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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이런 황당한 일이(2)


“목이 아프십니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반가움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다 현기증이 나 눈을 감는 연서를 보며 일순 사내의 표정에 이해가 서렸다.
“물이 자시고 싶으신 겁니까?”
다시 간신히 끄덕이는 고갯짓 때문에 가라앉으려던 현기증이 따라오려는 찰나, 투박한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을 연서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미지근한 온도지만 여태 살면서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은 달콤한 물이 제 역할을 해 타는 듯한 목을 달래듯 흘러 들어온다. 그제야 조금은 진정이 되며 간신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아마도 약의 후유증인 듯싶사옵니다. 당분간은 말씀하시기 어려우리라 사료되옵니다. 독한 약이 아니옵니까? 천천히 기다리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말을…… 못 한단 말이오?”
“당분간이옵니다. 목의 상태가 나아지시면 다시 말문은 트이실 겁니다.”
놀라는 중년의 부인을 달래듯 사내가 얼른 뒷말을 이어 붙였다.
“참이요? 그 말이 참이요?”
“네, 대부인 마님. 뉘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리까.”
대부인? 그건 또 무슨 호칭이래?
모르는 말뿐인데 자연스레 이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분명 어디서 들어 본 듯은 하지만 익숙한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서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말을 써 왔다는 듯이.
“그러면 되었소.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면 무에 걱정이겠소.”
사내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가슴을 쓸어내린 대부인이라는 사람이 다시 연서를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물 덕분인지 잦아든 통증 덕에 연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곳이었다.
나무로 만든 딱딱한 침상도 그렇거니와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분명 한복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다고 한복으로 보기에도 이상한 모양새가 어찌 보면 중국 무협드라마에 나오는 옷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부인이라는 여자와 그 뒤에 조아리고 있는 여자의 옷차림은 치렁거리며 불편해 보였다. 머리 모양 역시 꼬인 실타래로 둘둘 말아 올린 듯 높이며 무게가 장난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저 머리 모양을 견디는 목이 신기할 정도였다.
사내의 행색도 별다르지 않았다. 머리에 눌러쓴 두건은 또 왜 그리 우스꽝스러운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옷들은 예쁘기라도 하지. 초라해 보이는 색까지, 그럼에도 또 이상스레 자연스러워 보였다.
모든 물건이 투박해 보였다. 딱히 기교도 없었다. 멋도 없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그래서 더 우아해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한 주변이 낯설고 이상해 정신이 없었다.
‘꿈을 꾸는 거야. 난 지금 꿈을 꾸는 거야.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자 보자. 깨면 다 사라질 거야.’
어차피 늘 이상한 꿈을 꾸던 자신이 아니던가. 이런 꿈쯤이야 눈 뜨면 사라지리라 믿으며 연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 잠에서 깨면 현실로 돌아와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렇게 믿고 깨어나 거울을 보고 다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앉아 어지러움에 머리를 만지니 쪼르르 늙은 아주머니가 거울과 빗을 내밀었다.
참빗이라니. 이라도 잡으라는 걸까? 예전에 수녀님이 한동안 고아원에 이 때문에 난리가 났을 때 이런 빗으로 두피가 벗겨지는 고통을 주며 머리를 빗겨 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는 빗. 지금 이것으로 머리를 빗으라는 건가?
수많은 생각 속에 눈에 들어온 얼굴. 저건 또 누구란 말인지.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던 연서가 가만히 빗을 내어 주고 거울을 치웠다.
어차피 지금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억지로라도 소리를 내 보려 하지만 숨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야 해. 아직 꿈속인 거야. 뭐 이런 그지 같은 꿈을 꾸는지 몰라도 깰 때까지 자야 해.
너무나 황당한 일에 연서는 답을 내리고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꿈에서 깰 때까지 자려는 모순조차 깨닫지 못하고.

* * *

“아니 가 보십니까?”
곱게 틀어 올린 가체가 오후의 햇빛에 부딪쳐 찬란한 빛을 발하며 가냘픈 몸으로 흘러내려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인이 정원에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를 향해 시선을 주고 있는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며 나직이 물었다.
스치는 바람처럼 가벼운 음성. 그러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한 톤 낮은 목소리가 너무도 잘 어울려 꽃을 향하던 나비조차도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도 없었다.
훤칠한 사내는 장도(長刀)를 허리에 찬 채 도포 깃을 단정히 정리하고 곧은 시선으로 앞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미세한 어깨의 움직임이 여인의 음성을 들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신이 드셨다 하옵니다. 가 보셔야죠.”
재촉도 아닌 그저 알고 있으라는 듯 무심한 음성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깨어났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된 것을.”
여인의 재촉 아닌 재촉에도 사내는 덤덤했다.
“그래도 공주마마는 서방님의 안해이십니다. 그러니 가 보셔야죠.”
서방님.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 그러나 그 말은 형수가 시동생을 부를 때 쓰이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이 여인의 음성에 담긴 애정은 전자처럼 들린다.
“부인이라.”
무심한 어조. 한 치의 애정도 담기지 않은 그저 남을 지칭하는 말인 듯 건조한 말투에 여인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다녀는 오셨습니까?”
“이제 가 보려 합니다. 눈을 뜨셨다고는 들었으나 상태를 모르니 가 봬야지요.”
“그럼 다녀오셔서 전해 주시지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등만 보이는 사내임에도 여인은 하등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말속에는 걱정이 담겨 있는 듯했지만 표정에는 도리어 안도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찾으실 것입니다. 뭐라 전해 드릴까요?”
“다행이라고 하면 알아들으실 것입니다.”
다행이라. 사경을 헤매던 부인이 깨어났다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무덤덤한 모습으로 다행이라는 말만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특별히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런 선택까지 해야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서방님 말씀대로 다행이지요. 살아나셨으니.”
정말 다행이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투나 행동에 문제가 없음에도 여인의 행동에는 묘하게 사람을 거슬리게 하는 기운이 묻어났다.
더구나 두 남녀에게서 흐르는 기운도 실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답답함이 어려 있었다.
“형님은 언제 오신다던가요?”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사내가 물어오자 그제야 여인의 미간이 흐려졌다.
“곧 당도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럼 형수님도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일이 있어 물러가겠습니다.”
형수님. 사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단어에 여인의 어깨가 흠칫했다. 작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는 사내는 마지막에 흘낏 자신을 바라볼 뿐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이 아려 온다.
저 사내의 곁에 형수라는 이름으로 서 있는 스스로가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알고나 있을지. 그런데 무엇이 억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인가. 끊으려 했다면 정말 죽든지. 죽지도 않고 살아나 그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과는 달리 너무 많이 가진 여인이었다. 한 나라의 공주라는 신분으로 자신이 가장 원하는 사내를 차지한 여자는 욕심이 넘쳐 오로지 그 사내를 혼자 차지하려 기를 쓰다 결국 그 선택을 하였으리라.
저 사내를 너무도 모르는 여자 때문에 여인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 있었다.
미웠다. 그녀 자신이 죽으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나서서 대신 죽여주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와의 인연이 이게 다임을 자각하고 있다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정리가 되던가.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떼던 여인이 다시 한 번 마음을 모두 가져간 사내를 뒤돌아보았다.
간단히 머리끈으로 묶어 내린 긴 머리를 바람이 스치듯 간질인다. 그 바람마저도 시기하고 있는 자신을 비웃으며 떼어 놓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낮은 음성으로 마음을 담아 부르던 인해라는 이름을 그에게 들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너무 멀어진 그와의 거리가 같이 있음에도 천 리 길 낭떠러지를 두고 보는 듯 서럽기만 했다.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손 마디마디에 붉은 핏줄이 서고 눈가가 아파와 인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은 푸르디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넘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2. 연서와 하연(1)


너였니? 계속 내 꿈에 나타난 사람이 너였어?
그래, 나였어. 이제야 우리 보는구나.
그럼 이제 내 꿈에 안 나타나는 거야?
글쎄, 모르겠어.
왜 내 꿈이야? 넌 누구지?
나도 몰라. 어느 날 네가 보였어.
그게 다야?
응, 네가 보이더니 너라면 내 말을 들어 줄 것 같았어. 넌 그동안 내내 나였으면서 또 너였어.
무슨 소리야?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 뜻은 아니었어. 정말 내 뜻은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
다음 생에는 많은 사랑 받는 아이로 태어나고 싶어. 다음 생이 있다면 말이야. 넌 나랑 달라. 강한 사람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이제 안녕, 잘 있어. 그리고 고마웠어. 내 삶에 적어도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았어.
너에게만큼은 다 말할 수 있어서 좋았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안녕. 안녕. 안녕…….
잠시만. 잠깐만 기다려.

처음으로 만난 꿈속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아주 예뻤다. 반올림 머리 아래로 긴 머리가 갸름한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눈에 익지 않은 눈처럼 흰 소복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슬프게 웃는 미소마저도 너무나 예쁜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져 당황스럽다.
그 와중에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하연의 목소리가 연서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하연. 그래 저 여자의 이름은 하연이었다.
어떻게 아는지 몰랐다. 스스로 이름을 밝힌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하연.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하연의 기억들.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왕의 지나가는 바람기로 태어난 아이. 어미가 궁 안의 천한 무수리였기에 공주라지만 대접도 못 받고 자란 아이.
그 아이가 마음에 둔 사람을 처음 만났던 기억도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떠올랐다.
일찍 어미를 잃고 외진 궁 안에서 외로이 자란 아이 앞에 나타난 사내아이.
아이라고 하기엔 조금 나이가 있다지만, 어쨌든 사내아이는 당당한 모습으로 제 아버지 옆에 서 있었다.
명망 있는 대사헌의 둘째 아들이라 했다. 넘어져 울지도 못하고 무릎을 부여잡고 앉아 있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안아 일으켜 세워 주던 소년.
“조심해야지.”
단 한 마디. 그리고 위로하듯 보이던 그 미소가 외로운 궁 안에서 그녀를 밝혀 주는 횃불이 되었음을 모르리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그녀의 유모 이외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 없던 그곳에서 처음으로 다정한 말을 들었다.
그래서 눈물이 흘렀나 보다.
어린아이의 눈물에 어쩔 줄 모르며 달래지도 못하고 어정쩡히 서 있던 소년이 제 아버지를 구원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대사헌이 웃으며 하연을 달래 주었다.
“이런 공주님께서 많이 놀라신 모양이십니다. 이제 옥루를 그치세요. 예쁜 얼굴이 가려지지 않습니까?”
공주라는 말에 얼어 버린 소년이 부동자세를 취하는 모습에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있으나 마나 한 공주라는 말이 그래도 소년에게는 통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