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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언 (5화)
재환은 나무 창문 틈으로 숨죽인 채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가 없는 이 세상은, 문명의 이기란 이기는 모두 가지지 않는 이 세상은 나무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문짝으로 창을 열고 닫는 것으로 계폐와 햇빛의 출입을 허락했다.
그런데 이 침실의 나무창은 관리가 잘되어 있는 다른 나무창들과는 다르게 문짝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알레스티아가 그를 발견하고 보수하겠다고 말했으나 재환이 거절했다. 겨울이 오면 어차피 막을 것이다. 그것을 미리 당길 필요는 없었다. 북구의 겨울은 어차피 혹독하니.
언제나 찾아오는 밤은 재환을 외롭고 두려운 모양새로 새벽이 올 때까지 새게 했다. 재환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이국의 밤은 아름다웠으나 염려하는 마음을 재환의 눈앞으로 질질 끌고 와 앞에서 흔들었다. 날이면 찾아오는 고통에, 더 이상 책에 집중하지 못할 때면 잠에 들던 재환은 언제나 대가리를 빳빳이 치켜세운 밤 앞에서는 무력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하나의 위성은 언제나 이 행성을 빙빙 돌면서 중력을 시험했다. 재환은 자신도 위성이어서 지구가 자신을 끌어당겨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외롭다. 이렇게 외로울 바에는 차라리 우주의 먼지가 되어서 떠돌다가 어느 날에는 블랙홀에 삼켜지는 삶이라면 좋으련만. 밤마다 별을 세는 재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오늘도 손톱 끝과 같은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이곳의 위성을 부러워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재환이 미친놈과 같이 떠도는 메히온을 발견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재환은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메히온을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하고선 창을 닫았다. 그것은 반쯤 본능이었다. 누구보다 염려하는 마음은 그렇게 가끔씩 제 신체의 능력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한 능력을 끌어내는 법이었다. 재환은 재빠른 속도와는 다르게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몇 번 숨을 고르다가 겨우 일어나서 밖의 동향을 살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가 너무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다. 눈물도 나오는 것 같지만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 보니 나오지는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눈으로는 계속 메히온을 좇았다. 마치 이것은 공포영화와 같아서, 자신이 눈을 뗀 순간 자신의 뒤로 그가 다가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들개 같은 메히온은 한 손엔 병을 들고 후궁을 노려보다가 금세 가 버렸다. 다리가 풀려서 반쯤 꿇어앉은 자세가 되었다. 재환은 벽에 얼굴을 기댔다. 차가운 냉기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자신은 언제나 송곳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초식동물은 도무지 육식동물의 숨통을 조일 수 없다. 재환은 외피도 없고 발굽도 없고 뿔도 없었다. 먹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상처는 다 나았지만 소식이 없었다. 재환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러한, 심장을 쥐어짜고 희롱하는 방문이라니. 자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을 갔다 오는 분명히 다시 찾지 않는다면서. 눈을 뜨고 일어나면서 알레스티아의 멱살을 잡고 외치고 싶던 말이었다.
하지만 알레스티아의 눈을 본 순간, 재환은 자신의 이빨이 모두 넓적하고 섬유질을 씹기 좋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나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한다. 이런 목숨 개나 줘 버리고 싶다.
그러나 괜한 알페네온의 시도가 자신을 어리석게 만든다. 몸을 추스르는 동안에 몇 번이고 찾아왔다는 알페네온. 골이 부서질 것만 같다. 마치 자신이 어린 계집아이가 된 것 같다. 차라리 요즘 여자애들이 자신보다 더 주체성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거의 유일했던, 고등학교 때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친구, 그 아이가 생각난다. 여자라는 이유로 원통해했던 그 모습. 이를 아득바득 갈며 성공할 것을 다짐했고, 수능 가채점 또한 만점 가까이 받았다. 그에 비해서 재환 자신은 신데렐라만 꿈꾸는 병신 같은 남자애이다. 그 아이가 여기를 왔으면 더 나았으려나. 같잖은 가정은 때려치우자.
재환은 사실 알페네온이 자신을 좋아하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을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다만 동정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런 감정이야 언젠가는 사멸해서 세월과 함께 사장될 것이었다. 원래 그러했다.
그러므로 재환은 알페네온이 그냥 자신을 도망치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생활이야 모르지만 만약 돌아갈 수 없다면 이곳을 탈출하기만 해도 감읍해서 이 개 같은 신 칼라의 발끝이라도 핥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재환은 머리를 푹신한 오리털 베개에 묻었다. 피로 범벅이 되었던 시트는 어느새 치워진 지 오래였다. 두꺼운 이불을 덮어써도 춥고 외롭다. 아무런 정도 없는 반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일까. 창 틈새로 들어온 별빛이 눈을 시리게 했다.
방문은 정식으로 다시,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고 윽박과 폭력이 난무한 그런 방문이 아니었다. 말투는 언제나와 같이 일관되게 무시하는 말투였으나 전에 비해서는 훈훈하다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재환은 누구보다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레스티아는 재환의 뒤에서 비호하듯 서 있었으나 그런 것이 아닌 줄은 재환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은 뻔한데.
“얼굴색이 폈군.”
“모두 전하의 은덕 덕분입니다.”
“일이 있다. 모든 왕이 모일 것이다.”
본래 1년이 된 후에 모든 왕이 아페네를 맞이하는 게 풍습이지. 그 말에 재환은 새삼 시간을 깨달았다. 이곳에 떨어진 지 벌써 1년이나 된 것이다. 지구에서보다 4개월이 많은 이곳에서 1년이라고 하면 16개월이 지났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이룬 것은 손에 꼽혔다. 말이야 어느 정도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재환은 메히온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 채 방황했다. 마치 억지로 증언을 얻어 내는 재판장에 온 것만 같다.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고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너는 내 아페네이자 비로서 모자람 없이 보여야만 한다. 약속의 주인공이 약속을 확인하러 올 것이다. 게다가 그 전에는 축제마저 있어.”
“……네.”
“그러니까.”
우악스러운 힘이 재환의 얼굴을 당겼다. 눈앞에 메히온의 얼굴이 당도하자 재환은 벗어나려고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 치려다가 저를 내리누르는 알레스티아의 손길에 부들부들 떨며 잡혀 있었다. 메히온은 억센 손놀림으로 재환의 하악(下顎)을 쥐어 들었다.
“웃어.”
“네, 네!”
재환이 다급하게 말하자 메히온이 재환을 떨치듯이 놓아 주었다. 메히온은 어린 짐승처럼 떠는 재환을 무심하게 내리눌러 봤다. 얼굴이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얀 것 빼고는 별 볼 것이 없었다. 머리는 그나마 시녀들이 잘 정리해 하나로 묶어 놓았고 근육도 지방도 없어서 옷매 사이로 나온 쇄골이 도드라져 볼품없었다. 키도 작고 뼈도 작은 아페네. 어린 아페네. 그러면서 애써 숨 쉬는 어리석은 아페네.
“웃으면서 지내야 할 것이다. 약속을 그들 눈앞에 보이려면. 약속의 이행을 눈속임으로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자도 내가 너와 잘 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는 것이 목적이었겠지.”
“네.”
“그러니 웃어.”
재환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메히온은 불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혀를 한 번 쯧 하고 찼다.
“알페네온이 네 선생 자격으로 다시 올 거다. 나에게 너와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충실하게 설명을 했고,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 알페네온을 믿기 때문에, 또, 이 일에 적임 자격을 지닌 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나의 번민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아페네. 소문이 많은 처는 그 무엇보다도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번잡스럽게 하지.”
“…….”
“그리고, 나는 자비로운 영주이기에, 후궁 부속 정원 출입을 허한다.”
“황공합니다.”
재환이 입매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메히온은 그를 언뜻 보고서는 알은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문을 나설 뿐이었다. 재환은 그대로 탁자에 쓰러졌고 알레스티아는 재환이 하는 양을 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야단쳤다. 재환은 흐느적흐느적 일어나 응접실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웃어. 개돼지만도 못한 새끼들. 한국에서는 입에도 담지 않던 욕을 재환은 이곳에 와서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른다. 씨발 새끼. 씨발 새끼. 씨발 새끼. 울분으로 가득 찬 단어는 재환에게서 눈물 대신에 줄줄 흘렀다. 아, 이것이 왕의 목을 조르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은 왜 마법사도 아니어서 왕을 죽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일까? 왕이 절멸한다면 자신 또한 불살라져도 후회 따윈 없으리라. 하지만 그 일말의 희망마저도 망설임 없이 부숴 버리는 저 잔인한 칼라. 쇠망치는 외벽으로 감싼 희망을 깨부순다. 포춘 쿠키와 같이 어설픈 단단함이 오히려 칼라의 망치질을 더 가멸차게 했을지도 몰랐다. 신관도 술사도 남았다고 하지만, 글쎄. 확률은 언제나 룰렛을 돌리는 것과 같았고 재환은 운이 좋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알페네온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 재회에 자신의 온갖 운을 다 쓴 것일지도 몰랐다. 반테일 자작은 언제나 말뿐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체만 했지 자신에게 득 되는 일은 한 개도 없었다. 언제나 그는 불신자들이 두렵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래 놓고선 왜 두려운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재환은 인간에 아직 사회생활은 한 번도 하지 못한 화초인 즉,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근거 삼아 반테일 자작을 믿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저 알페네온에 대한 의미 없는 감정에 매달릴 뿐이었다.
이런 저를 누가 보면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재환이 이 자신의 집보다 넓은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할 수 있던 선택이었다. 이곳은 자신의 집보다 넓은, 세상보다 좁은 하나의 세계이자 감옥. 허우적거리면서 헤엄치는 감정에 마약처럼 취할 것 같았다. 아니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진통제였다.
여자애도 아니고, 시녀들도 많은데 하필 남자라니. 어쩌면 이 감정은 순수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구원자를 향한 갈망일지도. 본능적으로 시녀들이나 알레스티아가 아니라 저 남자만이 자신을 도망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신을 구원해 준다면 물고기라도 사랑했을 것이다. 결국 누구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마리화나이든 코카인이든 되는 대로 목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재환은 허무해져서 허허 웃었다. 이 생을 끊어 없앨 생각은 하지 않고 여기저기 감정만 질질 흘리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고통스럽다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나 보다. 몸부림치는 생애.
재환이 그렇게 침대에 엎드려 있을 무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환은 푹신한 오리털 베게에 마치 새가 깃 사이에 머리를 파묻듯 웅크리면서 말했다.
“좀 나가 줘.”
“…….”
“알레스티아?”
고개를 무기력하게 드니 보이는 것은 아까의 왕의 핏줄임을 자랑하는 붉은 머리였으나 순순한 녹음의 눈이었다. 재환은 당황해서 잠시 굳어 있다가 장님처럼 더듬더듬 일어섰다.
“여기는, 여기는,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송구합니다, 아페네. 저는 다만 저의 과오를 용서받고 싶어서.”
“아.”
알페네온이 무릎을 꿇었다. 재환이 황망하여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알페네온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무것도 제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다르게 알페네온은 순순히 재환의 손길에 일어섰다. 그리고 재환은 자신이 알페네온의 손을 아직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놓았다. 재환의 귀 끝이 미미하게 아침 햇살처럼 물들었다.
“경, 경께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데, 나는.”
“실토하자면 제가 함부로 입을 놀려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알페네온이 재환의 손을 다시 올려 잡았다. 아페네의 고초는 다 제가 초래한 것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재환은 잡힌 손과 알페네온의 사죄에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 거리다가 슬그머니 손을 다시 뺐다. 알페네온이 그 손을 다시 잡는 일은 없었다.
“괜찮다. 그저, 알페네온 경은 나를 위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언제나 좋은 의도는 좋은 결과와 맞아떨어져야지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페네. 쉽게 누군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알페네온이 부정했다. 재환은 그냥 조금 웃었다.
“나는 그것으로 좋아.”
알페네온이 침묵하자 곧 방 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닥쳤다. 재환이 그것을 못 참고 축객령을 내리려고 했으나 그보다는 알페네온의 대응이 빨랐다.
“아페네, 혹시 좋아하실진 모르겠지만.”
“…?”
“간식거리를 좀 가져왔습니다. 좋아하십니까?”
“조, 좋아해. 고마워.”
재환은 아까보다는 좀 더 환하게 웃었다. 알페네온도 따라서 웃었다. 이 세계에서 제외당한 듯한 웃음들이었다.
2.
축제가 다가오면서 끊어졌던 예절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학생이라지만 길고 긴― 제식순서는 재환에게 고역이었다. 반테일 자작은 까다롭지만 좋은 선생이었는데, 재환의 손짓 하나까지 신경 써 고매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재환에게 본래 천박한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매함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재환은 고전을 해야 했다.
반테일 자작의 매서운 입놀림은 왕성을 떠도는 가십을 말할 때뿐만 아니라 재환의 몸가짐을 지적할 때도 그 손속을 발휘했다. 갈색의 콧수염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재환은 금세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재환은 그러한 행위들이 마치 장인의 다이아몬드 세공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요, 아니요. 두 번 무릎을 꿇어 절하고 그 상태에서 한 번 허리를 숙입니다. 손은, 네, 맞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아페네.”
재환은 이 절 때문에 오늘 백팔 배의 숙원을 이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어렸을 때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갔을 때 백팔 배를 요구받았다가 결국 서른 번에서 나가떨어졌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체력이 안 따라 주어서 실제로 백팔 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반테일 자작은 끊임없이 재환에게 절을 시켰고 완벽을 요구했다. 결국 한국에서보다 더 나빠진 체력으로 스무 번쯤 반복했을 때 재환은 항복을 선언했고 반테일 자작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수긍했다. 확연하게 재환의 안색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환이 탁자에 앉아 반쯤 늘어져 있을 때, 반테일 자작은 시녀를 시켜서 시원한 물을 새로 떠오게 했다.
“물 좀 들이켜시면 나을 것입니다, 아페네.”
“고마워.”
손으로 잔을 잡으려고 몇 번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잡고선 입에 대었다. 재환은 그 절 몇 번으로 온몸이 다 저리는 것을 느꼈다. 수전증이 온 것처럼 손이 떨린다. 잔을 놓고 몇 번 손을 쥐었다 폈다 했지만 허벅지에서 손목으로 옮은 잔 떨림은 도저히 낫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악바리처럼 윗몸 일으키기에서 A를 받은 것도 모두 옛날이야기였다. 이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페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반테일 자작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재환을 굴리던 사람은 저기의 누군가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재환은 그 모습도 참 기가 차서 저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그래. 누구 덕이지.”
반테일이 허허 웃었다. 늙은이 같은 웃음이었다. 재환이 그 웃음에 반테일 자작을 응시했다. 귀밑머리가 조금 하얗다. 그러고 보니 많이 노쇠한 느낌이다. 서양인이어서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지 자세히 뜯어보면 꽤 주름이 많았다. 재환은 그 모습을 보며 서글퍼졌다. 아마 자신의 부모와 비슷한 연령이리라.
불여귀. 새 우짖는 소리가 창밖을 넘나들었다. 불여귀. 불여귀. 정신은 가끔, 저, 고명한 학자가 완전한 감각이라고 찬양했던 청각을 비집고 들어와 착란시킨다. 불여귀.
“힘드신가 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머릿속에서 괜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아 재환도 반테일 자작의 말을 기뻐하며 허락했다. 원체 표정 없는 동양인인지라 반테일 자작이 그 모습을 한 번에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분위기만으로도 재환이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환이 때때로 보이는 무방비한 순종과 경계 사이에서 반테일 자작은 재환을 꽤 가깝게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날카롭게 대해도 반테일 자작은 기꺼워했다. 재환은 딱 반테일 자작의 손자뻘이었다. 게다가 여신의 신성이라니.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두 눈으로 확인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전 왕의 아페네가 존재는 하였으나 반테일 자작이 전 왕의 아페네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축제와 연회가 언제라고?”
“축제는 다음 주 첫째 날이고 연회는 다음 달 말에 열릴 것입니다, 아페네.”
반테일 자작이 방을 나가고, 재환은 차를 마시다가 방에서 지키고 서 있는 알레스티아에게 문득 물어보았다. 초반에는 알레스티아는커녕 사람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알레스티아고 뭐고 다 달라붙어서 재환을 감시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애써 회피하면서 재환은 알레스티아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나머지 ‘재능’은 어떻게 돼?”
“경께서는 오늘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반테일 자작의 수업이 고되기 때문에 휴식시간을 가지고 약속을 잡아 놓았습니다.”
재환이 애써 여상스럽게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에 기뻐했다. 아, 오늘 다시 만나게 되다니. 괜히 설레는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지만 현실과 적당한 타협을 하기 시작한 뒤로 평정심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재환에게 딱히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나 자율신경계를 통해 움직이는 기관들을 대뇌활동으로 제어할 순 없었기에 한계는 존재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곳까지는 정리한 셈이었다. 그저 알페네온에게 이유 없이 호의를 보내는 것은 다정한 인사(人士)에게 자연히 따라오는 호의로 보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동안 산책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
왕의 자비로운 은혜로 후궁 정원을 갈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재환은 자주 산책을 하러 나갔다. 방 안에 갇혀 있으면 우울증이 심화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는 자주 환기도 시키고 그랬지만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는 녹색 양탄자를 바라보는 것과 실제 풀빛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재환의 체력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방에서 움직이지 않고 몇 달을 보낸 결과는 원래도 없던 근육의 손실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거의 운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육이 없었는데, 여기에 오면서 살덩어리가 더 물렁물렁해졌다. 본래 마르기도 했고 먹지도 못해서 뼈마디가 잡힐 정도이지만 기본적으로 팔뚝에 있는 살을 만져 보면 탄탄함이 사라져 있었다.
유럽을 죽음에 잠에 빠지게 한 흑사병이 사실 중국 운남성의 풍토병이었던 것처럼 낯선 병이란 그렇게 사람을 죽이기 쉬운 것이다. 면역력이 없으므로. 따라서 체력이 약해지면서 면역력 또한 약해진 재환이 데카리아의 풍토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청결한 위생 상태를 비롯한 천운이었다.
아무리 아페네가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알페네온이 그렇듯이 알레스티아도 교육 받은 사람으로서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며 재환의 체력을 키우기에 열중이었다. 그래서 알레스티아는 재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종종 산책을 권유했다.
밖은 방에 있을 때 보다야 나았다. 신은 우습게도 비단신이어서 풀 사이를 걸으면 풀물이 들까 봐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돌로 포장된 보도를 걷자니 재환은 기분이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방 안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장식들로, 그것도 이제는 날카로운 것이나 무거운 것들은 치워져서 없지만, 화려한 금장식과 보석들이 돋보였다. 현대의 세공만큼 세밀한 것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멋을 뽐내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재환은 방에만 있으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 종종 착각할 때가 많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자신의 좁은 방 침대 위라고 생각한 적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밖으로 나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저것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영영 꿈이 아니라는 것을 공기로써 깨닫는 것이었다.
“어머나. 아페네, 저것 좀 보세요.”
약간 뒤에서 종종 따라오던 시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름다워요. 색이 알록달록하고 우아한 깃을 가진 새였다. 시녀는 아름답다며 연신 감탄사를 외쳤다. 재환은 시녀의 감탄사에 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푸른 빛깔의 새는 우아하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시녀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새는 경계심 없이 동그란 눈으로 갸웃거리며 재환과 시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녀가 재환에게 새 가까이로 다가오라 종용했다. 재환은 망설이다가 다가갔다. 새는 그럼에도 달아나지 않고 날개를 한 번 휘저었을 뿐이었다.
“예쁘네.”
“네, 아페네. 아무래도 길들여진 것 같아요.”
시녀가 어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재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새는 쫑쫑거리며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와 재환의 손끝에 내려섰다. 재환은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크지도 않은 눈이 순박하게 깜박이자 새가 작게 울었다. 재환이 미소 지었다.
“이런.”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재환이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자 손의 새가 푸드덕 날아올라 나뭇가지에 앉았다. 알페네온이 멋쩍은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는 금색의 새장이 들려 있었다.
재환은 나무 창문 틈으로 숨죽인 채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가 없는 이 세상은, 문명의 이기란 이기는 모두 가지지 않는 이 세상은 나무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문짝으로 창을 열고 닫는 것으로 계폐와 햇빛의 출입을 허락했다.
그런데 이 침실의 나무창은 관리가 잘되어 있는 다른 나무창들과는 다르게 문짝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알레스티아가 그를 발견하고 보수하겠다고 말했으나 재환이 거절했다. 겨울이 오면 어차피 막을 것이다. 그것을 미리 당길 필요는 없었다. 북구의 겨울은 어차피 혹독하니.
언제나 찾아오는 밤은 재환을 외롭고 두려운 모양새로 새벽이 올 때까지 새게 했다. 재환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이국의 밤은 아름다웠으나 염려하는 마음을 재환의 눈앞으로 질질 끌고 와 앞에서 흔들었다. 날이면 찾아오는 고통에, 더 이상 책에 집중하지 못할 때면 잠에 들던 재환은 언제나 대가리를 빳빳이 치켜세운 밤 앞에서는 무력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하나의 위성은 언제나 이 행성을 빙빙 돌면서 중력을 시험했다. 재환은 자신도 위성이어서 지구가 자신을 끌어당겨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외롭다. 이렇게 외로울 바에는 차라리 우주의 먼지가 되어서 떠돌다가 어느 날에는 블랙홀에 삼켜지는 삶이라면 좋으련만. 밤마다 별을 세는 재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오늘도 손톱 끝과 같은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이곳의 위성을 부러워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재환이 미친놈과 같이 떠도는 메히온을 발견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재환은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메히온을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하고선 창을 닫았다. 그것은 반쯤 본능이었다. 누구보다 염려하는 마음은 그렇게 가끔씩 제 신체의 능력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한 능력을 끌어내는 법이었다. 재환은 재빠른 속도와는 다르게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몇 번 숨을 고르다가 겨우 일어나서 밖의 동향을 살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가 너무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다. 눈물도 나오는 것 같지만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 보니 나오지는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눈으로는 계속 메히온을 좇았다. 마치 이것은 공포영화와 같아서, 자신이 눈을 뗀 순간 자신의 뒤로 그가 다가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들개 같은 메히온은 한 손엔 병을 들고 후궁을 노려보다가 금세 가 버렸다. 다리가 풀려서 반쯤 꿇어앉은 자세가 되었다. 재환은 벽에 얼굴을 기댔다. 차가운 냉기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자신은 언제나 송곳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초식동물은 도무지 육식동물의 숨통을 조일 수 없다. 재환은 외피도 없고 발굽도 없고 뿔도 없었다. 먹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상처는 다 나았지만 소식이 없었다. 재환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러한, 심장을 쥐어짜고 희롱하는 방문이라니. 자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을 갔다 오는 분명히 다시 찾지 않는다면서. 눈을 뜨고 일어나면서 알레스티아의 멱살을 잡고 외치고 싶던 말이었다.
하지만 알레스티아의 눈을 본 순간, 재환은 자신의 이빨이 모두 넓적하고 섬유질을 씹기 좋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나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한다. 이런 목숨 개나 줘 버리고 싶다.
그러나 괜한 알페네온의 시도가 자신을 어리석게 만든다. 몸을 추스르는 동안에 몇 번이고 찾아왔다는 알페네온. 골이 부서질 것만 같다. 마치 자신이 어린 계집아이가 된 것 같다. 차라리 요즘 여자애들이 자신보다 더 주체성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거의 유일했던, 고등학교 때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친구, 그 아이가 생각난다. 여자라는 이유로 원통해했던 그 모습. 이를 아득바득 갈며 성공할 것을 다짐했고, 수능 가채점 또한 만점 가까이 받았다. 그에 비해서 재환 자신은 신데렐라만 꿈꾸는 병신 같은 남자애이다. 그 아이가 여기를 왔으면 더 나았으려나. 같잖은 가정은 때려치우자.
재환은 사실 알페네온이 자신을 좋아하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을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다만 동정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런 감정이야 언젠가는 사멸해서 세월과 함께 사장될 것이었다. 원래 그러했다.
그러므로 재환은 알페네온이 그냥 자신을 도망치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생활이야 모르지만 만약 돌아갈 수 없다면 이곳을 탈출하기만 해도 감읍해서 이 개 같은 신 칼라의 발끝이라도 핥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재환은 머리를 푹신한 오리털 베개에 묻었다. 피로 범벅이 되었던 시트는 어느새 치워진 지 오래였다. 두꺼운 이불을 덮어써도 춥고 외롭다. 아무런 정도 없는 반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일까. 창 틈새로 들어온 별빛이 눈을 시리게 했다.
방문은 정식으로 다시,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고 윽박과 폭력이 난무한 그런 방문이 아니었다. 말투는 언제나와 같이 일관되게 무시하는 말투였으나 전에 비해서는 훈훈하다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재환은 누구보다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레스티아는 재환의 뒤에서 비호하듯 서 있었으나 그런 것이 아닌 줄은 재환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은 뻔한데.
“얼굴색이 폈군.”
“모두 전하의 은덕 덕분입니다.”
“일이 있다. 모든 왕이 모일 것이다.”
본래 1년이 된 후에 모든 왕이 아페네를 맞이하는 게 풍습이지. 그 말에 재환은 새삼 시간을 깨달았다. 이곳에 떨어진 지 벌써 1년이나 된 것이다. 지구에서보다 4개월이 많은 이곳에서 1년이라고 하면 16개월이 지났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이룬 것은 손에 꼽혔다. 말이야 어느 정도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재환은 메히온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 채 방황했다. 마치 억지로 증언을 얻어 내는 재판장에 온 것만 같다.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고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너는 내 아페네이자 비로서 모자람 없이 보여야만 한다. 약속의 주인공이 약속을 확인하러 올 것이다. 게다가 그 전에는 축제마저 있어.”
“……네.”
“그러니까.”
우악스러운 힘이 재환의 얼굴을 당겼다. 눈앞에 메히온의 얼굴이 당도하자 재환은 벗어나려고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 치려다가 저를 내리누르는 알레스티아의 손길에 부들부들 떨며 잡혀 있었다. 메히온은 억센 손놀림으로 재환의 하악(下顎)을 쥐어 들었다.
“웃어.”
“네, 네!”
재환이 다급하게 말하자 메히온이 재환을 떨치듯이 놓아 주었다. 메히온은 어린 짐승처럼 떠는 재환을 무심하게 내리눌러 봤다. 얼굴이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얀 것 빼고는 별 볼 것이 없었다. 머리는 그나마 시녀들이 잘 정리해 하나로 묶어 놓았고 근육도 지방도 없어서 옷매 사이로 나온 쇄골이 도드라져 볼품없었다. 키도 작고 뼈도 작은 아페네. 어린 아페네. 그러면서 애써 숨 쉬는 어리석은 아페네.
“웃으면서 지내야 할 것이다. 약속을 그들 눈앞에 보이려면. 약속의 이행을 눈속임으로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자도 내가 너와 잘 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는 것이 목적이었겠지.”
“네.”
“그러니 웃어.”
재환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메히온은 불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혀를 한 번 쯧 하고 찼다.
“알페네온이 네 선생 자격으로 다시 올 거다. 나에게 너와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충실하게 설명을 했고,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 알페네온을 믿기 때문에, 또, 이 일에 적임 자격을 지닌 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나의 번민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아페네. 소문이 많은 처는 그 무엇보다도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번잡스럽게 하지.”
“…….”
“그리고, 나는 자비로운 영주이기에, 후궁 부속 정원 출입을 허한다.”
“황공합니다.”
재환이 입매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메히온은 그를 언뜻 보고서는 알은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문을 나설 뿐이었다. 재환은 그대로 탁자에 쓰러졌고 알레스티아는 재환이 하는 양을 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야단쳤다. 재환은 흐느적흐느적 일어나 응접실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웃어. 개돼지만도 못한 새끼들. 한국에서는 입에도 담지 않던 욕을 재환은 이곳에 와서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른다. 씨발 새끼. 씨발 새끼. 씨발 새끼. 울분으로 가득 찬 단어는 재환에게서 눈물 대신에 줄줄 흘렀다. 아, 이것이 왕의 목을 조르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은 왜 마법사도 아니어서 왕을 죽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일까? 왕이 절멸한다면 자신 또한 불살라져도 후회 따윈 없으리라. 하지만 그 일말의 희망마저도 망설임 없이 부숴 버리는 저 잔인한 칼라. 쇠망치는 외벽으로 감싼 희망을 깨부순다. 포춘 쿠키와 같이 어설픈 단단함이 오히려 칼라의 망치질을 더 가멸차게 했을지도 몰랐다. 신관도 술사도 남았다고 하지만, 글쎄. 확률은 언제나 룰렛을 돌리는 것과 같았고 재환은 운이 좋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알페네온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 재회에 자신의 온갖 운을 다 쓴 것일지도 몰랐다. 반테일 자작은 언제나 말뿐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체만 했지 자신에게 득 되는 일은 한 개도 없었다. 언제나 그는 불신자들이 두렵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래 놓고선 왜 두려운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재환은 인간에 아직 사회생활은 한 번도 하지 못한 화초인 즉,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근거 삼아 반테일 자작을 믿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저 알페네온에 대한 의미 없는 감정에 매달릴 뿐이었다.
이런 저를 누가 보면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재환이 이 자신의 집보다 넓은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할 수 있던 선택이었다. 이곳은 자신의 집보다 넓은, 세상보다 좁은 하나의 세계이자 감옥. 허우적거리면서 헤엄치는 감정에 마약처럼 취할 것 같았다. 아니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진통제였다.
여자애도 아니고, 시녀들도 많은데 하필 남자라니. 어쩌면 이 감정은 순수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구원자를 향한 갈망일지도. 본능적으로 시녀들이나 알레스티아가 아니라 저 남자만이 자신을 도망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신을 구원해 준다면 물고기라도 사랑했을 것이다. 결국 누구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마리화나이든 코카인이든 되는 대로 목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재환은 허무해져서 허허 웃었다. 이 생을 끊어 없앨 생각은 하지 않고 여기저기 감정만 질질 흘리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고통스럽다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나 보다. 몸부림치는 생애.
재환이 그렇게 침대에 엎드려 있을 무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환은 푹신한 오리털 베게에 마치 새가 깃 사이에 머리를 파묻듯 웅크리면서 말했다.
“좀 나가 줘.”
“…….”
“알레스티아?”
고개를 무기력하게 드니 보이는 것은 아까의 왕의 핏줄임을 자랑하는 붉은 머리였으나 순순한 녹음의 눈이었다. 재환은 당황해서 잠시 굳어 있다가 장님처럼 더듬더듬 일어섰다.
“여기는, 여기는,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송구합니다, 아페네. 저는 다만 저의 과오를 용서받고 싶어서.”
“아.”
알페네온이 무릎을 꿇었다. 재환이 황망하여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알페네온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무것도 제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다르게 알페네온은 순순히 재환의 손길에 일어섰다. 그리고 재환은 자신이 알페네온의 손을 아직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놓았다. 재환의 귀 끝이 미미하게 아침 햇살처럼 물들었다.
“경, 경께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데, 나는.”
“실토하자면 제가 함부로 입을 놀려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알페네온이 재환의 손을 다시 올려 잡았다. 아페네의 고초는 다 제가 초래한 것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재환은 잡힌 손과 알페네온의 사죄에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 거리다가 슬그머니 손을 다시 뺐다. 알페네온이 그 손을 다시 잡는 일은 없었다.
“괜찮다. 그저, 알페네온 경은 나를 위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언제나 좋은 의도는 좋은 결과와 맞아떨어져야지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페네. 쉽게 누군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알페네온이 부정했다. 재환은 그냥 조금 웃었다.
“나는 그것으로 좋아.”
알페네온이 침묵하자 곧 방 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닥쳤다. 재환이 그것을 못 참고 축객령을 내리려고 했으나 그보다는 알페네온의 대응이 빨랐다.
“아페네, 혹시 좋아하실진 모르겠지만.”
“…?”
“간식거리를 좀 가져왔습니다. 좋아하십니까?”
“조, 좋아해. 고마워.”
재환은 아까보다는 좀 더 환하게 웃었다. 알페네온도 따라서 웃었다. 이 세계에서 제외당한 듯한 웃음들이었다.
2.
축제가 다가오면서 끊어졌던 예절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학생이라지만 길고 긴― 제식순서는 재환에게 고역이었다. 반테일 자작은 까다롭지만 좋은 선생이었는데, 재환의 손짓 하나까지 신경 써 고매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재환에게 본래 천박한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매함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재환은 고전을 해야 했다.
반테일 자작의 매서운 입놀림은 왕성을 떠도는 가십을 말할 때뿐만 아니라 재환의 몸가짐을 지적할 때도 그 손속을 발휘했다. 갈색의 콧수염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재환은 금세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재환은 그러한 행위들이 마치 장인의 다이아몬드 세공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요, 아니요. 두 번 무릎을 꿇어 절하고 그 상태에서 한 번 허리를 숙입니다. 손은, 네, 맞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아페네.”
재환은 이 절 때문에 오늘 백팔 배의 숙원을 이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어렸을 때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갔을 때 백팔 배를 요구받았다가 결국 서른 번에서 나가떨어졌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체력이 안 따라 주어서 실제로 백팔 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반테일 자작은 끊임없이 재환에게 절을 시켰고 완벽을 요구했다. 결국 한국에서보다 더 나빠진 체력으로 스무 번쯤 반복했을 때 재환은 항복을 선언했고 반테일 자작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수긍했다. 확연하게 재환의 안색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환이 탁자에 앉아 반쯤 늘어져 있을 때, 반테일 자작은 시녀를 시켜서 시원한 물을 새로 떠오게 했다.
“물 좀 들이켜시면 나을 것입니다, 아페네.”
“고마워.”
손으로 잔을 잡으려고 몇 번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잡고선 입에 대었다. 재환은 그 절 몇 번으로 온몸이 다 저리는 것을 느꼈다. 수전증이 온 것처럼 손이 떨린다. 잔을 놓고 몇 번 손을 쥐었다 폈다 했지만 허벅지에서 손목으로 옮은 잔 떨림은 도저히 낫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악바리처럼 윗몸 일으키기에서 A를 받은 것도 모두 옛날이야기였다. 이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페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반테일 자작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재환을 굴리던 사람은 저기의 누군가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재환은 그 모습도 참 기가 차서 저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그래. 누구 덕이지.”
반테일이 허허 웃었다. 늙은이 같은 웃음이었다. 재환이 그 웃음에 반테일 자작을 응시했다. 귀밑머리가 조금 하얗다. 그러고 보니 많이 노쇠한 느낌이다. 서양인이어서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지 자세히 뜯어보면 꽤 주름이 많았다. 재환은 그 모습을 보며 서글퍼졌다. 아마 자신의 부모와 비슷한 연령이리라.
불여귀. 새 우짖는 소리가 창밖을 넘나들었다. 불여귀. 불여귀. 정신은 가끔, 저, 고명한 학자가 완전한 감각이라고 찬양했던 청각을 비집고 들어와 착란시킨다. 불여귀.
“힘드신가 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머릿속에서 괜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아 재환도 반테일 자작의 말을 기뻐하며 허락했다. 원체 표정 없는 동양인인지라 반테일 자작이 그 모습을 한 번에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분위기만으로도 재환이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환이 때때로 보이는 무방비한 순종과 경계 사이에서 반테일 자작은 재환을 꽤 가깝게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날카롭게 대해도 반테일 자작은 기꺼워했다. 재환은 딱 반테일 자작의 손자뻘이었다. 게다가 여신의 신성이라니.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두 눈으로 확인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전 왕의 아페네가 존재는 하였으나 반테일 자작이 전 왕의 아페네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축제와 연회가 언제라고?”
“축제는 다음 주 첫째 날이고 연회는 다음 달 말에 열릴 것입니다, 아페네.”
반테일 자작이 방을 나가고, 재환은 차를 마시다가 방에서 지키고 서 있는 알레스티아에게 문득 물어보았다. 초반에는 알레스티아는커녕 사람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알레스티아고 뭐고 다 달라붙어서 재환을 감시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애써 회피하면서 재환은 알레스티아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나머지 ‘재능’은 어떻게 돼?”
“경께서는 오늘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반테일 자작의 수업이 고되기 때문에 휴식시간을 가지고 약속을 잡아 놓았습니다.”
재환이 애써 여상스럽게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에 기뻐했다. 아, 오늘 다시 만나게 되다니. 괜히 설레는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지만 현실과 적당한 타협을 하기 시작한 뒤로 평정심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재환에게 딱히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나 자율신경계를 통해 움직이는 기관들을 대뇌활동으로 제어할 순 없었기에 한계는 존재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곳까지는 정리한 셈이었다. 그저 알페네온에게 이유 없이 호의를 보내는 것은 다정한 인사(人士)에게 자연히 따라오는 호의로 보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동안 산책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
왕의 자비로운 은혜로 후궁 정원을 갈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재환은 자주 산책을 하러 나갔다. 방 안에 갇혀 있으면 우울증이 심화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는 자주 환기도 시키고 그랬지만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는 녹색 양탄자를 바라보는 것과 실제 풀빛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재환의 체력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방에서 움직이지 않고 몇 달을 보낸 결과는 원래도 없던 근육의 손실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거의 운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육이 없었는데, 여기에 오면서 살덩어리가 더 물렁물렁해졌다. 본래 마르기도 했고 먹지도 못해서 뼈마디가 잡힐 정도이지만 기본적으로 팔뚝에 있는 살을 만져 보면 탄탄함이 사라져 있었다.
유럽을 죽음에 잠에 빠지게 한 흑사병이 사실 중국 운남성의 풍토병이었던 것처럼 낯선 병이란 그렇게 사람을 죽이기 쉬운 것이다. 면역력이 없으므로. 따라서 체력이 약해지면서 면역력 또한 약해진 재환이 데카리아의 풍토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청결한 위생 상태를 비롯한 천운이었다.
아무리 아페네가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알페네온이 그렇듯이 알레스티아도 교육 받은 사람으로서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며 재환의 체력을 키우기에 열중이었다. 그래서 알레스티아는 재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종종 산책을 권유했다.
밖은 방에 있을 때 보다야 나았다. 신은 우습게도 비단신이어서 풀 사이를 걸으면 풀물이 들까 봐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돌로 포장된 보도를 걷자니 재환은 기분이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방 안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장식들로, 그것도 이제는 날카로운 것이나 무거운 것들은 치워져서 없지만, 화려한 금장식과 보석들이 돋보였다. 현대의 세공만큼 세밀한 것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멋을 뽐내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재환은 방에만 있으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 종종 착각할 때가 많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자신의 좁은 방 침대 위라고 생각한 적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밖으로 나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저것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영영 꿈이 아니라는 것을 공기로써 깨닫는 것이었다.
“어머나. 아페네, 저것 좀 보세요.”
약간 뒤에서 종종 따라오던 시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름다워요. 색이 알록달록하고 우아한 깃을 가진 새였다. 시녀는 아름답다며 연신 감탄사를 외쳤다. 재환은 시녀의 감탄사에 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푸른 빛깔의 새는 우아하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시녀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새는 경계심 없이 동그란 눈으로 갸웃거리며 재환과 시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녀가 재환에게 새 가까이로 다가오라 종용했다. 재환은 망설이다가 다가갔다. 새는 그럼에도 달아나지 않고 날개를 한 번 휘저었을 뿐이었다.
“예쁘네.”
“네, 아페네. 아무래도 길들여진 것 같아요.”
시녀가 어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재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새는 쫑쫑거리며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와 재환의 손끝에 내려섰다. 재환은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크지도 않은 눈이 순박하게 깜박이자 새가 작게 울었다. 재환이 미소 지었다.
“이런.”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재환이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자 손의 새가 푸드덕 날아올라 나뭇가지에 앉았다. 알페네온이 멋쩍은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는 금색의 새장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