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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줄 개
1화
프롤로그


딸랑딸랑.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따라 들어온 봄바람에, 문에 달려 있던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이른 아침 모닝커피를 즐기러 카페를 찾은 손님들의 옷차림은 따뜻해진 날씨 탓에 한결 가벼워진 차림이었다.
하지만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따뜻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카운터까지 걸어간 여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테이블로 풀썩 엎드렸다.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에 돌아서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긴 생머리 여자가 놀라 알은체를 했다.
“정다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병원 문 열어야 하는 시간 아니야?”
엎드려 있던 다원이 겨우 고개를 들더니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약도 없고, 한 시간 뒤에 열기로 했어. 하아. 지연아. 지금 병원이 문제가 아니야. 나 아픈 것 같아. 감기 걸린 것 같아.”
“그러게 내가 아직 저녁에는 춥다니까 내 말 무시하고 티 한 장만 입고 다니더라니. 많이 아픈 거야?”
“콜록콜록, 보다시피 기침도 하고 편도도 부은 것 같고 거기다 열도 펄펄 나서 머리까지 띵하니 아파.”
웬만하면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하는 친구를 너무나 잘 아는 지연은 보통 아픈 게 아니라는 생각에 엎드려 있는 다원의 이마로 손을 갖다 댔다.
“어디 봐 봐.”
이마가 뜨거운 게 열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따뜻한 손 때문에 열이 난다고 착각한 건가 싶어 자신의 이마 열도 재 봤지만, 다원의 이마가 훨씬 더 뜨거웠다.
“정말이네. 이번에 감기가 독하다던데? 너 얼른 병원 가야겠다.”
병원이란 소리에 다원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병원이 왜 필요해? 내가 의산데?”
사람도 동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게 자신의 친구 정다원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동물의 분류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의사도 의사 나름이지.
“넌 동물 고치는 의사라 사람 고치는 자격증은 없잖아. 안 되겠다. 너 얼른 여기 이 층에 있는 병원에라도 갔다 와.”
이 층에 병원이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병원이 생겼나? 생전 처음 듣는 소식에 엎드려 있던 다원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기 이 층에 병원이 있어? 언제부터? 여기 이 층 비어 있었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병원이 들어왔어?”
날벼락 같은 소식에 다원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커져 있었다. 이런 그녀의 반응을 정확히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 대답하는 지연의 음성은 미동 없이 침착했다.
“너 저번 주 내내 강아지 받느라고 바빴잖아. 그때 들어왔어. 맞다. 너 저번 주 수요일인가? 배고프다고 와서 떡 얻어먹고 갔잖아. 그 떡, 위층에 이사 온 병원에서 돌린 거야.”
저번 주는 올해 들어 가장 바쁜 한 주였다. 어디 하늘이 점지해 준 길일이라도 몰려 있었는지 아니면 일복이 터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주에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열댓 마리가 넘는 동네 강아지들을 받아 내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다.
지연이 말한 저번 주 수요일 저녁에도 퇴근 시간을 훨씬 지나 시추 새끼 두 마리까지 받아 내고 나서야 병원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손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그녀는 그 길로 건너편 카페로 달려갔다. 배고프다고 징징대던 그녀에게 지연이 선심 쓰듯 던져 준 떡이 그럼? 난 또 그걸 좋다고 날름 받아먹고 맛있다며 웃었는데……. 그럼 그 떡이 이 층에 새로 문을 연 병원의 개업 떡?
“내가 그럼 내 병원 자리를 뺏어 간 병원에서 돌린 떡을 먹었단 말이야? 내가 여기 건물주한테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 지연이 너도 알잖아? 내가 간신처럼 웃으면서 비굴하게 여기 이 층에 세 좀 달라고 했던 거. 이야. 여기 건물 주인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사정할 땐 개들은 냄새도 나고 더럽고 시끄럽게 짖어서 안 된다고 했었나?”
흥분하는 다원을 보던 지연은 이제 그러려니 하며 커피만 홀짝홀짝 마셨다. 확 열을 올리며 큰일 낼 듯 투지를 불태우다가도, 조금만 있으면 이성을 찾고 잠잠해지는 성격의 친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건물 주인에 대한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가 계속되더니 역시나 지연의 예상대로 다원은 이내 잠잠해졌다. 한 풀 꺾인 얼굴을 한 다원이 물었다.
“그래서 병원은 잘 꾸며 놨어?”
“나도 안 가 봐서 몰라. 근데 문 연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거 같긴 해.”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여기 이 층으로 이사를 왔어야 한다니까. 여기가 음양이 만나서 터가 좋은 터라니까. 장사가 잘 되는 명당 자리라고! 거기다 건물도 신식이지, 넓은 주차장도 딸려 있지. 에이. 약 올라. 얼마나 잘해 놨는지 내가 당장 가서 봐야지. 위에 가서 보고 올게!”
그새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쌩쌩해진 다원이 쏜살같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지연은 못 말리는 친구 덕분에 아침부터 즐거워졌다.
지연이 운영하고 있는 ‘봄날의 오후’라는 카페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보인다. 그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맞은편에 낡은 건물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그녀의 친구 정다원이 운영하는 동물병원 ‘안아줄 개’가 위치하고 있다.
2년 전, 이 위치에 이 월세가 어디냐며 꼬드기던 부동산 아주머니 꾐에 넘어가 차린 동물병원은 다원의 노력으로 이 근방에서 그래도 꽤 알아주는 동물병원이었다.
그리고 6개월 전쯤, 이 자리에 4층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지연도 일 층에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카페를 열 수 있게 되었다. 한 달 전부터였던가? 카페를 수시로 들락거리던 다원이 매의 눈으로 새 건물을 이리저리 힐끔거리며 염탐하더니, 여기 건물로 들어오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녀의 동물병원이 있는 건물은 오래되고 낡은 탓에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가끔 물이 새기도 했고, 주차장도 따로 없다 보니 손님들 사이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다원이 늘 불평했었다.
하지만 병원을 옮겨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풍수지리적으로 딱 봐도 장사가 잘될 것 같다나, 뭐라나. 물론 지리적으로 앞에는 쉽게 닿을 수 있는 큰 도로가 있고 얼마 전 생긴 아파트 단지가 있다는 것도 위층 병원이 장사가 잘되는 이유가 되겠지만, 다원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이 며칠 만에 장사가 잘되는 이유는 바로 진료하는 두 명의 남자 의사가 여느 배우 못지않게 잘생긴 데다가 미혼이기까지 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일 것이다.
그 소문 덕에 온 동네 시집 못 간 처녀들은 물론이고 잘생긴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는 아주머니들로 이 층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 건물을 뺏긴 다원은 위층 병원의 성황은 오로지 새 건물의 지리적 요건 때문이라고만 치부해 버리겠지.
지연은 식어서도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밖은 벌써 봄을 알리는 하얀 목련이 수줍게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왠지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나른해진 일상에 사이다처럼 톡톡 쏘는 재밌는 일이 생겨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계단을 통해 이 층으로 한걸음에 올라간 다원은 병원 밖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에겐 지금 쓸데없이 크기만 한 개업을 축하하는 커다란 화분도 맘에 들지 않았고, 그 흔한 휴지 조각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통로 역시 못마땅했다. 보는 눈이 삐뚤어져 있는 그녀에게는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에헤이, 너무 깨끗해. 우리 동물병원 앞처럼 쓰레기도 좀 널려 있고 해야 인간미도 느껴지고 하지. 이름도 한마음내과가 뭐냐? 작명 센스하고는. 나 정도는 돼야지. 안아줄 개. 얼마나 센스가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말과 달리 마음속으로는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만 부러움이 담긴 말을 내뱉는 순간 지는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사소한 것들에 트집을 잡고 툴툴거리는 것뿐이었다.
유리문에 가려 안이 잘 보이지 않자 다원은 내부만 살짝 구경할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다원은 들어온 것을 단번에 후회했다.
‘저, 저건? L사에서 나온 울트라 HD 곡선 벽걸이 TV?’
대기실에 떡하니 붙어 있는 벽걸이 텔레비전은 얼마 전 사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최신식 텔레비전이었다. 독립해서 산 지 8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 집에 텔레비전도 없는 그녀가 큰맘 먹고 하나 장만하려다 너무 비싸 눈물을 머금고 접어 버린 그 텔레비전이었다.
텔레비전뿐만이 아니었다. 앉기만 해도 잠이 절로 올 것 같은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도 그녀 병원에 있는 싸구려 인조 가죽 소파와 달리 최고급으로 보였다. 거기다 그녀가 가장 약이 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손님이 꽤 많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사람 고치는 병원과 동물을 고치는 병원은 애초부터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데, 건물을 뺏겨 속이 상한 다원에게는 이 층 병원은 기필코 이겨야 할 경쟁 상대로 간주되고 있었다.
‘주사는 할아버지한테 가서 맞아야겠다.’
옆 옆 건물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의사 할아버지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서는데, 그녀 앞을 가로막는 가녀린 그림자가 있었다. 눈을 들어 보니 절로 부러움을 자아내는 얼굴을 가진 간호사가 천사같이 웃으며 다원을 보고 있었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친절하기까지 한 간호사가 상냥하게 다원을 보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시는 거세요?”
“하하. 네.”
그 자리에서 딱 걸린 다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병원 안까지 들어와서 그냥 나갈 수도 없고.
누가 병원 염탐하러 왔느냐고 묻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속으로 뜨끔한 다원은 간호사를 따라 순순히 접수까지 마치고 대기 자리로 가 앉았다. 분하다는 얼굴을 숨기고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있는데 옆 사람 건너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불쑥 알은체를 했다.
“원장님?”
“김 간호사?”
김 간호사를 여기서 볼 줄이야. 병원에 다원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녀만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로 베테랑인 김 간호사는, 다원이 전적으로 신뢰해 마지않는 직원이었다. 얼굴이 활짝 핀 걸 봐서는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원장님이 여긴 무슨 일이세요? 설마 선생님도 소문 듣고 오신 거예요?”
소문? 무슨 소문? 전혀 모르겠다는 다원을 본 김 간호사는 무슨 극비사항이라도 이야기하는 듯 귓속말로 속삭였다.
“여기 남자 의사 선생님이 두 분 계시는데 한 분은 웬만한 배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선이 굵고 카리스마 있게 잘생기셨고 다른 한 분은 순정 만화에 나오시는 남자 주인공처럼 샤방샤방 하시대요.”
김 간호사의 특급 정보를 듣고 나서 대기실을 한 번 훑어보니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여자였다. 이제 보니 좋은 건물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손님을 유도하기 위해 미남계까지 쓰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잘생겼기에 이 정도인지.
다원 역시 미인계로 손님을 모으고 싶었지만 딱 하나 중요한 문제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녀는 미인계를 쓸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눈에 띄게 예쁜 얼굴도 아니었고 그도 아니면 쭉쭉 빵빵 늘씬한 몸매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키와 몸무게에 평범한 얼굴, 지극히 대한민국 표준 여성의 표본이었다. 예쁘다는 말보단 귀엽다는 말을 더 자주 듣는 정도? 친구 지연이라면 몰라도 그녀가 미인계라, 아마 있던 손님까지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다 떨어지는 역효과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님, 이번에 지연이를 접수대 직원으로 확 스카우트해 버릴까?’
키도 모델들처럼 170센티가 넘지, 긴 머리에 웃으면 살짝 전지현을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친구 지연은 그 흔한 만 원짜리 티도 명품으로 바꿔 버리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여자였다. 아마 미인계로 여기 이 병원보다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연이네 카페가 장사가 잘 되는 이유도? 설마 커피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지연이의 미모 때문?’
그제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시금 깨닫는 다원이었다. 잘 되는 카페를 놔두고 동물병원 접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현실을 직시한 다원의 고개가 절로 땅으로 떨어졌다. 직장 상사의 절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간호사는 알고 있는 특급 정보를 신나게 떠들어 댔다.
“원장님. 여기 대기하는 사람들 모두 저쪽 오른쪽 진료실에는 안 들어가고 싶어 해요.”
“왜요?”
“오른쪽 진료실에 의사 선생님이 되게 무뚝뚝하시고 까칠하신가 보더라고요. 전에 어떤 아가씨가 아픈 데도 없는데 은근슬쩍 당신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단번에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원은 왜 왔느냐고 그러셨대요. 반면에 왼쪽 진료실 선생님은 되게 친절하고 상냥하셔서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던데요?”
설마 병원에 온 환자한테 그렇게 불친절했을라고? 다원은 말도 안 되는 김 간호사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순 없었다.
“에이 설마요.”
“아니에요. 모두들 저쪽으로 들어가기만 바란다니까요. 보세요. 저기 오른쪽 진료실로 들어가는 사람이랑 왼쪽 진료실로 들어가는 사람이랑 발걸음부터가 다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