
“네. 물론입니다, 아페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네, 명민하신 아페네.”
결국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재환은 책을 손에 쥐었다. 인정해야 한다.
“아페네는 모두 능력이 있나요?”
“아니요. 말씀드렸다시피, 어렵습니다. 그래도 발생 빈도는 훨씬 높죠. 아무래도 신 칼라께서 안배하시고 왕을 위해 보내는 자들이니 어느 정도 기여를 합니다. 학자로 성공한 아페네도 많고, 아, 이번 은빛 코끼리 아쉬뚱에게 온 아페네는 토목사업으로 유명하더군요. 운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답니다.”
“그럼 그마저도 없다면?”
알레스티아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 전제이지만, 반려가 되십니다. 물론 반려는 아페네께서 마법사이든 신관이든 그 무엇인가의 능력이 있으시든 관계없이 전하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그도 아니면?”
“글쎄요.”
그런 전례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알레스티아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럼 하실 말씀은 다 하신 건가요?”
“네―가 아니라, 아페네, 이제부터는 그 존대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저와 시녀들의 말투를 따라 하시는 것 같은데, 그는 전하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왜요?”
“왜요가 아니라 왜입니다, 아페네. 다시 말씀하세요.”
“……왜?”
“물론, 당신은 고귀한 아페네니까요.”
“여기서는 고귀한 사람을 이렇게 취급하나요?”
“말씀을 낮추세요, 아페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은 저희의 영원하실 왕, 메히온 전하를 위해 안배되어 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와 신분은 오직 메히온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하하…….”
재환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레스티아는 그런 재환을 힐끔 본 뒤에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치웠다.
“그럼 저녁때 식사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아페네.”
재환은 알레스티아가 방 밖으로 나갈 때까지 응시한 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물의 몸짓은 당연 거인에게는 인지조차 불가하니.


존대를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재환이 말을 익힌 것은 알레스티아가 말했듯이 전적으로 알레스티아와 시녀들의 말을 종합하여 따라한 것으로, 재환이 익숙하고 오로지 아는 것은 존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알레스티아보다는 시녀들의 말투에 가까웠다. 시녀들보다는 알레스티아가 재환과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했지만, 알레스티아와 재환의 일과는 서로 같은 공간에서 무시를 하며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연한 결과로, 재환은 알레스티아가 없을 때 재환의 방에 들어와 청소와 온갖 잡무를 하면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시녀의 말투가 귀에 더 익었고, 그를 차용한 것이었다.
알레스티아는 그런 재환을 위해서 하대를 가르쳐 주었는데, 재환이 쓰는 하대를 듣는 시녀들과 알레스티아의 미묘한 표정은 하대가 자신에게 크게 어울리는 말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여봐라? 내게 이것을 줄 수 없느냐?”
“아뇨, ‘여봐라’는 그렇게 ‘저기요?’ 부르듯이 쓰는 말투가 아닙니다. 그리고 너무, 음……. 정석대로 배우셨나 봅니다.”
알레스티아는 매우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시녀들 또한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고 알레스티아, 재환의 교육담당 본인은 재환을 어떻게 이끌지에 관한 고뇌가 이유였다.
물론 재환은 훌륭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훌륭하다 못해 너무나 정확한 나머지 재환이 흡수한 모든 것들은 모형처럼 나타났다. 살아 있는 말씨는 온데간데없고 죽은 고대 언어처럼 차고 딱딱하게. 게다가 알레스티아가 위신을 신경 쓴 나머지 반쯤은 고어(古語)투인데다가 표정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고역이었다.
“참 곤란합니다. 저번의 존대는 시녀들과 비슷해서 계집애 같고, 해체로 하면 너무 애 같고, 하게체는 너무 딱딱하군요.”
재환은 우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혼례일은 차일피일 다가와 모레이고, 자신은 평어체 하나를 구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레스티아는 피곤하다는 듯이, 재환이 고귀하다는 스스로의 말을 반하듯, 무례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시녀들은 처음에는 동정하는 눈치였으나 이 수업을 시작하고서는 웃지 못해 안달이었다. 피로하다.
“그럼 그냥 존댓말을 쓰면 안 되는가? 알레스티아처럼.”
“저는 본디 북쪽의 회색 늑대 영지와의 경계 쪽 사람이여서 사실 완전한 왕실어 구사가 아닙니다. 저를 따라하심은 체면상 조금 어렵습니다.”
“그럼 완전히 왕실어로는?”
“음. 전하께는 그리 할 필요성이 있겠지만……. 아, 귀족가 영식과 같이 구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알레스티아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귀족들은 보통 그러니까요. 그 말에 재환이 답답하던 평어체를 포기하고 다시 존대로 물어봤다. 이번에는 알레스티아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만 지었을 뿐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그럼 처음부터는 왜 안 하고요?”
“음, 제가 그래도 어릴 때 교육 받은 것 때문에 환상이 있던지라.”
“네?”
“그러니까, 아페네. 저뿐만 아니라 왕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아페네를 신성하게 여깁니다. 물론, 저와 올가 백작은 정진정명하게 왕당파에 현실주의자인지라 아페네, 당신을 퍽 존경하고 경외하는 눈치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저희는 아페네를 일개 개인으로 봅니다. 하지만 몇몇 신실한 귀족 늙은이들은 아페네를 아직도 신의 사자라고 굳게 믿고 있죠. 아페네가 왕국 내의 최고 제사장이 된 전적 또한 몇 번 있으니 아직도 그런 인식이 만연하다는 말입니다.”
“그게 왜요?”
“그러니까, 제가 아페네 당신을 일개 개인에 범인이라 볼지라도, 정도는 다르지만 저와 올가 백작, 심지어 전하께서도 아페네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신성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귀족의 어휘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죠. 제가 고어(古語)투를 아페네께 가르쳐 드린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저도 일개 신민이군요.”
아무리 교육받았다고 해도 말입니다. 알레스티아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뒤 재환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럼 그것으로 다시 시작하지요.”


재환이 결국 적절한 언어를 쓰게 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알레스티아는 그 성공에 언제나처럼 ‘명민하십니다.’를 말하지 못하고 시녀에게 일임을 했는데, 혼례식이 바로 내일이라 예복 준비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재환은 적절한 언어 구사를 한다는 것을 시녀에게 통과 받고나서 최근 받은 마법사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아무리 읽어도 뜬 구름 잡는 소리로만 느껴졌다. 마력이니 마정석이니, 모두 판타지 소설에서만 나올 것 같은.
하지만 재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페네도 아페네 나름이었다. 마법사나 술사가 되면 왕성 외곽에 있는 마법사의 탑이나 술사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왕실에 등록하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학자로서도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하면 왕립 중앙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할 수도 있었으나 그 방법은 너무 느렸다. 재환은 그저 빨리 이 공간에서 나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마법과 비의와 진실과 거짓들에게 익숙하지 못한 재환이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어 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도와준다던 알레스티아는 혼례복을 맞추기 위해 의상 담당을 닦달하러 갔고 주위에는 시녀들뿐이었는데, 하급 귀족의 딸이었지만 다들 ‘마법사나 술사는 마탑이나 술사의 집에만 있는 존재고 자신은 왕성에 들어와 스쳐본 것이 전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알레스티아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며 장담했지만 재환은 나름대로 불안했다. 아리스페에를 보고서도 기절을 했는데 다시 왕을 본다면 자신이 어떤 반응을 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일평생을 주어진 트랙을 돌면서 살아온 재환은 이러한 낯선 상황들이 너무 두려웠다. 자신이 또 한 번 강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공포……. 이러한 것들은 재환이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도대체 회색 늑대의 아페네는 왜 회색 늑대의 아페네인가? 왕이 사랑하는 아페네가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 재환은 밤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생각했다. 그는 왜 회색 늑대, 그 이름마저도 기억할 수 없는 왕의 아페네인가? 왜 헛된 약속을 하여서 자신을 이곳에 끌어들였는가?
왜, 하필, 나를.
아무리 중얼거려도 바뀌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속에서 화는 쌓이고 또 쌓여서 재환이 밤마다 잠을 설치고 가슴을 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신 칼라로 인해서 온 이방인 재환은 매일 믿지도 않았던 하나님한테 기도했다. 구해 주세요. 딱히 신을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천주교나 개신교여서, 절박한 상황에서 떠오른 신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세계의 기적을 본 재환은 신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유대민족의 신이 이방인인 재환의 청원을 들어줄 리는 없었지만.
아페네, 너는 여기서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