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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 이것을 복수의 시작이라 부르자(1)
복수는 어떻게 하나요?
엔터를 칠까 말까 고민하다 그녀는 인터넷 창을 닫아 버렸다. 이 무슨 초등학생 같은 질문이란 말인가. 답이 없는 질문을 놓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까지 할 지경이었다.
턱을 괸 채로 밖을 바라봤다. 표정엔 그 어떤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전쟁 후 폐허가 된 공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끼익― 약국 앞에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섰다. 작은 약국의 전면 유리가 검은 차로 인해 시야가 막혔다. 여기 주차 금지 구역인데, 한마디 하기 위해 강주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검은 차의 문도 열렸다.
“헙!”
당황하면 튀어나오는 소리. 입을 급히 틀어막고 강주는 몸을 숙였다. 복수를 꿈꾸기만 했을 뿐인데 무언가 벌써 잘못한 느낌이었다. 내린 건 인혜였다. 차 밖으로 미끄러지듯 나오는 인혜를 보자 자신이 생각만 했던 복수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한편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인혜는 청춘 약국 위에 자리 잡은 ‘사랑 피부과’를 바라봤다. 이 동네, 이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간판. 주혁이 내린 결정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지만 무슨 결정이든 주혁이 했다면 인혜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뭐냐, 너.”
익숙한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릿해지는 이 목소리. 인혜의 청각세포에 깊게 자리 잡은 주혁의 목소리였다. 긴팔 흰 티셔츠에 헐렁한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그가 느릿느릿 인혜 앞으로 걸어왔다.
“선배 개원 축하하러 왔지.”
“나 아직 개원 안 했는데. 다음 주야, 개원.”
“그때 오면 정신없을 거 아냐. 이렇게 말할 시간도 없고. 아직 인테리어 중?”
“해준이도 네가 여기 온 거 아냐?”
까칠한 그의 모습이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인혜는 여전히 힘들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인혜에게만 못되게 구는 주혁이 이상하다 말했다. 모든 여자들에게 다정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자에게 나쁘게 구는 남자도 아니었다.
“또야, 또. 갑자기 해준 오빠 얘기가 왜 나와?”
“내 친구고, 네 남자 친군데 얘기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남의 말을 듣는 쥐새끼마냥 숨죽인 채 강주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해준의 이름에 누가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것처럼 저절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지만 혹여나 심장 소리, 숨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릴까 조심하며 문이 열린 틈새로 그녀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오빠, 나는…….”
“나 바빠. 계속 바쁠 예정이고. 중요한 말 아니면 그냥 가라.”
주혁은 서 있는 인혜를 지나쳐 갔다. 그런 주혁의 무심한 뒷모습을 인혜는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울 듯한 인혜의 모습은 같은 여자의 동정심을 살 만큼 애처로웠다.
♡ ♥ ♡
― 그러니까 네가 남주혁을 만난 게 행운이라 말한 거야. 내가 말했잖아, 이건 신의 계시라고. 분명 무슨 뜻이 있으셨으니까 그 남자를 같은 건물, 그것도 바로 위층에 딱!
“진짜…… 그런가?”
― 정인혜, 보통은 아닌 거 알았지만 진짜 너무하네. 몰래 거기 간 것 보면 분명 아직도 남주혁한테 마음 있어, 그거. 근데도 아직 해준 오빠랑 사귀잖아. 내가 그때 걔 머리카락 다 뽑아 놨어야 했어. 회사에 얼굴 못 들고 다니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때! 아후, 넌 열 안 받아?
열 받지, 열 받는데……. 강주가 우물쭈물하자 아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바람에 강주는 휴대전화 통화 볼륨을 세 단계나 낮췄다.
― 야! 너 남주혁이 어떤 연애를 지향했는지 기억 안 나? 오는 여자 안 막는다, 그중 가장 괜찮은 애랑 사귀겠다. 딱 그랬잖아. 그냥 잠깐 만나. 만나고 정인혜 앞에 딱 나타나기만 하면 돼. 팔짱 끼고 싱긋, 걔가 네 앞에서 했던 것처럼! 그렇게만 하면 돼.
넌 내가 네 친구라는 것에 감사해라, 이 말을 끝으로 아영과의 통화는 끝났다.
그 날 머리끄덩이를 잡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는 아영이었다. 아영은 강주보다 더 복수를 꿈꾸는 듯했다. 친구의 8년 짝사랑을 모두 지켜본 그녀는 인혜가 한 파렴치한 행동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반드시 이 복수를 성공시키고 말리라, 더 다짐하는 아영이었다.
아영은 모든 문제를 간단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다. 복수는 그녀가 말한 것처럼 마냥 쉬운 것이 아님을 강주는 알고 있었다. 그가 여자를 사귀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제쳐 두고도 분명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 남주혁과 사귄다는 것. 둘째, 남주혁에게 다가간다는 것. 셋째, 남주혁을 만나는 것.
친하지도 않았던 그와 당장 마주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언제 그를 만나 다가가 사귄단 말인가. 강주는 31년 동안 연애 한 번 못 해 본 사람이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그때에 약국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오…….”
두 남자 손님에게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끝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비타민 음료 한 박스 주세요.”
남자의 주문에 강주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끼긱, 끼긱, 소리가 날 것 같은 걸음으로 걸어가더니 높게 쌓여 있는 박스 중 하나를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이런 여자의 어눌한 행동에 유범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이렇게 말하면 재수 없겠지만 여자가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유범에겐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주혁과 함께면 더욱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났다.
비록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라 두 남자는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지만 이 상태로 당장 강남의 핫한 클럽 어디를 가더라도 반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긴장해요? 이 동네엔 우리만큼 잘생긴 손님이 없나 봐요?”
능글능글, 유범이 말했다. 이 자식 또 시작이네, 주혁은 삐딱한 자세로 유범을 바라봤다.
“네?”
긴장한 얼굴은 어쩐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검은 스키니진에 회색 니트, 그 위에 걸친 하얀 가운. 화장기 없는 맨얼굴.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외모였다.
얇은 쌍꺼풀, 큰 눈,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오똑 솟은 코, 작지만 통통한 입술.
남들 다 가진 눈, 코, 입이지만 남들에겐 없는 조화로움과 기품이 느껴지는 이목구비. 유범은 단번에 그녀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알아봤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이……강주 씨. 이름 별로 안 어울리네. 왠지 태희, 혜교, 지현이……. 뭐 이런 이름들이 어울리는데.”
어떻게 이름을…… 헉! 놀라며 그녀는 가운에 수놓아진 자신의 이름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곧바로 주혁을 봤다. 혹시나 자신을 기억할까, 걱정하며 바라봤지만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유범의 모습이 이미 익숙한 주혁은 그와 강주가 나누는 대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아…….”
“아, 전 김유범이에요. 야, 너 인사했냐? 얘는 여기 2층에 새로 개원하는 피부과 의사. 남…….”
“얼마예요?”
유범의 말을 가로막고 주혁이 물었다. 그제야 강주는 자신이 가격도 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주혁이 약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엉켜 있던 생각들로 가득했던 머릿속에 누가 흰 페인트를 들이부은 것 같았다.
“아, 아……. 오천 원입니다.”
지갑을 꺼내려 주혁이 자신의 트레이닝 바지를 뒤적였다. 검은색 가죽 지갑이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오고, 곧 만 원이 꺼내졌다.
강주는 그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입술을 움찔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분명 여기서 이 타이밍에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선배! 저 밥 사 주세요!”
두 남자는 강주의 말에 놀랐다. 서로 다른 부분이었지만. 주혁은 강주의 ‘선배’라는 말에 놀랐고, 유범은 강주가 주혁에게 ‘밥을 사 달라’ 말한 것에 놀랐다.
그리고 이런 제 행동에 강주 자신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그 날 새내기들은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짓궂은 미션들을 골라 해내야 했다.
아영의 차례, 그녀는 ‘가장 잘생긴 선배와 러브샷’ 미션을 뽑았다. 강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해준을 선택하면 어쩌지…….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아영은 주혁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꺄아아……. 여자들의 함성. 남자들은 여자들의 반응을 이해했지만 불쾌하단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회를 보던 말 많은 선배는 크하하 웃으며 주혁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후배들이 아주 남주혁에게 벌써 빠진 것 같은데……. 이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연락해. 밥 사 줄게.”
끄아아아악!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방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였다. 실신할 듯 소리치는 아이들 속에서 강주는 두 귀를 꾹 막았다.
빛바랜 예전 기억이 이 순간 떠오른 이유는 뭘까?
강주는 자신이 한 말이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만나야겠단 생각에 급히 뱉은 말이었다.
“선배? 무슨 선배?”
“저 S대 약학과 후배예요.”
뱉은 말을 돌릴 수 없으니 이제 될 대로 되란 식이었다.
주혁은 방금 전과 다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주를 쳐다봤다. 무언가 굳은 결심이 서린 강주의 얼굴을 보니 그는 그녀의 말에 답을 하고 싶어졌다.
“사 줄게, 밥. 우선 계산부터 하고.”
2층으로 걸어 올라오는 내내 유범은 강주에 대해 얘기했다. 그만 좀 해라, 주혁이 말해도 유범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인테리어가 덜 끝난 ‘사랑 피부과’에 들어와서도 내내 강주 이야기뿐이었다.
아무래도 강주가 자신이 아닌 주혁을 택한 것에 대한 불만이 괜한 투정으로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저렇게 예쁜 후배를 알고 있었으면서 나한테는 말 한 마디도 안 해 주고. 내가 여자 소개시켜 달라고 할 때 맨날 없다 그러더니. 순 거짓말.”
“나 약학과 겨우 2년 다녔다. 그리고 쟤는 1년도 못 봤고. 기억 안 나.”
“뻥치네. 저런 얼굴이 기억 안 난다는 게 말이 되냐? 어? 기억 안 나는 척하지 마. 그게 더 재수 없으니까. 너 내가 혜수랑 헤어지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그때 내가 다른 여자 만나야겠다고 소개 좀 시켜 달라니까…….”
“너 어제 내 집 비밀번호 왜 물어봤냐?”
그제야 유범의 모터 달린 입이 멈췄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입, 유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치우고 나왔지?”
사귀고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또 헤어지고. 하루 세 끼 밥 먹듯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커플이었다.
모든 여자들에게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범이었지만 그가 혜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주혁은 알고 있었다. 괜찮은 여자를 보면 여지없이 다가가 느끼한 말을 내뱉지만 술을 마시고 취하면 늘 유범은 말했다. ‘주혁아, 나 혜수 진짜 사랑한다.’
그렇게 주혁은 유범의 진심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한편 유범은 주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전 싸움에서는 유범이 빌었지만, 이번 싸움에서는 혜수가 찾아와 빌었다. 자신의 인테리어 사무실에 찾아온 혜수가 사과를 하던 그때, 밤은 깊었고, 혜수는 아름다웠으며, 자신은 갈 곳이 없었다.
여자 친구를 데리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 갈 순 없었다. 자신의 작업장 주변에 괜찮은 호텔도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데 마침 주혁이 그날 집에 들어가 봐야 한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물 흘리는 그녀를 꼭 안아 주며 유범은 주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희 집 비밀번호 알려 줘.]
부끄러워하는 이모티콘도 함께.
“그럼. 어제 고마웠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맛있는 집 밥 먹었어?”
“밥은 무슨. 우리 집 분위기 알잖아.”
왜에? 천연덕스럽게 유범이 물었다. 어젯밤 혜수와의 일이 떠올랐는지 볼이 붉어진 채로.
♡ ♥ ♡
애꿎은 손가락을 깨물며 그녀는 시계를 노려봤다. 곧 있으면 그녀가 매일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었다. 즐거이 맞이했던 그 시각이 다가올수록 강주의 얼굴은 점점 더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만들어 주신 외모와 다르게 그녀는 겁이 많았다. 특히 남자 앞에만 서면 그녀는 어김없이 겁쟁이가 되었다.
모든 남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정작 짝사랑을 실패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그래서 그를 더 이상 못 보게 되면 어쩌나, 만약 운이 좋아 사귀다가 헤어지면 어쩌나. 그런 걱정들에 결국 고백도 하지 못하고 짝사랑은 끝났다.
그런 겁쟁이가 일을 쳤다. 과, 아니 학교에서 인기남이었던 주혁에게 대뜸 밥을 사 달라 말했다. 연락처를 주겠다며 약봉지를 주혁에게 주었다. 인쇄된 약국 번호를 가리키며 이리 전화하시라 말했다.
저녁이 되어 갈 무렵 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국이 끝나는 시각을 물어본 그는 퇴근시간에 맞춰 내려오겠다 말하곤 끊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으, 아……. 으아…….”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불안함에 손에 땀이 흥건했다. 덥지도 않은데 땀이 줄줄 솟았다. 거칠게 손등으로 이마에 땀을 닦다 자신이 오늘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맨얼굴임을 깨달았다.
“화, 화장!”
약국 벽에 붙어 있는 거울로 향한 강주는 빠르게 파우치를 뒤졌다. 파운데이션을 꺼내 손바닥에 주욱 짜고 아기 엉덩이 두드리듯 볼을 두드렸다.