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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선택 상
1화
프롤로그


한 번만 돌아봐 주세요.
당신만 바라보는 제가 보이지 않나요?
애타게 당신을 바라보는 제가 정녕 보이지 않으십니까?
오직 서방님을 은애하는 마음뿐인데 되돌아오는 원망을 제가 어찌해야 하나요?
단 한 번만 바라봐 달라는 소망조차 제게는 사치인가요?
서방님을 은애합니다. 제 짧은 생에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의 눈길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소망임을 모르시겠지요?
스치는 눈빛조차도 그리워하는 바보 같은 마음을 어찌해야 하나요?
서방님, 한 번만 신첩을 보아 주세요. 제발…….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작은 방 어둠 속 시계의 형광색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환청처럼 꿈속 여인의 가슴 아픈 외침이 머리에 울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에도 없는 꿈. 잊을 만하면 꾸는 꿈.
힘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자 축축한 볼이 느껴진다.
꿈속에서 들리는 사무치는 서러운 하소연에 정작 눈물을 쏟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너무 울어 무거운 눈을 뜬 연서가 어둠을 쫓기라도 하듯 불을 켰다.
갑자기 환해진 형광등의 밝음 때문에 눈앞이 하얗게 바래지더니 점차 초점이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정면에 놓여 있는 거울에 울고 있는 자신이 비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에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꿈에 나타난 존재는 어린아이에서 여인이 되어 가는 동안 끝없이 울며 고통스럽게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는 누군가를 마음에 담으며 슬픔에 몸부림치는 여자의 마음이 스펀지처럼 연서에게 흡수되어 연서까지 끝없는 절망으로 물들였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슬픔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꿈속의 존재 때문에 꿈을 깨고 나서는 가슴을 쳐야 했다.
사는 게 바빠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연서가 알지도 못하는 감정에 가슴이 저미고 있었다. 덕분에 누군가를 가슴에 담으면 그 여자처럼 될 것 같아 쉬이 마음을 내어 주지도 못했다.
“최면이라도 받아 볼까?”
황당한 꿈의 여파 때문에 자신의 전생에 관한 꿈은 아닌가 싶어 문득문득 그런 유혹을 느끼지만, 그런 것을 하는 곳도 모를뿐더러 이런 일을 누가 믿어 줄까 싶어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점점 꿈은 잦아지고 그녀의 슬픔은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겨우 꿈속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목소리만 들리지 얼굴 한 번을 못 봤다.
꿈인데, 분명 꿈인데 마치 현실처럼 그녀의 감정이 손에 닿을 듯 느껴졌다.
멍하니 앉아 있던 연서가 시계를 확인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새벽 4시.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2월이니 이 시간이면 한밤중에 가까웠지만 더 이상 잠자기는 틀렸다.
일어난 김에 아예 씻고 출근할 준비나 하자 하는 생각에 힘겹게 일어나는 연서의 모습은 외롭고 또 그만큼 쓸쓸해 보였다.

여전히 그 꿈은 연서를 괴롭히고 있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는 밤마다 연서의 꿈에 나타나 눈물 바람 일색이었다.
적어도 잦은 꿈 때문에 꿈속의 존재가 옛날 사람이라는 것과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으면서 뿌옇게 형체만 보였다.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남편이라는 작자 때문에 저고리 고름이 마를 사이도 없이 끝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상황에 이제는 부아가 치밀고 있었다.
살기 편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 혀를 차다가도 가뜩이나 잠이 모자란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정말 옆에 있으면 정신 차리라고 머리통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냥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오랜 시간 그녀의 꿈을 꾸며 이제는 어디엔가 정말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꽤 부유한 집안의 딸인 모양이었다. 제법 잘 차려입은 것을 보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의 시대가 지금 연서가 살고 있는 현재보다는 먼 과거라는 것이었다.
높이 올린 머리 모양과 투박한 한복 차림을 한 여인을 보며 현재라고 우기기에는 무리였다.
아마도 본인들과는 상관없이 집안의 약속대로 혼인한 모양인데 어쩌다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처음 꿈에 나타난 그 여자는 어린 소녀였다. 그 당시 연서도 어렸다.
아마도 같은 또래였으리라.
사랑에 빠져 한없이 행복해하던 어린 소녀의 감정을 기억한다.
외롭고 힘든 시간 속에 그 소녀의 꿈은 지금과는 달리 연서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미소 지을 수 있게 했었다.
분명 그런 시간이 있었다. 아주 잠시지만.
그러고 보면 그때도 꿈속의 존재는 투박하지만 고급스러운 한복 차림이었다. 특이한 건 땋은 머리가 아닌 반은 묶어 땋아 올리고 남은 머리를 귀엽게 등 뒤로 내리고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난 기억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밤마다 꿈에 나타나 눈물로 하소연하는 존재가 연서를 지치게 하며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주고 있었다.
잠이 모자라 어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에 졸다가 쫓겨날 뻔했었다. 이제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꿈을 멈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넘쳐흘러 판다가 될 지경인 자신을 보니 더는 이대로 지낼 수는 없었다.

오늘은 필히 정신과를 찾기로 마음먹은 연서의 발걸음이 급했다.
어쩌면 꿈속의 존재가 삶을 놓아 버릴 것 같은 기미가 보여 다급한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녀를 괴롭히는 존재라지만 삶의 끈을 놓는 모습까지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 진심이었다. 그 끝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감정으로 하루를 망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고아원에서 자란 연서기에 부모의 정이, 또 형제의 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수녀님들 손에 자라 딱히 고생스럽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항상 많은 아이들 속에 버려진 아이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수많은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을 받고 자란 삶이 뭐 그리 좋을까.
학교에서도 끝없는 편견 속에서 싸워야 했고 무시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부모라는 울타리를 가진 아이들을 보며 한없이 부러워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피해의식만 늘어 남들과 섞이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항상 부모 없이 자란 티가 난다는 말을 꼬리표처럼 붙이고 살았던 삶이었다.
간신히 홀로서기를 한 순간에도 이미 벗어날 수 없는 낙인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혀 스스로를 남들에게 소외시키며 살아온 삶이 어느덧 스물하고도 사 년이 지났다.
그 여자가 전생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쉼 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연서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대학 졸업반이어야 할 연서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보니 아직도 이 년이나 남은 학교생활을 아무 탈 없이 끝내려면 제대로 잠잘 시간이 필요했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로 잠이 모자란데 틈새 잠을 그 여자가 뺏고 있었다.
삶이 편해 사랑 타령이라지만 연서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의 삶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꿈속의 존재를 지우려 하는 중이었다.
“정신과 진료비는 꽤 비싼데. 아놔. 진짜 별난 곳에 돈 쓰게 하네.”
한 푼이 아쉬운 상태가 아니던가.
“안 돼!”
이를 박박 가는 연서가 막 길을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하려던 순간, 귓가에 비명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마치 풍선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이 연서를 덮쳐 왔다. 무슨 일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순간 연서의 의식이 멀어졌다.
그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비명처럼 울리는 익숙한 여자의 울음소리가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오던 차가 연서를 치고 담벼락을 들이박은 그 시간, 연서의 방에 있던 경대의 거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 깨졌다. 마치 주인의 상황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1. 이런 황당한 일이(1)


멍하니 앉아 있던 연서가 경대의 거울을 확인하고 넋이 빠졌다. 거울에 비친 사람은 분명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얼굴이 놀란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감지 않아 기름기 번쩍이던 단발머리가 왜인지 길게 자라 가지런히 모아 등 뒤로 땋아져 있었다.
머리 모양이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작은 달걀형 얼굴에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조그마한 입은 누구란 말이냐?
순간 등 뒤에 누가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려다 기운 없어 다시 거울을 주시했다.
자꾸만 떨어지는 고개 덕에 옷차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었던 속치마, 적삼을 입고 있는 사람이 정말 자신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요즘도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역사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옷차림이 아니던가.
그런 옷을 어째서 자신이 입고 있는 걸까?
거울에 비치는 여자는 또 누구지?
거울 속 얼굴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서를 보고 있었다. 마치 왜 네가 거기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사고가 있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무엇엔가 부딪쳐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붕 뜨던 몸과 희미해진 의식의 끝을 기억한다.
그리고 겨우 눈을 뜬 순간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사고를 당했다면 병원에서 눈을 떠야 하는 상황이건만 왜 이런 곳에서 눈을 뜬단 말인가?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 울며불며 소란을 떨더니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왔다.
황망히 맥을 잡던 늙은 남자를 떠올리며 연서가 아예 침대에 누워 버렸다.
한결같은 한복 차림의 사람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한복 차림을 보며 마치 시대극의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았다.
“마마, 이제 사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이신지.”
목이 메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웅얼거림과 함께 연신 눈물을 찍어 내던 늙은 여인 대신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고 몇 번이나 손끝을 눌러 대던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늙은 여인이 어느새 또 다른 누군가와 나타났다.
딱 보기에도 근엄한 아저씨, 아주머니와 함께.
“다행입니다, 마마. 정말 다행입니다.”
늙은 여인보다 귀한 행색을 한 여인도 눈물을 훔쳐 내며 연서의 손을 잡고 그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뭔 상황인지 몰라 누구냐고 물어보려던 연서가 타는 듯한 목의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에 따라 통증만 심해지며 강한 갈증까지 따라왔다.
손이나 놓고 물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여인네들은 연신 눈물 훔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버릇없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억지로 빼어 낸 손으로 목을 잡았다. 그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두 여인이 놀란 눈으로 연서를 보고 곧바로 뒤에 부복해 있는 나이 든 사내를 쳐다보았다.
“공주께서 왜 이러는 것이요?”
답답한 표정으로 목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행동이 함부로 넘길 상황이 아님을 인식한 때문이리라.
“잠시만, 제가 보겠습니다.”
여인의 다급한 표정을 보던 사내가 황급히 조아린 그 상태 그대로 연서에게 다가와 다시 손목을 잡더니 손끝을 대고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마마,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누구더러 공주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목의 통증과 답답함이 우선이었다. 말이 안 나오니 손짓과 표정으로 목이 아프다는 것과 물을 마시고 싶다는 뜻을 간신히 전했지만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