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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2. 연서와 하연(3)
그런데 처음 보는 공주의 행동에 당황해야 했다. 약이 독해 돌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를 만나고 처음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그녀가 그런 얼굴을 했었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크고 맑은 눈동자가 마치 모두 세현의 탓이라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의 탓을 하자면 모두 황제의 탓이었다. 그녀가 공주로 태어난 것이 그 처음이었고, 자신이 명망 있는 대사헌의 둘째라는 것이 두 번째였다. 처음부터 선택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이 지옥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감히 누구를 탓하고 있는가?
원망 가득한 공주의 눈빛을 떠올린 세현이 주먹을 쥐다 아직도 날아온 그릇을 버리지 않고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물건을 쥐고는 황당함에 버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화풀이를 하듯 던져진 질그릇이 형체도 없이 부서지는 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던 세현이 긴 장옷이 거치적거리기라도 하듯 걷어 올리며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오랜 시간 피양을 갔던 형님이 오신다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중을 나가야 할 참이었다.
3. 바뀌었다!(1)
하!
거울에 비친 모습에 연서가 말을 잊었다. 누워만 있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점차 기운이 나 오늘은 무리해 일어나 앉은 참이었다.
꾀죄죄한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하연의 유모가 기운 차린 연서를 씻기며 방긋거리고 있었다.
머리까지 다 감겨 주는 손길에 당황스러웠지만 오랜 시간 제대로 씻지 못해 근질거리는 느낌이 싫었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되는대로 맡겨 놓았다.
꽤 오랜 시간 앓았던 모양이었다. 그사이 하연은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눈 뜨고 무언가 먹고 다시 눈 감고 하던 시간들이어서 아예 감각이 마비된 듯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점차 현실감각이 돌아오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방세는 어찌 되었는지, 알바 자리는 잘리지나 않았는지, 이번에 복학하려면 서류도 준비해야 하는데 등등등.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 움직여야 했다. 알 수 없는 이런 곳에서 머뭇거릴 여유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러다 머리를 빗기려 하연의 유모가 가져온 경대의 거울을 보는 순간, 연서가 숨 막히는 비명을 삼켜야 했다.
거울 속에 비쳐진 모습은 연서가 아니었다. 손을 올려 눈, 코, 입을 만지는 행동은 같지만 그 얼굴은 달랐다.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
눈을 뜰 때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거울에 비친 여자가 자신이 아닌 하연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것도 꿈이라고, 것도 아니면 정신없어 그렇게 하연을 떠올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모든 것을 꿈이라 치부해 버렸다.
꿈이…… 아니었어.
처음으로 거울의 얼굴이 현실로 다가오며 두려움을 넘은 공포가 연서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한 인상의 여자는 놀람이 확실한 눈빛으로 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귀신에라도 홀린 것일까?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거울에 비친 귀신이라는 것을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처음 눈 뜨고 놀랐던 그때 일이 꿈이 아니었었나 보다. 그 후로 처음 보는 거울 속의 자신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당연히 꿈이라 믿고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믿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옳았다. 어떻게 다른 얼굴을 보며 자신이라고 느낀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누……구?”
너무 놀라서였는지 아니면 시간이 그만큼 흘러 몸이 좋아졌는지 그동안 막혀 있던 목소리마저 터져 나왔다.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듣기 껄끄럽지만 분명 이제 말문이 트이고 있었다.
“아이고, 공주님, 말문이, 목소리가…….”
혼잣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서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움에 머리를 빗기던 빗마저도 떨어뜨리고 하연의 유모가 다시 눈가를 찍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게 급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죠? 이 사람?”
설마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리라.
“아이고, 공주님. 이제는 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다 되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감사합니다. 우리 공주님께서 정말 나으셨습니다. 이 늙은이 더는 소원이 없사옵니다.”
부처님을 찾을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손을 모으고 조아리는 하연의 유모를 보며 답답함에 연서가 목소리를 높였다. 안 쓰던 목이라 그런지 몇 마디 내뱉는 것도 고역이었다.
입이 깔깔하고 목이 아파 온다.
“제 말 안 들려요? 이 사람 누구냐고요.”
“네? 누구라니요?”
이제야 연서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황급히 다가와 연서가 가리키는 거울을 보며 유모가 놀란 눈을 한다.
“이 사람 말이에요. 저기 거울에 비친.”
한 손은 목을 부여잡고 한 손으로 거울을 가리키는 연서의 행동에 유모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깔렸다.
“공주님, 왜 그러세요. 공주님이시잖아요.”
이게 무슨…….
거울에 비친 사람이 나라면 연서는 어디 있단 말인가? 한연서라는 인간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분명 자신이 있음에도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연서가 아니었다.
공주님!
유모가 공주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하연. 빈궁공주 하연.
이걸 말이라고.
순간 놀란 연서가 거울을 닫았다가 재빨리 열어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거울에 비춰지는 건 하연이었다.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여인. 꿈속에 너무 선명히 보였던 하연을 떠올리며 거울을 응시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꿈속의 사람이 보인다. 연서만큼이나 놀랐는지 떨리는 눈동자와 벌어진 입을 하고서.
꿈속에만 있는 존재가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기함할 일인데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미쳤나 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을 가진 채 자신이 아닌 여자를 보며 자신이라고 느끼는 현상.
이건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미친 거였다.
조금 더 일찍 정신과를 찾아야 했다. 어쩌면 정신과에서 발병을 해서 지금 자신은 정신병원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이 여자가 나…… 란 말이에요? 정말?”
“왜 이러세요, 공주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놀라 당황하기는 하연의 유모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고 이제 말문이 트여 한숨 돌리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공주님의 행동이 이상했다.
처음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는 눈빛이 걸리긴 했지만 그저 약에 의한 후유증이려니 했다. 살아나신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공주님, 공주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정신 놓으시면 안 되십니다.”
유모가 애원하는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연서는 놀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거울 속의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도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거울을 닫아 그 여자의 모습을 치워 버린 연서가 깊은 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조율했다.
미치면 안 된다. 누구보다 자신은 미치면 안 된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 없는 신세가 아니던가?
이렇게 미쳐 정신병원에서 헛소리나 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어떻게 살아왔는데.
순간순간 이를 악물며 살아왔다. 고아라는 타이틀 때문에 당하던 억울한 일들. 무시당하던 기억들. 누구 하나 편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거친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태어나 탯줄도 안 떨어진 신생아를 얼어 죽으라고 칼바람 부는 연못가에 버린 부모라는 인간을 찾아 자신들이 얼마나 천벌 받을 짓을 한 것인지 알려 주고 싶었던 연서였다.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열심히 살았다. 당신들이 버린 아이가 이만큼 잘 자라 당신들에게 죗값을 받으러 왔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미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억울해 절대 미칠 수 없었다.
가빠 오는 숨을 고르며 연서가 눈을 감고 처음부터 따지기 시작했다.
처음 눈을 뜬 순간 보인 낯선 환경들. 거울에 비쳤던 낯선 여자. 그리고 자신을 향해 공주라고 부르던 사람들. 꿈속의 대화와 밀려오는 기억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 속에 혼란스러웠던 감정들.
꿈이 아니라면?
이게 현실이라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연서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신이 미치는 것보다 황당한 일이었다. 영혼이 바뀌는 일이 실제로 있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즉, 공상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끔 귀신에 씐 사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몸에 다른 존재가 껴들어 왔을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죽어 다른 사람의 몸속에 기어 들어왔다는 말인데, 그건 더 끔찍했다.
생각만으로도 기함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살면서 상상도 못 해 본 일들이 아니던가. 우선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정말 자신의 몸이 바뀐 것인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여긴 어딘지. 몸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럼 하연은 또 어디에 있는지.
살며시 눈을 뜬 연서가 찬찬히 스스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키니 유모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다가왔다.
이건 감시인이나 진배없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예 껌딱지마냥 연서의 옆에 붙어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그녀를 보고 동동거리며 걱정하는 유모가 싫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돌봐 준 사람이 없었기에 적어도 저런 눈빛을 한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나, 물이 마시고 싶은데.”
차분한 음성에 유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동안의 근심이 가신 듯 생각보다 더 젊어 보였다.
“그럼요, 괜찮아야지요.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물이라고요? 여기.”
“그거 말고 아주 시원한 물로.”
“네? 네. 금방 떠 올게요. 잠시만 계세요.”
버릇처럼 눈물을 옷고름으로 닦아 내며 유모가 황급히 방을 나서자 연서가 일어나 앉아 스스로를 더듬었다.
우선 머리카락. 이 정도 길이면 적어도 십 년은 넘게 길러야 한다. 설마 자신이 그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무슨 잠자는 공주도 아니고.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천천히 속치마를 올려 배를 확인하는 순간, 연서가 눈을 비볐다. 다시 비빈 눈을 깜박여 시선을 모으고 바라보았다.
없었다. 연서가 가장 싫어하는 콤플렉스이면서도 감추기 쉬운 곳에 있었던 커다란 빨간 반점이 없었다.
배꼽을 기준으로 그 둘레로 빨갛게 새겨져 있던 점은 언뜻 보면 대한민국 지도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점은 없고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만 보였다.
그럼 이 육체의 주인은 연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혹시나 팔을 꼬집어보니 찌르르 통증이 밀려온다. 더불어 꼬집은 자리가 금방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하얀 피부도 연서에게는 없었다. 이런 피부라면 조금만 햇볕에 나가도 빨간 통구이가 되리라.
연서의 피부는 건강한 갈색이었다. 그래서 햇빛에 나가도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손도, 발도 모두 달랐다. 그럼에도 감각은 느낌 그대로 전해진다.
바뀌었다. 육체는 연서의 것이 아닌데 분명 연서의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그럼 자신은 죽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꿈? 그러기엔 통증이 너무 확실했다.
아무리 꼬집어도 부풀어 오르는 빨간 흔적과 더불어 통증만 남았다. 전혀 다른 변화는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정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믿을 수도 없는 기괴한 상황.
“정신을 차려야 해. 한연서. 정신 놓으면 안 된다.”
미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들어와 있는 육체가 하연의 것이라면 분명 하연은 연서의 육체에 갇혀 있을 터였다. 바뀌었다. 꿈속에 나타나던 그 존재와 연서가 자리를 바꿔 눈을 떠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