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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언 (6화)


“강녕하셨습니까, 아페네.”
“아, 알페네온 경.”
알페네온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새에게 손짓을 했지만 새는 뒷걸음질로 도망갔다. 재환이 그 모습을 보고 풋 하고 웃었다. 그러자 알페네온이 그 빨간 눈썹을 찌푸리며 재환에게 투덜대었다.
“아페네. 길들여진 새라지만 새라는 것은 본디 인간과 친하지 않은 법입니다.”
재환은 그 말에 아까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갸웃거리던 새는 몇 번 망설이더니 아까마냥 쫑쫑 다가와 손끝에 내려앉았다. 시녀가 꺄르르 웃었고 알페네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환은 새를 조심스럽게 잡아들어서 새장 안에 넣었다. 알페네온이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미물이라지만 주인을 알아보나 봅니다. 사실 이 새는 제가 아페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래?”
“네, 제가 새장을 느지막이 구해서……. 먼저 새만 보내 놓고 마침 약속도 있으니 새장을 들고 왔는데 옮기다가 시종이 실수를 했습니다. 분명 방에서 옮기다가 놓쳤는데 창문이 열려 있어서.”
“아, 정말……. 고마워. 계속 선물만 받곤.”
“아닙니다. 저는 다만, 아페네께서 기쁘셨으면 하여서.”
재환은 새를 바라보면서 재차 고맙다고 말했다. 시녀는 자연스럽게 새장을 받아들었다. 알페네온은 그런 재환에게 웃어 보이면서 약속된 사람은 조금 있으면 도착하니 이참에 자신과 산책을 하지 않겠냐고 청유했고 재환은 내심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혼자 산책하니 심심하다는 불필요한 첨언과 함께.
“새는 아페네의 방에 갖다 놓아라. 아페네, 아페네께서도 그것이 나으시겠죠?”
“아, 그래.”
“허나, 그러면 시중은…….”
“내가 들지.”
알페네온이 웃으면서 시녀를 돌려보냈다. 재환은 얼떨결에 그래그래를 반복하다가 알페네온과 단둘이 남겨지는 상황에 처했다. 호위병이 뒤따랐으나 멀리서 있는 것에 그쳤기 때문에 가까이 조곤조곤 말하면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아 단둘만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페네. 정말 일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니, 그 말은 이젠…….”
“아니요, 아니요. 제 사촌 형이자 저희의 숭고한 왕께서 저지르신 일은 저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알페네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충분히 알고 있다. 재환은 그 말에 수치심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페네온은 명명백백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재환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얼굴 근육의 긴장을 놓으면 무참히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는.
“어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러니, 이제 내가 무안한데.”
“아, 결국 심려가 있으셨군요.”
알페네온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좀 더 밝은 톤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회피성이 짙었다.
“제가 선물한 새는 은빛코끼리의 땅에서 사는 극락조입니다. 열대림에서만 사는 아이인데 구하느라 혼났습니다. 아무래도 새의 빛깔이 고운 데다가 잡기도 힘들어서 이렇게 새끼 때부터 사람 손을 탄 것은 드물죠. 제가 알기로는 거의 갓 태어났을 때 포획한 것입니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요.”
“아.”
“이름은 아직 없으니 아페네께서 지어 주십시오.”
재환이 방금 본 푸른 새를 생각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새의 체구가 작았던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어리다는 말을 못 들었을 때는 그저 원래 작은 새라고 생각했는데. 재환은 알페네온의 호의에 입매를 끌어 올렸다. 순간이었지만 알페네온은 놓치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지니 푸른 풀들이 점점 시들해져 가는 눈치였다. 지구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나뭇잎이 그 끄트머리부터 붉고 노랗게 익어 가는 것이 보였다. 어떤 나무는 벌써부터 가을 단장을 다 끝냈다. 듬성듬성 초록과 노랑과 빨강의 향연이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자연스러움. 깃털이 한 뭉텅이 뽑힌 오리처럼 우스웠으나 완연한 가을임이 느껴졌다. 가을꽃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인공미의 꽃들은 정확한 평방미터 안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정원사의 끝없는 노력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이죠?”
“그런 것 같아.”
“그래도 더 아름다운 곳은 비밀 정원입니다. 거기에는 전대 왕비를 위해서 기암괴석이니 하는 것들이나 여러 요초들을 끌어왔거든요. 저도 어릴 때는 딱 한 번 들어가 봤다가 지금 전하의 허락을 받아서 가끔 들르고 있습니다. 아페네도 나중에 한번 모시겠습니다.”
“말만이라도 듣기 좋은데.”
“말만이라니요.”
알페네온이 하하 웃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아페네, 다행히도 저는 아페네께 여러 효용이 있을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야?”
“아페네께 기초 체력을 위한 검술 수업을 허락받았습니다.”
이름뿐인 스승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 말에 재환도 아, 정말 잘됐어. 하고 내뱉었다. 낭보였다. 이 말을 듣자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알페네온은 재환에게 앞으로의 수업이며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재환은 예절 수업과 겹치지 않게 조정하면서 알페네온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소소하지만 이를 갈 만큼 원하던 것이었다. 여전히 호위기사가 쫓아오는데도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지내고 있을 참에 어느새 시녀가 다가와 있었다.
“신관과 술사가 도착했습니다. 아페네.”
“아, 들어가 봐야겠어, 경.”
“벌써 그렇게 됐군요.”
재환을 선두로 알페네온과 시녀가 뒤를 쫓아 들어갔다. 재환은 시녀가 응접실의 문을 여는 것을 보며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응접실로 들어서니 신관과 술사로 보이는 남자 둘이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하나는 더티블론드의 늙은 남자였고 하나는 고동색 머리의 젊은 남자였다.
어느 쪽이 신관이고 술사일까 하는 고민은 짧았다. 늙은 남자의 옷이 눈에 익었다. 예전에, 왕에게 강간당했을 때 자신을 자주 치료해 줬던 여자가 입었던 옷이었다. 정결함을 뜻하는 흰색에 검은 자칼이 수놓아진 옷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소매의 장식, 허리띠, 옷의 주름, 촉감, 품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든 것은 생생하게 뇌의 회색질에 박혀 있다. 분명 등에는 순리를 뜻하는 수레바퀴가 금색으로 수놓아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의 문구는 ‘모든 것은 신의 안배, 거스를 수 없다.’
“인사드립니다, 아페네. 저는 신 칼라의 어리석은 종, 페이티안이라고 합니다. 장로인 아카발의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술사 이판 카세입니다.”
“반가워.”
재환이 앉고 손짓을 하자 신관과 술사가 착석했다. 알페네온은 재환의 뒤에서 그저 바라볼 따름이었다. 신관과 술사는 그렇게 재환을 오랜 시간 기다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시험할 때처럼 너무 쉬운 것을 요구했다. 신관은 신 칼라의 성수를 뿌려 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술사는 재환의 머리카락을 요구했다.
“성수를 이마, 코, 양 손에 묻히고 제가 신성력을 불어 넣어서 반응을 한다면 신성력이 있다고 간주해도 좋습니다. 만약 신성력이 있으신다면 성수는 딱딱한 고체가 되어서 떨어져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액체가 됩니다.”
“너무 쉬운 일인데. 이렇게나 사람을 선별할 필요가 있었어, 알페네온 경?”
“쉽게 보이지만 치료하기 위해서 신성력이 스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몸에 침투하는 것이죠. 그에 대해 체내의 신성력이 반발하여 성수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를 하기 위해서는 꽤 고위의 능력을 가진 신관이 필요하고, 신전은 그에 꽤 인색합니다.”
“경. 오해할 소리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신전은 인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고위 능력의 신관들은 모두 빈민촌에 봉사를 나가서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만 해도 얼마 전까지 오염된 물로 인해서 전염병이 퍼진지라 정화를 하러 파견되었고요.”
“농담입니다, 아카발.”
알페네온도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고 신관도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신관은 웃으면서 개시하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구했고 재환은 허락으로 두 손을 탁자 위로 옮겼다. 긴장이 되어서 허락의 말조차도 하지 못했다.
신관은 작은 푸른색의 유리병을 꺼내더니 재환의 이마와 코, 양손에 발랐다. 조금 많이 발랐던 탓인지 투명한 물이 재환의 뺨과 콧등을 타고 흘렀다. 재환이 조금 눈을 찌푸렸다. 수능 보기 전날처럼 긴장했다. 아니, 수능에서 마지막 영어 답을 눌러 찍자마자 종이 울렸던 때보다 더 긴장한 듯싶기도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재환의 손끝을 신관은 살짝 내리 잡았다. 낙막하게 손등을 흐르는 핏줄을 따라 빛이 기어 올라왔다. 재환은 눈을 내리감았다.
헛숨을 들이켜는 기색이었다. 재환은 어떤 예감이 화살처럼 머리에 박혔다. 아니, 예감이 아닌 사실이었다. 얼굴이 아직도 축축했다.
“아, 아쉽게도.”
신전에서 뵙기는 어려울 듯하군요, 아페네. 신관이 아쉬운 기색을 내비췄다. 재환은 뺨이며 코며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성수를 손으로 훔쳤다. 계속 흘러내린다. 심호흡. 심호흡을 하자. 재환은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감췄다. 옆에서 아페네, 하고 시녀가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재환은 온 얼굴에 범벅이 된 성수를 닦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수건 너머로 나타났다. 술사, 이판이 그 모습을 곰곰이 살폈다.
“아페네, 혹시 이미 마수와 계약을 맺으셨습니까?”
“무슨 소리지?”
재환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고상 같은 얼굴이었다. 술사는 푸른 눈을 빛내며 간살거리는 목소리로 단어 몇 개를 읊조렸다.
“마수 아칸의 첫 번째 딸, 잠자지 않는 불꽃, 위시바 윙바 위살바.”
그러자 환한 빛이 이판의 옷 밑, 목덜미에서 일어났다. 옷 틈새를 타고 올라온 그 빛은 짐승처럼 기지개를 펴더니 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질질 끌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단지 빛의 덩어리였던 그것은 다리가 생기고 대가리가 생기더니 꼬리가 쥐새끼처럼 늘어졌다. 불타는 털이 온갖 곳에 내려앉고 꼬리가 풍성해졌다. 마지막으로 눈을 뜨니 화염에 감싸 안긴 것을 빼면 그 얼굴 모양은 영락없는 여우였다.
여우가 눈을 가늘게 뜨자 이판은 여우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혼자 말하는 연극 같았다.
“위시바. 제 앞의 분은 아페네이십니다. 네. 아니요. 아니요. 화내지 마세요. 위시바. 아니, 딸기 꽃은 저번에 드렸― 아 네, 알겠고 하여간―”
알페네온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무엇인가 생각난 눈치였다.
“제가 술사의 집에 하도 간청을 했더니 거물이 왔나 봅니다. 마수 위시바라니.”
“마수 위시바?”
“네, 용암에서 태어난 마수 아칸의 장녀입니다. 저도 술사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 아칸은 대단한 마수입니다. 붉은 용 살리레뉘와 힘겨루기를 해 영지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거니, 내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거니?
갑자기 어떤 여자의 음성이 재환의 사고체계에 끼어들었다. 재환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고 알페네온은 어리둥절해서 재환을 쳐다보았다. 재환이 문득 여우를 쳐다보니 여우는 송곳니를 다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이판은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 새가슴인 것 좀 봐.
“위시바. 제발 아페네 앞에서 무례하게는…….”
-왜, 칸테하임. 무례하니?
“칸테하임이……. 혹시…….”
“네, 아페네. 황금여우의 영지에서 아페네를 부르는 다른 말입니다. 아무래도 위시바는 황금여우의 영지에 있던 마수라.”
이판이 위시바를 불안하다는 듯이 보더니 이내 재환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우는 그를 보며 그저 흐흐흥 하고 다시 이를 드러낼 뿐이었다. 위시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몸을 둥글게 만 반동으로 튀어 탁자 위에 올라섰다.
머리카락은 아직 안 샜지만 어느 정도 늙은 신관은 위시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의자에서 자빠질 뻔했다. 위시바의 덩치는 여우라기에는 꽤나 중형견 같았기 때문에 그 행동은 누구에게나 위협적이었다. 그러므로 알페네온이 그와 동시에 재환을 의자에서 일으켜 자신의 뒤로 숨긴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에 비해 재환은 위험을 감지하지도 못한 채 알페네온의 뒤에서 멀뚱거리고 있었다. 재환의 유일한 친구인 그 아이의 집에는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의 뛰어오를 때의 자세가 딱 이 여우의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위시바는 여우라고 하기에도 조금 모자란 감이 있었는데 얼굴이야 여우였지만 몸체의 어느 부분이 고양이를 닮기도 했고 발톱은 고양이나 개과 동물보다는 수리를 연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 마수라는 것의 생김새가 괴이하기는 하지만 재환이 볼 때는 퍽 친근하기도 했다. 게다가 말을 하는 이것에게 근본 없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자면― 여우괴물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재환은 어떤 정신적인 교감 비슷하게 알 수 있었다. 마수 위시바가 말하는 방식은 특이했는데 입을 벙긋거리지 않으면서도 재환의 뇌리에 파고들어서 그 의지를 전했다. 마수는 자신의 말과 함께 친절함과 흥미의 복합적인 감정 덩어리를 재환에게 보였다. 때문에 재환은 그 여우가 무엇을 하든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이런, 이런. 네 뒤에 칸테하임을 숨긴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해코지를 못 할 것처럼 보이니?
“해 볼 수 있는 일이라도 하는 겁니다. 위시바 윙바 위살바.”
-어머, 말은 잘하는구나, 인간. 그렇지만 어린 인간아. 네가 아무리 간살스럽게 아첨을 해도 내 계약자보단 아니란다. 그리고 내가 칸테하임을 해칠 이유가 무엇이니?
“없습니다, 위시바. 하지만 저는 만일의 확률을 셈해 가며 아페네의 신변을 지켜야만 하는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뭐, 내가 양보하지.
알페네온이 ‘위시바 윙바 위살바’라는 말을 내뱉자 이판의 뺨이 간교한 얼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홍조를 띠웠다. 여우는 불꽃의 꼬리로 이판의 얼굴을 토닥였으나 역효과로 귀뺨이 온통 벌게졌다. 재환은 그 모습을 방관자처럼 관찰할 따름이었다. 위시바는 여우의 얼굴을 재환에게 들이밀었다.
-칸테하임아. 너 마수 쉬페따를 아니?
“모릅니다, 위시바.”
-그럼 그 손은 뭐니.
“네?”
-내밀어 보렴. 칸테하임아.
재환이 왼손을 내밀자, 위시바가 아니 그 손 말고 하면서 오른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재환은 알페네온의 손목을 쥐어 잡고 있던 오른손을 불신과 함께 위시바에게 넘겨주었다. 위시바는 오른손의 손을 살피더니 눈을 가늘게 홉떴다.
-어머나, 야비하게도 어리석은 종자이구나.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위시바.”
-가끔 마수 중에서 어리석은 것들이 많지. 오래 살았어도 나이를 헛먹었는지 그래.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거야.
재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껌벅였다. 위시바는 재환의 이해를 바란 것을 아니었던지 그냥 그의 송곳니를 다시 한 번 재환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을 뿐이었다.
-귀여워라아. 물론 내 술사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재미있었어. 기회가 있다면 또 보자구우.
위시바의 말끝이 점점 느려지더니 여우의 형상이 그와 함께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다시 과정의 역행이었다. 샛노란 눈이 감기고 시뻘건 불길이 잦아들더니 큰 쥐새끼 같은 몸뚱어리에서 꼬리와 대가리가 말소되고 다리가 줄어들고, 그리고 빛으로 되돌아가 이판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재환의 머릿속에서 위시바는 속살거렸다.
-짐승의 이가 있는 것을 살피렴.
재환이 그 말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위시바의 종적이 사라진 뒤였다. 이판은 미간을 찌푸리고 마수 위시바가 돌아간 반동을 감내하더니 결국 탈진한 채로 헐떡거렸다. 옆에 있던 시녀가 이판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겠어?”
이판은 재환의 물음에 뭐라 답하려다가 다시 헐떡이면서 죽어 가는 목소리로 네…… 흑, 근데 헉, 헉, 조금…… 하고 웅얼거렸다. 재환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딱히 못 할 일이야 아니었다. 그동안 재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신관에게 나가도 좋다고 말했고 시녀는 위시바의 뜀뛰기로 어지럽혀진 탁자 위를 치웠다. 이판은 숨을 고르더니 창백한 안색에서 좀 혈색이 도는 인간 같은 얼굴로 돌아오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헉헉, 아페네. 먼저 언급하지 못한…… 흑,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일단, 헉, 저의 가정은 아페네께서……흐억,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일개, 헉, 술사인지라 느낌만 올 뿐이옵고 자세한 것은 마수 위…… 흑, 위…… 위시바에게 물어보기 위하여 불렀는데……. 허억, 허억, 하……. 아, 이제 좀 살겠네, 하여간 웬 거지 같은 아이구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본래 거지…… 가 아니라 좀 괴팍한 성정인 위시바가 거지 같…… 아니 제멋대로 굴고선 딱히 확답도 주지 않고 가 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추측해 보건대 계약이 완전한 것 같지는 않고……. 간섭이 있습니다. 네. 말하자면 침을 뱉…… 이 아니라 미리 예약을 해 놓는 건데…….”
“언어 사용이 퍽 자유로운데, 이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상스러운 말과 고상한 어휘를 섞어 쓰는 이판을 보며 재환이 웃었다. 야비하게 생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헙하고 입을 가로 막으며 이판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서는 이번에는 조금 더 단어에 신경 쓰며 문장을 구성해 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계약이 불가하십니다. 술사의 자질이 어느 정도는 있으십니다만― 그러니 아페네를 노렸겠지 말입니다. 하여간 아주 강한 마수, 예를 들어 고대 마수 아칸과 같은 것들이나 그의 장자― 예를 들어 아칸의 장녀 위시바와 같은 마수가 아니면 계약이 불가하실 겁니다.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간섭이 있었고 그를 깰 수 있는 것은 아주 상회의 것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그 마수가 미약할지라도. 언제나 말하지만 약속은 신성한 것이니까요.”
“머리카락 미리 안 자르길 잘했네.”
“아페네.”
알페네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술법은?”
“예에- 그거야 뭐, 계약이 완전해야 하니 말입니다. 계약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은 아시지요, 아페네?”
“그래. 정략혼, 약탈혼 두 개.”
“아, 네, 그 정도. 훌륭하십니다. 보통은 정략혼만 알고 있거든요. 마수들이…… 예의 바를 거라는 착각은 참. 하여간 정략혼은 마수와 술사가 동등하게 계약을 해서 조건을 거래하는 거고, 약탈혼은 술사와 계약을 한 마수를 죽이고 남은 술사를 차지하는 것이고, 알려지지 않은 게 약혼입니다. 저와 아페네 같은 경우입니다.”
“같은 경우라니?”
“어……. 아페네, 그러니까 저도 예약당한 거죠. 약혼 자체가 드물지만, 일단 저 또한 저도 모르게 약혼당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집적댄 겁니다. 사실 보통 그러고 맙니다, 심지어 저는 술사로서의 자각도 없었는지라 모를 확률이 더더욱 높았죠. 약혼은 힘없는 마수들이 많이 쓰는 수법이거든요. 그러니까, 대가 말입니다. 좀 명명백백한 거래 물건. 그게 딸리니까 편법을 쓰는 겁니다. 술사는 마수의 힘을 기반으로 술법을 쓰니까요. 보통 술사는 마수에게, 음, 저 같은 경우는 딸기 꽃을 바치…… 하…… 진짜…… 하여간 그러지만 대충 원하는 물건, 먹을 것 등등이나 유희거리를 공급하고 마수는 잠깐 힘을 빌려줍니다. 아페네, 아시…죠? 네. 힘없는 마수들이 뭔가 얻고 싶은데 대화는 불가능하고! 상급마수 이상만 계약자 없이 대화가 가능하니까! 이럴 때 많이들 씁니다. 그래도 좀 심심한 고대마수나 그들의 장자, 아니면 다른 상급마수들도 가끔 씁니다. 심심한데 관찰한다 이거죠. 위시바가 그런 경우입니다. 약혼은 그렇게 의미 없는 겁니다. 비록 신진술사 앞길 막는데 주요하지만……. 그들이 신경 쓸 상황은 아니고, 하여간 그런데 약혼이 정혼으로 바뀌려면…….”
이판은 옷으로 가렸던 목의 밑 부분을 끌어내리며 재환에게 보여 줬다. 아까 빛이 새어 나오던 목은 거대한 흉터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무엇인가에 물어 뜯겼다가 다시 온전치 못하게 붙은 상처. 분명 살아 있는 것이 기이한 죽음의 흔적이었다. 재환은 그 끔찍한 형태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무례라는 것을 깨닫고선 애써 표정을 되돌렸다.
“죽다 살아났군.”
“예에, 경, 정확히 말하자면 죽을 뻔, 했습니다. 위시바가 계약으로 살렸죠. 예. 약혼이 성립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죽음의 옷자락입니다. 계약으로 죽음에서 약혼자를 질질 끌어내는 겁니다. 예……. 저도 참 좋은 꼴로 살아난 건 아니어서.”
그래도 마수가 구하지 않으면 끝입니다. 이판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추천하고 싶은…… 음, 그런 코스는 아닙니다. 끔찍하게 아프거든요.”
“아페네.”
“괜찮아.”
이것이 운명이라면 나쁘지는 않아. 재환은 탁자에서 일어나면서 이판과 알페네온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판은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네, 그럼 다음에 부르시길, 하고 꽁무니를 빼었고 알페네온은 재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몇 번 헛되게 벙긋거리다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하나뿐인 것처럼, 다시 한 번.
“아페네, 정말―”
“괜찮―! 아, 아니. 진짜 괜찮은데, 진짜. 알페네온, 경에게 소리 지르려는 것이 아니라…….”
“아페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페네께서는 이렇게 단기간에 이곳의 언어에도 익숙해지시고…….”
재환이 굳게 이를 악물었다. 턱이 단단하게 그 분노를 드러냈다. 알페네온은 그런 재환의 뺨을 손으로 이완시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여간, 신 칼라께서는 언제나 안배를 하십니다. 저는 결코 그것이 아페네를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았으니…… 날 좀…… 혼자…….”
“제발, 저를 다시 부르십시오.”
알페네온은 궁정식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선 돌아섰다. 재환은 그 뒷모습을 보고 침실로 들어섰다. 칼라여. 이제는 누구 때문인지 찾기도 지쳤다. 역시 무언가를 논하는 것은 잘못이고 헛된 노동이다.
귀뺨을 세게 얻어맞은 것과 같이 대가리가 얼얼하다. 예상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하는 마음은 재환의 한구석에서 똬리를 튼 어떤 희망. 그것은 이미 불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복권을 쥐어 들고 매주 TV 앞에 선, 학자금을 금덩이처럼 쌓아 놓고 있는 청년. 복권 번호가 불려 오면 아닐 것이라고 믿으면서 동그라미. 동그라미. 엑스. 엑스. 엑스. 엑스. 결과는 언제나 같지만 그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확률의 문제였다. 언제나 0%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어리석은 숫자.
어째서 카지노에서 재산을 탕진하는 것인가?
강원 랜드에 가면, 그래 그 주변에 가면 괴소문이 있다고들 한다. 재환은 침대에 누워서 고향의 매캐한 정경을 그렸다. 강원 랜드 주변의 여관에서 사람이 죽지 않은 방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고향이라는 말이 쑥스러운 도시에서 재환이 보던 풍경은 건물 숲이 열기를 토해 내는, 그곳에서 사람은 물고기 같이 헤엄치고. 돌아다니는 카지노에서 룰렛을 돌리고 카드를 돌리고 기계를 돌리는 사람들도 그 소문을 모르지 않을진대 왜 그렇게 모였는지. 재환은 그 모습을 종종 학교 창이나 버스 창을 통해서 바라보곤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강원 랜드는 성행하고 옆의 여관마저도 성행하는. 그 속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재환을 가끔씩 충동질했다.
결국 같은 이야기다.
조각 난 기억을 더듬더듬 꿰매어 맞추었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재환은 고개를 오리털 베개의 그 푹신함에 투레질하듯이 묻고선 멍청하게 호흡했다.
-짐승의 이가 있는 것을 살피렴.
누가 다시 뇌리에 파고드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아무것도 살피지 않으려 하는 것은 저의 잘못이려나.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거릴 힘을 점점 상실해 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치 자신감에 가득 차 마우스가드도 안 하다가 카운터펀치에 얻어터져서 시야가 검어진 것처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빨은 분명 나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링 위의 게임은 언제나 끝이 있었고 재환은 아무리 얻어맞아도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종료 버튼은 어디 있지. 재환이 멍하게 생각했다. 종료 버튼은 어디 있지.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