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언 (4화)


약속과는 다르게 알페네온은 약속보다 한 달이 더 돼서야 찾아왔다. 재환은 알페네온에 대한 희망을 버린 채였다. 재환은 다시 무력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예전과 달라진 것은 예절 선생이라는 반테일 자작이 꼬박꼬박 찾아오며 재환에게 잡다한 가십을 늘어놓은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알페네온이 문득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신관도 술사도 없었다.
“아페네, 무례하게도 약속된 날짜에 찾아뵈지 못한 점 면구스럽습니다.”
알페네온은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 알페네온에게는 못 보던 상처가 몇몇 늘은 채였다. 재환은 조그맣게 용서하지, 하는 것밖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려고? 왕의 외사촌에게? 그저 자신은 헛된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 들뜸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재환의 어리석음이었다.
“상처가 있는데.”
“그게……. 저도 미처 예상치 못하게, 전하의 특명을 받고 잠시 도성을 나갔었습니다. 제가 늦은 연유도 그러한 것입니다. 불민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쩔 수 없지. 일어나는 게 좋겠는데.”
“감사드립니다, 아페네.”
알페네온은 허리를 들면서 씩 웃었다. 다소 심각했던 분위기가 풀리는 듯했다. 재환은 그 미소에 어쩔 수 없이, 모든 화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재환은 애써 그의 변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왕의 특명이라는데 그가 어찌했어야 한다는 것인가? 재환의 생각은 긍정적으로 끝없이 나아갔다. 그도 분명 자신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락을 하기에는 왕의 특명이 새어 나갈 수도 있고……. 뭣도 모르면서 생각은.
“그래서 술사와 신관의 수배가 늦어졌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틀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좋아. 난 상관없어.”
재환의 목소리가 반 옥타브 올라갔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알페네온이 다시 한번 웃었다. 웃음이 헤픈 남자다. 재환은 수치심에 가슴을 진정시켰다. 재환은 애써 생각 한다: 저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베풀어지는 행복. 그것으로 연명해 나가는 생은 비참하거나 감사하거나. 이것은 다만 부유한 사람이 빈자들에게 베푸는 구호 물품과 같은 것.
그러나 재환은 그것이 목숨 줄이라도 된 것처럼 움켜쥔다. 모래처럼 빠져나갈 것인가, 아니면 바닷물처럼 갈증을 심화시켜 죽음을 부를 것인가.
또 아니면 나를 구원,
해 줄 리 없다.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간다. 모두 신 칼라의 자손. 이자는 왕의 외사촌이다. 재환은 다시 자신의 마음의 고삐를 당긴다. 아, 그것이 달려 나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억센 이성이 고삐를 당긴다. 어차피 이자는 왕의 명령으로 온 것이다. 신성의 핏줄. 왕에 대한 의무는 이 모든 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 자신은 그것들에게 무력하게 굴복했다.
자신의 이름은 저 세상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명예와 멍에. 공부는 영광이었고 아페네는 신성이나 모두들 자신을 고분고분한 짐승으로 만들었다. 자신은 어디서나 채찍질 당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자신이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 재환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알페네온이 웃고, 재환의 시야는 흐려진다.
“그러하면, 저는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재환의 목 끝까지 가지 말라는 소리가 차오른다. 마치 그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때, 아페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레스티아의 목소리. 망상은 끝이 난다.
“허락하지. 가 보도록.”
“그럼, 송구하게도.”
알페네온이 문을 열고 나간다. 재환이 마지막으로 말을 뱉었다.
“상처가 심한 것 같던데.”
“…….”
“신관에게 먼저 들르는 게 좋을 거 같군.”
“면구스럽습니다.”
남자가 나갔다. 재환은 자괴감에 빠졌다. 아, 결국 참지 못하고 걱정의 말을 던졌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웃기지만 자신은 외사촌의 부인이다. 역겨워. 아니, 어쩌면 인사치레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괴로울 것 같다. 생각이 마음대로 번져 나간다. 마치 먹물을 한지에 가득 흩뿌린 것만 같다. 먹물은 닥나무 종이의 결을 타고 파고든다. 혈관에 퍼지는 피와 같이.
고통스럽다.
재환은 의자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뉴런 단위로 정신이 조각조각 잘려 나가는 기분이다. 이것은 호르몬에 대한 생리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애써 다독인다. 정말로 자신은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알페네온은 그대로 재환의 방을 나와 본궁으로 향했다. 재환이 신관에게 들르라고 했지만 전번에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것이 마음에 걸려 왕에게 먼저 들르는 대신 재환부터 만난 참이었다. 더 이상의 지체는 허용되지 않았다. 알페네온은 재환에게 꽤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외사촌이자 친우의 만행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옆구리가 쓰리다. 검은 숲에 접근하다가 암습을 받았을 때 생긴 상처였다. 그 때문에 검은 숲 초반에서 말을 돌려야 했다.
“이제 오는 거냐?”
“뭐, 그렇지.”
집무실에 들어가니 붉은색의 사자가 으르렁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시였다. 알페네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빼 물었으나 메히온의 저지에 그 시도가 무산되었다.
“연초 피우지 마. 집무실에 연초 냄새 배는 건 끔찍하다고 말했을 텐데.”
“아, 넌 싫어하지.”
이번에 서대륙에서 들어온 주요 수입 물품인데. 즐길 줄 모르다니. 알페네온이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런 알페네온을 보면서 메히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네 잘난 연초 피울 시간은 있고, 검은 숲 갈 시간은 없고?”
“암습이라니까. 상처 보여 줘?”
“됐어. 네 얼굴 꼴 보니 잘 알겠군.”
메히온이 피곤하다는 듯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알페네온에게 어서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알페네온은 그런 손짓을 무시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페네를 아주 방 안에 가둬 두었던데?”
“네가 상관할 부분은 아닐 텐데.”
“아페네는 근육이 하나도 없다고. 저렇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체력이 약해져서 데카리아 풍토병 따위에 걸려 죽어 나자빠질 게 분명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런 태도는 곤란하다고. 알페네온이 한숨을 쉬었다. 이봐, 전하.
“네 위신을 세우라고. 다른 왕들이 네가 아페네를 이런 취급하는 줄 알면 어떤 표정일 거 같아? 그게 싫다면 회색 늑대의 아페네를 생각…….”
쾅-
알페네온의 머리 옆으로 도장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귀 끝이 스쳐서 따끔따끔하더니 결국 피가 나는 것을 확인한 알페네온이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입 다물어.”
“귀 찢어졌잖아.”
“자업자득이다.”
“그래도 아페네가 죽지는 않게 해야지.”
“닥치라고 했지.”
“알았어, 나간다.”
여기서는 연초도 못 피우는데, 나도 나갈 거야. 알페네온이 파이프를 품속에 다시 넣더니 옆구리를 짚고선 일어났다. 응급처치 했는데 피가 다시 흐르네. 다시 여상스럽게 말하고선 짧게 쾅, 문 닫는 소리.
알페네온이 나간 문을 쏘아보고 있던 메히온이 치미는 화로 시근덕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밖으로 나서는 메히온의 빠른 발걸음에 시종이 다급하게 따라 붙었다.

재환이 난폭한 방문을 받은 것은 때늦은 점심으로 과일을 먹고 있을 참이었다. 알레스티아가 재환에게 요정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재환은 여전히 극소량의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을 섭취할 뿐이었다. 그나마 알레스티아를 안심시킨 것은 과일이나 샐러드라도 꾸준히 먹는 것이었다.
고기는 누린내가 나서 재환은 입에 대지 못했다. 재환이 그 외에 잘 먹는 것이라면 대륙 동쪽에서 키우는 곡식이었는데, 쌀과 가장 비슷한 음식이었다. 좀 더 푸슬푸슬하고 누랬지만 분명했다. 그렇지만 동대륙에서 해로(海路)로 수입해 오는 와중에 값이 금값보다 더 해져 부유한 귀족들 중에서도 향신료도 아닌 이 특이한 곡식을 먹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므로 왕의 눈엣가시인 아페네가 누리기에는 과한 사치이기에 재환이 쌀을 보는 일은 그가 아파 앓아누울 때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어색한 손놀림으로 재환은 과일을 집어 들었다. 듣다 보니 회색늑대의 영지에서는 포크를 쓰는 것 같았는데 아직도 이곳은 문명의 혜택은 어림도 없었다. 반테일 자작에게 식사예절을 듣긴 들었지만 아직도 우아하게 집으라느니, 몇 번째 손가락으로 소스를 찍으라느니 하는 말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손놀림은 결국 시끄러운 소리에 음식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메히온 전하. 메히온 전하!”
“입 닥쳐! 난 아페네를 보러 왔어. 아페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벌컥 열리고 재환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남자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 남자는 무례하게 쳐들어와서 재환의 머리채를 바로 휘어잡았다. 그리고 곧장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뒤따라서 들어온 아리스페에는 아이고, 하는 탄식을 내뱉었고, 재환을 감시하고 있던 알레스티아는 뒤로 살짝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악!”
“아페네, 내가,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 말했을 텐데.”
“조용, 조, 조용히, 있, 었…….”
재환이 헉헉거렸다. 온전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했지만 눈앞에 갑자기 닥친 공포는 재환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재환은 갑자기 내린 재앙에 혀가 딱딱한 뼈로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절을 말하기도, 음절을 말하기도 힘들었다. 공포는 다시 재환의 뺨을 쳤다.
“아, 아, 아―”
“발정이라도 났나, 아페네? 내 외사촌에게 알랑거려? 그렇게 아랫도리가 쑤셔서 못 참겠나?”
“아, 아니, 아니, 아, 아니요. 진, 진짜, 아.”
“왜. 그게 아니면 왜 알페네온이 네 걱정을 내게 쪼르르 달려와서 하는 건데? 응? 그새 그 삼류 창녀보다 못한 실력이 나아졌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재환은 그렇게 입 안의 혀를 굴렀다. 그것은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스페에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알레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애써 봐도 성대는 신음성밖에는 내뱉지 못했다. 오로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눈앞의 붉은 공포. 두피를 뜯어 버릴 듯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었지만 재환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부인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것은 부군의 임무이지, 아페네, 미안하게 됐어. 그동안 챙겨 주지 못했으니.”
“아니, 아니, 제발, 아, 제발.”
재환은 놀란 톰슨가젤처럼 탈출을 시도했다. 자신 손목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손목을 뿌리치려다가 결국 억센 손에 귀뺨을 맞았다. 악! 귀가 멍멍하다. 바르작거리며 반항을 했지만 남자의 손은 무자비했다. 용서 없이 내리는 매여. 재환은 어지러운 와중에 생각했다. 어디를 잘못 맞은 거 같은데…….
[너무, 너무, 아, 아파, 아.]
“못 본 사이에 반항이 늘었군, 아페네. 다시 한 번 교육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충분히 맞은 재환은 축 늘어졌다. 아파, 아파. 재환은 살겠다는 본능으로 서툴게 외치던 이곳의 말을 포기하고 중얼거렸다. 유창해진다. 아프다. 어느새 어깨선을 넘은 머리는 재환의 고삐로 쓰기에 알맞았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가 온통 고였다. 앞이 흐릿하다. 광대는 왜 이리 아픈지. 메히온은 재환의 머리채를 끌고 응접실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문 틈사이로 알레스티아가 보인다. 살려 줘. 재환이 입을 뻐끔거렸다. 알레스티아가 문을 완전히 닫았다.
메히온은 재환을 침대에 처박았다. 어느 불꽃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왕이여. 재환은 끈 떨어진 망석중처럼 고개가 꺾인 채 기괴한 자세로 푹신한 오리털 시트에 몸을 묻었다. 재환이 날개를 펄럭인다. 어설프다. 남자는 재환의 날개 죽지를 완고하게 잡았다. 어떠한 반항도 용서치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였다.
고개가 푹신한 베개에 처박힌 재환은 숨 쉬는 것이 어려웠다. 침을 삼키자 입 안에 고인 피가 기관(氣管)을 메웠다. 헉헉. 밭은 숨만 내쉬는 재환을 메히온이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남자는 숨 쉬는 것보다 쉽게 재환의 몸에 멍 자국을 남겼다. 단지 재환의 살점을 악력으로 짓뭉개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재환이 숨을 쉬려고 고개를 들며 온몸을 들썩이자 남자는 천을 찢던 손놀림을 뒤로하고 재환의 머리를 벽에 박았다.
쾅쾅쾅.
세, 네 번쯤 반복하자 재환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 재환은 자신이 숨을 쉬든 말든 상관할 여력이 없었다. 베개에 박힌 머리는 눈뜨기도 어렵다. 남자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재환을 유린했다. 왼쪽 팔은 어깨에서 애초에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거칠게 파고드는 감각에 재환은 영원 같은 순간을 느꼈다.
메히온이 떠난 후 재환은 사흘 밤낮을 앓았다. 알레스티아가 신관을 요구했으나 메히온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재환은 그 열을 고스란히 앓는 수밖에는 없었다. 상처 또한 신관 때문에 발전하지 않은 의술로 어설프게 치료된 채 방치되었다. 게다가 식사 또한 근 몇 달간 부실했던 터라 상처가 낫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열 또한 쉽사리 내려가지 않았다. 알레스티아가 재환에게 뭐라도 먹이려고 했지만 온통 허물어진 입 안은 물마저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앓고 일어난 재환은 전보다 더 생기가 없어 보였다. 탈골된 왼쪽 어깨는 알레스티아가 재환이 앓던 사이 맞춘 지 오래였다. 알레스티아가 알페네온이 정신을 잃은 동안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이미 생명력을 잃은 재환은 그 소식에 미처 기뻐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재환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실은, 메히온이 그날 밤을 기점으로 알레스티아에게, 재환이 다 낫는다면 다시 찾겠다는 기별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약속은 거진 무기한이나 다름없었는데, 메히온이 재환에게 신관을 전연 보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재환의 치료는 거의 자가 치유 능력에 맡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알레스티아는 억지로 영양가가 높은 식사로 바꾸진 않았다. 적당히 섞어서 재환에게 한두 입 먹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전부였다. 재환은 그 정도의 강제에는 반항하지 않고 따랐다. 다만 점점 더 식욕이 떨어져 뼈마디가 보일 정도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사이 알페네온이 재환과 만나려고 했지만 왕의 명령이라는 말과 함께 알페네온은 재환이 사는 궁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되었다. 재환은 점점 나아가는 자신의 몸에 대해 우울해져 있었고 틈틈이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왕을 만난다는 공포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 습관이 된 것은 금방이었다. 손이나 발등, 다리 등을 무거운 촛대로 몇 번이나 짓찢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팔 다리의 멍이 늘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알레스티아에게 걸렸고 위험할 만한 장식들이 모두 치워졌다.
상처는 다 나아가고 예정된 공포는 한 걸음씩 다가왔다. 피할 수 있는 것이란 알레스티아와 시녀들과의 대화밖에는 없었다. 예절 수업은 끊어졌다. 재환이 다쳤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립된 상태에서 재환의 얼굴은 몽고반점과 같은 푸른색에서 하얀 제 색으로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손목에 있던 자국도 사라지고 있었으나 재환의 정신적 외상은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재환의 반응이 전보다 느려졌던 것이다. 알레스티아나 시녀가 조금이라도 작은 목소리로 부르려 치면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아페네.”
“…….”
“아페네!”
“어? 어.”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다니시면 아니 되십니다. 만약 제가 다른 귀족이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하셨어요.”
뭔가 멍해진 표정으로 답하면 알레스티아는 아페네의 몸가짐을 가르치며 혼을 냈고 재환은 주억거렸다. 이제 자해는 손등을 물어뜯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재환이 오직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몸 상태뿐이었다. 회복세를 타고 몸은 점점 더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불길(不吉)이었다.


왕. 영주. 신 칼라의 영도자. 신 칼라의 종.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이곳의 지배자란 그런 식이다. 메히온이 푸른빛의 리큐르를 잔에 따랐다. 벌써 세 병째이다. 분노는 왕의 뇌리를 침식한다. 메히온은 언제나 분노했다. 왜 나는 아페네와 성관계를 맺었는가. 더러운 피. 리큐르가 왕의 목을 적신다.
처음에도 다음에도 그 후에도, 언제나 분노였다. 이 분노라는 놈은 매우 영악하여 순식간에 메히온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아 갔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면 일은 벌어진 이후.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원했으리라. 그럼에도 진절머리 나는 것은 아페네와 성관계를 했다는 것. 상대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하필 아페네라니. 역겨워서. 하지만 아페네는 메히온의 머리를 돌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메히온은 다시 잔을 채웠다. 금색의 잔이 푸른빛과 만나 어색하게 일그러진다. 잔에는 신 칼라의 동물인 자칼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언제나 칼라의 손에서 노는 기분이란. 손으로 자칼의 눈에 박힌 루비를 더듬었다. 메히온은 리큐르를 한 번에 다 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는 날은 고통에 젖어서 잘 수가 없다. 이런 날은 여자도 싫다.
메히온은 의자에서 일어나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면서 애써 생각하는 것들이란ㅡ 새로 온 아페네를 축하하러 오는 다른 왕들과, 아페네와, 그리고 늑대의 영지로 간,
새로운 생각들이 아니다. 메히온은 손에 들고 있던 리큐르를 병째로 한 번에 반쯤 마셨다. 새로운 생각을 하자. 이번 축제는 추수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에 대해 신 칼라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이번에 책정된 예산은 금화 50만 개. 유례 없는 규모이다. 그리고 아페네가 이렇게 빨리 내려오게 된 것에 대한 감사도 겸한다.
푸른 물이 소매 끝에 들었다. 이제 이 옷은 버려야만 한다. 신전에는 금과 은으로 된 포도주 희석 동이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최고 제사장이 나와 기원을 드리겠지. 양과 소, 말 한 마리씩 신 칼라에게 바치게 된다. 아주 최상급의 것들만 도륙한다.
언제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최상급이라고 해서 살아남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항상 칼라는 2급의 아페네만을 보낸다. 가장 깨끗한 곳에 사는 것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환경에 금세 죽어 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등(次等)의 것들도 너무 어설퍼서 자주 죽어 버린다. 그래도 칼라는 죽어도 일급수에 사는 물고기 같은 것은 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어머니는,
새로운 생각을 하자. 리큐르가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부작용인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해 목 부분이 파랗게 물들었다. 붉은 사자라는 위명이 안쓰럽다. 취해서 멍청하게 굴려고 했지만 이 대가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메히온이 고개를 들었다. 후궁이었다. 저것 또한 차등의 것이다. 부르고 싶었던 것은 저것이 아니다. 모두들 차등의 것이지만 매양 다른 것들이 나타난다. 구역질이 밀려온다.
아페네를 생각한다. 아페네는 병신 같았다. 사내새끼면서 사내답지도 못하고 같은 검은 머리, 검은 눈을 하고 있지만 회색 늑대의 아페네보다 멍청하고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다. 할 줄 아는 건 오직 우는 것밖에 없는 멍청한 아페네. 여기 와서 하는 일은 그저 먹고 자는 것밖에는 없다.
은빛 코끼리의 아페네는 운하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맺었고, 흰 호랑이의 아페네는 유명한 검사, 회색 늑대의 아페네는- 다른 것을 둘째치고 회색 늑대에게 후계를 안겨 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페네는 그 삐쩍 꼴은 몸으로 도대체 어떠한 위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저 차등의 것.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숨 쉬는 것뿐. 차라리 사막에 사는 식물들의 몸부림이 좀 더 경외할 만하고 아름답다.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없다지. 애꿎은 마정석 하나만 깨먹었다. 차라리 왜 그를 닮지 않고선.
더 이상 새로운 생각 따윈 나지 않는다. 회색 늑대의 아페네를 듣고 싶다. 메히온은 혼미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듣고 싶다. 정처 없는 발걸음이 휘청거리며 이어졌다.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리큐르 병을 다 비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