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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언 (3화)


“아페네, 씻으셔야죠.”
시녀가 재환에게 목욕을 할 것을 종용했다. 재환은 수치도 모른 채 시녀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며 생각했다.
너도 불행했으면 좋겠다.
혼례는 재환의 생각보다는 간단하게 끝났다. 재환이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치장을 하고 신방에 앉았을 때에 재환은 긴장 때문에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화려한 방과 불빛들 온갖 신성한 붉은 색으로 치장된 방.
울음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두려울 뿐. 앞일은 한 치도 알 수가 없고 다만 아는 것은 왕을 만나게 된다는 것. 전하는 당신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재환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던 그 말은 지금 그때의 빛을 잃은 채 조약돌이 되어서 데굴데굴 굴러갔다.
심장 소리는 너무나 컸다. 재환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자율신경계가 지배하는 심장은 재환의 의지를 끝내 따라주지 않았다. 아, 나를 구원하소서. 의미 없는 말들만 재환이 쥐어 잡을 수 있는 모든 것.
시간은 해를 싣고 운명을 향해 달려가는 파에톤의 마차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사이에 재환은 생기를 조금 되찾았다. 밤은 깊어 가고 기름을 채운 등과 초 또한 점점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오지 않는다. 이보다 기쁜 어절은 없다. 재환은 이불도 덮지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지 않을 왕을 반겼다. 구원하소서. 재환은 다시 기도했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신은 이방인인 재환의 청원을 용서치 아니하니.
벌컥-
문 열리는 소리는 재환의 들숨과 날숨을 순식간에 앗아 갔다. 발소리는 재환이 가진 근육에 대한 통제를 앗아 갔다. 존재는 재환의 모든 것을 앗아 간다.
“아페네.”
“…….”
“아페네.”
“…….”
“귀머거리인가? 아페네?”
“네, 네? 아, 아, 아, 니요.”
“우스운 꼴이군.”
왕에게는 어떠한 분노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재환은 전번의 분노를 그대로 왼쪽 새끼손가락에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분노는 어딘가에 붙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불빛이 일렁이며 지나가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스운 꼴이야.”
“…….”
“입 다물고 지내. 네가 뭘 하든지 상관은 하지 않는다.”
“…….”
“말썽만 피우지 말고.”
“…….”
“조용히.”
“…….”
재환은 자꾸만 헛숨을 들이켰다. 왕은 그런 재환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나가 버렸다. 효용은 없다. 왕이 나가는 모습을 재환은 고개를 살짝 들어 흘낏 쳐다보았다. 붉은색이 일렁이는 방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불꽃. 문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고 재환은 침대에 쓰러져 헐떡였다.
왕이 사라지자 왕이 앗아 갔던 모든 것들이 재환에게 돌아왔다. 가위에 눌린 듯이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았던 손가락은 그제야 제 구실을 하며 움직여졌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왕은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재환의 퇴궐을 약속했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그의 마음에 달렸지만 그래도 재환은 그 희망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어리석지만 재환은 신방에 누워서 내일을 그렸다. 그래, 내일은 알레스티아에게 내게 어떠한 재능이 있는지 물어보고 찾자. 그러면 왕은 흔쾌히는 아니더라도 나를 어디론가 보내 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가진 보석 몇 개를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알레스티아는 잠시 고민해 보다가 허락해 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그것들을 들고 아주 멀리는 아니더라도 왕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 것이다. 왕성이 있는 쪽으로는 침도 뱉지 아니하고선. 마탑이나 술사의 집 같은 곳이 아니고 평생 결혼할 수 없다는 신전의 전속 사제마저 좋다. 자식이나 아내를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다. 그냥 이곳에서 멀리…….
재환은 긴장이 풀린 충격으로 금세 잠이 들었다. 어리석은 꿈을 꾸면서.
아침에 일어나니 시녀들이 갈아입을 옷과 욕조를 가져왔다.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기며 씻고 나니 시녀 하나가 알레스티아가 응접실에 있다는 말을 전해 왔다. 재환은 우울한 몸짓으로 알레스티아에게 다가갔다. 알레스티아는 그런 재환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허락을 받은 뒤 앉았다.
“이제 여기가 아페네의 방입니다. 본래는 전하의 상대분들이 지내는 곳이지만 전하께서는 본디 그런 것들을 싫어하십니다. 왕실의 돈이 들어가니까요. 그러므로, 이 궁을 쓰는 것은 아페네 혼자이십니다. 기뻐하십시오.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아, 시녀들에게 말은 들었습니다. 이제 적절하게 언어를 구사하실 수 있으시다고요. 역시 명민하십니다, 아페네.”
알레스티아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큰 고비를 넘었다는 기색이었다.
“혹시 불편하시거나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내 방의 붉은색 장식을 치워 주면 좋겠어. 눈이 피로하니.”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아페네의 눈 건강은 신관이 걱정할 수준이더군요.”
녹색과 푸른색 계통으로 다시 꾸밀까요? 그래. 재환은 피로하다는 듯이 눈가를 문질렀다. 알레스티아는 그 모습을 보고선 시녀들에게 장식들을 바꾸고 침실정리를 하라고 명령했다.
“일단 예절을 담당할 선생을 부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배워야 하실 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재능은 말입니다, 아페네, 아마도 그 또한 적절한 사람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좋습니다. 그러면 찾는 대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알레스티아는 재환에게 정중하게 허락을 구한 후 일어났다. 시녀들은 바지런히 장식품들을 날랐고 재환은 그대로 응접실 탁자에 앉아 촛대를 나르던 시녀에게 자신이 읽던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시녀가 들고 오자 재환은 그 책을 탁자에 펴 놓고선 읽는 시늉을 했다.
개미떼처럼 움직인다. 하하 호호. 무엇이 그렇게 재미난지. 재환은 책장을 펄럭였다.

……그리하여 모든 운명에 반항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는 견유학파와는 유사하지만 견해를 달리하는데, 그들은 그러한 운명에 몸을 온전히 맡기다 못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손상시키지만 우리 학파는……

애써 읽으려던 책에는 그저 쓸모없는 소리만 가득하다. 다른 배울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알레스티아가 가져온 과학과 수학에 관련된 책은 재환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과학책에는 원소가 어쩌니, 만물이 사원소 중 물에서 나왔다느니, 불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소리만 가득했고, 수학책은 재환이 제일 싫어하던 작도만 가득했다.
지금 새로 읽으려던 철학책은 이러니저러니 물어뜯는 내용 외에는 별 볼 것이 없었다. 열 권을 넘게 읽었는데 견유학파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흥미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도 식었다.
책을 그만 읽고 싶다. 그렇지만 재환이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는 것밖에는 없었다. 정원에 나가 보고 싶었으나 알레스티아에게 거절당한 지 오래였다.
혹시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요즘 재환은 식욕도 무엇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식욕은 있으나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샐러드나 과일을 먹을 따름이었다. 배가 고프면 준비해 온 오리 구이나 멧돼지 구이 따위 대신 야채와 과일을 양껏 먹었다. 알레스티아는 그런 재환을 보면서, 아페네, 요정이라도 되실 생각이십니까? 하고 물었지만 재환은 웃으면서 기름진 것이 안 넘어가서. 하고 대답했다.
바깥엔 나갈 수도 없고 재환과 말동무를 할 이는 더더욱 없었다. 시녀들은 묻는 말에 대답을 할 뿐이고 알레스티아는 제 할 말만 했다. 모두 합용병서였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따로 놀았다.
“아페네. 침실 재정비를 마쳤습니다.”
재환은 그 소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들어가니 이상한 장식품들은 모두 치워져 있고 녹색 계열의 은은한 가구들이 재환의 불안정한 정서를 가라앉혔다.
재환은 원래 세계에서는 법 없이도 살 정도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인사였으나, 요즘 들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누가 지적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시녀들은 죄가 없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이 나라의 왕이다. 그러나 알레스티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심화는 속에서 불꽃도 되지 못한 채 재로 사그라진다. 그러나 불씨는 언젠가 불붙을 것이다. 재환은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재환은 창가로 다가갔다. 후궁전의 창은 재환이 있던 별궁의 창과 달랐다. 별궁은 마치 누군가를 숨기려고 하듯이…… 철창으로 꼭꼭 잠겨 있었으나 지금 재환의 방의 창은 마음대로 열 수 있었으며 정원뿐만 아니라 저 멀리 이 시대의 기술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푸른 탑마저도 보였다. 재환이 원래 있던 별궁에서는 바로 앞에 있는 다른 궁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고, 재환의 방에서는 아예 방향이 달라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재환은 마침 과일과 간식거리를 가져온 시녀를 불렀다.
“저기, 저 탑은 뭐지?”
“마탑이에요. 마법사와 허락받은 일부 고위 귀족만 왕래가 용납 가능한 곳이죠.”
재환은 높인 솟은 탑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피사의 사탑보다는 조금 더 올곧게 서 있는 그 탑은 커다란 가시를 지면에 박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신이 벼락을 땅 위에 박제했으면 바로 저것이리라.
“저희도 저것이 어떻게 이 땅에 생겼는지는 몰라요. 그저 신 칼라와 관련된 옛 고대 유물이라는 것밖에요.”
신의 손길은 이렇게 구석구석 대륙에 닿아 있다. 재환은 다시 한 번 신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했다. 자신은 정녕 이 세계를 나가지 못할 것이다.


알레스티아가 데려온 예절 선생은, 자신의 이름은 갈레스티온 베레테뒤만이며 반테일 자작이라고 소개했다. 적갈색을 띤 콧수염이 인상적인 자였다. 재환은 처음에는 그의 불그스름한 머리색과 눈을 경계했으나 꼬장꼬장하게 생긴 생김새와는 정반대로 그는 재환에게 매우 친절했다.
“아페네, 뵙게 되어서 매우 영광입니다.”
“나 또한.”
“오늘부터 붉은 사자 영지의 예의범절에 관하여 알려 드리겠습니다. 분명 아페네가 있던 곳과는 차이가 있을 테니 유익하실 것입니다.”
반테일 자작은 재환의 생활 습관부터 지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앉을 때는 허리를 세우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이며 고개는 약간 당기고, 말할 때는 어찌하며 웃을 때는 어찌하고…….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마저도 반테일 자작의 손을 거쳤다.
재환은 몸 쓰는 일은 잘 못하는 편이었지만 훌륭한 학생이었기에 반테일 자작이 몇 번 자세를 직접 보여 주고 교정해 주자 금세 알아채고 따라 했다. 반테일 자작은 금방 따라오는 재환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알아채고선 휴식을 권했다.
“그러고 보니, 아페네, 아십니까? 저는 정말 아페네를 보길 고대했습니다. 저는 곧 늙어 버리지만 전하는 아니시니 제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전하의 아페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과 다른 사람들은 수명이 다른가?”
“네, 존엄하신 붉은 사자께서는, 물론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신 칼라의 예속된 종이니까요. 사실, 아페네께서도 수명이 다르십니다.”
“뭐라고?”
“아, 이런 불경한 자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설명이란 다 제 좋을 것들만 했을 겁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이니까요, 아페네.”
반테일 자작이 작게 분노했다. 그러고선 재환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페네는 왕 메히온 전하를 위해 안배된 몸. 그러기에 세례를 받아 수명이 늘어나신 전하와 비슷한 몸이 되셨을 것입니다. 수명도 늘고 병도 잘 걸리지 않고 죽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페네께서는 당신이 전에 살던 곳에서 예상하는 수명이 그 무엇이었든지, 여기서는 전하와 함께하실 겁니다.”
“아.”
재환는 미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럼 얼마나 살아야 하는 거지?
“분노하십시오, 아페네. 그러셔도 됩니다. 다들 불민한 자들입니다.”
재환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반테일 자작이 재환에게 분노하라고 말했지만 이곳에서 지낸 근 몇 달간 재환은 분노도, 슬픔도, 절망도 속으로 삭여야만 했었고, 그러한 방식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아페네와는 다르게 조금 어리십니다. 물론 아페네께서도 어리시긴 하지만 전하께서는 더더욱 그러시지요. 왜냐면 어릴 적부터 세례를 받으신 터라 정신적으로 늦되십니다. 물론 영민하신 탓에 잘 해내고 계시지만.”
재환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짐승 같은 신음성을 내질렀다. 어리다고? 그 흉흉한 육체를 가지고도. 이 말의 의미는 반테일 자작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명백했다. 어리니 어르고 달래라는 것이거나 아니면 용납하라는. 재환이 몸을 떨었다. 웃기지 마.
“또 내가 모르는 것은 없나?”
“저도 모릅니다, 아페네. 그들이 아페네께 무엇을 알려 드렸는지를 모르니까요.”
반테일 자작이 콧수염을 쓰다듬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재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 불민한 자들은 믿지 마소서, 아페네. 혹여나 의문점이 있으신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왕당파이지만 신 칼라의 두려움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자들입니다. 두렵게도. 재환은 자신에게 친근하게 구는 자작에게 경계심이 많이 희석된 채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반테일 자작은 재환에게 허락을 구하고 일어섰다.
“그럼 오늘 배우신 대로 인사를 하고 수업을 끝마치겠습니다.”
“좋아.”
자작과 재환은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자작은 재환의 인사를 내심 기뻐하며 재환에게 자신은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할 것임을 상기시킨 후 방을 빠져나갔다.
자작이 나간 이후 재환은 생각에 잠겼다. 자작은 알레스티아가 말한 ‘신실한 귀족 늙은이들’에 속한 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자작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내는 거지? 재환은 생각에 잠겼다가 곧 머리를 흔들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분노도 피곤하고, 절망도 피곤하고, 생각도 피곤하다. 자작은 자신에게 분노하라 충동질했지만 자신이 분노하여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왕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오리 깃털 베개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던지는 것?
어리석은 반항들. 재환은 아까 배운 교육들이 무색하게 탁자에 몸을 기대 엎드렸다. 다과로 들여진 과자의 달큼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아, 분노가 가슴을 갉아 먹는다. 다른 생각을 해야 하지만 왕의 목소리가 손가락을 맴돈다. 입 다물고 지내.
자신이 언제 입 다물고 지내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재환의 인생은 언제나 말 잘 듣는 학생; 경주마; 개. 이러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온당했다. 그것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왕의 효용 없는 첨언이 없더라도.
아, 분노가 가슴께를 맴돈다. 재환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깨부수고 싶은 충동이 재환을 흔들었지만 그런 것들은 한 번도 재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역시나 재환의 인생에 어울리는 호칭은 길들여진 짐승; 한 번도 주인의 발을 물어 본 적 없는 개; 도살장의 소. 재환은 파괴하는 것 대신 파괴당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아페네, 그런 곳에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알레스티아가 재환을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재환은 어지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재환 또한 당혹스럽게도 알레스티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붉은 머리의 젊은 남자와 함께였다.
“아.”
“무례를. 죄송합니다, 아페네.”
“아, 아, 그래.”
재환은 말을 더듬었다. 왕의 머리처럼 태양을 치장한 듯한 주홍과 붉은색과 노랑들의 향연은 아니었지만 붉은 머리임은 확실했다. 어쩌면 왕의 핏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가정만으로도 재환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남자는 그 특유의 녹색 눈으로 재환을 직시하면서 웃었다. 재환은 그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긴장했다.
불길한 운명은 재환에게 예고도 없이 다가오나, 모든 것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저 두려운 것과 염려해야 할 것이 가득한 세상에서, 웃는 자는 저자뿐.
자신에게 친근하게 구는 자작마저도 웃지는 않았다. 시녀들은 웃었으나 그것은 자기들끼리의 대화에서 국한된 것일 뿐 자신을 대할 때는 언제나 기계적인 표정이었다. 알레스티아는 말할 것도 없었고, 여기서 말하기도 역겹게도 자신의 남편이라고 명명된 왕, 메히온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 그는 당연하게 웃지 않았다. 언제나 마이너스적인 감정들.
“뵙게 되어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아페네. 저는 아페네 당신의 신성한 재능을 찾기 위해 온, 붉은 사자의 외사촌 되는 알페네온 에페튀안입니다.”
“나 또한.”
다시 한번 웃는다. 이번에는 재환이 조금 웃었다. 처음으로 이곳 사람들에게 내보인 웃음이었다. 알레스티아는 그 모양을 보면서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불길한 운명은 옆에서 지켜보는 자에게는 더욱 더 잘 보이는 법이었다.
재환은 그런 알레스티아도 모른 채 알페네온의 녹색 눈동자를 보았다. 알페네온은 재차 웃었다. 알레스티아는 다시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아페네의 운명은 알레스티아의 소관이 아니었다.
“아페네. 들으셨다시피, 이분은 전하의 외사촌 되시는 알페네온 에페튀안입니다. 왕녀이시자 전대 붉은 사자의 누이동생 되시는 이시아 단히 아페리티 카리튀페에의 아들이십니다.”
“반가워.”
“네, 그저 저를 알페네온 경이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페네온 경께서는 마검사이십니다, 아페네. 붉은 사자 영지 최대의 인재이십니다. 이런 분을 아페네의 교사로 내리신 전하의 은혜에 감읍하세요.”
“……너무 감사드린다고 전해 드려.”
“알레스티아. 나머지는 내가 직접 전해 드릴 테니 그대는 나가 있도록.”
알페네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레스티아는 말에 잠시 다시, 입매를 꾹 다물더니, 알겠습니다, 하고 재환에게 허락을 구한 뒤 총총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재환은 그 모습에서 알레스티아의 불편한 심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마검사가 뭐지?”
“마검사는 마법과 검을 같이 쓰는 전투 인력을 말하는 겁니다, 아페네. 알레스티아는 아페네가 검에 대한 소질이 전연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기초 훈련은 받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방에서 나갈 수가 없어.”
“이런.”
알페네온이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그러하다면 그 문제는 제가 전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쨌든 생명 활동을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운동은 하셔야지 건강에 도움이 되실 테니까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제가 반대 쪽 의자를 차지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녹색 눈이 웃었다.
“아, 내 불찰이야. 허락하지.”
재환이 아직까지 서 있던 알페네온을 발견하고 놀라 허둥지둥 말했다.
“아닙니다. 감히 먼저 청한 저의 잘못일 따름입니다.”
재환은 계속 어색한 상태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에다가 왕의 사촌이었지만 남자는 다정했다. 오늘따라 자신에게 어떤 의도로든지 잘 해 주는 이들만 만난다. 붉은 머리의 그에게는 콧잔등에는 약간의 주근깨마저 있다. 장난기 서린 얼굴이다.
“그럼 아페네, 감히 무엄케도 손을.”
재환이 손을 줘야 할지 망설였다. 아직도 재환은 같은 남자가 역겨웠다. 재환이 망설이는 것을 보면서 알페네온은 그저 기다렸다. 초초하게 굴지도, 재환에게 재촉하지도 않고 그냥 말없이 기다렸다. 재환은 그 모습에 우물쭈물하다가 알페네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환의 생각과는 달리 역겹지는 않았다. 다만 부담스러웠을 뿐.
“저는 지금 아페네의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측정해 드릴 것입니다. 여기 제 손에 있는 마정석의, 정제되지 않은 마력을 아페네께 부어 드릴 것입니다. 아페네가 그를 받아들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정석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재환은 그 파열음에 화들짝 놀라서 알페네온에게 붙잡힌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알페네온의 악력은 예상외로 강했다. 그래서 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손은 잡힌 채 뒤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러난 재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깨닫고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아페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어? 어…… 그러한데?”
“아, 불행하게도 아페네께서는 자질이 없으시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신력이 있는지 알아보거나, 계약할 마수를 찾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뭐지?”
“신전은 속가신관으로써 의탁이 가능하십니다. 물론 혼인도 가능하고, 전속 신관과 달리 차별받는 것도 없으십니다. 다만 신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신력이 있으시다면 전속 신관도 가능하십니다. 다만, 그렇게 되시면 혼인은 하실 수 없습니다. 마수를 찾아보셔야 할 것 같다고 드리는 말씀은 술사가 되시려면 마수와 계약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아페네께서 신력이 없으시다면 좋겠군요. 알페네온이 입을 달싹였다. 재환이 그 말을 듣고 어? 하고 물음을 던졌지만 알페네온은 그냥 웃으며 말을 돌릴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아페네. 저는 다음에 능력 있는 술사와 신관과 함께 오겠습니다.”
허락을 구하고 나가는 알페네온에게 재환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언제 오는 것이지?”
“아, 중앙 신전에 연락을 넣고, 술사의 집에도 양해를 구해야 하니, 나흘 뒤에 오겠습니다.”
아페네,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재환은 그 말에 아쉬움을 느꼈다. 빨리 다시 봤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너무 평화로운 생각이었다. 재환에게 온통 날것으로 다가오는 이 세계에서 이렇게 메르헨적인 생각이란.
분명히 독이 될 텐데.
재환은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아까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멍청한 생각이지만 그랬다.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이 역겨웠던 것이 어제인데.
이것은 모두 몽상이다. 재환은 애써 털어 냈다. 이 세계에 별별 일을 다 겪어서 머리까지 멍청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이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내가, 여기서, 첫눈에,
반할 리
는,
재환에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병신. 병신. 병신. 재환은 자신이 병신이라는 사실을 옛날부터 알았다. 그렇다. 자신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자신을 괴롭혀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잘 해 주면 그 모든 사실을 잊는 병신이었다.
초등학교 때, 악명 높은 선생님이 하나 있었다. 실수로 숙제를 학교에 가지고 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은 자신의 뺨을 때렸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도한 체벌로 허벅지에 피멍이 들게 한 적도 빈번했다. 하지만 나중에 미안하다면서 사탕을 준 사실, 그 단 한 가지 때문에 재환은 그 모든 악행을 잊었었다. 그리고 나중에 중학교를 같이 올라온 같은 반 아이들이 그 선생을 욕하는 것을 잠깐 엿들었을 때 깨달았다. 아, 나는 병신이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잠시 웃어 줬다고 좋아할 이유는 없어야 하는데.
재환은 애써 웃었다. 불길한 운명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찾아올지라도.
이제는 마법사에 대한 책은 버려둔 채, 재환은 ‘신전의 역사’나 ‘술사들의 계약과 그들의 주문’과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책을 온전히 읽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재환은 알페네온이 약속한 나흘째 날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약간의 불안감과 약간의 흥분. 재환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 자신을 다독이려 애썼지만 언제나 그러하지만 재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능은 재환을 충동질했다. 책을 읽었지만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방을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도 해 보고, 저 밖에 보이는 신의 신성, 푸른 탑을 보기도 했지만 재환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흘째 날이 되자 재환의 정서불안은 극에 달했다. 기다리던 날이 되자 재환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재환을 진정시킨 것은 알레스티아의 한마디였다.
“아페네.”
“왜?”
“왜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고, 저와도 상관이 없지만.”
“…….”
“무슨 일이든지 아페네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저, 기다리세요.”
재환은 수긍했다. 하루 종일 재환은 평소처럼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알페네온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