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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연서와 하연(2)
첫 만남을 시작으로 쏟아지는 기억들을 연서가 울며 웃으며 가슴에, 그리고 머리에 가득 담아 저장하고 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들 속에 하연의 슬픔과 사랑과 아픔이 마치 이어진 전선에 전기가 통하듯 연서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전쟁에 이기고 온 그에게 포상으로 내려진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던 그날도.
그리고 환희와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던 시간들.
곧 그 시간이 처절한 외로움의 시간으로 바뀔 줄도 모르고 설레던 나날들.
사랑하는 이를 쳐다만 보아야 하는 고통 속에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가 자신이 목숨보다 더 사랑한 이라는 것을 깨닫던 날의 슬픔.
자신의 것도 아닌 감정 때문에 연서가 울고 있었다. 그 감정에 동조한 것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슬픔이 짓눌러 와 숨쉬기도 괴로울 정도였다.
외로움에 말라 죽어 가는 작은 꽃송이처럼 하연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림처럼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던 하연의 모습을 작은 경대가 비춰 주고 있었다. 그리고 경대의 작은 거울에 비친 얼굴은 연서가 보았던 하연의 얼굴과 똑같았다.
“마마, 공주마마!”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연서가 눈을 뜨자 뜨거운 눈물이 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또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한 꿈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그게 꿈이라는 걸 자각할 만큼 오랜 시간 겪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연서는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뜨면 현실의 자신으로 돌아가 적어도 낯선 곳일지라도 익숙한 곳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잠이 든 장소 그대로 또 그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도대체.
기가 막혀 어차피 나오지도 않을 목소리로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 눈물이 그렁한 여인이 연서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누군지 이제는 아는 얼굴.
하연의 유모였다.
처음 사람을 인지하는 그 순간부터 하연을 제 딸처럼 챙기고 받아 주던 사람. 하연의 유모가 연서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모든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을 목으로 가져가려는데 도대체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답답하시죠? 조금 참으시면 목소리는 돌아올 것이라 했습니다. 어찌 그리 모진 선택을 하셨습니까? 이 늙은이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더이까?”
눈물 반, 울음 반의 원망에 연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도, 그렇다고 시원하게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여기는 어딘지. 꿈속에서 본 사람이 왜 눈앞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깨어나셨느냐?”
혼란스런 눈으로 유모의 얼굴을 보던 연서가 낮은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사내였다. 하연이 그토록 사랑하던 사내. 그래서 더한 외로움에 떨게 만들었던 사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연서는 알고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 아무 감정도 없는 눈빛. 하연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눈빛.
여전히 그 눈빛으로 연서를 향하는 사내를 보는 순간, 하연의 감정이 전해지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목석이라도 그토록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또한 아무리 강요에 의한 원하지 않는 결혼이라도 자신의 와이프라면 돌아보는 것이 옳았다.
차라리 미워하기라도 하면 사람으로 대한다 느끼겠지만, 없는 사람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연서는 알고 있었다.
어떤 틈도 주지 않고 다가오지도, 멀리 가지도 못하게 잡아 두고 하루하루 고문하던 그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다.
결국 치밀어 오르는 화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머리맡에 놓아둔 물그릇이 그대로 날아가 그를 향했다.
저런, 반사 신경도 좋은 인간.
그러나 연서의 의지와 달리 날아간 그릇은 그의 손에 있었다. 위로라면 물만큼은 잡아 내지 못했는지 얼굴 여기저기, 그리고 옷 여기저기 튀어 흔적을 남겼다.
뜻밖의 행동에 연서도 놀랬지만 당한 사내의 눈에도 처음으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공주마마!”
당황한 것은 연서와 사내만은 아닌 듯했다. 하연의 유모가 놀라 새된 음성으로 하연을 부르고 있었다.
“무슨 짓이오.”
몰라서 묻니?
목소리가 안 나와 속으로 대답한 연서가 휙 고개를 돌리고는 이불 속에 숨어 사내를 외면했다. 쳐다보기도 싫은 인간이었다.
모진 인간. 아무리 싫어도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야. 왕따라니.
가뜩이나 외롭게 자란 애를 그렇게 왕따를 시키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연을 대신해 따지고 싶었지만 잠깐의 행동에 지친 몸뚱어리와 입을 벌려야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나오는 목청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생긴 거야 멀쩡했다.
하지만 그 어색한 옷차림이라니. 뭔 머리는 그리도 긴지.
허리춤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를 댕강 묶은 품새가 영 어색했다.
지가 무슨 무협에 나오는 무사라도 되는 듯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서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아찔해지며 현실이 다가왔다.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다.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리 마님. 마마가 아직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닌지라. 제정신으로 하신 행동은 아니실 겁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유모의 다급히 무마하려는 음성을 들으며 연서는 또 깨닫고 있었다.
유모의 말을 다 알아듣고 있다지만 사투리가 심한 시골말을 듣는 듯 어색하다.
분명 한국말인데 어딘가 묘하게 다르고 발음이 이상했다. 그걸 무리 없이 소화하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도대체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연서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다잡으며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향하는 사내와 고개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모르는 유모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죠?
“뭐라는 거요?”
생긴 것 같지 않게 속도 좁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릇이야 피했으니 다친 곳도 없을 테고 물 좀 맞았다고 저토록 사람 잡아먹을 표정이라니. 목소리에도 얼음이 깔린 듯 차갑게 들린다.
“네?”
놀란 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시선도 돌리지 않는 사내가 연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나도 말하고 싶다고, 인간아.
답답한 것은 연서가 더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두려움을 억지로 구겨 삼키며 연서가 천천히 입을 벌려 다시 물었다. 물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제발 알아듣기를 바라며.
여기가 어디냐고요.
“붕어도 아니면서 왜 입만 뻐끔거리는 거요?”
저 인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눈빛만으로 잡아 족칠 듯 바라보는 사내를 보니 상대해 봐야 소용이 없어 보였다.
뭘 잘했다고 지가 난리래.
기가 차 고개를 젓던 연서가 힘없이 유모를 향했다. 제발 저 여인이라도 알아듣기를.
여기가 어디죠?
“뭐라고 하신 겁니까? 마마.”
역시나. 무리였던 모양이다.
“나리, 마마께서 약의 후유증으로 지금은 목소리를 못 내십니다.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많이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노여움을 푸세요.”
“약의 후유증치고는 꽤 불쾌한 반응이 나오는군. 말문이 막혔다니 그럼 말문이 트이면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
죽일 듯 노려보는 눈을 마주해 지지 않고 노려보던 연서가 이제 시선을 유모에게 고정시켰다.
나쁜 인간.
생김새만 번드르르해서 여러 여자 울리고 다닐 상이었다. 원래 남자들 머리 길은 것을 싫어했던 연서였다. 더구나 록 하는 사람도 아닌데 허리까지 긴 머리라니.
여자가 봐도 울고 지나갈 정도로 매끄러운 머릿결까지 자랑하고 있었다. 굵은 얼굴선과 어울리지 않는 머리 모양. 그 옷차림까지 어느 한 구석 마음에 차는 구석이 없었다.
도대체 하연은 그 사내의 어디를 좋아한 것일까?
부드러움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니던가. 마초같이 남자는 남자라는 인식이 온몸에 배어 있는, 권의의식에 절어 있는 인간으로 보였다.
반듯한 눈썹 아래 강인한 눈이 번뜩였다. 사람을 오금 저리게 하는 눈빛이라는 말이 저런 눈을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잘생겼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마음이 먼저 생겼다. 어차피 오래 볼 사람도 아니니 이쯤에서 신경 끄자 싶은 연서가 당장의 상황에 집중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아까부터 자신을 향해 공주라고 부르는 하연의 유모를 보며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공주라니.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마, 어찌 그런 짓을. 쇤네 명줄이 줄어드는 줄 알았습니다요.”
힘없이 앉아 있는 연서가 안타까운지 유모가 그 사내가 나가자 냉큼 연서를 눕혔다. 궁금한 것이 많아 눕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기운을 다 써 버린 몸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푹 꺼지듯 누워 버렸다.
어디?
간신히 기운을 뽑아 같은 말을 묻고 있었다.
“어……디냐고요?”
아, 감사합니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서를 향해 딱하다는 시선이 따라왔다.
“어디긴요. 마마의 처소지요. 왜 그런 짓을…….”
뭔 말을 하기도 전에 하연의 유모는 다시 옷고름으로 눈가를 닦고 있었다.
마마의 처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말들. 혼란스러워진 연서가 더 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저절로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또 깊은 잠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연서의 머릿속이 다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져 있었다.
공주의 처소를 나오는 세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부부라는 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기에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물벼락이라니.
공주가 저런 성격이었던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공주였다. 부모님과 황제의 명령으로 맺어진 인연이 반가울 리 없었다.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흐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움츠린 어깨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공주를 보면 여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미건조한 마음. 싫은 것도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무색무미의 감정만 있을 뿐이었다.
공주가 어찌 자랐는지도 알고 있었다. 여색이 취미인 황제의 노리개였던 천한 궁인의 몸에서 난 존재. 그래서 궁에서도 내놓은 공주라는 말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공으로 내려지는 하사품으로 쓰일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던 존재이기도 했다.
하물며 황제는 공주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둘 수 없는 부마의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 특별히 허락한다며 첩을 둘 수 있다는 교지까지 내리지 않았던가.
황제로서의 자애로움을 보이는 방법치고는 대단히 악랄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더구나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교서의 내용을 보고 사색이 되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매사 순리대로, 이치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그런 교지를 받았다고 용인할 리도 없었지만 딱히 다른 이를 첩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원하던 이와의 인연도 어그러진 마당에 그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렇듯 황제에게 빈궁공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궁에는 이미 수많은 미인들과 황제의 총애를 다투는 비, 빈들이 넘치고 있었다. 하룻밤의 장난으로 품은 천한 궁인의 자식을 제대로 인정할 황제가 아니었다.
그 처지를 생각하면 불쌍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존재조차 잊고 지냈다 하나 부인이었다. 그런 존재가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는 소식에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그뿐이었다. 그 마음을 헤아릴 세현이 아니었다.
더구나 공주가 아니던가. 아무리 인정 못 받은 공주라 하나 그 신분이 있음에 자결이라니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살아나 집안을 들썩이게 만들어 신경을 건드리더니, 어제는 어머니까지 오셔서 찾아가 보지도 않는다며 닦달을 하시는 통에 나선 길이었다.
2. 연서와 하연(2)
첫 만남을 시작으로 쏟아지는 기억들을 연서가 울며 웃으며 가슴에, 그리고 머리에 가득 담아 저장하고 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들 속에 하연의 슬픔과 사랑과 아픔이 마치 이어진 전선에 전기가 통하듯 연서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전쟁에 이기고 온 그에게 포상으로 내려진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던 그날도.
그리고 환희와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던 시간들.
곧 그 시간이 처절한 외로움의 시간으로 바뀔 줄도 모르고 설레던 나날들.
사랑하는 이를 쳐다만 보아야 하는 고통 속에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가 자신이 목숨보다 더 사랑한 이라는 것을 깨닫던 날의 슬픔.
자신의 것도 아닌 감정 때문에 연서가 울고 있었다. 그 감정에 동조한 것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슬픔이 짓눌러 와 숨쉬기도 괴로울 정도였다.
외로움에 말라 죽어 가는 작은 꽃송이처럼 하연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림처럼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던 하연의 모습을 작은 경대가 비춰 주고 있었다. 그리고 경대의 작은 거울에 비친 얼굴은 연서가 보았던 하연의 얼굴과 똑같았다.
“마마, 공주마마!”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연서가 눈을 뜨자 뜨거운 눈물이 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또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한 꿈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그게 꿈이라는 걸 자각할 만큼 오랜 시간 겪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연서는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뜨면 현실의 자신으로 돌아가 적어도 낯선 곳일지라도 익숙한 곳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잠이 든 장소 그대로 또 그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도대체.
기가 막혀 어차피 나오지도 않을 목소리로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 눈물이 그렁한 여인이 연서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누군지 이제는 아는 얼굴.
하연의 유모였다.
처음 사람을 인지하는 그 순간부터 하연을 제 딸처럼 챙기고 받아 주던 사람. 하연의 유모가 연서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모든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을 목으로 가져가려는데 도대체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답답하시죠? 조금 참으시면 목소리는 돌아올 것이라 했습니다. 어찌 그리 모진 선택을 하셨습니까? 이 늙은이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더이까?”
눈물 반, 울음 반의 원망에 연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도, 그렇다고 시원하게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여기는 어딘지. 꿈속에서 본 사람이 왜 눈앞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깨어나셨느냐?”
혼란스런 눈으로 유모의 얼굴을 보던 연서가 낮은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사내였다. 하연이 그토록 사랑하던 사내. 그래서 더한 외로움에 떨게 만들었던 사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연서는 알고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 아무 감정도 없는 눈빛. 하연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눈빛.
여전히 그 눈빛으로 연서를 향하는 사내를 보는 순간, 하연의 감정이 전해지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목석이라도 그토록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또한 아무리 강요에 의한 원하지 않는 결혼이라도 자신의 와이프라면 돌아보는 것이 옳았다.
차라리 미워하기라도 하면 사람으로 대한다 느끼겠지만, 없는 사람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연서는 알고 있었다.
어떤 틈도 주지 않고 다가오지도, 멀리 가지도 못하게 잡아 두고 하루하루 고문하던 그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다.
결국 치밀어 오르는 화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머리맡에 놓아둔 물그릇이 그대로 날아가 그를 향했다.
저런, 반사 신경도 좋은 인간.
그러나 연서의 의지와 달리 날아간 그릇은 그의 손에 있었다. 위로라면 물만큼은 잡아 내지 못했는지 얼굴 여기저기, 그리고 옷 여기저기 튀어 흔적을 남겼다.
뜻밖의 행동에 연서도 놀랬지만 당한 사내의 눈에도 처음으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공주마마!”
당황한 것은 연서와 사내만은 아닌 듯했다. 하연의 유모가 놀라 새된 음성으로 하연을 부르고 있었다.
“무슨 짓이오.”
몰라서 묻니?
목소리가 안 나와 속으로 대답한 연서가 휙 고개를 돌리고는 이불 속에 숨어 사내를 외면했다. 쳐다보기도 싫은 인간이었다.
모진 인간. 아무리 싫어도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야. 왕따라니.
가뜩이나 외롭게 자란 애를 그렇게 왕따를 시키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연을 대신해 따지고 싶었지만 잠깐의 행동에 지친 몸뚱어리와 입을 벌려야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나오는 목청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생긴 거야 멀쩡했다.
하지만 그 어색한 옷차림이라니. 뭔 머리는 그리도 긴지.
허리춤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를 댕강 묶은 품새가 영 어색했다.
지가 무슨 무협에 나오는 무사라도 되는 듯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서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아찔해지며 현실이 다가왔다.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다.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리 마님. 마마가 아직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닌지라. 제정신으로 하신 행동은 아니실 겁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유모의 다급히 무마하려는 음성을 들으며 연서는 또 깨닫고 있었다.
유모의 말을 다 알아듣고 있다지만 사투리가 심한 시골말을 듣는 듯 어색하다.
분명 한국말인데 어딘가 묘하게 다르고 발음이 이상했다. 그걸 무리 없이 소화하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도대체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연서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다잡으며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향하는 사내와 고개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모르는 유모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죠?
“뭐라는 거요?”
생긴 것 같지 않게 속도 좁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릇이야 피했으니 다친 곳도 없을 테고 물 좀 맞았다고 저토록 사람 잡아먹을 표정이라니. 목소리에도 얼음이 깔린 듯 차갑게 들린다.
“네?”
놀란 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시선도 돌리지 않는 사내가 연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나도 말하고 싶다고, 인간아.
답답한 것은 연서가 더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두려움을 억지로 구겨 삼키며 연서가 천천히 입을 벌려 다시 물었다. 물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제발 알아듣기를 바라며.
여기가 어디냐고요.
“붕어도 아니면서 왜 입만 뻐끔거리는 거요?”
저 인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눈빛만으로 잡아 족칠 듯 바라보는 사내를 보니 상대해 봐야 소용이 없어 보였다.
뭘 잘했다고 지가 난리래.
기가 차 고개를 젓던 연서가 힘없이 유모를 향했다. 제발 저 여인이라도 알아듣기를.
여기가 어디죠?
“뭐라고 하신 겁니까? 마마.”
역시나. 무리였던 모양이다.
“나리, 마마께서 약의 후유증으로 지금은 목소리를 못 내십니다.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많이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노여움을 푸세요.”
“약의 후유증치고는 꽤 불쾌한 반응이 나오는군. 말문이 막혔다니 그럼 말문이 트이면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
죽일 듯 노려보는 눈을 마주해 지지 않고 노려보던 연서가 이제 시선을 유모에게 고정시켰다.
나쁜 인간.
생김새만 번드르르해서 여러 여자 울리고 다닐 상이었다. 원래 남자들 머리 길은 것을 싫어했던 연서였다. 더구나 록 하는 사람도 아닌데 허리까지 긴 머리라니.
여자가 봐도 울고 지나갈 정도로 매끄러운 머릿결까지 자랑하고 있었다. 굵은 얼굴선과 어울리지 않는 머리 모양. 그 옷차림까지 어느 한 구석 마음에 차는 구석이 없었다.
도대체 하연은 그 사내의 어디를 좋아한 것일까?
부드러움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니던가. 마초같이 남자는 남자라는 인식이 온몸에 배어 있는, 권의의식에 절어 있는 인간으로 보였다.
반듯한 눈썹 아래 강인한 눈이 번뜩였다. 사람을 오금 저리게 하는 눈빛이라는 말이 저런 눈을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잘생겼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마음이 먼저 생겼다. 어차피 오래 볼 사람도 아니니 이쯤에서 신경 끄자 싶은 연서가 당장의 상황에 집중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아까부터 자신을 향해 공주라고 부르는 하연의 유모를 보며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공주라니.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마, 어찌 그런 짓을. 쇤네 명줄이 줄어드는 줄 알았습니다요.”
힘없이 앉아 있는 연서가 안타까운지 유모가 그 사내가 나가자 냉큼 연서를 눕혔다. 궁금한 것이 많아 눕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기운을 다 써 버린 몸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푹 꺼지듯 누워 버렸다.
어디?
간신히 기운을 뽑아 같은 말을 묻고 있었다.
“어……디냐고요?”
아, 감사합니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서를 향해 딱하다는 시선이 따라왔다.
“어디긴요. 마마의 처소지요. 왜 그런 짓을…….”
뭔 말을 하기도 전에 하연의 유모는 다시 옷고름으로 눈가를 닦고 있었다.
마마의 처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말들. 혼란스러워진 연서가 더 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저절로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또 깊은 잠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연서의 머릿속이 다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져 있었다.
공주의 처소를 나오는 세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부부라는 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기에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물벼락이라니.
공주가 저런 성격이었던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공주였다. 부모님과 황제의 명령으로 맺어진 인연이 반가울 리 없었다.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흐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움츠린 어깨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공주를 보면 여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미건조한 마음. 싫은 것도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무색무미의 감정만 있을 뿐이었다.
공주가 어찌 자랐는지도 알고 있었다. 여색이 취미인 황제의 노리개였던 천한 궁인의 몸에서 난 존재. 그래서 궁에서도 내놓은 공주라는 말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공으로 내려지는 하사품으로 쓰일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던 존재이기도 했다.
하물며 황제는 공주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둘 수 없는 부마의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 특별히 허락한다며 첩을 둘 수 있다는 교지까지 내리지 않았던가.
황제로서의 자애로움을 보이는 방법치고는 대단히 악랄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더구나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교서의 내용을 보고 사색이 되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매사 순리대로, 이치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그런 교지를 받았다고 용인할 리도 없었지만 딱히 다른 이를 첩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원하던 이와의 인연도 어그러진 마당에 그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렇듯 황제에게 빈궁공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궁에는 이미 수많은 미인들과 황제의 총애를 다투는 비, 빈들이 넘치고 있었다. 하룻밤의 장난으로 품은 천한 궁인의 자식을 제대로 인정할 황제가 아니었다.
그 처지를 생각하면 불쌍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존재조차 잊고 지냈다 하나 부인이었다. 그런 존재가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는 소식에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그뿐이었다. 그 마음을 헤아릴 세현이 아니었다.
더구나 공주가 아니던가. 아무리 인정 못 받은 공주라 하나 그 신분이 있음에 자결이라니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살아나 집안을 들썩이게 만들어 신경을 건드리더니, 어제는 어머니까지 오셔서 찾아가 보지도 않는다며 닦달을 하시는 통에 나선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